122화. 악재
우리는 그날의 경기를 패배했다.
승, 패, 패.
최종 스코어 1:2로 매치 패.
내가 1군에 올라오고 나서 겪은 첫 패배다.
“괜찮아?”
사실 내 생각보다 훨씬 패배가 늦다.
오히려 더 강한 팀에서도 일찍 패배했었는데.
벌써 반시즌을 넘긴 시기.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패배다.
하지만 문제는 이 패배가 단발성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점.
“아..”
패배 후, 우리는 대기실을 빨리 뜨지 못했다.
최은호 때문이다.
“건아, 우리 잠깐 나갔다 올까?”
김예성이 작게 속삭였다.
나도 순식간에 어지러워진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우리 뒤로 최수철 코치님이 따라붙는다.
“코치님, 어떡해요?”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일단 은호 코피 지혈 끝나고, 돌아가서 이야기하자.”
김예성의 말에 최 코치님은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벌써 두 번째 출혈.
어떻게 보면 고작 코피지만.
최은호의 컨디션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최 코치님은 일부러 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
“권건 선수!”
마주친 것은 트릭스터의 미드 오미래와 원딜 고수호.
“홀리 쓋! 연예인 보는 것 같다.”
“실물 지렸다. 맨날 니 얼굴 보다가 권건 선수 보니까 나 조금 어지럽다. 반말은 못 할 것 같아..”
“현기증이 있으시다면 철분이 풍부한 멸치라도 처먹으시길 권합니다.”
“멸치가 철분 맞냐?”
“내가 알 바임?”
“돌았나 진짜.. 아, 조용, 조용히 해.”
두 사람은 호들갑을 자제하며 다가왔다.
최 코치님이 앞으로 나서기 전에, 김예성이 먼저 나섰다.
“안녕하세요. 퓨처, 고구미 선수.”
“안녕하세요. 라온 선수.”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사이이긴 한 듯, 세 사람이 가볍게 인사를 나눈다.
“저기, 인사 좀 나눠도 될까요?”
“권건 선수 만나러 왔는데.”
사실 승리한 팀이 패배한 팀을 보러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평소에 어지간히 친한 친구라도 게임에서 박살 난 다음에 만나기는 좀, 뭐랄까.
얼굴 보기가 좀 그렇잖아?
웃기긴 한데.
상대를 만날 권한은 패배한 팀의 특권이다.
나야 대강 두 사람의 성격을 알고 있긴 하다.
아마 원딜 고수호가 졸랐고, 그런 고수호를 컨트롤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오미래가 따라왔을 것이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좀 그렇지 않아요?”
김예성의 눈이 새파랗게 빛난다.
“아니, 그. 우리가 마주칠 일이 없어가지고. 그.. msl 때 고맙다는 말도 하고 싶었고. 저한테 딱 맞는 솔루션 몇 개가 너무 좋았거든요. 그래서 드릴 것도 있고 그래서.. 직접 말해야 친추도 받아주고 그런다고..”
차가운 대답에 당황한 듯 주절거리는 원딜 고수호.
틀림없다.
몰래 빠져나왔을 것이다.
트릭스터의 이길준 감독은 상당히 고지식한 편이니까.
“권건 선수가 솔랭에서 만날 때마다 캐리도 해주고 그랬거든요? 권건 선수는 결과랑 상관없이 그냥 너무 잘하는 선수니까, 그래서 왔어요. 이거 좀 주고 가면 안 돼요? 이거 델라웨어 포도인데요. 과일 좋아하신다고 그랬잖아요. 저도 과일 좋아해요.”
“대기실에 있던 거 아니에요?”
김예성이 몸을 반쯤 내 쪽으로 돌린 채 빈정거리자 고수호가 발끈한다.
“아뇨, 아뇨! 오늘 팀에서 밥 시킬 때 따로 주문했어요!”
“먹는 건 안 돼요. 문제라도 생기면 큰일 나는 거 아시죠?”
김예성이 이렇게까지 말을 잘하는 줄은 몰랐다.
“그리고, 권건 선수’는’ 잘했다? 이거 안 좋은 표현인데요. 저희는 팀이에요.”
이건 매우 큰 편견일 수 있지만.
이상하게 원딜들은 조금 어린 느낌인 경우가 많다.
실제 나이와 상관없이 좀 더.. 그래, 그래서 왕자님인가.
조금은 자기중심적이어야 게임에서도 잘 풀리는 포지션이니까.
명가에서만 활동해본 고수호는 더욱 그렇다.
나이도 많은 편은 아니고.
어딜 가나 환영받는 게 몸에 익어있다.
아마 고수호는 우리와 꽤 친해졌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실제로도 구단 단위에서 트릭스터와 FWX는 최근 부쩍 가까워졌거든.
어쨌든 이쯤 되니 고수호도 실수를 눈치챈 듯 조금 주눅 든 표정이었다.
“나쁜 의도는 없었는데..”
“죄송합니다. 우리 애가 철이 없어요. 반가워서 그랬어요.”
미드 오미래가 고수호를 감쌌다.
“그리고 음식에 장난치고 그런다는 건 좀. 저희가 그 정도로 이상한 팀은 아니거든요? 말씀하신대로 저희도 팀이라서.”
“그건 알죠. 솔랭에서 맨날 우정권, 우정권 하시던 분들 아니에요?”
미드가 미드를 만나자.
첨예해지는 대화.
용호상박, 차가운 표정의 김예성과 웃는 낯의 오미래 사이에 불꽃이 튀는 듯하다.
선수의 일은 선수들끼리 해결하게 두려고 했던 듯 물러나 있던 최 코치님이 느리게 움직여 선수들 사이를 갈랐다.
“오늘은 좀 곤란할 것 같습니다.”
정중한 몸짓.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규칙이 그래서요. 퓨처 선수, 고구미 선수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자리를 한번 마련해보면 어떨까요?”
전문가의 등장에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렸다.
“그럼, 그. 흠. 포장된 상품은 괜찮아..요? 그.. 다음에.”
고수호가 김예성의 어깨너머로 내 눈치를 살핀다.
나 역시 썩 기분이 좋은 상태는 아니었지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철이 없는 저 선수는, 유니버스의 최정인만큼은 아니지만 내 플레이 스타일에 대한 선호도가 무척 높다.
그래.
얘도 내 팬이다.
“제가 알기로는 다음 주 일요일 1경기가 저희고, 2경기가 FWX인 걸로 알고 있는데.. 그때 대기실에 남기고 갈게요. 잊어버리시면 안 돼요.”
그걸 어떻게 기억하고 있어?
“절대 버리지 마세요. 혹시 문자 남겨드릴까요? 번호 알려주시면..”
김예성이 최 코치님을 향해 눈짓했다.
“오늘 승리 축하드립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오늘 일은 비밀로 해드릴 테니 어서 돌아가세요.”
두 사람의 상황을 꿰뚫고 있는 최 코치님의 말에 오미래가 황급히 고수호를 챙겼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감사합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수고하세요.”
“나한테 말했다! 권건 선수, 날 기억해 줘!”
두 사람이 멀어진 후.
“그냥.. 다시 들어가요.”
김예성은 다시 흐린 얼굴로 돌아왔다.
말은 많이 안 해도 감정이 꽤 예민한 우리 미드.
김예성이 유독 날카롭게 군 것은, 팀의 사정을 숨기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
트릭스터와의 경기 전.
선수들이 이름점을 보던 그날.
곽지운은 박진현 감독과 면담했다.
주제는 다름 아닌 최은호.
면담이 으레 개인의 고민이나 플레이 스타일의 디테일 추적에 관한 내용으로 이루어지는 것과는 조금 다른 양상이었다.
“혹시 요즘 은호 이상한 부분 없니?”
“최은호요? 걔는 항상 이상한데.”
곽지운은 잠시 고민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감독님이 따로 묻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음.. 잘 모르겠어요. 아, 연습량이 많이 늘었어요. 예전에는 제가 숙소에 있다가 연습하러 가자고 하면 잘 안 따라 나왔는데 요새는 먼저 가자고 하기도 하고 그래요.”
“그래? 그 외에 다른 건?”
“탱폿 열심히 해보려고 하고. 원래는 은호가 은근히 칼바람 땡땡이도 많이 치고, 꼴픽도 하고 그랬는데 요새는 되게 대중적인 픽을 집중적으로 연습해요.”
곽지운은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놨다.
박 감독은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구나. 사실은..”
박 감독은 이미 결정한 일이었음에도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곽지운은 팀의 주장.
바텀 듀오인 만큼 누구보다도 최은호와 가까운 사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업무에 관한 내용.
“기억나지, 시즌 전에 건강 검진한 거.”
박 감독은 위임받은 관련 데이터를 차분히 정리했다.
“와, 감독님! 대장 내시경 진짜 죽음이었는데. 전 다시 태어나도 그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아요..”
“하하. 그래도 몇 년 주기로 꾸준히 해야 해. 건강이 최고니까. 음, 어쨌든.”
“네..”
“근육 검사도 싹 긁었는데 은호가 손목이 좀 많이 안 좋더라. 몸도 그렇고.”
“아.”
곽지운은 잠깐 멍하니 생각을 더듬었다.
“그럼 어떻게 돼요? 어떻게 아픈 건데요?”
“나도 이런 증후군 겪어본 적이 있긴 한데, 손목을 쓸 때 통증을 느끼게 돼. 사람마다 굉장히 편차가 크거든. 근데 이 정도면 꽤.. 많이 아팠을 거라던데.”
“어. 음. 아. 그래서.. 그랬나?”
“뭐 생각나는 일 있니?”
곽지운은 심각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일단 최은호가.. 아.. 테이핑에 목숨을 걸고. 맨날 돌아다니면서 애들한테 스트레칭 하라고 말하면서 손목 운동하구요. 아, 맨날 귀찮게 군다고 지랄했는데.”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DPI도 높게 쓰고, 평소에 밥 먹을 때도 젓가락보다 포크를 사용하고.. 그냥 어린애같은 건 줄..”
곽지운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진다.
“그때! 그때부터인가? 그 왜.. 예전에. 건이 들어오고 나서 얼마 안 됐을 때. 예성이가 Y2K 스타일 옷 입고 왔던 날인가? 그때 뭐 어디 부딪혔다고 한동안 계속 손목에 파스 붙이고, 뭔 엄청 화한 냄새 나는 약 바른다고 한참 난리 쳤었어요. 스트리밍 실에 부딪힐 데가 딱히 없는데 뭐 부딪혔다고 하니까 구라 아니냐고 놀렸었는데. 진짜 부딪혔거나..”
“아니면.. 그냥, 자기 통증을 착각했을 수도 있겠네.”
박 감독은 손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들겼다.
“이게 당장 손을 못 쓰게 되는 질병이거나 그런 게 아니거든. 그리고 아무래도 나이가 어리다 보니. 그런 부분에서 둔할 수 있겠구나. 그냥 삐었구나 하면서 넘어간 건가..”
최은호도 가볍게 생각했을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통증.
젊음이란 많은 것을 착각하게 한다.
아픈가 싶다가도 자고 일어나면 나아진다.
워낙 회복이 빠르니까.
심각한 질병이 오히려 젊은 층에서 늦게 발견되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통증을 숨기는 경우도 있다.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고통이라면 참으면 된다고.
혹시라도 쉬어야 한다면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하..”
꾸준히 팀 차원에서도 문진을 시도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선수 개인이 심각성을 인지해야 한다.
박 감독이 바로 최은호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반대의 경우다.
실제 검사 결과와 개인의 고통 인지가 다르듯.
환자에게 ‘당신이 지금 이런 병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경우, 도리어 정신적으로 자신이 아프다는 생각에 매몰되어 더한 통증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럼.. 그래서 F.L.E랑 할 때 코피도 났던 거예요?”
“아니. 그건 은호가 최근에 무리해서 그랬던 것 같아. 은호가 체력이 아주 좋은 편은 아니라서.”
어쩐지 툭하면 코피를 쏟던 고등학교 친구가 생각난다.
그걸로 조퇴하는 친구가 참 부러웠는데.
철없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제가 아파본 적이 없어서.. 잘 몰랐나 봐요.”
워낙 건강한 곽지운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곽지운은 문득 서로 운동하라고 갈구던 것도 생각났다.
슬그머니 내려다보니 괜히 볼록 튀어나온 것 같은 자신의 배.
그렇구나, 운동은 다이어트용이 아니구나.
권건에게 같이 운동 가르쳐달라고 해볼 걸 그랬다.
항상 물고 뜯는 두 사람이었지만 마음이 잘 맞는 서포터를 만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더 커진다.
“지운아.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런 부분은 우리가 신경 쓸 테니까. 일정 조절 들어가면 돼.”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다.
비록 여러 가지가 겹치면서 알아차리는 게 늦었지만.
분명히 해결 방안은 있다.
선수들은 물론 현대인이라면 흔히 가지고 있는 질병.
다만 이 분야는 손목이 대부분이라고 봐도 되기에 꽤 무겁게 다뤄지지만, 선수에게까지 부담을 지울 필요는 없다.
“일단은 은호의 통증 레벨부터 다시 조사해봐야겠어. 여러 이야기해줘서 고맙다.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지 말고, 반드시 우리가 해결할 테니 안심해. 우리 주장. 항상 믿는다.”
항상 선수 관리가 들어가지만 개인의 차이가 있는 법.
통증은 주관적이니까.
전문가도 많이 있다.
그러니까 틀림없이 괜찮을 것이다.
다만.
이 선수가 전조증상을 맞이했음에도 이것이 통증이 아닐 것이라고 애써 무시하며, 경기에 매달리고 싶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알겠습니다!”
곽지운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음.. 저는, 은호랑.. 잘 맞아요. 그러니까.. 가능하면.. 걔랑 같이하고 싶어요. 다들 같은 마음일 거예요.”
그리고 절대 최은호 앞에서는 꺼내지 않을 이야기를 남긴다.
“그래. 이런 팀이어서 그렇구나. 그랬어..”
박 감독은 웃어 보였다.
이럴 때는 무조건 선수를 감싸주지 못하는 것이 조금 미안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할 것이라는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정말 혹시나, 정말 혹시나라는 게 있으니까.
하지만 이 고난을 헤쳐 나가는 데에 온 힘을 쏟을 것이라는 말은 할 수 있었다.
이것은.
태풍이 오기 바로 직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