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118화 (119/326)

118화. 게임 체인저

첫 번째 세트에서 퍼펙트 킬 스코어로 패배한 F.L.E는 두 번째 세트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특이한 점이라면.

두 번째 세트 진행 중 최은호가 코피를 쏟는 유혈사태가 일어나 잠시 경기가 중단되었다는 것.

경기장 내에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빠르게 처치를 도왔다.

그 사이 해설진은 잠시 첫 번째 세트를 복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게요. 권건 선수가 가져간 쉔이 말입니다. 사실은 이번 메타에서 썩 좋은 챔피언이라고 하기는 어려웠어요.”

“솔직하시군요?”

“네.. 저도 일단은 이걸로 먹고 살아야 하거든요. 하하, 쉔은 사실상 주도권도 없고 갱도 어렵습니다. 일단, 지금은요. 잠깐씩 올라오기도 했지만요.”

두 번째 경기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압도적이었던 첫 번째 세트의 잔상이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근데 오늘 나왔던 쉔은 플레이 주체가 권건 선수였거든요. 저 정말 가슴이 벅차고 기쁩니다. 역사적으로도 리그전에서 쉔이 나온 적은 있지만, LKL에서 사랑받은 픽은 아니라서요.”

“하핫, 현수진 해설께서 쉔의 굉장한 팬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우리 해설가들도 각자 시그니처 픽이나 그런 부분이 있잖아요.”

“예. 선수 경험이 있건 없건 간에 연구를 위해서도 LOS를 플레이하곤 하죠. 그런데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 보니, 이거 참. 다양한 챔피언을 플레이하는 건 쉽지 않더라구요. 요즘 다들 실력이 굉장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도 시그니처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지금, 권건 선수는 말이죠..”

현수진 해설은 뜨거워지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전부터 그랬지만.

이 일을 트리거로 이 선수의 완벽한 팬이 될 것 같다.

승리가 최고인 걸 알지만.

경기력이 가장 중요한 걸 알지만.

솔직히 해설진 입장에서는 흥행도 중요하다.

물론 흥행이고 나발이고 세계 1위만 한다면 더 바랄 게 없는 빛나는 팀이 되겠지만.

몇 년 전 피지컬 유망주 붐 이후 한국은 월챔에서 중국에게 자리를 빼앗겼고.

월드 무대에서 2인자.

지금 나타난 이 선수, 권건.

영상을 해설하고 있는 우리보다도 빠른 판단과 오더.

그저 경악할 수밖에 없는 능력.

항상 흥행과 메타를 선도하는 픽.

그리고 이 선수를 중심으로.

서서히 맞아들어가는 FWX의 하모니가 화면을 넘어 마음속으로 느껴진다.

FWX의 어셈블!

남동현 해설이 자랑할 때까지만 해도 기대감 정도였는데 이제는 다르다.

빨리 이 선수를, 이 팀을 세계에 보여주고 싶다.

자랑하고 싶다.

슈퍼 플레이에도 상수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지금, 권건 선수는 아주 작은 한 걸음을 내디딘 겁니다.”

“쉔 말입니까?”

옆에서 강기수 해설가가 습관적 딴지를 걸었지만 현수진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챔피언 이야기가 아니다.

“이 선수에게는 작은 한 걸음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우리 LKL에는 큰, 한 걸음입니다!”

게임 체인저.

판도를 뒤집어놓을 팀.

FWX.

#

F.L.E는 두 번째 세트에서 우리와 주류 픽을 나눠 먹었지만 힘을 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손쉽게 매치승을 가져왔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뒤, 우리는 몇몇 F.L.E 선수들과 가벼운 만남을 가졌다.

사실 나는 F.L.E 선수들에 대해 잘 모른다.

거의 만날 일이 없었거든.

다만 F.L.E의 정글러인 이정우가 항상 나를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근데 이번에는 좀 더 적극적인 느낌이다.

선수들의 관계에서.

서로 같은 포지션인 경우 어색할 때가 있다.

솔랭에서도 그렇고 경기에서도 맞라인에 서서 항상 경쟁하는 포지션이라 그렇다.

정글러는 계속 얼굴을 맞대지는 않다 보니 그런 부분이 적긴 한데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자리가 겨우 열 자리 남짓한 시장.

짬이 찰수록 상대가 잠재적 경쟁자로 보이는 법이다.

뭐, 반대로 아주 친하거나 동경하는 경우도 있다.

이전에 같은 팀에서 함께 생활했을 수도 있고.

종종 동일한 포지션의 선수를 롤모델로 삼은 채 프로게이머가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저, 정, 정말, 정말,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나보다 한살 어린 정글은 손이 땀 범벅이었다.

“패, 패, 팬입니다.”

악수한 뒤 나를 올려다보는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내 플레이를 본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을 텐데.

어떻게 사람 눈이 이렇게 빛날 수가 있지.

우리 팀 2군 정글러와 닮은 모습이다.

“쉐.. 쉔 W가.. 그.. 검 당기면서.. 중간에.. 아군한테.. 멈추는 거 원래.. 되는 건지..”

“정우야, 플레이 이야기하기에는 시간이 짧을걸.”

F.L.E의 이수민 코치가 이정우에게 살짝 운을 띄운다.

“그, 그럼, 잘 못 하는 팀원들을 데리고도 이기는 방법을..”

“정우야..”

작은 목소리였지만 대충 어떤 생각인지 알 것 같다.

“F.L.E를 캐리하고 싶어요?”

“네, 네네. 네. 형들이 싫어서 말한 게 아니라, 형들이 너무 고생하니까..”

아.

그렇구나.

이 선수가 전보다 나를 더 우러러보는 이유는, 아마 FWX와 F.L.E가 비슷한 사정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선수는 궁금한 감정이 얼마나 큰 걸까?

패배감에 먹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음..”

나는 목뒤를 매만지며 천천히 주물렀다.

‘고생하는 팀원들’이라..

나는 고생하는 팀원들을 여기 와서 처음 만났다.

그래서 약간은 이런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약팀의 팀 단위 플레이는 피지컬부터 판단까지 모두 엉망일 줄 알았는데.

결코 리그에서 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약팀들의 노력과 설움을 봤고.

기회만 있다면, 계기만 있다면 변할 수 있다는 것도 느낀다.

뭐, 아직 부족한 부분이 훨씬 많지만.

오늘 경기가 워낙 쉽게 풀렸기 때문일까.

마음이 조금 너그러워진다.

“유니버스 연습생 출신이었죠?”

“어, 어, 어떻게, 어떻게 아셨어요?”

둥그레진 눈.

“지망생 때 유명했잖아요. 리우 선수.”

가볍게 립서비스를 해준다.

“리, 리, 리우라고 불러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어떻게 저에 대해..”

이 선수의 선수명은 Rio.

본인은 리우라고 읽히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대부분 리오라고 읽는다.

종종 선수의 선수명 발음에 대해 의견이 갈릴 때가 있다.

물론 해설진에게 제대로 전달되긴 하지만.

이 선수는 여전히 존재감을 발산하지 못해 많은 사람이 리오라고 부른다.

애당초 그 이름을 읽어줄 해설진이 호명하지 않으면 시청자들이 모를 수밖에 없으니까.

어쩌면 읽기 어려운 선수명을 짓는다는 것은 자신감일지도 모른다.

“저도, 저도 그냥 정우라고 지을까.. 지금이라도 선수명을 바꿀까..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본명 선수명 너무 멋있고..”

선수명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생각보다는 많은데, 선수명 변경이 잘 알려지지 않는 이유는 그들 역시 자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라 그렇다.

여기엔 가슴 아픈 사연도 많은데.

그냥 이미지 쇄신을 위해서나 그 전 선수명에 복이 붙지 않아서 바꿨다는 선수도 있다.

부모님이 점집에 가서 다시 뽑아오셨다나.

“그때 배운 것들을 잘 기억해봐요. 그리고 팀원들에게도 많이 알려주고.”

내가 해준 말은 지극히 평범한 조언이지만 중요한 말이다.

유니버스 아카데미는 커리큘럼이 훌륭하다.

괜히 강팀이 아니니까.

그냥 어깨를 툭툭, 치자 이 선수는 굉장히 감동한 눈치로 제 양손을 꼭 맞잡았다.

이정우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

“잠깐. 너, 이름이 뭐라고?”

이유찬이 끼어들었다.

“이.. 정우예요. 안녕하세요, 그.. 차니 선수?”

“미안하지만 선수명 변경은 하지 않는 게 좋겠어. 봐봐. 넌 거니랑 다르게 받침이 없잖아.”

“아..”

이정우의 어깨가 눈에 띄게 처진다.

“근데 내가 이름점은 봐줄 수 있어.”

“이름점이요?”

“이게 뭐냐면. 팀원들과 합을 맞춰보는 건데..”

“저 그러면 본명으로 해야 하는지 선수명으로 해야 하는지..”

“그건 중요하지 않아.. 들어봐.. 이름점이라는 건..”

순식간에 두 사람은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저런 걸 믿어?

점 전문가는 최은호인데.

옮아버린 건가?

어깨를 으쓱하며 돌아서는데.

“저.”

또 다른 선수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

하지만 말이 없다.

동그란 안경에 지문 자국이 잔뜩 남아있다.

무신경한 타입인가.

불쑥 손이 내밀어져 온다.

꽉 말아쥔 주먹.

나도 말없이 주먹을 내밀었다.

“F.L.E에게. 좋은 기회.”

두 주먹이 가볍게 부딪힌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는데요.”

지저분한 안경 너머로 눈빛이 잘 보이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대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이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이기어검..”

중얼거리며 멀어진다.

이기어검?

이기어검하면 이렐 아닌가?

아, 그래.

기억났다.

솔랭에서 이렐 서폿, 리그에서는 요른과 리싱 서폿을 하는 사람.

서포터 사이다 유상준.

인사를 나눠본 건 처음이다.

#

FWX의 다음 대진은 강적 인천 트릭스터.

그리고 그다음은 울산 피닉스다.

트릭스터는 지난 스프링 성적 1위, 피닉스는 10위.

극과 극의 두 팀이다.

피닉스는 권건의 데뷔전에서 펀치를 날렸지만 얻어맞고 쓰러진 팀이다.

사실 그때도 강팀이라고 보기는 어려웠고, 지금은 더욱 그렇다.

팀끼리도 그리 가깝지 않아 스크림도 거의 없다.

과거 3약이라고 불리던 ㅍ라인에 해당되는 팀이었기에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FWX는 트릭스터 전에 집중했다.

모든 라인이 밸런스가 좋은 팀.

그들과 맞서기 위해서는 휴식이 중요했다.

하지만 인천 트릭스터의 사옥.

“감독님. 다음 주 일정 재확인 드립니다.”

트릭스터는 고민이 깊어 휴일을 온전한 하루가 아닌 반나절로 돌렸다.

“흠..”

트릭스터의 이길준 감독은 머리를 긁었다.

타 게임의 프로 출신인 이 감독은 연령대가 높은 편이었다.

“아주 아쉬워.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좋은 대진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수요일 경기가 FWX. 토요일 경기가 대구 유니버스입니다.”

“쟁쟁하군. 일정이 빡빡해. 다다음 주는 빅스, 미라쥬?”

그렇다는 것은 이 바닥에 오래 굴러 뼈가 굵다는 뜻이기도 했다.

“네. 쭉 이어집니다. 그래도 FWX랑은 스크림을 많이 했으니까..”

“상대도 우리를 그만큼 잘 알겠지.”

단호하게 말한 이 감독은 손끝으로 책상을 툭툭 두들겼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FWX는 강팀이다.

FWX와 트릭스터의 스크림.

FWX는 새로운 탑이 갓 합류한 초반에는 많이 밀렸다.

하지만 시즌이 다가올수록 빠른 속도로 성장했고.

시즌이 진행되는 지금도 점점 상체의 호흡이 강화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다.

게다가 무서운 건 이것뿐만이 아니다.

선수들은 프로페셔널이지만, 동시에 나이가 어린 청년들.

리그 내의 팀 간 관계나 전체의 부흥을 깊이 신경 쓰기 어렵고.

국제전 성적에 월챔 시드권이 걸려있음에도 자신들을 이긴 팀이 코가 깨졌으면 하고 저주하는 모습도 여러 번 봤다.

그런데 권건은 트릭스터에게 아낌없이 자료를 퍼부었다.

이건 선수가 자발적으로 나서지 않는 한 나올 수 없는 퀄리티다.

FWX의 박진현 감독?

그 사람은 섬세한 내정에 힘을 쏟는 이상주의자 타입이다.

무엇보다도 그 자료는.

선수에게 최적화되어있었다.

“데이터.. 그래, 마치 코칭이라도 하는 것처럼.”

결과적으로 자료와 스크림이 큰 도움이 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자료를 본 이 감독은 오히려 무서움을 느꼈다.

지난 msl 당시의 시즌 변화에 대해 오싹할 만큼 잘 정리된 자료.

“그리고.. 지난 F.L.E 1세트 마지막 오더.”

충분히 이긴 상대에게도 방심하지 않으며, 조그만 가능성조차 남겨놓지 않는 냉혹한 오더.

해당 내용은 보이스로 공개되면서 수많은 관심을 받았다.

이런 대단함은 오히려 FWX 내부보다 외부에서 더 잘 느낄 수 있다.

“음.”

이길준 감독에게 LOS 선수 경험은 없다.

하지만 타 게임에서의 감독 경력과 흐름을 읽는 능력을 인정받았기에 여기까지 왔다.

감이 말하고 있다.

이 선수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정욱아.”

“예, 감독님.”

“권건 선수 말이지. 우리 팀에서는 누구랑 친하지?”

“개인적인 친분은 아예 없지만, 미드인 미래와 원딜인 수호가 우정권을 읊습니다.”

짧게 현재 정글인 김은검에 대한 정보가 스친다.

그리고 나중을 위한 정보는 머릿속의 안쪽 서랍에 접어두고.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정보는 입 밖으로 꺼낸다.

“권건 선수 평가 자료 수정 들어갔지?”

“예.”

“거기 하나 더 추가해.”

“뭘요?”

“혹시라도. 부상 이슈나 메타 변동으로 폼이 떨어질 경우.”

이 감독은 목을 양옆으로 꺾었다.

다른 스포츠만큼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부상으로 이 판을 떠나게 되는 선수들도 많다.

떠날 정도는 아니더라도 미묘한 경기력의 변화가 생길 수도 있고.

“플레잉 코치, 분석관으로라도 영입할 수 있게. 새 옵션을 넣어줘.”

“아직 너무 어린데요.”

“상관없어. 대어를 잡으려거든. 미리 준비해야 하는 법이니까. 선수로만 보는 건 너무 닫힌 생각이야.”

프로게이머의 수명은 짧지만.

은퇴 후에도 삶은 길다.

어쩌면 이른 은퇴이기에 더욱더 길다.

이길준 역시 그런 길을 걸어왔으니까.

아주 큰 판으로 봤을 때.

권건은 트릭스터라는 팀을 불멸의 왕조로 만들어줄 조각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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