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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116화 (117/326)

116화. 출두

가뜩이나 체급 차이가 나는데 불리한 픽까지 뒤집어쓴 F.L.E.

빅스전에서 보여준 권건 리싱의 압도감이 불러온 재앙이다.

한타를 봤더라면 완성도가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한타까지 가기도 전에 경기는 무너졌다.

만약 FWX가 좀 더 개인 기록 쌓기에 집중하는 타입의 팀이었더라면 게임은 더욱 빨리 찢겨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들의 움직임은 마치 요인 보호에 치중하는 듯한 움직임.

누군가 활약할 시간을 벌어주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휘둘리는 F.L.E 선수들은 울상이었다.

“얘네 왜 이렇게 빡빡하게 해?”

숨만 쉬어도 느껴지는 압박감.

이전 FWX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위압감.

다른 강팀들과는 또 다른 이 느낌.

빨리 맞는 것과 천천히 맞는 느낌의 차이다.

손바닥으로 회초리가 떨어지고 있다.

결과적으로는 맞을 걸 아는데 그 시간이 무량대수로 늘어난다.

“갱 안 와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안 와서 더 끔찍한 건지 모르겠어.”

“얘 때리면 권건이 날아오겠지?”

“어. 그거 소환 버튼일걸..”

“쉔 진짜 미친 사기챔이네.”

“이 판 누가 봐도 밴픽부터 완전 망했는데 그냥 다음 판 볼까?”

누군가의 말에.

“안돼.”

누군가 대답한다.

“우리가 실력이 안 되는 걸 어떡해.”

“그래도 해.”

“맞아. 포기하지 마! 그럼 녹일 수 있는 것부터 해보자! 어떻게든 한 번만 인원수 차이로 이득 보자. 날아오기 전에 죽이면 권건 궁도 뺄 수 있고. 쿨 기니까..”

순간 흔들렸지만.

F.L.E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떴다.

소나기 같은 잔 펀치를 맞았지만 아직 K.O는 아니다.

“쿨 몇 초더라?”

“나 기억 잘 안나. 너무 안 해봐서.”

“3분? 그 정도일걸?”

하지만 냉병기로 무장하고 라인을 점거하는 흉흉한 기세에 비탈길의 경사는 점점 높아지기 시작한다.

#

서장(西藏)에서 건너온 눈먼 수도승은 바텀 지역 패권을 놓고 다투고 있었다.

동료는 거대한 화승총(火繩銃)을 든 어두운 피부의 여인.

이곳, 협곡에 서폿 리싱을 전파하기 위해 왔거늘.

상대가 만만치 않다.

적은 기문병기(奇門兵器) 륜(輪)을 다루며 흐르는 구름처럼 빠른 이국의 낭인, 유운풍쾌(流雲風快) 시비루.

그 동료는 얼어붙은 활을 든 여왕, 빙궁마후(氷弓魔后) 애시.

패색이 짙지만 여기서 꺾일 수는 없다.

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피부로 느껴지는 감각.

불길한 바람의 냄새.

언어의 장벽이라도 있는 것일까?

동료는 약속되지 않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한 걸음.

단 한 걸음이었다.

시간이 쪼개진다.

빙궁마후 애시의 활시위가 탄력 있게 휘는 모습이 한없이 느리게 보인다.

푸른 수정의 빛무리.

에일듯한 북풍한설(北風寒雪)의 결정.

화살이 퉁겨지기 직전, 또 다른 기파가 느껴진다.

매복이 아니다.

이건 좀 더 거대한..!

“와요, 와요, 와요! 옵니다아아악! 지금! 그가, 그가! 와요! 권건! 권건! 궁! 궁!”

“애시의 슬라아아이딩 릴리즈! 궁극기 셰나에게 정확하게 적중!”

산이 무너졌을까,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리고.

시간이 원래의 속도를 되찾는다.

“왔어요! 왔어요, 왔어요! 권건! 들어갑니다, 돌입, 돌입!”

‘그’였다.

여태껏 숨을 죽이고 있던 은둔자.

그의 검이 결계 속에 요요롭게 떠 있다.

아뿔싸.

이기어검의 고수!

그 놀라운 경지에 찰나 간 시야를 빼앗겼던 수도승은 재빨리 기파를 뿌리며 달려들었지만.

“이거, 이거, 리싱이, 사이다 선수의 리싱!”

“서로 스칩..!”

허초였나.

나타난 고수는 수도승의 기세를 우측 귀 옆으로 훨훨 흩어내며 단숨에 치닫는다.

투로(鬪路)가 끊긴다.

“피했어요!”

놀라운 경공.

아니,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

순간적으로 사라진 듯한..

“점멸 반응!”

수도승의 곁으로 선명하게 남은 고수의 숨결이 의미를 새긴다.

기세는 좋았지만.

너는 아직 멀었다는 듯.

틀림없이 나와 연배가 같을 터인데.

반로환동(返老還童)이라도 한 듯한 내공.

“예술적인 도발 연계!”

그 움직임을 놓친 순간.

“부메랑, 부메랑, 시비루, 시비루! 순식간에, 순식간에 셰나르으으으을!”

이미, 압도.

한바탕 유운풍쾌의 풍압에 짓눌렸던 곳에는.

동료의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다.

“여기서, FWX가! 또다시 킬을 가져갑니다! 엄청난 집중력, 대단한 경기력!”

“지금 너무 못 컸거든요! 이거 셰나 존재감 아예 사라져요?!”

압도적인 살기와 튕겨져나오는 륜의 파편.

순위로는 동향(同鄕)이었을 자들인데.

어느새 새외(塞外)의 물이 들었나, FWX.

순식간에 남부가 초토화된다.

우리를 불러왔던 도사, 도사는 어디에 있는가!

“탈리아! 탈리아가! 지금이라도 도착해봅니다만, 밀어내는 것 외에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이미 권건 선수가 너무 딴딴해요!”

“이게 탈리아도 분명히! 벽을 뚫고 순식간에 도달하는데! 더 빠른 게 있었어요! LOS가 허락한! 정글러의! 유일한! 합법 텔레포트! 쉔의 독문무공!”

느려터진 말코 같으니, 이런 젠장.

합류 차이..

그는 별수 없이 등을 돌렸다.

수도승이 강호에 출두하기는 일렀나?

동방의 무사 역시 초출인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믿을 수 없는 초고수였다.

“거리 제한 없는 이동기!”

“쉔 궁! 쉔 궁! 디스 이즈 쉔! 디스! 이즈! 권건! 더 정글러어어어어억!”

이가 부러져라 악다문 그가 후일을 기약하며 도망갈 때.

어디선가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이건.. 전음입밀(傳音入密)?

사이다!

듣고 있는가.

넌 여기서 죽을 아해가 아니다.

가라, 더욱 강해져서 돌아와라.

대체 무슨 기연을 얻은 거냐, FWX..

#

- (FWX) 이딴 꼴픽으로도 압도적인 게임ㅋㅋㅋㅋㅋ (.gif)

ㄴ 쉔 존나 사기챔ㅋㅋㅋㅋㅋㅋㅋㅋ

ㄴㄴ 어디로든~~ 문~~~ 호오오오잇~~~

ㄴㄴ 쉔~~ 떨어~~~져유~~~

ㄴㄴ 라온 존나 살인마ㅋㅋㅋㅋㅋ

ㄴㄴ 바텀 개꿀픽 미쳤다진짜 ㅋㅋㅋㅋㅋㅋ

ㄴㄴ 오늘 클래스 교수님 강의 열렸다ㅋㅋㅋㅋ

ㄴㄴ 차니는 그냥 정체성이 짐승인거냐고ㅋㅋㅋㅋㅋ

ㄴㄴ 이제 미드 선픽해도 그게 탑인지 미드인지 모르겠네ㅋㅋㅋㅋ

ㄴㄴ 나도 요내가 탑 갈 줄 알았어ㅋㅋㅋㅋㅋ아ㅋㅋㅋㅋ

ㄴㄴ ㄹㅇㅋㅋㅋ

ㄴ F.L.E..! 어떻게 된 거야.. 팔이.. 팔이..!! 8위..!!

ㄴㄴ 샤..샹크스..! KDA가.. KDA가..!!

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페이지에 이렇게 정신적 타격을 주는 영상과 댓글을 올리는 건 옳지 않습니다. 실제로 저도 타격을 받았고, 우울증이 와서 병원에 가야 할 것 같네요. 안정되면 자료 모아서 경찰서에 제출할 거고요. 합의 없습니다. 감옥에서 반성하시길 바랍니다..

ㄴㄴ 않이 시발 잘못했어요 ㅠㅠㅠㅠ 근데 FWX 태그도 달려있잖아요ㅠㅠㅋㅋㅋㅋㅋ

ㄴㄴ 댓글 자삭하도록 하겠습니다 ㅠㅠㅠㅠㅋㅋ

ㄴㄴ 붕붕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ㄴ ㅠㅠㅜㅠㅠㅜ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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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상황 상당히 심각합니다. F.L.E, 아예 아무것도 못 했어요.”

“모든 오브젝트 주도권이 넘어갔고, 뭘 보여주려고 했는지도 모르겠거든요. 이거 승부수 던져야 합니다.”

- 해설진 존나 야속하다..

- 야속한 건 이미 망한 이 경기를 안 끝내주는 FWX가 아닐까?

“이 차이는 CS만 봐도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서폿조차 1코어 이상 차이나고 있죠. 오늘따라 FWX가 아예 공격적인 모습을 안 보여주고, 천천히 숨통을 조이고 있어요. 뭔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차라리 F.L.E 쪽에서 걸어봤으면 나았을까요? 아니, 그러기에는 이미 차이가 너무 났었죠.”

오늘의 나는 유유자적.

뒷짐을 지고 잘 닦인 가도를 산책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내가 궁극기만 쓰지 않아도 무형의 압박감이 생겨난다.

사람이란 비빌 언덕이 생기면 자꾸만 기대고 싶어지기 마련인데.

오랜만에 참 느긋한 시간이다.

“첫 번째 궁이.. 바텀에 갔네? 내가 진짜 호화롭게 대접할 수 있었는데.”

팀원들이 그사이 성장해버린 건가?

제 손으로 영역을 정리한 우리 미드가 집착의 시선을 건넨다.

“그러니까. 지금 아자르가 잘하고 있는데.”

탑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이번 수련은 성공적이다.

“그치. 어? 아니, 지금은 내가 아니라 네가 아자르잖아.”

“그러니까 다음은 나겠지. 탑에 와 줘.”

“아닐걸? 동선이 미드인데.”

“그럼 내가 미드에 설게. 어차피 라인전 끝났어.”

“탑, 너 진짜.. 자꾸 나쁜 말 하고 싶게 할래?”

“거니 대장, 나 블루도 좀 줘.”

“하, 건아, 그럼 난 레드.. 괜찮을까?”

나는 그저 허허롭게 웃어넘긴다.

“우리 상체 막내들 미쳤어? 이 형은 나쁜 말 참지 않아. 미드랑 레드는 형한테 양보해야지.”

아암.

“그럼 우리 블루는 유찬이 아자르, 적 레드는 예성이 요내. 우리 레드는 깍지, 적 블루는 내가 먹을까?”

“최은호 솔로몬인 줄. 근데 은근슬쩍 서폿 애시가 블루?”

“안 넘어오네.”

“건이는요?”

“나머지 다. 어때?”

“콜.”

농담이 오가지만.

글쎄.

그럴 시간이 있을까?

#

“이거, 이거 밀어주는 것 좀 봐. 이런 미친.”

“내 정글! 내 정글!”

FWX의 VIP는 느리기 짝이 없는 칼을 꺼내 들고 눈앞에서 당당하게 정글을 갈취한다.

아까 리싱을 든 서포터가 재치 있게 카정을 들어가서 조금 훔쳐먹고 나온 게 두 배로 돌아왔다.

다 먹지도 못했는데 억울하다.

전령도 뺏겼고.

용도 뺏겼다.

킬도 줬고, 타워도 줬다.

“안 되겠어. 이대로 가봤자 아무것도 못하고 바보같이 질 거야.”

모두 빼앗긴 설움에 분노가 인다.

“이거, 그래. 안 되겠다.”

“답 없다. 바론 본다.”

“먹으면 대박, 못 먹어도 어차피 져.”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

종종 나오는 이해할 수 없는 바론 판단.

이 이유는 수십, 수 백 가지가 있겠지만.

지금의 F.L.E의 이유는 명확하다.

이대로 가면 지니까.

어차피 질 거라면.

남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우리의 최후를 정하겠다.

“악으로 깡으로! F.L.E!”

“악!”

“악!”

이성을 반쯤 놓은 듯한 F.L.E가 바론으로 시선을 모았다.

그렇다고 대책 없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최대한 곰살궂은 기색으로 내줄 것들을 내주면서.

몸을 웅크리고 벌벌 떠는 척하며 한 땀 한 땀 시야를 잡아간다.

기회는 단 한 번뿐.

혹시 모른다.

“이거, 이거 바론입니다. 지금 결심했어요. 모여! 여기로 모여! 집하아압! 집합하라아아아아아!”

그리고 살짝 상대가 멀다고 판단되는 순간.

끝내 마지막 지령이 떨어지고 만다.

“글쎄요..? 이거 될까요?”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뭅니다. 지금 F.L.E의 각오, 보통이 아니에요. 이건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의 눈빛입니다!”

“하지만 이 싸움을 굳이 FWX가 해줄 필요가 없거든요. 이미 라인 관리 너무 잘되어 있어요. 이대로 쭉 밀고 나가기만 해도 됩니다. 이런 상황이 드문데, 바론이 필요가 없어요. F.L.E가 바론을 가져간다고 하더라도 팔이 긴 조합도 아니거든요. 오히려 지금 이 타이밍은..”

냉정한 시선이 쏟아지지만.

“하지만 별수 없습니다. 어차피 지금, 첫 번째 세트는 악밖에 안 남았어요. 보여줘야 합니다. 의지를 보여줘야 해요!”

“그런데, 이거. 지금.”

“FWX! 회군하는데요? 눈치채고 싸워주러 가는 건가요! ‘F’의 의지에! 지금 FWX가! 감동한 건가요! 그냥 밀어도 되는데, 지금 정당하게 겨뤄보자고 결정한 거예요! 마지막 생사결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입니다!”

FWX가 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FWX 선수들이 스킬을 누르지도 못하고 똑바로 서서 죽는 기적이 연달아 다섯 번 정도 일어나면 모르겠지만 F.L.E의 CC기가 전혀..”

하지만.

“어?”

FWX는 바로 F.L.E를 향해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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