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112화 (113/326)

112화. ESTJ

방송 일정이 잡혀있는 날.

FWX는 필수 방송 계약을 맺지 않아 일종의 서비스 개념이었지만.

꾸준히 얼굴을 비추는 게 당연하기 때문에 최소 시간 정도는 있었다.

선수들은 이전보다 훨씬 편안하게 스트리밍 룸으로 향해 한 사람씩 방송을 켰다.

최근 FWX 기세가 심상치 않은 만큼 방송이 두렵지 않았다.

성적이 안 좋다면 방송은 물론 팀 채널에 영상을 올리는 것 역시 부담이다.

FWX가 그랬다.

팬들은 최근 경기력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마련이고.

수많은 사람이 내 플레이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어딘가 무너져 내리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애석하지만 팬들의 우려 섞인 말들이 정말로 팀에 도움 되는 경우는 드물기에 더 그랬다.

알고는 있어도 그게 잘되지 않고, 팀 내 사정을 전부 공유할 수는 없으니까.

선수나 팬이나 모두 답답하고 억울한 상황.

이 정신력은 프로의 소양 중 하나이긴 했지만.

‘게임을 잘한다’ 와 ‘정신력이 강하다’가 항상 동반되지는 않았기에 많은 지망생이 데뷔 직후 고배를 마시거나 기대했던 프로게이머 생활과 다르다는 말이 나온다.

아직 한 사람의 일생보다 짧은 LOS 리그의 역사.

리그는 팬 중심, 선수 중심의 문화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며 천천히 성장기를 거쳐 성숙기를 향해 가고 있었다.

오프라인 관객보다 온라인 관객이 많고.

선수와 팬 모두 평균 연령이 젊은 편이고 타 스포츠에 비해 접근성이 매우 높은 장르.

e스포츠 경기의 기반이 되는 온라인 세계와 팬들이 의견을 교류하는 세계는 동일한 위계다.

연습을 위해 필드로 나가는 것과 연습을 위해 컴퓨터를 켜는 것.

선수와 팬들의 접촉면에서도 차이가 있다.

그렇기에 선수들은 더욱 멘탈을 단단히 해야하고, 또 노력해야 한다.

동시에 구단에서도 지나치게 파고들지 않도록 관리한다.

오로지 선수를 공격하고 싶어 할 뿐인 악의에는 접촉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중 커뮤니티나 리그 채팅 등은 어느 정도 감코진이 필터링할 수 있지만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방송은 더욱 관리가 어려운 법.

그래서 많은 팀이 성적이 좋지 않은 시기에는 방송을 쉬어가곤 했다.

물론 좀 더 집중 연습 시간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권건은 늘 그렇듯이 인사를 하고 조용히 게임에 몰두했다.

- 오늘도,, 신께서,, 인사를 해주셨읍니다

- 권건님의,, 오더 보이스 모음집,, 가져왔읍니다,, 뒤에 틀어놓고,, 보세요

- 감사,,합니다,,

채팅방에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

이제 이 분위기에도 적응됐다.

어차피 후원은 막혀있고, 권건은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권건의 플레이 화면을 보다 보면.

얼마나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군말 없이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었다.

대신 이 세계만의 장점.

팬들 사이에서 금세 새로운 문화가 생겨난다.

- 권건이 탑에 가면? 탑‘건’

- FWX의 팬이었던 내가 갑자기 타 팀 팬들의 부러움을 사며 떡상한 ‘건’

- 우리 정글이 너무 잘하는 ‘건’에 대하여

- 권건 선수 MBTI 뭔지 아시는 분?

- ESTJ

- 경영자 스타일?

- ESTJ : ‘이 사람은 특별한 정글이다’

- 이거 맏따^,^ㅋㅋㅋㅋ

- ㄹㅇㅋㅋㅋㅋㅋㅁㅊㅋㅋㅋㅋ

집단 지성이란 놀라워서.

매번 새로운 드립이 등장하곤 한다.

한 게임을 마친 권건이 채팅창을 보고 가볍게 웃었다.

- 웃으셨다!

- 웃으셨다!!

- 야 더 열심히 해봐 웃게 해드려!!!

- 이.사.특.정 좋았다ㅋㅋㅋㅋ

- 이사특정을 열혈 팬으로 추대하라ㅋㅋㅋㅋㅋㅋ

- 얶덖계 시청자들이 스트리머를 웃기는 방송ㅋㅋㅋㅋ

- 얼굴을 보여주시는 것만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ㅠ_ㅠ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한 사람.

- 기분 좋아보이네 ㄱㄱㅎㅇ

- 담판 같이 ㄱ?

- 써머?!?!?!

- 써머다!!!!!!

- 노점노쌈? 권건님이랑 친해요?

유니버스 탑, 최정인.

이유찬에게 트래쉬 토크를 하기는 했지만.

경기 후 양 팀의 탑솔러들이 똑같은 선언을 하는 영상이 LKL 채널에 공개됐다.

이것은 노점노쌈 선언, 치와와 시츄 분쟁 등으로 불렸으며.

결국 그 세트에서 서로 솔로킬 지표를 두둑하게 챙겨가면서 탑에서는 윈윈이었다는 식으로 굳어졌다.

심지어 두 선수가 비슷하게 한 말들이 전혀 합의되지 않았었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FWX 팬들은 꽤 명문팀인 유니버스와 어울리는 것을 즐거워했으며 유니버스 팬들도 승패와는 별개로 불탔던 ‘탑의 맹세’에 만족하면서 높은 영상 조회수를 자랑했다.

권건은 잠시 말을 골랐다.

최정인과 인연은 있었지만, 그건 과거의 이야기.

적당히 선을 지킨다.

“안녕하세요, 써머 선수.”

- 대박

- 써머 선수!! 말 좀 더 걸어주세요 ㅠㅠㅠㅠ

- 안부도 좀 물어봐 주시면 안 돼요???? 오늘 뭐 먹었는지 물은 몇 잔 마셨는지

- 스토커세요?

- 미쳤다;;;

- ㅎ..

채팅만 봐도 최정인이 실실 웃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 채팅할게ㅎ

- 와 부럽다..

- 나도 프로게이머 하고 싶다..

- 일대일 메시지 보내고싶다.. 후원이라도 열어줘 제발..

호가호위로 실컷 꺼드럭거린 최정인은 재빨리 게임 친구 채팅으로 말을 걸었다.

일부러 방송방에 들어와 주목받아 권건이 대답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요령.

이래서 늙은 호랑이인가.

- UVS Summer : 근데

계정도 평소에 사용하던 것과 달리 보란 듯이 공식 선수명 계정을 들고 들어왔다.

두 계정 다 조르고 졸라 친구 등록했다.

- UVS Summer : 아직 친구 많이 없네ㅎ

권건의 친구창은 소수 정예였다.

대부분의 선수는 같은 출신, 소개, 인게임, 각종 행사나 경기 종료 후 교류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아는 사이가 되지만.

권건은 키와 체격이 큰 편인데다 무뚝뚝했으며, 항상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고 프로 중의 프로라고 불릴만한 실력이다.

어지간한 선수들은 말이라도 한번 붙여보려다가 자신감을 잃고 물러나기 일쑤였다.

사실 권건이 반복적으로 다시 친해지는 과정에 지쳐있어서였지만, FWX도 선수가 새로운 교류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경기에 집중할 수 있게 전력 지원했기에 권건의 친구창은 일종의 성지였다.

실제로 팀 내에서도 선수들과 플레잉 코치 최수철, 해설인 남동현, 그 외 직접 친구 추가를 요청했던 호넷의 원딜 목해인 정도가 자리를 빛냈다.

그래도 최근에 박진현 감독도 추가된 참이다.

하지만 최정인을 받아준 이유는 조금 다르다.

지금의 권건과 최정인은 유니버스전 후 흉흉한 분위기 속 눈인사를 한 게 전부인 사이.

그런데도 자기 마음에 든 건 다 제 것인 줄 아는 전형적인 고양잇과의 짐승.

어느 팀을 가도 지독하게 얽혀오는 저 탑을 외면하면.

상상만해도 지긋지긋한 귀찮음이 시작된다.

- UVS Summer : 흠ㅎ 내가 영의정쯤 되나?ㅎ

최정인은 이 사실이 썩 만족스러웠다.

싫은 척하는 권건이지만 역시 너도 나를 좋아하는군.

하긴, 내가 좀 괜찮은 탑이지.

오해는 깊어져 갔다.

- ㅠㅠㅠ서로 친해요??

- 좋겠다ㅠㅠ 부러워 ㅠㅠ

-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팬들의 열광적인 반응에 권건은 큐를 돌리려다가 잠시 멈췄다.

요즘은 전보다 마음이 여유롭다.

입 한번 열지 않고 게임에 몰두하던 때와 약간 다르다.

왜 이러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오늘은, 그냥 그런 기분.

“지인입니다.”

최정인은 황당한 듯 조금 느리게 반응했다.

- UVS Summer : 지인?????

- UVS Summer : 내가 왜 고작 지인?????

- UVS Summer : 나 형이야ㅎ 형이라고 불러봐

“여러분. 오늘은 이야기를 좀 나눌까요.”

권건은 아무렇지도않게 시청자들과 말을 이었다.

- UVS Summer : 형이라고 나 형이라니까??? 부끄러워서 그래?? 나 정인이 형

최정인이 빠르게 채팅을 올렸지만.

- ????

- 우리 신님 왜 그래요??? 이야기..??

- 무슨 일 있어요..?? 무리하지 마세요 제발

- 하루에 300자 이상 말 못하는 거 아니었어?

- 금제 걸어서 실력 올린거임? ㄹㅇ 밸런스

최초로 열린 권건과의 대화의 장.

팬들은 흥분했다.

- UVS Summer : “기프티콘”!!!!!

- UVS Summer : 짜잔 스킨 선물권이 도착했습니다 갖고 싶은 스킨을 고르면 제가

권건은 대화창을 닫아버렸다.

“기분이 좋아서요. 혹시 질문하실 분 없으시면..”

- 진짜 ESTJ에요?

- 빅스 조공 뭐 받았어요?

- 깻잎 논쟁 어떻게 생각하세요?

- 저희 집 포인트 컬러 딥 그린으로 해도 될까요?

- 저 부전공 뭐로 할까요?

- 아기 이름 건으로 해도 될까요? 성이 이씨긴 한데..

- 이건 좀;

최정인이 보낸 메시지는 계속 숫자가 올라가고 있었지만.

권건이 게임 친구 채팅을 더 열어보는 일은 없었다.

#

“은호 형님? 뭐해요.”

방송을 끝내고 야식을 찾으러 카페테리아에 온 이유찬.

“아. 잘 왔다. 이쪽은 우리 막내 탑! 이유찬, 차니 선수예요. 인사하자.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눈을 끔뻑거리던 이유찬은 카메라를 향해 인사했다.

카페테리아 한구석, 잘 꾸며진 장소에서 최은호가 무언가 반죽하고 있었다.

“이거 뭐예요?”

“콘텐츠 촬영 중.”

최은호는 카메라에 덜 비치는 방향에서 이유찬의 눌린 머리를 흔들어줬다.

“아! 오늘 방송 대신? 요리 방송? 형님 멋있네?”

오늘 최은호는 방송을 오래 하지 않았다.

대신 빅스에서 받은 DIY 쿠키 만들기 세트를 만지고 있었다.

이 콘텐츠는 최은호가 직접 제안하기도 했지만.

프런트에서도 빅스가 내민 조공을 받아들였기에 성사된 특별 콘텐츠다.

“잠깐 했어. 시참 한 판정도. 나머지는 저스트 채팅이었지만.”

최은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유찬이도 같이 해도 돼요?”

“네. 좋죠.”

PD에게서 사인이 떨어지자 최은호가 의자를 하나 더 가져와서 이유찬을 앉혔다.

SNS는 열심이었지만 재치 넘치는 멘트에 자신이 없는 최은호다.

만만한 곽지운은 아직 방송 중.

아마 막내와 함께라면 제법 따뜻한 분위기의 콘텐츠를 연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거 반죽으로 과자 만드는 거예요?”

“응. 이렇게 반죽하면 색깔도 섞인다? 우리가 만들고 나면 구워주신대.”

“오우야.”

하지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

“있잖아. 수민아.”

제주 F.L.E의 감독 오지현은 금연을 포기했다.

이번 시즌 F.L.E.

여태까지의 대진은 대구 유니버스, 광주 미라쥬, 인천 트릭스터.

이름만 들어도 강팀이다.

어떻게 됐냐고?

벌써 3연패.

세트 승 없음.

그리고 다음 대진은?

대전 FWX다.

“나 왜 이렇게 자꾸.. 눈물이..?”

“늙어서 그래요.”

“그 정도는 아니야, 나쁜 새끼야.”

“직장 내 폭언? 당장 사원의 소리함에 신고합니다.”

“와씨. 잘못했어.. 내가 미안해.. 너무 스트레스받아서 그랬어.”

오 감독은 이수민 코치와 잘 맞는 편이었다.

이 코치는 다소 냉소적인 면이 있었지만 오 감독의 걱정이 깊은 것을 알고 흡연 구역까지 따라 나왔다.

“그다음 대진 순서는?”

“빅스, 해머스, 그다음 피닉스, 바로 다음에 스톰이네요.”

오 감독은 말없이 담배 필터가 쪼그라들 만큼 쭉 빨았다.

새빨갛게 타오르며 빠르게 줄어드는 담배.

마치 자신의 속을 보는 것 같았다.

“나 요즘 명상 수업 다녀.”

“어디 좋은 데 있어요?”

“어. 주민 센터. 오전반. 일찍 일어나서 갔다 와. 어머님들이 많아. 인생 이야기도 많이 듣고 그래.”

“좋으시겠어요..”

두 사람은 대화가 끊겼다.

“FWX는 신인이 샘솟는 걸까?”

간신히 입을 연 오 감독.

“글쎄요.. 차니 그 친구는 원래 무력이 뛰어나긴 했죠. 근데 협조가 잘 안됐으니까. 뇌지컬도 많이 부족하고.”

냉정한 이 코치의 말.

하지만 오 감독은 그 말에 백번 동의했다.

피지컬 좋은 사람을 데려오는 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자리는 적고, 지망생은 많으니까.

요는 진짜 옥석을 어떻게 가려내는가다.

선수는 개인의 랭크만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점수가 상당히 낮은 선수가 주전인 경우도 있다.

“박진현 감독.. 인가..”

“권건 선수. 그리고 그 다음에 박 감독님이겠죠.”

“권건..”

또다시 배가 살살 아파져 온다.

약팀이 그렇다.

이번 대진은 어려울 테니까, 다음 대진은 어떤 팀인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

그게 약팀이다.

이 심해에서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그 어려운 걸 해낸 게 FWX다.

“상준이한테, 항상 너무 미안하네. 결국 그런 시도라도 해봐야겠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오 감독은 신경 쓰지 못해 길게 자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어쩔 수 없죠.”

“그래! LKL의 파괴를 막기 위해!”

그래도 힘을 낸다.

FWX를 롤 모델로 삼는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사랑과 진실! 어둠을 뿌리고 다니는!”

“감독님, 그만 하세요.”

F.L.E도 여전히 2군 선수들을 키워내고 있으니까.

“우리! 제주 F.L.E에겐! 아름다운 미래, 밝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다!”

“난 수민이다옹.”

“미친놈.”

“신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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