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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104화 (105/326)

104화. 조공을 바치라고?

빅스와의 경기 날.

우연히 겹친 게이밍 기어 제작사 쏘닉스의 신상품 출시일.

팀 FWX의 스폰서 중 하나이자 가장 큰 협찬사인 쏘닉스는 선수들이 휴가 기간 동안 촬영했던 짧은 광고 영상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광고는 팀 계약이었지만 이번 광고 영상은 각 선수의 상징성에 의미를 뒀다.

곽지운, 최은호, 그리고 권건.

세 사람 각각 개인 버전과 단체 버전으로 총 4개의 광고 영상.

“너의 한계를 단정 짓지 마.”

곽지운.

“오, 새롭게 만나는 나의 뉴월드.”

최은호.

“승리. 다만 그것뿐.”

그리고, 권건.

ㄴ 와! 신상 마우스 정말 좋아 보인다! 색도 너무 잘 빠졌고 게임 실력이 향상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이렇게 말하면 되는 거지, 형들?

ㄴ 와 이거 진짜 추억이네 내가 대학생 때부터 사용하던 마우스인데 저거 오른쪽 누르면 에임 핵 켜지고 왼쪽 누르면 상태창 뜸

ㄴㄴ 얘는 무슨 컨셉이냐??

ㄴㄴ 솔깃했네ㅋㅋㅋㅋㅋㅋㅋ

ㄴ 왜 이렇게 잘생긴‘거니’

ㄴㄴ 왜 못 하는 게 없는‘거니’

ㄴ 이번에 쏘닉스 광고 잘 뽑았네ㅋㅋㅋㅋ

ㄴㄴ 연기도 잘함 클래스 빼고ㅋㅋㅋㅋㅋ

ㄴㄴ ㅋㅋㅋㄹㅇ프로게이머들 광고 보면 진짜ㅋㅋㅋㅋ

ㄴㄴ 클래스 어버버 미쳤다ㅋㅋㅋ 오, 새럽개 만내는 나으 뉴얼드

스포츠 선수에게 매체에서의 연기력은 필수가 아니다.

하지만 꽤 뻔뻔한 곽지운이나.

연기마저 잘하는 권건과 달리.

최은호는 아무리 촬영해도 삑사리가 날 뿐.

결국 광고 최종본에도 어색한 목소리로 ‘오, 새롭게 만나는 뉴월드’를 읊은 최은호에게는 새로운 별명이 붙었다.

“오, 뉴은호.”

“하지 말라고.”

“새롭게 만나는 오뉴월.”

“하지 말라고! 내 대사가 어려웠어!”

“햬지 맬라고~”

곽지운이 끊임없이 최은호를 따라다니며 놀린 끝에.

최은호는 첫 광고 촬영으로 들떠서 SNS에 잔뜩 올린 게시글을 몇 개 삭제했다.

“잘했어. 그거 너무 많이 올려도 안 좋다더라.”

“콘텐츠 팀에 허락받았거든?”

“다음에 또 다른 광고를 받을 수도 있잖아. 그때마다 게시글을 그렇게 올릴 수는 없지.”

“뭐야, 깍지. 너 꽤 좋은 말을 하는 녀석이잖아..?”

“이제야 내 서포터답군.”

“역시 내 원딜.”

바텀 듀오가 다시 의기투합하는 사이.

“저 마우스 쓰면 진짜 이겨줘?”

이유찬은 이번 광고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일절 관심 없는 기색으로 코만 긁고 있었다.

“진짜 에임 핵 기능 있어?”

“그런 건 없지.”

권건이 어깨를 으쓱였지만 이유찬은 권건이 한 말이라면 철석같이 믿는지.

“야, 김미드. 우리도 저거 살래?”

상품 결제창까지 열어놓고 있었다.

“이미 우리 비품실에 들어와 있어. 나는 마우스는 원래 쓰던 게 좋아서 그거 쓰고.”

“아하. 니는 모르는 게 없네. 어쩐지 좀 친다 싶었어. 아닌가, 그냥 원래 잘하나?”

이유찬의 별생각 없는 말에 김예성은 남몰래 목뒤를 매만지며 미소 지었다.

하고 다니는 건 별로지만 솔직한 면은 좋다.

봉구 형이 말하던 갈레오로 트린을 이겼다는 것도 얘였고.

그러고 보니 권건을 데려온 것도 이유찬이랬나.

“건이 연기력 좋네. 화면발도 잘받고..”

김예성은 괜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광고를 몇 번이나 돌려봤다.

“유니폼 촬영 때부터 봤는데, 건이는 나랑 피부톤이 좀 비슷한 것 같아.”

“나는?”

“너는 완전 다르지.”

“왜 나는 다른데.”

“사람마다 타고나는 색이 다르니까..”

김예성은 평범한 이 연령대의 선수들과는 약간 다른 면이 있었다.

헤어나 스타일링부터.

자기에게 뭐가 어울리는지도 잘 알고 있으며 다양한 의류 브랜드에 대한 이해도까지.

아주 빼어난 외모는 아니었지만 꾸준한 자기 관리를 하는 타입.

다만 스스로에 대해 엄격한 만큼 상대도 그걸 지켜주기를 바랐다.

성격적으로나, 거리감에 대해서나, 기본 예의 같은 것들.

태어난 김에 살아가는 것 같은 이유찬과는 정반대의 스타일이었다.

“그런 건 어떻게 알아.”

김예성은 기껏 팀에서 만져 보낸 머리를 대충 눌러 넘긴 이유찬을 바라보면서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지만.

“그냥..”

방금 이유찬이 자신에게 건넸던 칭찬을 생각하면서 아주 조금은 편하게 입을 뗐다.

“부모님..께서 그런 쪽이셔서.”

“그렇구나. 진짜 좋은 분들이신가보다.”

이유찬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권건에게 잡담을 건네는 사이.

김예성은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새로 들어온 탑은 사려 깊은 타입은 아니었지만 털털하고 편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권건과 아는 사이.

“근데 너, 건이한테 무슨 말 하고 있어.”

“아 그냥 오늘 뭐 먹을 거냐고 물어봤다고!”

“진짜야?”

“김미드 무서워! 거니! 도와줘!”

권건은 이 소란 속에서도 집중한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야, 이유찬 카운터 떴냐?”

“그런 것 같음.”

한바탕 웃음이 지나가고.

“자, 이제 경기장 다 왔으니까 다들 들어가자. 어디 불편한 곳 있는 사람?”

박 감독의 말에 손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경기 시작을 코앞에 둔 시각.

서울 빅스는 1주차에 광주 미라쥬와 수원 해머스를 만나 각각 2:1로 매치 승을 거뒀지만.

대전 FWX가 연달아 스윕을 가져가면서 같은 2승 라인임에도 불구하고 득실 차로 밀리고 있었다.

작년, 아니 지난 시즌에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위치.

하지만 빅스 역시 몇 년에 걸쳐 중위권에서 상위권까지 치고 올라온 팀.

마지막으로 FWX와 만났을 때 지나치게 미드를 의식한 것과 상대를 얕본 것이 패인이라고 생각했던 빅스는 이번 경기를 다른 방향으로 준비해왔다.

그리고 오늘은.

역대급 이벤트 날이기도 했다.

“드디어 오늘인가요!”

“그렇습니다! 저희가 어지간해서는 이런 말을 잘 안 합니다만, 오늘 이벤트가 정말 많은 이슈가 됐죠! 완전 여름 축제예요!”

카메라가 객석을 비춘다.

“오늘따라 관객분들의 옷차림이 상당히 화려하지 않습니까?”

“크, 사실상 풀템이죠?”

입장하면서 각 구단에서 선물을 잔뜩 받은 팬들이 환호와 함께 치어풀을 흔들고 있었다.

- 세자, 더 리빙 레전드! 하지만 오늘은 티켓팅 성공한 내가 더 레전드!

- FWX에 올인! 승리해서 살림 장만하자!

- 나는 신을 믿어, 권건 당‘신’

- 진짜 부자인 팀은 누구? 바람이 너무 시원해요:) FWX 사랑해요

머리띠부터 시작해서 팔찌, 응원봉까지 화려한 양측의 팬들.

다만.

부채를 지급한 빅스와 달리 오늘 관객석에 입장한 모든 팬에게 손풍기를 지급한 FWX.

FWX 팬들은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빅스 진영을 마주 보고 바람을 불어댔다.

상대 진영까지 바람이 갈 리가 없지만 FWX 팬들의 도발은 어느 정도 먹혔다.

“아, 뭔데.”

“이거 피켓이라도 흔들어!”

- 빅스 너만 믿는다, 자취생들의 희망 대/황/빅/스

- 암어 쌔비지 빅스의 주머니를 터는 괴도! #BGSWIN

- 밤 바바바 밤 X발라바려

“이야, 이게 누구죠! 반가운 얼굴! 전 프로였던 선수 얼굴이 보이는데요?”

“추억의 인물이군요! 저희 모두와 가까운 분이시죠? 이제는 사라진 명가의 그 탑..”

“너무 반갑습니다!”

“살림 장만하러 오신 건가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중립석이지만 손에 FWX 야광 팔찌가! 아, 가려도 소용없습니다! 요즘 나온 마우스가 그렇게 좋다더라구요.”

각 구단의 불붙은 이벤트 경쟁은 오프라인에서만 끝나지 않아서.

갖은 비디오 플랫폼과 SNS에서도 응원 인증 경쟁이 한창이었다.

수많은 볼거리와 즐길 거리.

오늘의 경기는 시즌 초치고는 이례적으로 높은 인기를 자랑했다.

- 존나 재밌어ㅋㅋㅋㅋㅋ

- 유니버스 이기고 왔으니까 인정하겠음ㅋㅋㅋㅋ

- 우리한텐 정글 권건이 있어

- 우리한테는 정글 미스터가.. 씨바 뭐지? 왜 이렇게 닉넴이 약해 보임?

- 미스터가 뭐냐 미스터가; 마스터 정도는 됐어야지;;

- 그래도 권건이 더 세보임 쉬바빳따;

- 권건 에디션 쏘닉스 마우스도 존나 강해 보인다

자연스럽게 노출되는 신제품.

그리고 수많은 사람의 호응에 쏘닉스 관계자 역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항상 스톰의 제트로니카에서 밀렸지만 오늘부터는 다를 것 같다.

계약도 타이밍인 법이다, 제트로니카 놈들아.

혹시나 경기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소고기 회식을 위한 법카는 준비되어있다.

물론 그럴 리 없지.

위대한 FWX니까.

개인적으로도 FWX 팬인 그는 업무상 유니폼을 입지는 못했지만 남몰래 챙긴 야광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프밍아웃이 가능한 시대라니, 이렇게 좋을 수가.

“그래서! 오늘 경기! 정말 여러 가지 의미에서 배팅이 걸려있다고 볼 수 있겠죠?”

“두 팀의 대애애애격돌! 과연! 경기에서 이기고 팬들에게 무지막지한 경품을 안겨 줄 수 있는 팀은 어디가 될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사실 정말 핵심은 진 팀이 이긴 팀에게 조공을 바쳐야 한다는 거예요!”

“치욕적입니다! 하지만 권건 선수의 선전포고를 받아들인 이상, 빅스도 정말 최선을 다해서! FWX에게 뭔가 받아내야겠죠! 뭘 받을까요!”

“글쎄요, 아마..”

- 혹시 권건 줌?

- 오 그거 진짜 좋다

- 권건이 걸린 경기였던 거임?

- 조공이 권건이였어????

- 존나 중요한 경기였네????

- 라온이랑 손잡고 돌아오면 되겠네????

여론이 이상하게 굴러가던 이때.

자리에서 장비를 세팅하던 김예성은 왠지 등을 타고 흐르는 싸한 느낌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시선에 빅스 팬들의 치어풀이 닿는다.

- 최고의 조공은 ‘권건’이다^오^

- 빅스의 우정권? 이건 못 참지

옛 친정팀을 바라보는 김예성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

#

“오늘은 대전 FWX가 블루, 서울 빅스가 레드 진영에서 시작합니다!”

밴픽이 시작됐다.

“지난번에 FWX가 미드 중심의 플레이를 하면서 톡톡히 재미를 봤거든요! 빅스에서 미드 밴을 많이 한 상황!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우리도 제법 빅스가 들고나올 법한 전략들을 분석했지만.

“FWX의 탑 냐르! 이 친구가 참 무난한 픽이죠. 아직 색을 보여줄 생각이 없는 FWX!”

“빅스에서는 바로 그윈과 아펠!”

상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첫 밴에서 우연히 빅스가 읽고 들어온 부분이 많아지면서 밴픽 시간이 길어졌다.

“바로 지난 경기에서 세자 선수가 아펠의 힘을 보여줬었죠! 빅스에서도 그런 결과를 받아보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이어서 FWX는 리싱과 칼리를 가져갑니다!”

“권건 선수의 5전 전승 카드, 리싱 나왔습니다! 승률이! 백 프로!”

“빅스에서는.. 루루로 바텀 조합을 완성합니다! 바텀 주도권을 빼앗길 생각이 없는 빅스!”

“루루는 하이퍼 캐리와 잘 어울리죠! 아펠 루루가 나온 만큼 그랩류 서폿 밴 하면서! 계속해서 픽 진행합니다!”

그리고.

“스캬너로군요!”

“그렇군요! 지금까지 나온 FWX의 조합은 팔이 짧은 편이거든요. 물론 권건 선수의 리싱을 상대로 스캬너를 키운다는 건 상당히 부담됩니다만, 안전하게 크기만 한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수도 있겠죠.”

“메타를 타는 챔피언이라! 비교적 신인인 권건 선수가 이 챔피언에 상대적으로 익숙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구요!”

“빅스가 정글 쪽 자원 투자를 결심한 것 같아요. 권건 선수가 요즘 꽤 악명이 높은데, 아무래도 어느 정도 성장만 하고 나면 확실하게 킬을 내겠다는 각오로 보입니다. 아무리 피지컬이 좋더라도 일단 제압당해서 끌려오면 누구든 어쩔 수 없잖아요!”

“좋습니다! 그럼 FWX의 조합은요?”

“FWX, 레나타를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트페 할게요.”

김예성이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메타에서 아주 좋다고 볼 수는 없는 챔피언.

하지만 오랜만의 챔피언 신청이다.

“트페? 트페하면 상대가 사일 가져가지 않을까? 우리 냐르도 있고 레나타도 있어서 거의 확실할 것 같은데. 그럼 저쪽 후반 밸류가 많이 높아. AP 딜 더 나오는 쪽으로 가면 어때? 빅터르나.”

박 감독님도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제 생각에는..”

김예성은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어차피 이미 밴도 많이 됐고, 우리가 생각한 방향이랑 다르잖아요. 빅터르는 자원을 많이 먹고.”

“그렇긴 하지.”

시간이 모두 소모되고, 레나타가 락인되면서 우리의 마지막 픽을 골라야 할 시간이다.

“상대가 사일런트하게 두면 제가 충분히 마크하고 그 전에 굴릴 수 있어요.”

김예성의 표정을 읽기란 쉽지 않지만, 오늘따라 더 단호하다는 건 알 수 있다.

아직도 빅스에 미련이 남았나?

“그리고, 오늘 느낌이 좋아요.”

이런 말을 자주 하는 선수가 아니다.

박 감독님이 살짝 내게 눈짓해서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흠, 뭔들.

어차피 밴픽에서 가장 발언권이 강한 사람은 플레이하는 선수 본인이다.

선수들 사이에 이런 말이 있다.

'경기를 지면 감코진의 발언권이 강해진다'.

뭐, 이 말은 이기고 있을 때는 대부분 선수의 의사에 따라 밴픽이 진행된다는 이야기다.

이 성향은 팀마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특히나 첫 세트에는 그렇다.

오늘따라 느낌이 오는 픽이 있을 때도 있거든.

“뭐. 건이가 있으니까. 뭔들.”

박 감독님도 나와 같은 생각.

그리고.

상대가 예상대로 사일까지 가져가면서.

경기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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