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프며든다
나는 지난 시즌까지 다이브를 많이 시도하지는 않았다.
아주 확실한 상황을 제외하면, 대체로 그랬다.
사실 다이브란 게.
라인 압박이 충분히 수행되어야만 가능한 부분이기도 하고.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죽을 가능성이 높은 법인데, 음.
타워 어그로 핑퐁이 잘 될지 솔직히 확신이 없어서다.
어그로 핑퐁에서는 판단과 호흡이 중요하다.
누가 가장 먼저 희생할 것인가에 대해서 순서를 정할 때.
그것이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LOS에서는 서포터가 숭고한 희생의 역할을 맡아주는 경우가 많지만.
만약.. 서포터, 서 부장님이 부재중이시라면?
그럼 널뛰는 실적의 탑 부장이?
발로 뛰던 정 부장?
아니면 탄탄대로의 엘리트 미 부장이나 토끼 같은 자식들이 있는 원 부장?
모두 각자 희생하지 못 할만한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라인을 덜 밀고 왔다던가, 지금 몸을 사려야 후반 캐리가 가능하다던가.
언제나 변수는 발생하기 마련이고.
‘순간적인 판단’이 쉽지 않기 때문에 무리한 다이브는 잘 나오지 않는다.
내가 우선순위를 정해준다고 한들.
인간은 이기적이라서,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몸을 빼기 마련이거든.
경험담이다.
그래서 무작정 신사업을 시작하기보다는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잘 굴리는 게 중요하지.
근데.
“여기 이 장면에서 왜 네가 포탑 어그로 받았어?”
참 신기하게도.
여기는 이런 협의가 필요한 곳이 아니다.
도리어 반대다.
“나? 내가 살 걸 알고 있었으니까.”
“거짓말하지 마. 피 3 남았잖아. 이건 계산의 영역이 아니야. 건이도 분명히 너 빠지라고 했었어.”
꼼꼼한 김예성.
“거니야, 얘 집착있다. 이때 네가 실수했으면 거니 죽었을걸? 거의 실수 나올 뻔했는데?”
능글맞은 이유찬.
누가 여기에 더 오래 있던 사람인지 모르겠다.
“아니! 나도 무조건 건이 지켰어!”
“김트페. 나약한 인간의 몸뚱아리. 마법사 나부랭이.”
“그래도 두 대는 버텨. 너는, 너는.. 나물괴물..”
그리고 얼굴이 빨개진 김예성은 헛소리를 뱉고 있다.
바보를 상대하다가 고장이 났나.
얘랑 이유찬이 상성이라도 있는 건지.
“유찬. 정말로 알고 그랬어?”
그래, 여기는.
“진짜로! 안 죽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시정하겠습니다!”
“나도 앞으로 완벽하게 플레이할게!”
과잉 충성이다.
우리는 스크림 후 피드백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최근 스크림에서는 끊임없이 이유찬과 김예성의 합을 맞추려는 시도가 있었다.
아직 갈 길이 좀 남았지만.
“날 걱정해준 거야? 다음에는 꼭 김트페한테 맡길게.”
“싫어. 탑 로밍 안 갈 거야.”
“그러지 말고 와줘잉. 우리가 잘해야.. 알지?”
이유찬과 김예성이 동시에 나를 흘긋 바라본다.
“그럼 내가 탱챔 할게. 갈레오 어때?”
“그럼 내가 딜챔 할게. 카뮐 어때?”
“콜.”
“콜.”
그래도 다행히 둘은 사이가 나쁘지 않아 보였다.
보이지 않는 동맹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나를 왜 김트페라고 불러?”
“김레오?”
“아니, 챔피언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난 마음대로 사는 게 좋은데.”
김예성은 잠시 생각하다가 크게 싫지는 않은지 고개를 끄덕였다.
“자유.. 존중할게.”
이런 사소한 잡음이 있긴 했지만.
FWX만큼 빠르게 내 오더를 받아들인 팀은 없다.
LOS는 5인 스포츠다.
그러나 축구나 야구처럼 하나의 공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득점, 실점이 발생할 수 있다 보니.
국지전의 중요성도 빼놓을 수 없다.
대부분의 승리는 전면전에서 결정되지만, 이 전면전을 위해서는 전리품을 든든하게 챙겨야만 하니까.
그러니까, 이 작은 전쟁 같은 스포츠에서 원맨 캐리라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가장 좋은 것은.
뛰어난 사령관과 훌륭한 대원들.
그렇다면, 가서 죽으라고만 말하는 사령관이 좋은 사령관인가?
그럴 리가 없다.
역할에 따라, 메타에 따라.
사령관인 나도, 그 외의 포지션도 언제나 앞장설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유니버스 전에서 그랬듯.
저격수에 해당하는 곽지운조차 적을 빨아들이기 위해 위험을 감수해야 할 때가 있다는 거다.
게임 내적으로 뿐만 아니라.
외적으로도 서로서로 희생하는 포지션을 돌려 갖는 것이 중요하다.
대신 죽어주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희생에는 자원을 포기하는 것, 위험을 감수하는 것 등 다양한 종류가 있으니까.
이 희생이 특정 포지션이나 인물로 고정되게 된다면.
팀에서는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이 생긴다.
항상 조연이나 들러리가 되는 것.
그것을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
“스프링 빅스 전에서는 예성이가 펜타킬을..”
“그럼 지난 경기 예성이 코르기 데이터가..”
빅스에서의 김예성이 그런 역할이었다.
김예성은 여러모로 팀과도 맞지 않았지만, 분명 희생을 강요하는 플레이에도 탈력감을 느꼈을 거다.
“탑에서 칼로 붙어줄까요? 토이 선수가 써머 선수만큼 불도저는 아닌데..”
“그러면 이번에는 유찬이를..”
“그게 안 되면 약간 바텀을 수비적으로 돌려보면 어때요?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라인 스왑 픽을 가져가 보면 어때요?”
“도형이, 좋은 아이디어 있어?”
“서폿 리싱?”
“오..”
“야, 세모네모. 그럴 거면 니가 해.”
“나 서폿 시켜주냐?”
“니가 서폿? 그럼 내가 성을 간다. 너 와드 위치도 모르잖아.”
“그까짓 거 껌이지. 다시 태어난 윤도형 모르냐?”
“너는.. 진짜로.. 성격상 다시 태어나도 안돼. 차라리 내가 피쯔 서폿을 하고 말지.”
“그건 스왑이 안 되잖아.”
“예성이랑 바꾸면 돼.”
“예성이보다는.. 유찬이가 가능성 있을 듯?”
“어? 그러게. 진짜. 어? 재밌겠다.”
“야, 은호야. 이거 데이터 찾아볼래? 나온 적 있어.”
“서폿으로?”
“아니, 탑으로.”
“언제?”
“바야흐로 강산이 변하기 전쯤..”
“나 장인이라고 소문은 나 있으니까 깜짝 픽으로 의미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럼 이거 조건을 맞추려면.. 나중에.. 메타가..”
어쩌면 나에게 자리를 빼앗겼다고 느낄지도 모르는 윤도형도 다양한 방향에서 노력하고 있다.
주전 자리는 어려우니 올해 계약이 끝나면 이적할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여전히 FWX에서 적극적으로 전략 회의에 참여한다.
희생 강요, 박탈감.
나도 그랬던 적이 있다.
답을 찾을 수 없어 아무런 팀이나 옮겨 다닐 적에는 더더욱 그랬다.
내 실력도 멘탈도 지금같지 않았던 초반.
분명 실력이 전부여야 할 이 판에서.
이상한 색의 콘텐츠나 뒤틀린 위계질서를 강요하는 프런트.
생각지도 않은 부분을 걸고넘어지는 협회.
좋은 오더를 해도 성골의 자존심 때문에 들어주지 않는 팀원이나, 타성에 젖어 끊임없이 나를 견제하는 팀원.
원래 주전이던 선수와 감코진 간의 정치, 유착 관계를 봤다.
“지운아. 지난번 스크림에서 빈스 선수 어땠어? 스타일 면에서.”
“그쪽 원딜은 여전히 달려드는 플레이를 선호해요. 근데 그렇다고 트릭스터같은 느낌은 아니고. 약간, 제 생각에 이번에 루시언 쓰고 싶어 할 것 같은 느낌?”
“뭔지 알겠다. 그때 그거?”
“네. 근데 유니버스 5인 다이브 봤을 테니까.. 하려면 아마 탑 주도권 꽉 쥐면서 가고 싶을걸요.”
“그러다 보면 정글 후픽 우리한테 넘겨야 할 텐데?”
“그럼 뭐.”
곽지운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와우. 우리 팀 진짜 강해졌네. 와. 뭐야. 격세지감.”
최수철 코치님이 웃고 있는 동안, 나와 눈이 마주친 곽지운도 입을 벌리며 방긋 웃었다.
“우정권이라서..”
그래.
소소하게 발목을 잡는 요소들.
최소한 FWX에 그런 건 없는 것 같다.
예전에 이런 것들을 완벽하게 넘어서지 못했던 게 나의 부족함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1군에 자리 잡은 상태에서 회귀를 시작했다면 좀 나았을까.
혹은 제법 괜찮았던 몇몇 팀을 먼저 만났더라면 괜찮았을까.
나도 그런 면에서는 한없이 나약한 인간일 뿐이라서.
점점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되었을 뿐.
솔랭에서 만나는 같은 팀 다섯 명 중에도 이상한 사람이 있는데.
같은 프로게이머나 감독, 코치 사이에는 없을까.
흔히 말하는 비즈니스 우정.
그 이상도, 그 이하의 노력도 하지 않았던 게 언제부터였는지.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 감사합니다. 얘들아. 이번 빅스전 이벤트 들었지?”
피드백 회의가 종료 시간에 맞춰 구단 스탭이 상품을 들고 연습실을 찾았다.
“네!”
“이거, 그날 배포할 사인 유니폼인데. 지금 사인하자. 수량이 많지는 않아. 인당 다섯개 정도.”
“유찬이 너 사인 있어?”
“깍지 형님. 저 누나가 만들어 준 사인 있습니다. 프로 한다고 했더니.”
“와. 좋은 분이네.”
“누나?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셔?”
감독님을 도와 선수들에게 상품을 배분하던 최은호가 관심을 보인다.
“모르겠는데요.”
“그걸 왜 몰라?”
“관심이 없어서.”
“그래..”
더 물어봤자 얻을 게 없을 것 같았는지, 최은호는 눈에 띄게 실망한 표정이었지만 손으로는 야무지게 포장을 뜯고 있었다.
“건아, 사인. 여기.”
그리고 내 앞에 사인할 유니폼을 차근차근 펼쳐준다.
“여기도.”
수십만 번은 더 한 것 같은 사인.
“여기에도.”
사인을.. 하는데.
왠지 좀 많은 것 같다.
“여기 종이에도..”
“은호 형?”
김예성이 도끼눈을 뜨고 다가왔다.
“뭐 하는 거야?”
“아니, 그. 주변에서 좀 받아다 달라길래.. 절대 개인 방송 이벤트 사은품 같은 건 아니다?”
“흠.”
김예성은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좋아. 앞으로 그건 내가 관리할게. 대신, 오늘은 여기까지. 건이 손목 관리해야 해.”
대단히 엄중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그걸 니가 왜 관리해.
“아! 내가 그걸 간과했다. 진짜 미안. 건이 손목 중요하지. 맞아.”
“그리고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팬 분 이름도 쓰면서..”
“그거 진짜 좋다.. 그럼 유니폼 사인은 좀 더 손목에 부담이 가니까..”
“문구는 두 가지 타입으로 고정을..”
둘이 너무 진지하게 협의하는 것 같아서 나는 빠지기로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팀인지.
“얘들아! 그날 협찬해주시는 쏘닉스 관계자분들도 오신대. 회식 있다.”
할 일이 끝나자 감독님은 추가 일정을 공유했다.
“회식요? 소고기?”
“지운이 너는 문어 치킨이 최고라면서.”
“그거 메타 지났어요.”
“지금은 뭔데?”
“소고기 메타.”
“그래서 소고기로 준비했습니다!”
환호가 울려 퍼진다.
“근데 중요한 걸 알아야 한다. 얘들아. 회식 장소가 소고기도 팔고 돼지고기도 팔거든?”
박 감독님은 무게를 잡으면서 우리를 둘러봤다.
“이겼을 때는 우리가 메뉴판에서 소고기를 골라도 되겠지. 하지만 지면?”
“그럼 유찬이한테 주문시켜요.”
“가능.”
“하하, 그래도 어떻게 해야 한다?”
“이긴다!”
“빅스한테 조공을 바치기 싫으면?”
“이긴다!”
“팬 분들에게 선물을 드리고 싶으면?”
“이긴다아아아악!”
“쏘닉스 기둥 뽑아!”
다들 날뛰고 있다.
“건이가 먼저 건 내기를! 우리가! 이기려면!”
“이긴다람쥐썬더!”
“찍! 찌직! 찌지지직!”
“다람쥐 그거 맞아? 시궁쥐 아니야?”
박 감독님도 주먹을 버둥거리며 춤 비슷한 걸 추고 있다.
“건아, 우리 꼭 소고기 먹자.”
그리고, 김예성은 오늘도 조용한 목소리로 내 곁에서 속삭인다.
“그러려면.. 알지?”
“거니, 방금 얘가 뭐라고 했어?”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나는 어쩐지 이런 아무렇지도 않은 평화가.
굉장히 묘하고 간지럽게 느껴져서.
“그래.”
나도 모르게 약속을 해버리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