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불꽃처럼
“야, 얘들아! 와 줘! 우리도 와 줘! 복수 해 줘!”
유니버스가 벌떼처럼 바텀에 모여든다.
“아아아아아아아아! 부쉬 끝자락에 살짝 보였어요! 걸렸다구요!”
“야, 아라! 너! 꼬리 제대로 숨기랬지!”
“꼬리가 너무 길었어요! 아라는 꼬리가 많거든요!”
하지만 급하게 상대와 맞춰 가려는 전략은 손해를 불러온다.
그 전략을 꿰고 있는 권건이 있다면 더욱.
“결국 클래스를 잡긴 했지만 세자 선수까지 잡지는 못했어요! 억까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억까는 억지로 해야 성공할 수 있는 건데 억지로 할 수가 없었어요!”
“그 사이에 FWX가 이득을 와장창 가져갑니다! 지금은 우장창창인가요! 코끼리 유니버스가 우장창창!”
- 똥을 우장창창 싸요!
- 아모른직다..
- 이거 딜 나오나 모르겠는데
- 근데 광역 CC가 많아서 한타 함 터뜨리면 될 듯?
- 아펠 존나 유리몸이니까..
“오늘 유니버스 왜 이렇게 대인배 운영하나요? 이번에는 양보해! 이번에도!”
“엄청나게 휘둘리고 있어요!”
FWX는 주도권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전라인이 압도적인 경기는 아니었다.
탑에서 꾸준히 성장한 최정인의 요른은 점점 더 단단해지고 있었고.
미드에서 김예성의 세라핌을 상대한 이시환의 아라 역시 충분히 제 역할을 해줄 만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바텀이다.
유니버스의 핵심인 바텀 루시언은 여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원거리 딜러에게 올인하는 조합을 한다는 것이 그렇다.
유니버스는 바텀을 칼로 뚫어보고자 했으나.
상대의 극단적인 전략에 한 대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OS는 팀 게임이다.
여전히 한타 한 번이면 경기를 뒤집을 수 있다.
물론 거기에는 킬 뿐만 아니라 오브젝트, 그리고 다음 오브젝트 주도권까지 포함되어야 한다.
유니버스는 바론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상대의 바론을 막거나 빼앗으면서 킬을 수급하고자 했다.
“나 뿔피리 준비 완료.”
“쇼부 함 보자.”
“나 딜이 아예 안 나오는 건 아니거든?”
“CC는 우리가 훨씬 좋아. 다 쓸어버려. 아펠 공중에서 못 내려오게 해!”
“그냥 공중에서 죽여버려!”
서포터 이주원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은찬이 형, 내가 계속 서포트 해 줄 테니까 나만 믿어!”
“어.”
원딜 강은찬은 미드에서 라인을 받아먹으며 계속해서 몸을 양옆으로 털었다.
안전한 지역이었지만, 일종의 손풀기 습관이다.
상대 진영 쪽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맞라인의 곽지운은 고요하게 꼭 필요한 움직임만 보이고 있다.
두 사람은 이렇게나 달랐다.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두 팀의 선수들 역시 곧 다가올 한타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FWX는 한 번쯤 작은 실수를 하더라도 기회가 더 있고.
유니버스에는 없다.
FWX도 마지막 점검에 들어갔다.
“쟤네 궁극기 직선형이야. 쭉 밀고 들어올 테고 나는 무조건 깍지 지킬 거야. 내 궁 깍지한테만 쓸 거다. 나 말했다.”
잘 풀린 왕자님을 지키던 서포터는 의기양양했다.
“이쪽 시야 체크했어?”
“멍!”
“알겠어.”
김예성과 이유찬은 오늘따라 은근히 호흡이 잘 맞았다.
“예성, 상대 직선형 궁극기 피해내면서 반대로 앙코르.”
“할 수 있어.”
“나랑 이유찬이 앞에 서 있을 테니까.”
“그러면 무조건.”
“좋아.”
권건은 또 낮게 웃었다.
그 소리는 고양이가 골골대는 것 같았다.
아니, 다른 동물일까.
곽지운은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누가누가 목소리가 큰지 싸우는 게 아니라.
미리 계획을 세우고 들어가는 전투는 이렇게나 아름답다.
물론 항상 계획은 틀어진다.
그렇다고 계획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그것을 바로 잡아줄 수 있는 역량의 선수들이 있다.
곽지운은 FWX에 있는 동안 숱한 선수들을 만났다.
팀 밖에서도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발이 넓다.
짧디짧은 프로게이머의 삶 속에서.
프로들의 기억에도, 팬들의 기억에도 남지 못한 채 사라진 수많은 선수가 있었다.
곽지운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자신만은 기억해주고 싶었다.
그들은 모두 곽지운의 마음속에서 별이 됐다.
“바로 들어가지 말고 거리 유지.”
깎아지른 듯 날카롭고 어두운 협곡.
별은 보이지 않고, 달의 그림자만 아른거린다.
“우리 왕자! 절대 지켜!”
전투가 다가온다.
곽지운은 자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세팅했다.
“이유찬, 어그로.”
권건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곽지운은 천천히 이 세상에 녹아들어 간다.
세계와 하나가 된 순간.
손에 들린 총을 꽉 움켜쥔다.
나를 유혹하는 가짜 여우가 다가온다.
돌풍 같은 몸놀림으로 피해낸다.
하지만 고요를 깨는 적의 뿔피리 소리.
그리고 재앙처럼 밀려오는 해일.
어리광을 부리던 어린 탑이 용맹하게 앞장서지만, 거대한 파도는 모든 것을 쓸고 지나갈 듯 다가온다.
적의 위협으로 살짝 빠졌던 나, 반대 방향으로 피했던 최은호.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 서로를 향해 빛처럼 다가가고.
안전한 서포터의 품으로 몸을 숨긴다.
가시는 있지만 사실은 상냥한 나의 장미.
서포터.
무서운 재난으로 폐허가 된 자리 위로.
이제는 두 다리로 똑바로 선 미드 라이너가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른다.
“라온, 라온, 라아아아아온! 궁극기! 앙코르!”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바로 이 타이밍.
어쩐지, 보이지 않는 이 노래가 희망처럼 들려서.
서포터의 품을 벗어나 상대 앞에 나선다.
내 앞에는 여전히 든든한 등이 보인다.
산의 외침에도, 해일에도 쓸려나가지 않았던 돌처럼 단단한 사람.
나의 사막여우, 권건.
서로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은.
네가 금세 떠날지도 모른다는 사실만으로도 상처받게 될 나를 떠오르게 하지만.
그래도 이제, 나는 너를 완전히 믿기로 했어.
“완전히 쏠린 유니버스! 빨려 들어갑니다! 권건이, 권건이! 돌아요! 돕니다! 회전격!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위를 올려다보자.
별의 바다에 달이 뜨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 세자.. 세자.. 세자!”
어두웠던 하늘.
달이 가장 높게 떴을 때.
오랫동안 그것을 모아왔던 나는, 쏘아낸다.
달빛이.
쏟아져 내린다.
월광포화.
“아..”
내가 끝까지 놓지 않았던 것.
팀에 대한 신념.
나의 가장 강력한 무기다.
다시 한번.
크게 호흡을 들이키는 순간.
아름다웠던 달빛은 별로 쪼개진다.
나의 하늘을 무수하게 장식했던 수많은 기억과 상처들.
아른아른 빛을 내던 별들이 일시에 화염으로 폭발한다.
협곡은 대낮처럼 밝아진다.
놀라우리만치 밝은 불꽃.
나는 FWX.
Fireworks.
#
곽지운은 이번 경기에서 LKL 1,000킬을 달성했다.
2 세트, 펜타킬을 먹은 순간이었다고 한다.
이르다면 이르고 늦다면 늦다.
원딜은 킬을 많이 가져가는 포지션이기도 하고.
곽지운은 단 한 번도 주전 자리에서 빠진 적이 없으니까.
데뷔 시즌에 최고 킬 수를 기록하고, 점차 줄어들었던 그 숫자는.
나와 함께하면서 급상승해서 결국 여기까지 왔다.
곽지운은 이게 다 내 덕분이라고 했지만.
글쎄.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원딜의 킬 캐치 능력까지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캐리형 정글이란, 있을 수는 있지만 결코 항상 옳은 건 아니다.
가끔은 내가 캐리할지언정.
좋은 팀이라는 건, 모든 포지션에서 캐리가 가능해야 한다.
그게 가장 어려운 거지만.
POM 인터뷰에서 곽지운은 울고 있었다.
고작해야 시즌 중 한 경기에 불과한데.
왜 울고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설마 펜타 먹어서?
뉴타입 펜타무새인가?
아니면 펜타주면 우니까 먹이지 말아야 하는건가?
“정말, 팀원들에게 고맙고. 또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모두 팬 여러분들의 사랑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팬들이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울지 말라고 외치며 환호성을 지른다.
“우리 세자 선수, 다시보기 해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아나운서의 말에 씩씩하게 손등으로 얼굴을 훔친 곽지운이 활짝 웃는다.
“와, 이 장면 보시면 궁극기가 제대로 들어가면서..”
나는 대흉근을 곧게 펴면서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관객석의 절반을 메웠던 유니버스의 팬들은 도망치듯 사라졌다.
트래쉬 토크가 꽤 화제가 됐거든.
곽지운은 FWX의 간판스타답게 팬이 꽤 많은 편이다.
아주 오래된 팬들도 보인다.
꼬박꼬박 자기가 사랑하는 선수의 킬 수를 미리 세면서 준비해 온 치어풀.
- 세자 1,000킬 축하!
종종 웃음이 나오는 문구도 있다.
- FWX는 계란 한 판 사면 스물 아홉개겠네 “한계란 없으니까”
그래도 거래는 투명해야지.
공정거래위원회 분들, 여깁니다.
- 권건을 신고합니다 혼인 신고
신고? 곤란.
그리고..
- 언제나 이 자리에서 응원할게, 나는 언제나 여기에 있었어 세린아
- 오랫동안 기다려왔어 이제 우리의 시대야!
지나가 버린 시즌의 유니폼을 입고 온, 시간 여행자들.
잘나가는 사람이 말하는 역경과 진짜 역경을 겪은 사람이 말하는 역경은 다르다.
곽지운정도라면.. 그래.
역경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그래서 게임 자체가 환해져서, 개안한 것 같다는 표현이 있었어요. 정말 멋진 장면이었죠.”
“아..”
곽지운은 자신이 1,000킬을 달성하는 모습을 보며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FWX 진짜 멋있다..”
끝내 팬과 비슷한 말을 내뱉었다.
뭐야.
니가 한 거잖아요.
아무튼 여기 사람들 다 이상하다니까.
사람을 1,000명 쯤 죽이면 진리를 얻는다고 하던데.
아직 우리 원딜은 멀었나보다.
“다음 주에는 빅스와 오랜만에 만나게 되는데요. 지난번처럼 미드 중심의 플레이 메이킹을 하실 예정인가요, 세자 선수?”
“음.. 그 부분은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기대하실만한 경기력을 준비해 오도록 하겠습니다.”
“네. 좋습니다. 그러면 권건 선수, 다음 상대 빅스에게 한마디 해주신다면요?”
트래쉬 토크로 재미 좀 봤다 이건가.
기대감이 느껴지는 표정이다.
빅스, 그래, 빅스라.
내기에 미친 사람들이지.
“흠.”
마이크를 잡고 작게 목소리를 고른다.
“내기 하나 할까요, 빅스?”
“와! 무슨 내기요? 제가 빅스에 전해드릴게요!”
“진 팀이 이긴 팀에게 조공 바치기.”
“와우.”
아나운서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진다.
자극적인 말에 팬들도 환호한다.
“빅스, 듣고 계신가요? 빅스도 다음 경기 꼭 이겨야겠는걸요!”
너네 이런 거 좋아하잖아.
그치?
그리고 안 받으면 어쩔 건데.
저희가 졌습니다, 이럴 거야?
“좋습니다! 인터뷰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수고해주신 두 선수와 FWX에게 뜨거운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환호 속에서 웃으며 퇴장했다.
“건아, 이거 괜찮은 거야?”
아직 눈가가 빨간 곽지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괜찮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요즘 같은 기세로는 다들 좋아할걸?
“그런가. 하긴..”
곽지운도 박 감독님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니까 맞겠지. 이런 것도 다 해보고. 좋다.”
이때다 싶어 나도 궁금했던 걸 물어봤다.
이거 진짜 궁금했거든.
“근데, 점수 몇 점이었어요?”
“어?”
“뭐더라. 왕 포인트.”
“아! 그거.”
곽지운이 얼굴이 구겨질 정도로 웃었다.
“아하핫! 당연히 100점이었지!”
“그럼 됐어요.”
“근데.”
뒤를 쫓아오던 곽지운이 갑자기 내 소매를 잡았다.
“음..”
그리고 뭔가 물어보고 싶은 표정을 짓다가.
“아니다, 됐다. 그거 알지.”
“뭘요?”
“우린 함께야.”
너무 느닷없는 말이라서.
“네. 함께요.”
나도 별 생각 없이 대답했을 뿐인데.
“얼른 가자. 오늘도 피카츄 돈가스 사줄까?”
주장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