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어린 왕자
특정 선수나 픽이 껄끄러울 때 사용하는 전략이 있다.
바로, 싸워주지 않는거다.
예를 들어 탑에서 배인을 만났을 때.
나의 픽이 근접 챔피언이라면.
굳이 상대가 원하는대로 맞딜을 해 줄 필요가 있을까?
없다.
그럴 땐 정글을 부르면 된다.
정글은 그래서 있는 거니까.
어쨌든.
이런 ‘외면하기’.
외면하기는 상당히 유용한 전술이다.
이 전략이 소극적일 때는 그저 정글을 기다리는 것이 되겠으나.
적극적이 된다면 그게 로밍이 된다.
내가 상대보다 라인을 미는 속도가 빨라도 로밍이 되고.
상대와 싸울 필요가 없다면, 때론 다른 라인으로 잠시 투자해서 이득을 보고 돌아오는 것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아주 극단적으로는.
솔랭에서 유행했던 탑 쟌나같은 것들이 그렇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기만해도 승률은 올라간다.
이런 이야기를 왜 했냐면.
라이너는 판단에 따라 라인을 버릴 수도 있다는 거다.
그런데.
여기서 예외가 있다.
바로, 정글.
“권건, 권건, 권건! 요공!”
“또, 또, 또오오오오! 이번에도?!”
“이거 생각보다 일찍 왔어요!”
“루시언이 재미 좀 본다고 딜교하는 순간! 뒤에서 등장!”
“세자! 세자! 과감한 앞 점멸 갱 호응! 정확하게 중력포로 상대 발을 묶어냅니다!”
정글은.
상대하기 싫다고 해서, 만나기 싫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돌아다니니까.
안녕, 강은찬.
또 만나서 반가워.
내가 보고 싶었다면서?
“심연 잠수! 연계되면서! 이거.. 잡힐 것 같은데요?”
날 기다리고 있었니?
집착하는 사람은 별론데.
아, 일그러진 표정이 보이는 것 같다.
옛정이 있으니 봐주고 싶지만, 우리 왕자님이 앞 점멸 호응까지 하는데.
어떻게 봐줄 수가 있겠어.
“끈질기게 추격! 점멸로 타워 안까지 도망가보지만! 결국 권건 선수가 깔끔하게 마지막 타격을 가하고 점멸로 빠져나옵니다!”
마음이 아프니까 얼른 집으로 보내주자.
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는 없다.
“이번에도! 또다시! 바텀에서 선취점을 가져가면서! 경기 시원하게 시작합니다!”
잠깐 양말이라도 벗고 쉬다가 와라.
- 왜 또 저래.. 왜 또 저래.. 분명히 바텀도 우리가 더 센 거 아니었어?
- 손발 존나 잘 맞네;;
- 아ㅋㅋㅋ 진짜 킬샷 이 새끼 입만 털지 말라고ㅠㅠㅠㅠ
- 허공에 공포탄만 존나 날리네ㄷㄷㄷㄷ
- 왤캐 감성적으로 게임하냐고 ㅆㅂ 그럴 거면 다른 게임을 해
- 세자가 세자나~ ^오^
- 루냐미 상대법 : 칼뭄무를 하세요(X) 정글을 부르세요(O)
- 정글(X) 권건을 부르세요(O)
“그 틈에 론도 선수는 재빨리 카운터 정글링으로 이득을 봤죠.”
“그렇습니다. 지나간 건 지나간 거고, 이렇게 꾸준히 챙겨야 해요. 유니버스 바텀이 불안해지긴 했지만 아펠 역시 점멸이 빠진 건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상대 정글의 움직임을 훑는다.
도망칠 곳이 없으니, 어떻게든 내 것을 빼앗았을 것이다.
“현재 왕자님 즉위 0.5 스택!”
최은호의 중계.
흠, 어시라서 0.5?
당연히 못 잡는 것보다는 낫다.
어쩔 수 없지.
내가 좀 더 열심히 해서 우리 왕자님을 키워주는 수밖에.
후계자 구도를 굳히는 방법은 금권을 쥐여주는 것만이 아니다.
지지 세력을 키우는 것도 역시 한 가지 방법이다.
미드 방향.
상대는 나보다 레벨이 하나 더 높은 상태.
이제 어떻게 하고 싶을까.
“예성, 여기 부쉬 내려와 줄래?”
이건 왕자님께는 비밀인데.
사실 퍼블은 좀 달다.
퍼블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건아. 싸움?”
여기는 협곡의 열매가 열리는 곳.
아아, 요공의 무릉도원인가.
그러고 보니 나는 복숭아는 좀 좋아하는 편이다.
이제 복숭아 시즌이다.
“어. 여기 적 정글 대기하고 있을 거야.”
딱딱한 복숭아와 물렁한 복숭아.
딱복과 물복.
나는 물복파였는데.
릴리 덕분에 이런저런 과일을 접하다 보니 릴리는 딱복파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생각보다 딱복이 맛있다는 것도.
“어어어어? 이거, 여기, 뽀비 숨어있는 거 핑 찍혀요?”
“뭐죠? 뭐죠! 미드, 미드 용 쪽 방향! 미드 정글 2 대 2 교전!”
“두 팀 모두 궁극기 없는 상황! 정글 1레벨 차이로 싸움 걸어보는데..어어어?”
근데, 어느 쪽이 맛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둘 다 먹으면 되는 거다.
“요공, 마치 부쉬 안이 보이는 것처럼 반응해서!”
어이, 딱복.
“아아아니! 론도 선수?! 벽꿍하신 건 제 분신입니다만, 망치를 어디로 휘두르시는 거죠?! 순간적으로 론도 선수 스킬 다 빠졌어요! 이거 완전히 속았어요! 완전히! 먼저 노린다고 생각했는데! 노리던 것은 FWX! 뒤통수 제대로 맞았어요 이거!”
“이거 시야가 없는 거 체크하고 숨었던 건데! 이걸 어떻게 반응한 거죠! 말이 안 돼요! 아, 렌즈 미리 돌리지 말 걸! 아니, 그냥 싸움을 걸지 말걸!”
니가 버린 요공이 어때?
이제 좀 좋아 보여?
실력 좀 기르고 다시 와라.
“아라 스킬 피해내면서! 세라핌의 완벽한 호응! 이거, 세상 여유 있게 뽀비를 처치합니다!”
“킬은 또다시 요공이 가져갑니다! 아라는 아무것도 못 하고 빠져요!”
- 론도 시발..
- 오와리다.. 권건 반응 속도 실화냐..
- 권건 쟤만 만나면 정글러들이 다 개병신이댐..
- 론도야.. 분신 때리는 게.. 최선이었냐..
- 스트레스 해소할 게 필요하면 인형을 하나 사 ㅆㅂ..
- 론도 존나 노히트 노런이었네ㅋㅋㅋ 못 때리고 못 도망감ㅋ 씨바..알..
“현재 왕자님 즉위 0.75 스택!”
아, 짜다 짜.
“은호 형, 그거 몇 스택 쌓여야 하는 거예요?”
김예성이 조심스럽게 물어보고.
“원딜 킬 당 1점씩 해서..”
최은호가 진지하게 대답한다.
“5점 이상 되면 좀 안정적일 것 같은데.”
와.
왕이 되는 게 이렇게 어렵다.
“참고로 전령은 1점이야.”
최은호가 새침한 말투로 덧붙였다.
참 나, 그런 게 어딨어.
바텀이 이렇게 까칠한 라인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컨셉이니까.
자, 버스터 콜을 발동할 시간이다.
“이유찬.”
“멍! 싹둑싹둑! 멍!”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되는 그 이름.
“가자.”
찢으러.
#
곽지운은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래.
권건을 만나고 나서야, 게임다운 게임을 하고 있었다.
원딜은 중압감이 심한 포지션이다.
초반에 죽는 것은 사고다.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원딜의 중요성은 점점 커져가서.
그야말로 원딜 하나만으로도 게임의 승패가 결정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빡겜.
무호흡 딜링.
살아있는 넥서스.
그야말로 원딜에게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한번 끊기면 게임이 끝난다는 긴장감.
곽지운은 자신이 수다를 떨면서는 경기에 집중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담과 긴장에 몸이 얽매인 어느 순간부터 그랬다.
더, 더, 더.
더 나를 몰아쳐야만 이길 수 있다.
항상 속으로만 외쳤다.
여기 원딜 있어요.
여기 우리 팀이 있어요.
여기, FWX에 언제나 내가 있어요.
그래도 요즘은 입을 열 수 있다.
정글에게 노 리쉬라는 말을 들어본 게 얼마 만인지.
내가 열심히 컸는데도 메이킹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진 숫자가 몇이나 되던가.
내가 발로 뛰었는데도 호응이 되지 않아서 진 숫자가 몇이나 되던가.
올해 김예성이 팀에 들어왔을 때.
사실 조금 기대했었다.
준우승 출신의 미드 라이너.
하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김예성은 괜찮은 아이였지만 어딘가 붕 떠 보였다.
그리고 또다시 몰아닥친 스프링 시즌 초의 공격적인 탑 메타는 문봉구를 꺾어놨고.
감각파 정글러 윤도형은 메타 적응이 느려 허우적거렸다.
FWX.
LKL을 처음 알았을 때부터 선망했던 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선수가 있었던 팀.
내 삶의 전부.
권건이 들어왔을 때, 너무 많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기대란 부담을 주기 마련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리고 권건이 활약을 시작하면서.
솔직히 의심했다.
스스로의 실력을 몰랐을 리가 없다.
이런 선수가 왜 여기에 왔을까.
내 팀이라고 해서 객관화가 안 되는 건 아니다.
그리고 그 답은.
권건이 던져놓았던 중국어책을 보고 알았다.
아, 얘도 결국 우리 팀을 징검다리로 이용할 뿐이구나.
곽지운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남들이 보지 못하게 책을 옷 아래쪽으로 숨겨뒀다.
남들에게 권건이 오해받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잠시라도 여길 선택해줬다는 마음이 기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에서.
이별을 선택지로 두지 않는 사람은 항상 결국 이별을 통보받기 마련이니까.
이건 정말 끔찍하고 마음 아픈 일이다.
그런데..
“왕자님.”
“지운이 형.”
“멍멍.”
여기에.
모두가 와있다.
이상한 나라에서 온 개 같은 탑 이유찬도.
이제는 여기에 마음을 붙인 것 같은 미드 김예성도.
그리고, 권건까지도.
“드시죠.”
이렇게, 이렇게 자꾸만.
자꾸만 내가 이 팀이 이대로 계속 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게 만들면.
나는 너무.
너무 고맙고, 또 고마워서..
#
“FWX의 바텀 5인 다이브!”
“이거 미친 거 아니에요?! 이러면 뭘 어떡하란 말이에요! 아무리! 루시언과 냐미가 최고의 커플이라고 해도! 이건 선 넘은 거잖아요! 여기가 어디라고 탑이 와요! 어디라고! 아직 시간은 오후도 안 됐단 말이에요!”
“사실 둘이 정식 커플은 아닙니다. 자, 약속대로 바텀으로 모여! 이거 절대 충동적인 게 아니었죠.”
“혹시 살 수 있나요? 혹시? 적은 많아봤자 다섯 명이거든요?”
- 옘뱅ㅋㅋㅋㅋㅋ
- 많아봤자 다섯 명 ㅇㅈㄹ
- 뭔데 팀플 ㅈ되네;;
- 아니 우리 팀 애들은 머하냐고;;;
- 타이밍 감쪽같긴 하네
- 바텀에 원수졌냐고ㅆㅂ
- 트래쉬 토크 효과 본 거 아님?
- 이게 효과냐? 존나 독약이었고
“아니, 뭐 이딴 게임이 다 있어요! 솔직히 유니버스 바텀에는 귀책 사유가 없어요! 그냥 너무 열받아요! 유니버스 바텀 듀오, 끝까지 몸부림쳐보지만! 도저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킬도 깔끔하게 세자 선수의 아펠이 몰아서 가져갑니다! 오늘 FWX 정말 대단한데요! 평소와 완전히 다르고 과감한 전략입니다! 라인 비우는 걸 좋아하지 않는 팀이거든요!”
FWX가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해가면서까지 바텀을 압박했지만.
섬세한 조율이 들어가면서 계산서는 묘한 상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팀원들의 총출동 응원에 기운이라도 난 것처럼.
“FWX 바텀 듀오! 성공적으로 라인 솔로킬, 냐미를 잡아냅니다!”
“라인 교전을 선호하지 않는 세자 선수가 앞으로 나서서 싸움을 걸었죠! 어, 그런데! 이 타이밍?! 설마, 설마!”
“아펠의 ‘그’ 무기인가요! 이러면 전령이 따로 필요가 없어요! 루시언 밀어내고 포탑을 갈아버립니다!”
“지금 권건의 요공이 눈을 흉흉하게 뜨고 있거든요!”
즉위 스택은 5점을 향해 달려 나간다.
“전령은 양보한 FWX, 대신 드래곤을 꾸준하게 챙겼습니다!”
“이거 되게 강팀식 운영이죠? 전령 양보할게. 대신 그동안 우리는 그 이상의 이득을 낼 거야!”
이유찬이 특별히 솔로킬을 내거나 당하는 이슈도 없고.
김예성이 미드에 전령 박치기를 당하는 정도의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권건 선수가 방금 교전에서 에프랑 선수의 냐미를 다시 한번 잡아내면서! 100킬을 달성합니다!”
“한 시즌.. 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사실 이 선수 입장에서는 채 한 시즌을 뛴 것도 아닌데! 벌써! 정글러가 그렇게 킬을 많이 먹을 수 있는 포지션이 아니거든요? 최단기간 아닌가요, 이거!”
선수들이 모르는 사이 권건이 100킬을 달성하고.
그런 권건의 영향력 아래, 바텀은 꾸준히 거대해져 간다.
“건아, 너 뭐 한 거야?”
“연기.”
“역시 건이..”
뻔뻔하게 적들 사이에서 분신인 척 연기하며 살짝 각을 노린 권건과 별걸 다 감탄하는 김예성.
곽지운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건아.”
“네.”
하지만 평소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점점 알 것 같다.
집요하게 바텀을 노린 이유를.
1세트를 거쳐, 2세트까지 점점 선명하게 이유가 드러난다.
때로는 백 마디의 말보다 한가지 행동이 더 그 사람을 잘 보여줄 때가 있다.
곽지운이 봤을 때.
권건은 실력도 대단하고 아주 어른스러워 보이지만.
무슨 일을 겪은 건지 감정을 많이 숨기고 마음의 벽이 높다.
이 벽을 우리 팀이 뚫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지금 당장은 권건도 강은찬이 한 말에 대해서.
나와 똑같이 분노하고 있다는 것.
그래.
아직 나는 너를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3레벨 타이밍에 갱을 온다면.
나는 1레벨부터 행복할 거야.
지금은 그거면 됐어.
말 못하는 원딜, 아펠은 조용히 웃고만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지막 한타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