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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98화 (99/326)

98화. 심해

“저게, 저렇게 되나..? 와..씨.”

“그게.. 마지막에는 요공이 부쉬에서 안보이는 상태였을텐데.”

최 코치는 옵저빙 모니터 좌측에서 전 장면을 다시 확인했다.

선수들 간의 대화로 봤을 때.

분명히, 알고 당해줬다.

등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1레벨 스펠 교환부터 시작해서 밀려나는 것처럼 보였던 것.

그리고 극적인 권건의 등장까지.

초반 혼전 상황, 풀 스펠이 빠지고 체력이 완벽하지 않았던 상황.

계산 자체가 쉽지는 않았지만 서로 할 말이 있다.

상대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정글러를 믿고 앞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그걸 막아내면서 역갱을 성공시켰다.

아군 원딜이 먼저 죽었다면 상대 원딜을 잡아냈더라도 손해다.

라인도 박혔을테고.

그런데.

여기까지가 모두 설계였다고?

하자고 한 권건이나.

그걸 한 곽지운이나.

“우리 애들.. 무섭게 게임하네..”

원딜의 스펠은 소중하다.

챔피언마다 다르지만, 미포같은 뚜벅이 챔피언의 경우는 더 그렇다.

“이걸.. 이걸 어떻게 안 할 수가 있겠어요.”

“죄가 있다면 요공이 점멸을 아낀 죄겠죠.”

윤도형이 냉정하게 평가했다.

“건이를 상대로 저렇게 말랑말랑하게 하면 안돼요. 이득을 단 한 번이라도 보려면 모든 걸 쏟아 부었어야 했어요.”

어쩌면 윤도형만이 유일하게 권건에 대해서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모든 걸 다 지켜보면서 배우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이길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윤도형은 잠시 눈을 감고 아찔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같은 정글인 제 판단으로는.”

무서운 놈.

절대 상대로 만나고 싶지 않다.

“오늘 건이 존나 빡쳐있어요.”

특히 화가 났을 때는.

#

“탑에서 6레벨 찍자마자! 서로 싸웁니다!”

“어어어어어어어! 써머의 그윈! 차니의 피요라!”

음?

고요하던 탑이 어느새 싸우고 있다.

보아하니, 상대가 먼저 싸움을 건 것 같다.

나는 바텀을 든든하게 봐주다가 미드에서 점멸을 한 번 빼주고, 이제는 상대 정글을 쫓으며 게릴라 데이트를 하고 있다.

우리 모범생 김예성은 수도 없이 몰아친 코르기의 패치에도 불구하고 지금 버전에서의 장단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기에.

약간의 도움만으로도 든든하게 성장해주고 있다.

그리고.

“솔-로-킬!”

“써머 선수가 LKL의 무서운 맛을 보여줍니다! 싹둑싹둑! 싹둑싹둑! 어떻게 잘라드릴까요! 별 모양으로 잘라주세요!”

“날렵하게 응수 피하면서! 그대로! 멋진 솔로킬을 가져갑니다, 써머 선수! 역시, 최고의 탑솔러가 누구냐는 논쟁에서 빠지지 않는 선수!”

“분하다! 분해! 차니 선수 지금 분합니다! 진짜 칼 끝이 닿이기만 했으면 이기는 건데! 팔이 짧았어요!”

- ㅋㅋㅋㅋㅋㅋㅋㅋ

- 씨게 한 대 맞았죠?

- 흔들리는 탑들 속에서~ 써머향이 느껴진거야

- 어이 “신고식” 함 하자ㅋㅋㅋㅋㅋ

- ??? : 이 새낀 뭔데 꼴랑 해머스 솔로킬 했다고 깝쳐요?ㅋㅋㅋㅋ

우리 탑은 솔로킬을 당했다.

“뭐야.”

“점화.. 점화..!”

이유찬은 눈을 더 크게 뜰 수 없을만큼 크게 뜨고 있었다.

소소한 사고.

우리는 예전처럼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다.

이미 바텀이 상당히 기울었거든.

그래도, 역시 배에 태울 검사는 삼도류정도는 되어야하는 것인가..

“괜찮아, 우리가 캐리할게.”

최은호가 황급히 달랬지만.

“풋내기.”

김예성의 한 마디가 더 효과가 좋았다.

“탑에 아무도 오지마! 남자의 싸움이다!”

어디서 한 번 들어본 말인 것 같은데.

이번에는 진짜 오지 말라는 말인 것 같으니까 신경 안 쓰기로 했다.

이게 하드 트레이닝이지.

“용 갑니다.”

초반 기세를 이용해 라인전을 완전히 밀어붙인 바텀.

내가 본 곽지운은 꾸준한 성장으로 힘을 보여주는 타입이었다.

상대의 심리전이나 도발에 잘 넘어가지 않으며.

라인 솔로킬을 노리기 위한 무리한 움직임도 없다.

그야말로 안전 제일 클래식.

하지만 얼마전부터는 조금씩 스크림에서 곽지운이 자신의 플레이를 보여주는 것을 보고.

이 역시 오랜 기간동안 약팀에서 메이킹, 앞라인이 없어 고통받던 원딜의 비애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신인 시절부터 비원딜, 원딜 챔피언은 물론 인파이터, 아웃복서의 역할의 전환도 다양하게 가능했던 선수.

그 때 그 폼이 지금과 똑같지는 않겠지만.

경험이라는 것은 어디로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래서, 당연히.

“FWX에서 용을 차지합니다!”

“오늘 두 팀 상당히 바텀 중심으로 게임을 하고 있어요! 권건 선수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가 카운터 정글링인데. 오늘은 론도 선수의 숨통이 좀 트여있습니다?”

“네! 오브젝트 주도권은 없었지만 그래도 써머 선수가 탑 쪽 주도권을 가져주면서, 꾸준히 힘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죠!”

그리고 전령 쪽으로 시선이 갈 때 쯤.

“어어어어어어!”

“또, 또! 탑, 탑, 탑! 탑 또 다시 일대일! 이번에는 차니 선수가!”

“으아아아아! 솔-로-킬!”

“눈 마주치자마자, 시선이 교차하자마자! 어? 너 혼자야? 너두? 그럼 알지?”

“써머! 너! 나와! 나랑 한 판 다시 붙어! 리벤지! 리매치! 너만 돌격 있어? 나도 있어!”

“선배님! 선배님이 뭐, 최강이요? 이제는 제가 그 자리 가져가겠습니다!”

“이번 응수 심리전에서는 확실하게 이겼어요! 옆으로 콕! 콕! 약점 공략! 진짜 예술입니다! 가슴이 웅장해집니다! 차니 선수가 스스로 따서 갚았어요!”

“써머 선수 최고의 장점이자 단점이 싸움을 절대 피하지 않는다는 거거든요! 이번에는 한 대 얻어 맞았습니다!”

- 저는 오늘부터 따갚좌 차니맘입니다

- 특이점이 온 탑ㅋㅋㅋㅋ

- 이번 시즌 탑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만하지 않냐?

- 거 너무 넉넉한거 아니여?ㅋㅋㅋㅋ

- 팬시vs차니.. FWX 탑 주전 경쟁은 대체..??

- ??? : 야 서열 정리 다시 해봐ㅋㅋㅋㅋㅋ 넌 똥이나 굴려

이번에는 우리 신참이 킬을 가져온다.

“봤지.”

당당한 이유찬에.

“잘했어.”

곽지운이 웃음을 터뜨리며 오랜만에 웃었다.

이제 이 사람의 스위치를 좀 알 것 같기도 하다.

“또 싸울 예정이야?”

“이제 서로 동점이니까 또 싸워야지.”

이유찬의 자신감에 어이가 없다.

그래, 뭐.

잃고 땄으니 다시 한 번 해 볼만 하다.

“내가 한 번만 더 쟤 점화있는 타이밍에 싸우면 개다, 개.”

이유찬은 야무지게 물음표 인장을 띄우며 도발 모션을 취하고 있었다.

아까 최정인도 했었나?

둘만의 세계니까 그대로 두도록 하자.

“나이스 타이밍! FWX가 전령을 챙겨갑니다!”

“그렇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전투였지만 FWX가 판정승을 거둡니다!”

그리고 전령을 우리 미드에게 풀어주고.

“고마워. 역시 저 풋내기보다는..”

김예성이 다분히 이유찬을 놀리는 말을 꺼냈지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고 더는 장난치지 않았다.

어차피 팀에서 맡은 역할이 있으니까.

자, 계속 가보자.

#

강은찬은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애썼다.

그래, 권건 때문이다.

분명히 죽일 각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곽지운은 멍청하게 앞으로 나왔을 뿐이고.

권건이 그걸 커버해줄만큼 엄청난 정글인 것 뿐이다.

그러니까 절대, 절대 자신감을 잃을 필요는 없다.

나도 잘하는 원딜이니까.

그냥 정글 차이다.

“도율이 형. 나 이제 킬 먹어야 돼. 패시브 터뜨려야 풀려.”

“잠깐만, 지금 이 캠프 먹어둬야만..”

상대 정글에 쫄아있는 꼴이라니.

“시환아. 바텀 로밍 가능해?”

“음, 지금은, 음, 자리 비우면 미드 나가서.”

좀 친다고 했던 미드도 저런다.

뭐, 라온?

걔 빅스에서 잘렸던 애 아니야.

저것도 권건이 미드에 전령 풀어서겠지.

“쉣. 내가 한 번만 더 나 점화 없는 타이밍에 싸우면 개다, 개.”

믿을만했던 탑도 신입한테 따이고 있다.

기가 찬다.

탑이란.

스킬샷이나 챔피언 상성 이야기보다는 상대 스펠 하나를 승패의 요인으로 말하는 놈들이다.

섬세한 원딜의 마음을 읽을 리가 없다.

“하. 쟤네 바텀 진짜 좆밥이란 말이야.”

오늘따라 자꾸만 예민해진다.

“은찬이 형. 나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강은찬이 투덜거리자 옆에서 서포터 이주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꽤 나쁘지 않은 서포터다.

비위도 잘 맞추고, 재밌는 조합 짜기도 좋다.

“형은 왜 이렇게 FWX 바텀을 싫어해? 특히 지운이 형.”

“뭐?”

“아니, 세자 선수.”

“몰라도 돼. 집중이나 해.”

“알겠어. 내가 꼭 킬 먹여줄게. 알지? 각 나오면 나한테 킬 줘.”

“퍄이크.. 그래.”

못마땅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모를 이 이야기를,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을까.

데뷔하던 시절.

가장 큰 벽으로 느꼈던 상대가 곽지운이라는 걸.

그 때의 곽지운은 당대 최고의 유망주였다.

퓨처스 리그에서 펜타킬을 밥 먹듯이 내고.

팀이 망하더라도 혼자서 꾸역꾸역 멱살승을 챙겨오는 원딜러.

메타 덕도 있었겠지만, 그야말로 가장 빛이 나는 왕자님.

따라다니는 별명은 ‘왕이 될 상’, 세자.

수많은 팀이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지만, 곽지운은 끝내 자신이 FWX의 광팬이라며 FWX에서 그대로 1군행을 결정했다.

그래.

그렇게 퓨처스 리그에서 어깨를 비비던 두 사람은 1군에서 다시 만났다.

여전히 구도는 같았다.

그 당시 강은찬이 있었던 팀은 FWX를 이길 수 없었고.

서포터가 있건 없건 여전히 곽지운에게 두들겨 맞았다.

한계를 느낀 강은찬이 유럽에서 뼈를 깎는 수련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FWX의 몰락으로 두 사람의 위치는 바뀌어있었다.

“용, 용 챙기자. 두 번째 용은 양보하면 안돼. 쟤네 용 가져가면 주도권 너무 강해.”

“오케이, 싸움 보자. 내가 어떻게든 폭탄 배송은 빼볼게.”

“뽀비 궁 조심하고!”

“나 잘 지켜.”

강은찬은 짜증났다.

멍청하게 하위권 팀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꼴 좀 보라지.

이적을 하지 않으면 바보가 되는 곳이다.

프로게이머의 가치는 잔인할만큼 빠르게 떨어지니까.

곽지운도 예전같지는 않다.

곽지운을 따라다니던 최고의 신인이라는 말은.

캐리형 우승권 원딜이라는 말로 바뀌고.

그 말은 한 해, 두 해를 지나 동체원이라는 평가로 격하됐다.

그리고 지난 시즌 초.

여전히 폼이 크게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팀의 순위가 낮은 그에게는 더이상 선수명인 ‘세자’말고 다른 평가가 붙지 않았다.

하늘에 있던 곽지운은 심해에 가라앉았다.

이 얼마나 초라한가.

그러니까.

나도 너를 이길 거다.

계속해서 이길 거다.

어떻게든 짓밟고, 위로 올라갈 거다.

절대 너 따위에 얽매이지 않을 거다.

나는 최고가 될 거니까.

“일단 용 뺏어볼게!”

주도권을 내 줄 생각이 없는 두 팀이 모두 모였다.

점차 엉켜들어간다.

“노틸 노플!”

“피요라 위치만 잘 봐! 한타에선 내가 더 영향력 있어!”

순식간에 싸움이 커지고.

“나 스틸 실패! 권건 조심해!”

“싸움 봐! 싸움 봐! 괜찮아! 라온 폭탄 배송은 빼놨어!”

용이 사라진 자리.

서로의 집중된 스킬 교환이 일어난다.

“아자르, 아자르! 올라 선수의 아자르가 미포를 향해 들어갑니다!”

“미포 위치 선정 좋아요! 세자 선수, 살짝 흘려내면서!”

“굉장한 혼전! 피요라, 달려들어요!”

“코르기, 그윈! 서로 드리블!”

“요공, 뛰어들어갑니다!”

“정확하게 응수!”

“권건, 권건, 권건! 뽀비! 기가 막힌 각! 위기에요! 위기에요, 유니버스! 드래이븐!”

각각의 상대에게 시선을 빼앗기는 전장.

괴물이 다가와서.

또다시 강은찬의 멱살을 낚아채 벽에 꽂아넣는다.

“권건..!”

강은찬은 아찔한 느낌을 받았다.

언제 들었던 기분인지 알고 있다.

- 바다의 생명력이 충만합니다!

벌써 몇 년 전.

라인에서 곽지운을 마주했을 때와 같다.

현실의 내가 맞는 것도 아닌데 숨통이 조여들어오는 느낌.

눈을 실제로 마주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목숨을 위협당하는 느낌.

왜, 어째서?

다가오는 용을 예고하면서 협곡의 지형이 변하기 시작한다.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온 몸이 비로 젖어들어간다.

쿠궁쿠궁, 쿠궁.

천둥 소리인가.

“노틸..”

아니다.

물 속에서 폭뢰가 다가온다.

그리고 그 위로.

또 다른 비가 쏟아진다.

비와 함께 내리는, 무수하게 난사된 총알.

불릿 타임.

“곽.. 지운..”

분명히 내가 위였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다시 멀어진다.

오도가도 할 수 없는 여기서.

그나마 눈 앞에 있는 것은.

그래도 끝까지 나를 지키려고 했던 서포터.

비가, 비가 내려.

비가 내리고 또 내려서.

몸이 잠겨들어간다.

어느새.

이곳은 바다였다.

이곳이 바다인줄도 모르고 싸웠던 유니버스는.

회색으로 어두워진 깊은 심해에 가라앉고 있었다.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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