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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97화 (98/326)

97화. 출항

유니버스는 스프링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를 권건이 있는 FWX와 치뤘다.

트래쉬 토크에서 킬샷, 강은찬이 말한 것처럼 바텀 차이가 아주 심했던 건 아니다.

도발은 과장되기 마련이니까.

라인전 중 최은호의 실수가 몇 번 나왔고.

상대가 자신있어하는 챔피언을 건네주면서 CS 차이가 조금 벌어졌던 적은 있지만.

결국 2:1로 매치 승은 FWX가 가져갔다.

다만.

FWX가 패배했던 세트에서 유니버스가 사용했던 서포터는 섀코.

트리키한 서포터 에프랑이 꺼내든, 리그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 픽.

유니버스는 플옵 진출이 확정된 상황이었기에 한 새로운 시도이긴 했지만.

서포터 간의 심리전에서 꼬이면서 게임은 완전히 붕괴됐다.

“야. 너네 왜 시즌 초부터 트래쉬 토크를 그렇게 세게 했어? 권건 저거 표정 봤어? 쟤 자리에 앉을 때 나 노려보는 거 봤냐고! 쟤 존나 빡쳤잖아!”

유니버스 정글러 진도율이 손으로 얼굴을 마구 비볐다.

이 괴로운 마음을 라이너들은 모른다.

우매한 것들.

“쟤가 너를 왜 봐. 날 본 거겠지. 권건이 나 좀 좋아하거든.”

탑 최정인이 느긋하게 진도율의 등을 두드렸다.

“니 쟤랑 실제로 대화한 적도 없잖아.”

“야, 꼭 대화를 해봐야 아냐? 쟤는 그냥 나랑 운명이라니까.”

“나 섭섭해지려고 한다? 나도 정글인데?”

“야야, 도율아. 들어봐.”

진도율은 최정인을 전형적인 탑신병자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의외로 지능적인 타입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리그에서 오래 구른 늙은 사자.

“너 폴리 걔 요즘 점수 봤어?”

“그게 누구?”

“FWX 정글 있잖아. 권건 말고.”

“아. 퍼즈 이슈 걔?”

“어어. 걔 실력 엄청 늘어난 거 봤지. 내가 분석관님 데이터 봤는데, 걔 평점 엄청 좋아졌거든?”

“근데.”

“봐봐. 더블 스쿼드를 해서 권건은 육식형을 하고 저는 초식형을 하고. 교체 출전. 어?”

“미친. 무슨 말 하나 했다. 너 인성 존나 쓰레기야.”

“더 들어봐봐. 엄청난 장점이 있어.”

“뭐?”

“이제 리그에서 권건을 안 만날 수 있어.”

“오..”

“오, 는 무슨.”

경기를 준비하던 유니버스 코치 원대한이 두 선수의 어깨를 꽉 잡았다.

“그리고 트래쉬 토크를 시즌 초에 세게 하지, 언제 또 세게 하겠어.”

“그건 그래요.”

“그래, 뭐. 정인아. 나쁘지 않아. 걔랑 친하게 지내둬라.”

원 코치는 권건에 대해 언급을 아끼면서도 최정인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최정인은 은근히 정치에 밝다.

권건도 FWX보다는 유니버스에 있을 때 날개를 펼치기 좋을거다.

항상 좋은 선수를 찾기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는 유니버스.

굳이 처음부터 키워낼 필요는 없다.

데려오면 되니까.

선수가 팀에 대한 어필정도는 할 수도 있지.

거기다 뭐, 팀 관계자가 아니라 선수 간의 사적인 관계에서 오간 ‘같이 게임하고 싶다’ 정도야.

템퍼링도 아니다.

최정인은 어디까지가 허용되는지 아주 잘 아는 똑똑한 선수다.

미드 이시환도 그런 식으로 데려왔으니까.

“야. 정인. 내가 더 좋은 생각이 났다.”

“뭔데.”

“내가 정글에서 탑으로 포변을 할게. 그리고 니가 서브 정글 해라.”

“꺼져.”

“너도 꺼져.”

탑 라이너의 평균 수명과 전성기 기간은 다른 라인보다 길다.

하지만 정글은 그렇지 않다.

슬슬 유니버스의 정글러 세대 교체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미래를 대비해야한다.

권건, 벌써부터 욕심나는 선수다.

“얘들아, 장비 다 설치했으면 테스트부터 시작하자.”

원 코치는 다시 한 번 최정인의 어깨를 두드리고 전략 분석관을 향해 걸어갔다.

#

“오늘의 두 번째 매치업! 많은 분들이 기다려오신! 대구 유니버스 대 대전 FWX의 경기!”

“사실 두 팀의 경기, 지난 번. 그러니까 스프링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 굉장히 재밌었거든요!”

“네에! 그렇습니다. 경기가 상당히 길어지기도 했고 재밌는 픽도 대거 등장하면서 두 팀이 다시 만날 날이 기대된다는 평가가 있었죠!”

“하지만 운명은 두 팀을 갈라놨습니다. 한 팀은 플레이 오프에 진출했고, 한 팀은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아! 어째서 함께 할 수 없었나요! 어째서!”

“그래서, 약 3개월의 시간을 지나! 두 팀이 마주합니다!”

“블루 진영에 대구 유니버스! 레드 진영에서 대전 FWX가 시작합니다!”

- 왜 자꾸 라이벌 구도 만드냐ㅋㅋㅋ

- 대 유니버스한테 FWX 비비는 거 좀 웃김ㅋㅋㅋ

- 지금 FWX가 1등임

- ;; 그렇게 따지면 우리도 1등임

- 아직 첫 주도 안 끝났는데 그게 의미있음?

- 얘넨 처음인가보지ㅋㅋㅋ

- 그러니까 누가 진짜 1등인지 자웅을 겨루자

- 골때리네ㅋㅋㅋㅋㅋㅋㅋ 응 바텀 차이ㅋㅋㅋㅋ

첫번째 세트.

“아하.”

“원딜 밴을 쭉 해나가시겠다?”

유니버스는 FWX를 공략하는 방법으로.

답이 없는 정글이나 미드, 아직 불확실한 탑보다는.

과감하게 바텀 밴을 선택했다.

“그래, 분명 또 이상한 거 준비해올 줄 알았다.”

“그거겠네요.”

예상한 바다.

감코진도 집중력을 발휘했다.

“두 팀, 서로 바텀 방향 밴을 중심으로 이어나가고 있죠!”

“네, 그렇습니다! 이러면 이번 메타 OP라고 평가받는 픽들이 대거 풀리게 되는데요. 나눠먹자! 나눠먹어보자!”

“왠지 예상되는 부분이 있으면서도! 정작 바텀에서 어떤 픽이 나올지 궁금합니다! 밴이라는 건 자기도 안할거라는 거거든요! 무슨 생각이죠, 두 팀?”

그리고 완전히 밝혀진 서로의 생각.

“완료됐습니다!”

“유니버스에서 그윈과 요공, 그리고 아자르로 강력한 상체를 만들었고.”

“FWX는 피요라, 뽀비, 코르기를 나눠먹었죠!”

“저는 탑 구도도 너무 재밌을 것 같아요. 차니 선수의 피요라? 이거 어지간해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픽이거든요. 이 선수, LKL에서는 어떨까?”

“손 싸움입니다!”

“그리고 레나타를 밴했던 유니버스가 결국 드래이븐을 선택했습니다!”

“드래이븐과 퍄이크 바텀 조합! 이야, 이거 상당히 무서운데요!”

“킬샷 선수가 트래쉬 토크에서도 그랬죠. 바텀 죽여버리겠다고! 좋습니다! 오늘 상당히 자신감을 보여주고 있어요!”

오랜만에 제법 서로 때리는 트래쉬 토크가 있었던 만큼.

그리고 두 팀 모두 꽤 인기 있는 팀인 만큼.

경기장은 평소보다 뜨겁게 달아올랐다.

“FWX에서의 대항마는 미포와 노틸입니다! 노틸을 미리 뽑아 놓은 게 꽤 괜찮은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어쩌면, FWX에서는 상대가 드래이븐을 들고 나올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던 것 같습니다!”

자주 보이지 않는 픽들이 쏟아져나온 것 역시 그랬다.

분명한 컨셉.

“밸런스가 나쁘지 않아요. FWX는 바텀에서 초반에 시간을 벌어서 코르기를 키울 생각으로 보이고. 유니버스는 미드에서 최대한 압박해서 코르기의 성장을 억제하면서 드래이븐에게 킬을 먹여야겠죠.”

팬들 입장에서는 이것이 비밀 무기인지, 아니면 나쁘지 않아서 해 본 것일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경기는 뒤집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것.

“예상의 예상! 두 팀, 치열한 밴픽 완료하면서!”

“지금부터! 경기! 만나보겠습니다!”

#

이유찬이 잡은 피요라는 의외성이 있는 챔피언이다.

거기에 선수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유니버스가 탑으로 몸을 기울일까?

아니.

상대 정글러의 특성, 유니버스 원딜러의 성격, 그리고 픽을 고려하면.

탑이 아니라 바텀으로 몸이 쏠릴 것이다.

지난번에 우리가 플레이를 통해 탑 일대일 구도를 만들어준 것과 달리.

이번에는 적아의 흐름으로 일대일로 만들었다.

이유찬에게 맡겨볼 차례다.

데뷔 배려?

하루면 됐지.

그래서 결국 바텀.

바텀은 원래 중요하다.

LOS에서 중요하지 않은 라인은 없지만.

가장 터지면 안되는 라인을 꼽으라면, 인원이 둘인 바텀을 꼽는 것이 옳을 것이다.

두 배로 터지니까.

오늘은 중요성이 더 올라간다.

사실상 바텀에서 3:3이 일어날 것이 보인다.

“리쉬 괜찮아요.”

“그래도 돼?”

“네. 주도권 더 챙기세요.”

이번 메타에서, 이건 꽤 큰 투자다.

대신 나도 믿음을 요구했다.

“은호 형. 아까 말한 교환, 잊지 말아요. 분명히 걸려들테니까.”

글쎄.

오늘은 왠지 두 사람이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니까.

“알겠어.”

나는 사실 우리를 도발한 최정인과 강은찬을 잘 안다.

최정인은 진심으로 나를 탐내고 있을 것이고.

강은찬은..

“노틸, 몸 약한 것도 절대 간과하지 말고.”

“응!”

강은찬은.

항상 ‘원딜이 하늘이다’라는 말을 달고 살고.

비원딜, 유사 원딜 등 안 하는 챔피언이 없다.

“FWX 바텀, 지금 리쉬 안하고 왔죠? 이러면 주도권 완전히 꽉 잡을 수 있습니다! 이거 드래이븐이 상당히 숨쉬기 힘들긴 해요!”

하나, 둘, 셋.

마음 속으로 숫자를 센다.

“처음부터 강하게 밀어붙이는 FWX! 어, 어!”

“이거 못 참아! 못 참아! 유니버스, 약간의 각이 나오자마자 들이칩니다! 굉장히 공격적인 바텀 듀오거든요!”

“격렬한 싸움! 양 측 바텀 1레벨 풀 스펠 소모전!”

강은찬은.

팬들의 환호에 미치고.

극적이며 화려한 플레이를 사랑하는 원딜이다.

“순식간에 바텀에서 밀고 들어갑니다! 딜 교환에서 크게 유리해진 유니버스! 역시, 강력한 바텀 듀오입니다!”

“노틸, 살짝 위험할 뻔했죠? 저게 갑옷이 두꺼워보이지만 생각보다 속은 텅 비었거든요! 게로 따지면 수율이 안좋은 시기입니다! 지금 여름철이거든요?! 그래도 일단 살았으니까요!”

- ;;; ㅈ발리네

- 바텀 차이 이렇게 컸냐?

- 킬샷이 말한대론가본데? 진짜 바텀 차이 나네ㅋㅋ

- ㅋㅋㅋㅋㅋ킬샷 에프랑 월클^오^

- 키싯! 키싯! 키시싯! 유사 원딜 대가리 키시싯!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증명에 목매는 선수다.

그 자격지심이 어디에서 왔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유럽에서 활동했던 경험이 있는만큼, 오만가지 원딜을 할 수 있다.

나와 같이 활동할 때는 제이슨, 케낸 원딜까지 꺼냈었다.

사실 그것은 나에게 쏠리는 스포트라이트를 어떻게든 자기에게 끌어오기 위함이었다.

우습지 않은가.

나보다 주목받고 싶어서 했던 픽이.

내가 없을 때는 불가능하다는 게.

유니버스에서의 가장 힘들었던 점은, 이기적인 원딜이 오래도록 나와 기싸움을 벌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굳이 쓸 수 있는 사람, 쓸 수 없는 사람이 갈리는 드래이븐을 꺼내든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거다.

그러니까.

우리는 상대의 ‘자신감’, 그리고 ‘증명하고 싶은 마음’을 이용한다.

“아프긴 하네..”

“믿어요.”

“당연히 건이 믿지.”

집중한 곽지운은 말이 없다.

탑에서의 바보 연기보다 바텀에서의 바보 연기는 훨씬 더 어렵다.

스펠의 가치나 유지력이 현격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탑의 싸움이 다시 기어 올라올 수 있는 낭떠러지 위에서의 싸움이라면.

바텀은 바다 위의 승부다.

패배자는 끝없이 물 속으로 가라앉게 된다.

상대는 서폿 퍄이크로 우리를 깊은 바닷 속에 빠뜨리고 싶을 것이고.

우리는 서폿 노틸의 거대한 닻으로 적을 끌어내려야 할 것이다.

“요공 여기 가는 중.”

김예성이 짧게 콜을 남긴다.

“가요.”

나는 빠르게 움직인다.

이 곳에서 짠 내음이 나는 것만 같다.

바다의 공기다.

크게 돌아, 상대의 시야를 피해.

그림자 끝자락에 몸을 숨긴다.

내 뽀비의 작은 손에 들린 거대한 망치를 꽉 움켜 쥔 채로.

자신이 거대한 배 위에 올라타고 있는 줄도 모르는 강은찬을 바라본다.

“쟤네 정글도 왔다. 직선 방향, 올라오는 중.”

주인공이 되고 싶고.

나약해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 사람.

강은찬은, 자신이 플레이하고 있는 챔피언과 닮은 구석이 있다.

“각 준다.”

곽지운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미포의 작은 한 걸음.

나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행동.

설혹 계획이 실패해 자신이 죽더라도 내가 이득을 내줄 것이라는 믿음.

이 바다에서 가장 유혹적인 미인계.

“지금.”

강은찬이 스스로에게 도취된 지금.

나는 내 오른손의 맥동을 느낀다.

정확하게.

아주 섬세하게.

하지만 빨리.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뛰는 맥박이 한 번 뛰는 순간.

“어! 어! 아! 으아아아아아아! 권건, 권건! 굳건한 태세! 아니, 아니!”

“이게, 이게! 이게! 순간적으로! 순간적으로 점멸로! 요공의 돌격기를 모두 막아버리면서! 완벽하게 미포를 지켜냅니다!”

앞에서 시선을 끌고, 뒤에서 내가 들이닥친다.

서포터의 작살을 피해.

상대 정글러를 차단하면서.

우리 원딜을 지켜낸다.

오늘 출발하는 배에.

무거운 돌 원숭이가 밀항할 자리는 없다.

내가 찾는 사람은 따로 있다.

“바로 드래이븐 쪽! 박력있는 벽치기!”

안녕, 강은찬.

나 보고 싶었다며?

오랜만이다.

네가 한 도발, 자알 봤다.

“드래이븐 점사!”

있잖아.

FWX는 은퇴하기 전에 가는 팀?

너는 그 말을 곽지운을 긁기 위해 했을지 몰라도..

“이거, 이거, 이거! 이러면 순식간에!”

나까지 빡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바로 클래스의 닻까지 연계됩니다!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솔직히 나도 찔리는 부분이 있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금은.. 조금 다르거든.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

미안하지만 네가 희생양이 되어줘야겠다.

“바텀에서 FWX의 퍼블! 드래이븐이 끊기면서 시작합니다, 유니버스!”

“완전히 미친 연계! 완전히 알고 있었어요! 정글 순도 백 퍼센트, 천 퍼센트 읽혔습니다!”

“퇴각! 퇴각하라! 퇴각하라!”

짧은 백병전이 끝나고.

“건아.. 완전 최고였어.”

우리는 준비가 됐다.

“출항!”

나를 믿은 곽지운이 기분 좋게 흥얼거린다.

자, 노틸.

이제 닻을 올려라.

나는 오늘 최고의 모루이자 최고의 망치.

우리 선장님의 복수를 하러 바다로 떠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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