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선장
김예성은 꽤 조용한 타입이다.
그런데 요즘은.
생각보다 감정 표현이 많아졌다.
특히 이유찬을 마주치면 예의 그 표정을 짓는다.
“너..”
“왜.”
“머리.. 아니야.”
아마 머리를 좀 깎으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지만.
이 조심스러운 선수는 시시콜콜 참견하는 것을 대단히 실례라고 생각하는 타입이라 말을 아낀다.
나름대로 이유찬이 적응하는 기간이라고 생각해주는 것 같다.
탑과 미드는 매우 밀접한 관계여야한다.
어떻게보면 원딜과 서폿과도 같다.
정글이 없을 때는 둘이 듀오처럼 잘 맞아야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야, 나 머리카락이 실력 주머니야.”
“그래? 그런 거라면 오늘 유니버스만큼은..”
“사실 구라임.”
“...”
가능하다면 사적으로도.
둘이 사적으로도 통하는 부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대화의 구심점같은 게 생기면 좋을텐데.
“그래도 오늘은 동맹이다.”
“체크.”
뭐.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니까.
“준비는 다 끝났어? 오늘은 2경기라 대기 시간 길어질 수 있다. 은호, 담요는?”
출발 준비가 한창이다.
유니버스는 으레 다른 구단들이 그렇듯.
기본적으로 연고지에 일부 인프라를 둔 글로벌 기업이다.
각 구단들은 해당 연고지에서 아마추어 리그를 열거나 지자체 특화 프로그램을 시행한다.
그리고 거기서 지역 유망주들을 끌어오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e스포츠는 온라인이다보니 다른 스포츠만큼 큰 효과를 보지는 못한다.
그래도 초기에 스카우터들이 직접 귓속말로 연락하던 때보다는 낫다.
대회를 통해 재능을 개화하고, 아카데미에 초빙되는 선수들이 종종 나오곤 하니까.
팀에서는 2군 서포터 이지호가 대전 출신이다.
e스포츠는 과거의 부정적이던 이미지를 탈피하기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최종적으로는 게임도 생활 체육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다.
그 노력이 어느정도 빛을 발해 성장세는 괜찮은 편이다.
그리고 지역 채용에서는 효과가 좋다고 한다.
FWX 게임 팀은 LOS만 있는 게 아니며.
구단 운영에도 선수만 있는게 아니니까.
그래, 유니버스는 직원 복지가 훌륭하기로 유명한 팀이다.
직원 복지랑 프로게이머가 무슨 상관이냐고?
이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니버스는 분석 팀부터 시작해서 감독, 코치, 전략 분석관까지 풀 로스터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
리그 규정 최대치인 감독 1인, 코치 3인, 전략 분석관 1인.
LKL 구단 최다 숫자다.
우리 팀은 분석팀을 갖췄지만 전략 분석관 자리를 공석으로 비워뒀는데.
유니버스 쪽은 팀이 워낙 크다보니 일종의 팀장 개념으로 전략 분석관을 둔다.
리그에 코칭 스태프 최소 연봉 하한선도 있는만큼.
유니버스는 ‘부자 팀’이라는 말도 있다.
사실, 선수 빼가기로 유명한 팀이기도 하고.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지만 유니버스는 사실 꽤 괜찮은 팀이다.
나에게는 좀 묘한 기억으로 남아있긴 하지만.
“유니버스 애들.. 또 바텀 조합 들고나올까요?”
곽지운은 진지한 표정으로 최수철 코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스프링 마지막 경기.
우리를 고생시킨 것은 대구 유니버스의 바텀이었다.
#
- UNV Summer (TOP) : 아, 신인 탑이요?
경기 시작 전.
두 팀의 트래쉬 토크가 흘러나오고 있다.
- UNV Summer (TOP) : 그냥 해머스 이긴거잖아요? 해머스는 저희도 맨날 이겨요. 석기(HMS Rimo, TOP)가 좀 착한 동생이거든요.
준수한 얼굴의 유니버스 탑, 최정인이 시원하게 웃었다.
권건에게 은근히 같은 팀이 되기를 바라는 뉘앙스를 풍기던 선수.
- UNV Summer (TOP) : 그걸 뭐라고 하죠? 하룻강아지라고 하죠. 그냥, 작고 귀여운.
그리고 LKL치고 대담한 트래쉬 토크와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강한 라인전, 그리고 과감한 픽으로 인기가 많은 선수다.
- UNV Summer (TOP) : 친구네 집에 가서 치와와를 본 적이 있는데 아주 잘 짖더라구요.
최정인은 장난스럽게 손사래 쳤다.
- FWX Chani (TOP) : 네? 개요? 저보고 개라고 말씀하셨대요?
교차 편집된 이유찬이 나온다.
- FWX Chani (TOP) : 견종이 뭐래요? 아. 치와와요? 저는 치와와보다는 시츄가 좋은데.
타격감 제로의 표정으로 활짝 웃은 이유찬이 한참 시츄 이야기를 늘어놨다.
- FWX Chani (TOP) : 그럼 써머 선수는 뭐래요?
- UNV Summer (TOP) : 저는 코끼리죠.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동물. 차니? 자니? 저한테 다가오지도 못할 거에요. 압도될 테니까.
- FWX Chani (TOP) : 아, 진짜요? 와.
이유찬은 손뼉까지 치며 박장대소했다.
- FWX Chani (TOP) : 제 취미가 동물 동영상 보는 건데. 그거 아세요? 코끼리는 하루에 똥을 50kg씩 싸요.
- UNV Summer (TOP) : 예?
- FWX Chani (TOP) : 누누 좋아하시던데 똥으로 똥굴리기 하시면 되겠다. 그쵸?
- 차니 미친새끼.. 미친새끼다
- 존나 똥굴리기 ㅇㅈㄹ ㅋㅋㅋㅋㅋ
- 동물 성애자 ㄷㄷㄷ
- 하이에나 이후 코끼리는 금지어였다ㅋㅋㅋㅋㅋㅋ
- 써머가 제 무덤 팠네ㅋㅋㅋ
- 이걸 받네ㅋㅋㅋ ㅆㅂ
- 신인 새기 존나 꼴받네 건방짐
- FWX에도 트래쉬 토크 제대로 받는 사람 나왔네ㅋㅋㅋ 응원한다
하지만.
유니버스의 진짜 트래쉬 토커는 따로 있다.
- UNV Killshot (AD) : 네, 미라쥬한테 소문 들었어요.
곽지운과 동갑인 미라쥬의 원거리 딜러, 강은찬.
외국물 좀 먹어 본 강은찬은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웃었다.
- UNV Killshot (AD) : 많이 강해졌다고 하더라구요. 근데요. LOS는 원래 원딜 게임이잖아요.
- FWX seZa (AD) : 팀 게임이죠.
- UNV Killshot (AD) : 그런 건 온실 속 도련님들이나 하는 얘기고요. 아. 아, 지운이는 도련님인데 깜빡했다! 아이고!
한국식 트래쉬 토크, 비켜.
- UNV Killshot (AD) : 국산 도련님! 세계 무대 밟아 본 적도 없고 한국에만 갇혀있는. 아, 어디 부산이나 뭐 그런 데는 가봤어요? LOS 파크랑 사옥에만 있는 거 아니죠?
- FWX seZa (AD) : 저는 항상 최선을 다해요.
곽지운도 할 말은 하는 스타일이었지만.
강은찬이 던지는 말 중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어느정도 사실이라서.
- UNV Killshot (AD) : 전 솔직히 작년까지 FWX라는 팀에 원딜 포지션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FWX, 은퇴하기 전에나 들르는 팀 아니에요? 보험 들어주니까.
무엇보다도, 곽지운이 트래쉬 토크에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이 컸다.
FWX는 겸손과 성실을 강조했고.
유니버스 입장에서는 약팀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발언을 하는 것을 안좋게 보는 팬들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년까지 FWX는 견제할 필요가 없는 팀이었다.
LKL의 트래쉬 토크가 전혀 강하지 않기도 해서 그랬다.
대부분은 ‘잘 못하시는 것 같던데’, ‘제가 더 강해서요’ 레벨.
일부 시청자들은 트래쉬 토크 코너가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의문을 표하기도 했다.
- UNV Killshot (AD) : 아이디도 세자? 뒤주에 콕 처박혀서 CS도 못 먹고 굶어죽으려나?
하지만 스포츠에서 트래쉬 토크를 하는 이유는.
첫째로 흥행, 둘째로 심리전이다.
경기 중 상대를 방해하는 대화 역시 트래쉬 토크지만 LOS는 상대와 육체를 부딪치는 스포츠가 아닌 만큼.
LKL에서의 트래쉬 토크는 다른 스포츠보다 무기로서의 용도가 적다.
MLB와 KBO의 벤치 클리어링이 다른 것처럼.
- UNV Killshot (AD) : 기억나죠? 지난 번에도 바텀은 개박살 났던 거. 기억 안나도 나게 해드릴게요. 기다려요. FWX.
그래서 곽지운은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동갑인 강은찬은 곽지운이 방장인 채팅방 ‘왕자님 모임’의 일원이다.
제법 관계가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오랜 기간 솔랭을 해오다보니 자연스럽게 채팅에서의 욕설은 익숙했지만.
말로 뒤집어 쓴 것은 처음이다.
- 존나 아파;;
- 오늘 왤캐 쎄게 때려?
- 이게 유럽 활동 경력 선수의 맛?ㅠㅠ
- 곽지운 멘탈 부수려고 하는 것 같은데;;
- 세레브한 세린이를 그만 때려주시기를 부탁하는 뎃스우
- 방어 체계 출동해줘 제발..
곽지운이 으레 하던 각오를 말하고 퇴장한 뒤.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권건이 자리에 앉았다.
- FWX GwonGun (JUG) : 뭘 기다려요?
평소보다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권건은 천천히 고개를 양쪽으로 꺾었다.
- FWX GwonGun (JUG) : 혹시 절 기다리시나요? 제가 보고 싶으신가 봐요, 킬샷 선수.
- UNV Rondo (JUG) : 저는 아닙니다. 아무튼 아닙니다.
유니버스의 정글러는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 FWX GwonGun (JUG) : 자주 가는 수밖에.
- UNV Rondo (JUG) : 좋은 경기 했으면 좋겠습니다.
트래쉬 토크란 서로의 심장을 관통해야만 의미가 있는 법.
- FWX GwonGun (JUG) : 지금, 만나러 갑니다.
권건이 이를 드러내면서 웃고.
- 빅 뻐킹 건
- 사람 이름이 어떻게 “Gun”
- 시발럼아 왜 도발하냐고;;
- 야 그래도 우리가 제일 GGFWX 이길 뻔 하지 않음?
- 아 쉬바;; 근데 졌잖아;;
- 아까까진 우리가 존나 이길 것 같았는데 마지막에 이 새끼 나오니까 존나 질 것 같아;;
- 권건은 못하는 게 뭐야
상대 정글러가 도망치듯 자리를 뜨자, 화면은 해설진에게 넘어간다.
#
오늘 유독 선수들은 열의에 불타고 있었다.
이유찬도, 김예성도, 최은호도.
거기에 박 감독님까지.
하지만 곽지운이 걱정이다.
나는 김예성 너머의 곽지운을 지그시 바라봤다.
곽지운은 선수들 중에서는 체구가 작은 편이라, 살짝 몸을 기울여야했다.
우리 팀의 작은 원딜.
애칭 ‘깍지’, ‘세린이’.
놀랐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촬영 후 곽지운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봤다.
처음에는 의문, 다음에는 당황, 그리고 분노.
곽지운이 화가 난 표정은 처음 봤다.
일상 생활에서의 곽지운은 꽤 친근한 타입이다.
도움을 요청할 것이 있다면 스스럼없이 요청하고.
구태여 주장이나 형 행세를 하려고 들지도 않으며.
말로는 간식이 다 자기 거라고 하면서도 나중에는 자리마다 하나씩 같은 간식거리를 놔주는 사람.
그리고 확실하게.
FWX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아.”
헤드셋을 통해 곽지운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 알겠다.”
“뭘요?”
“나, 빡쳤던거다.”
분노라는 감정에 익숙하지 않은 곽지운은 이제서야 알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풀고 있는지 오므렸다 폈다를 반복한다.
“국산 도련님이요? 형님, 저도 국내 생산인데요!”
“아니? 그건 사실이니까 괜찮아. 근데.”
리그에서의 모든 시간을 FWX에서 머문 강철의 주장.
FWX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모든 순간을 함께 해 온 선수.
곽지운은 다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우리 팀을.”
가끔, 곽지운의 마이크에 문제가 생겼나 의심이 들 때가 있었다.
집중하면 말을 아예 하지 않는 타입이라서.
“은퇴하기 전에나 들르는 팀이라고 했어.”
곽지운은.
상처받거나 놀란 게 아니었다.
아직 스물 세살.
모든 스포츠의 평균 연령으로 치자면 어릴 수 있으나.
프로게이머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
소위 자주 거론되는 ‘에이징 커브’, ‘일반적인 원거리 딜러의 전성기 연령’의 끝자락.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FWX의 2021 시즌.
그 때 FWX에서, LKL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었던 열 아홉살의 곽지운은.
5년차인 지금까지.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면서 많은 것들을 잃었었다.
많은 이들이 이적하지 않는 그의 선택에 의문을 표했음에도.
풍랑에 흔들리는 배에서 내리지 않고.
다른 선원들이 하나, 둘 떠나갈 때에도 끝까지 남아 FWX를 짊어진 채 키를 잡은.
이제는 선장이 된 어린 선원.
“그 말은 절대 용서할 수 없어.”
그가 FWX를 떠나지 않은 이유는.
그저, 이 팀의 오랜 팬이었고.
이 곳의 모든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저 ‘우리 팀’밖에 모르는 바보.
주장은 화가 나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