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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95화 (96/326)

95화.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다음 경기는 토요일 오후 8시.

대구 유니버스와의 경기다.

유니버스는 지난 시즌 마지막 경기를 치뤘는데.

제법 고생을 했던 기억이 있다.

상성이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인데..

- 정일도 : 형들!

- 이지호 : 건이 형! 축하해!

폰이 계속 울린다.

- 나 : 고마워

- 탑병이유찬 : 후 이겨서 그런가 공기가 다르네;

- 이지호 : 내가 가서 맡아본다

- 탑병이유찬 : 암튼 다름

- 이지호 : 차니 형 고마워

- 탑병이유찬 : ?

- 이지호 : 봉구 형 진짜 천사야 (눈을 반짝이는 이모티콘)

- 이지호 : 밥도 잘 사주고 꼼꼼하게 플레이도 봐주고 조언도 많이 해 줘

- 이지호 : 이런 천사님을 만나게 해줘서 고마워

- 탑병이유찬 : 나는?

- 이지호 : ?

- 정일도 : ?

- 나 : ?

- 정일도 : 봉구 형도 초대해도 될까?

그러라고 했다.

2군에서 문봉구는 플레잉 코치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피지컬은 조금 부족할지언정 이론과 경험은 정말 괜찮은 선수다.

분명히 팀 전체에 큰 도움이 될거다.

FWX가 올 한 해만 리그에 참여하는 게 아니니까.

- 문봉구 : 이 방 뭐여?

- 정일도 : 봉구 형 :) 그냥 수다방이에요!

- 문봉구 : 여어 히사시부리?

- 문봉구 : 유찬이 승리 축하하고

- 탑병이유찬 : 형님 감사하고 또 사랑합니다!

- 문봉구 : ㅋㅋㅋ 생일 선물 뭐 받고 싶은감

- 탑병이유찬 : 저

- 탑병이유찬 : 한강뷰 아파트요

- 문봉구 : 홀리..

- 문봉구 : 미안하다.. 형이 그렇게까지는 부자가 아니다

- 정일도 : 내 생각이 너무 소박했네..

- 이지호 : 역시 차니 형한테도 배울 게 있다니까

- 나 : ;

사실 문봉구의 존재로 인해 1군과 2군은 부쩍 가까워졌다.

1군과 2군이 가까운 팀이 더 적으니,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심지어 사이가 나쁜 팀도 있다.

여태까지는 밥 먹는 시간 등이 서로 달라서 그전까지는 마주칠 일이 적었다면.

지금은 식사를 늦게 하거나 할 때 종종 문봉구를 중심으로 합석하기도 한다.

- 문봉구 : 치킨 쿠폰 ㅇㅋ?

- 탑병이유찬 : 감사합니다 형님!!!

- 문봉구 : 그랴그랴

- 문봉구 : 우리 건이ㅋㅋ 이거 봐봐ㅋㅋ (링크)

- 문봉구 : 진짜 꼭 봐야한다

- 문봉구 : 나는 우리 미드 산이 데리고 미용실 왔워

- 문봉구 : 다 됐나보다ㅋㅋ 이따가 또 연락하꾸마~

대화가 조금씩 더 올라왔지만.

주로 이유찬을 놀리는 말들이었다.

나는 채팅창을 닫으려다가 문봉구가 보낸 동영상 링크를 열었다.

“자! 퓨처스 리그에서 빠질 수 없는 질문이죠! 가장 존경하는 선수는 누군가요, 단디 선수?”

오랜만에 듣는 2군 캐스터의 목소리.

경기 후 인터뷰다.

“저는.. 저희 1군에 계신.. 권건 선수님이요..”

상기된 얼굴로 기어들어가듯 대답하는 선수는.

내가 콜 업 된 후 2군에 영입된 아카데미 출신의 장한울.

“오! 권건!”

“저희 퓨처스 리그 최고의 아웃풋이죠?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저도 권건 선수의 팬입니다!”

“그럼 단디 선수! 우리 권건 선배님에게 영상 편지 한 번 써볼까요!”

“지금요?”

“물론이죠! 자, 카메라 보시고. 지금부터 시작!”

아, 신인 선수 귀여워하는 레퍼토리.

동현이 형은 또 저기에 있네.

나는 침대에 머리를 기댔다.

“많이.. 존경하고 있습니다.. 진짜 많이 배워요.. 제가 말을 잘.. 못하는데.. 다음에 밥 먹을 때.. 사인 좀 해주시면 안될까요.. 꼭 부탁드립니다..”

옆에서 흐뭇하게 웃음을 참는 해설진들의 모습.

존경하는 선수에게 영상 편지 보내기는 퓨처스 리그의 고전이다.

2군 선수들이 소속 구단 선수가 아닌 1군 상위권 팀의 선수를 좋아하는 경우도 꽤 많은데, 그것 또한 심술 포인트다.

유망주들이 어떤 대답을 해야할지 망설이게 만드는 거다.

그래서 1군과 달리 인터뷰 교육을 시행하지 않던 2군에서도.

종종 곤란한 질문이 나왔을 때 피해가는 방법들을 알려주곤 한다.

1군 성적이 나쁘더라도 같은 구단의 선수의 ‘인내심’이나 ‘챔피언 폭’을 본받고 싶다고 하라던가.

다른 구단의 선수와 같은 구단의 선수를 함께 말하라는 식이다.

얘도 양 감독님이 시켰을까.

[ 아니, 당연히 진심이지. ]

“언제 왔어.”

자연스럽게 릴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솔직히 좀 놀랐지만.

나는 침착하게 가방에 챙겨놨던 간식거리를 건넸다.

“이거 줄게.”

[ 다 내거야? ]

릴리는 조그만 가방에 이것저것 가득 담았다.

사실 이번에도 다 내가 산 건 아니고.

곽지운의 간식 창고를 턴 최은호가 준 것과 팬들이 보내준 것도 있다.

[ 응, 어때? 요즘은? ]

“어떠냐고. 그냥, 뭐.”

내가 두루뭉술하게 말하자 릴리의 눈이 가늘어진다.

[ 있잖아. ]

가방 정리를 마친 작은 소녀는 양 손을 탁, 탁 털었다.

[ FWX는 항상 너에게 진심이야. ]

“...”

좋은 사람들이다.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다른 이의 입을 통해 듣는 것은 다른 문제다.

[ 조금 더 다가가보면 어때. ]

릴리는 항상 내 마음의 어떤 부분을 찔러온다.

[ 게임 말고. ]

샐쭉 웃은 어린 악마는 제 할 말을 다 했다는 것처럼 사라진다.

모습은 사라졌지만.

어디선가 ‘괜찮으니까..’라는 말이 남아서 맴돈다.

“후.”

나는 천천히 목을 돌리며 스트레칭했다.

그리고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나는 천천히, 문봉구의 이름을 ‘문봉구’에서 ‘봉구 형’으로 바꿨다.

#

늦은 밤.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FWX의 회의실.

“건이 슬슬 100킬 달겠는데.”

“아니, 데뷔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100킬이래요?”

“원딜도 아니고 미드도 아니고 정글인데?”

“그러니까. 수철아, 너는 언제 100킬 달았냐?”

박진현 감독이 최수철 코치와 김한빛 코치에게 시원한 아이스티를 건네며 물었다.

날이 부쩍 더워졌다.

아직 6월에 불과하지만 지구가 정상이 아닌 게 틀림없다.

이럴 때일수록 선수들의 건강에 신경 써야 했다.

모두 한창 건강할 나이지만 아무래도 몸을 단련하는 스포츠가 아니다 보니.

자칫하면 다른 쪽에서 문제가 생기기 쉽다.

“형님, 그걸 어떻게 기억해요?”

“중요한 건 수철이가 아니죠. 이거 정글 최단 기록일 것 같은데요.”

“아니.. 한빛 형님. 그렇게까지 뒷방 늙은이 취급하면 내가 섭섭한데..”

“너 예전에 은퇴 했잖아.”

“아직도 스킨 내기 때문에 삐졌어요?”

두 코치가 투닥거리는 것을 보던 박 감독은 기분좋게 웃었다.

최수철 코치는 선출, 김한빛 코치는 비선출이다.

어찌보면 출신이 아예 다른 두 코치들의 자연스러운 의견 교류.

보기 좋다.

“너 예전에 프로 할 때 미드에서 그 진화..”

“아, 그거 나 아니었다고!”

의견 교류가 지나치게 심화되기 전에 박 감독은 헛기침을 해서 대화를 끊었다.

“흠, 흠. 애들 건강 검진 결과는 나왔어?”

“아직요. 이번에 옵션 많이 달아서 전체 다 나오기까지는 한 달정도 걸릴 것 같아요.”

이번 건강 검진에는 갖은 내시경이나 근육 테스트를 비롯해 알러지 반응 검사까지 넣었다.

문봉구가 새우 알러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는데, 구단 측에서도 선뜻 지원을 해줘서 아예 풀코스로 돌렸다.

“좋아. 냉방병 주의하고.. 애들 개인 담요 위생 철저하게. 습도는 50에서 60퍼센트 맞추고. 에어컨 껐을 때는 제습기랑 저소음 서큘레이터 켜자. 하루 생수 한 병도 꼭 지키고.”

“옙.”

박 감독은 꼼꼼하게 선수들의 차트를 훑었다.

더위에 약한 선수, 추위에 약한 선수.

알러지가 있는 선수, 아토피가 있는 선수.

선수 관리란 비단 말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스탭과 의료진이 돕기는 하지만 선수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돌보는 것은 감코진이다.

선수들이 잘해주는 만큼.

감코진은 선수들이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애들은 연습하고 있어?”

“네.”

“음. 그럼 나는 마지막 체크 갔다가 먼저 들어갈게. 수철이, 고생 많아.”

“들어가세요, 형님.”

박 감독은 연습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해가 진 것보다 뜨는 것이 가까운 시간.

가능하면 선수들과 시계를 맞추는 편이지만 완전히 따라잡기는 힘들다.

슬슬 졸음이 밀려온다.

선수 때는 쉽게 했었던 것들이 이제는 어렵다.

아무래도 나이 탓도 있겠지.

음, 운동을 좀 더 해야하나.

연습실에 도착한 박 감독이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친 것은 최은호였다.

“쉿.”

최은호는 은밀하고 신속하게 다가와 박 감독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천천히 이유찬과 김예성이 서있는 곳을 향해 박 감독을 안내했다.

권건은 연습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게 뭐가 문제라는거지.

박 감독이 눈짓을 보내자 최은호는 고개를 흔들며 채팅창이 있는 위치를 가리켰다.

- 정글맘에안드네 : 왜 혼자 큐 돌림?

- 정글맘에안드네 : 같이 하기로 했잖

- 정글맘에안드네 : 대답 없는 건 긍정?

권건이 하고 있는 게임이 아니라 귓속말이다.

대답하지 않고 있었지만 상대는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지난 채팅 내역 일부가 보인다.

- 정글맘에안드네 : 걍 겜 돌리러 감 ㅅㄱ

그리고 5초도 지나지 않아.

- 정글맘에안드네 : 아 언제 끝낼건데

- 정글맘에안드네 : 혹시 적으로 만날까봐 무서워서 그래?

- 정글맘에안드네 : ㅋㅋ그럼 내가 닷지해줌 나 부계도 점수 높음

- 정글맘에안드네 : 계속 같은 팀 하고 싶은가

- 정글맘에안드네 :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ㅎ

박 감독은 김예성이 눈으로 침을 뱉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이 얌전한 선수가?

이건 심각한 문제다.

박 감독은 재빨리 선수들을 휴게실로 이끌었다.

“감독님!”

김예성이 오랜만에 격한 감정을 드러냈다.

“저거 템퍼링 아니에요? 저 사람 자꾸 건이한테 귓속말 한다구요!”

“음.”

“저 선수 유니버스 탑 최정인이에요.”

최은호가 재빨리 최정인의 전적을 검색해서 띄웠다.

상당히 높은 솔랭 점수.

다양한 챔피언.

“뭐? 탑이었어? 정글 아니야?!”

“아이디에 정글 들어가면 정글이냐?”

“유찬이 너는 그것도 모르고 보고 있었어?”

“니가 거니 뒤에 서있으니까!”

“너는..! 아니,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김예성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우리끼리 싸우지 말아요. 저 사람, 누누예요.”

“아. 탑 누누 그 선수.”

“건이한테 자꾸 집적거려요. 엄청 노골적으로.”

“건이는 대답 안하고?”

“게임 끝나면 그냥 다음에 기회되면 만나요, 이러는데 이거 정중한 거절의 말이잖아요.”

“어. 그거 거절이였어?”

최은호의 표정이 흐려졌다.

“은호 형. 정신차려. 건이는 우리 팀이잖아.”

오늘따라 김예성이 똑부러진다.

“맞아. 감독님. 절대로 이대로 두면 안돼요.”

최은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탑이라고? 탑이었다고! 기억 났어!”

이유찬도 결의에 찬 표정이었다.

“탑 누누! 구와아아악!"

“어떻게 친추했지?”

박 감독이 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몰라요, 건이 잘 안 받아주는데!”

최은호가 으스댄다.

박 감독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템퍼링이라고 말 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불편하다.

권건이 신경 쓰지 않더라도 선수들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는 존재.

박 감독과 있었던 일은 아니지만.

유니버스는 2군 미드 김창민을 FWX에 보내면서 문제를 숨겼던 전력도 있다.

분명히 알고 있었을텐데도.

근데, 그래놓고 감히 건이한테 손을 대려고 해?

양심도 없지.

잘됐다.

대구와 대전을 연고지로 둔 두 팀은 지명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도 놀림을 받아왔다.

왜 똑같은 대(大)를 쓰면서도 한 쪽은 작냐고.

코를 납작하게 눌러줘야만 저런 소리를 못하지.

“유찬아, 예성아, 지호야.”

박 감독은 세 사람과 조용히 눈빛을 교환했다.

“결국에. 프로는 뭐다.”

“승리!”

“제가 탑 부숴버릴게요. 감히 건이랑 게임을 하겠다고?”

이유찬의 말에 김예성이 만족스러운 눈빛을 한다.

“이유찬 너, 이제야 나랑 좀 통하네?”

“그래. 얘들아.”

박 감독은 슬슬 졸음이 쏟아지던 몸에 분노 비슷한 것으로 활력이 도는 것을 느꼈다.

건이랑은 나도 친추 못했는데.

대구 유니버스, 용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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