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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92화 (93/326)

92화. 암흑 탄생

이유찬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상상했던 그대로다.

LOS 파크의 공기.

적당히 서늘한 이 느낌.

쏟아지는 환호와 열기, 아스라이 들려오는 해설진의 목소리.

2군 경기보다 훨씬 많은 수의 경기 관리자들과 스태프의 숫자.

그리고 우리 팀을 응원하는 팬들.

긴장되지 않냐고?

“쟝 쟝가쟝쟝! 우왱왱왱왱!”

긴장될 때, 난 기타를 쳐.

“집중.”

그러면 들려오는 권건의 목소리.

이건 묘하게 안심이 된다.

같은 팀 선수들이 플레이하는 걸 보고 있을 때.

저걸 왜 저렇게 하지.

왜 저렇게 느리지.

이런 기만적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게, 언제부터였을까.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2군 양태진 감독과 구태양 코치의 집중 케어로 일취월장하면서.

솔랭에서 1군의 프로 선수들을 만나더라도 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실제로 2군 선수로 활동하면서.

혼자 이기는 것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1군과 붙어보고 싶은데 팀 자체가 부족하니 스크림을 하기가 어렵고.

아주 나쁜 생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재난 사태같은 것이 일어나서 1군 탑이 잠시 자리를 비운다면 내 실력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유찬. 이제 제어 와드는 좀 사?”

“딱 두고 봐라! 내가 시야 점수 1등 먹을거다!”

“그래. 본다.”

그런데 권건을 만났다.

처음에는 별 생각없었다.

그런데, 경기를 하면서 알게됐다.

자신이 바로 그 ‘피지컬 열풍 세대’의 끝자락에 있는 선수였다는 것을.

그냥 1군으로 무작정 올라왔다면 멍청한 야수가 됐으리라는 것도.

그래서.

FWX에서 자신을 콜 업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찬은 권건과 경기를 해 본 후에야 제대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 전까지는 그를 완벽하게 압도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제서야 이론으로만 수없이 머리에 때려박힌 ‘진짜 LOS’가 뭔지.

아주 가끔 느꼈던 그 조각의 정체를 알았다.

이유찬이 생각하기에 그 감정은.

일대일로 이기면 상대 탑을 빡치게 할 수 있지만, 오대오로 이기면 상대 전체를 빡치게 할 수 있어서 오는 황홀경이었다.

팀 게임은 나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럼 이 위치에 와드.”

“지금?”

“네가 라인을 밀어낼 수 있다면 말이지.”

어떤 상황에도 감정 변화가 없는 것 같은 저 모습.

이유찬은 본능적으로 권건은 묘하게 외로워하고 있다고 느꼈다.

나와 같은 생각인걸까?

천재란 고독한 법이지.

그래.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다.

LKL.

권건의 옆.

내가 자랑하는 힘을 보여줄 수 있는 이곳.

#

“형님들! 길 닦아 놨습니다!”

“유찬아.. 볼륨 좀 줄여..”

우리 새 탑은 아주 씩씩하다.

“거니! 적 블루에 와드 꽂아놨어! 도전 과제 성공?!”

흠.

그리고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다.

“예성이, 뒤로 돌아서 먼저 내려가. 깍지 형이 숨겨주세요.”

“오케이.”

“FWX가 먼저 전령을 챙깁니다!”

“해머스는 울며 겨자먹기로 용이라도 챙기는데요! 어, 아!”

“빠지는 게 좀 늦었어요!”

“이러면 아, 해머스 살짝 곤란해지는데요! 한 발 앞서서 내려온 라온 선수가 순진하게 지름길로 복귀하던 바슈 선수의 사일런트를 그대로 퍼올립니다! 노플!”

“까아알끔한 토스! 바슈 선수도 똑같은 궁으로 반응해보지만, 과감하게 앞점멸 호응을 한 셰나가 킬을 챙깁니다! 오늘 세자 선수도 아주 깔끔하게 플레이해주고 있어요! 세라핌이 CS를 먹고 킬은 셰나가 챙기고! 이러면 이거, 일거양득인데요!”

“성장 시간 앞당겨집니다!”

“그으.. 이렇게 되면, 해머스 입장에서 용을 먹고 값을 지불한 거라고 볼 수도 있을까요?”

“뭐, 그렇게라도 말해야합니다. 근데. 근데요! 꼭 값을 지불해야해요?! 용이나 전령, 바론은 사실 그 누구의 것도 아니잖아요! 자연의 것이거늘! 이게 좋게 말해서 그렇다는거지, 어떤 상황에서도 값을 지불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거라구요!”

- 그건 맞지ㅋㅋㅋㅋㅋㅋ

- 거 너무 후불제인 거 아니요?

- 주문은 키오스크에서 부탁드립니다^^7

- CAN WIN! HMS CAN WIN!

“FWX가 사람 좋은 척 무료 드래곤 나눔을 할 때 다 이유가 있었군요..”

“나이스.”

내가 말을 물가에 데려다 줄 수는 있지만 물을 먹여줄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방금의 플레이는 김예성과 곽지운, 두 사람이 서로를 믿고 만들었다고 봐야 한다.

“봤어?”

김예성은 보기 드물게 의기양양한 목소리였다.

“크윽.”

이유찬?

“근데 니가 킬 먹은 건 아니잖아.”

“셰나 키워야 하니까.”

“아니? 우리 킬로 치기로 했는데?”

“너..”

둘을 그냥 뒀다가는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아서 내가 끼어들었다.

“둘이서 뭐해?”

“전..”

“쉿.”

아아, 벌써 알겠다.

그러니까 둘이서.

킬 먼저 내는 사람에게 전령 밥차 양보하기, 뭐 이런 걸 계획하셨겠다?

“이유찬, 김예성.”

“건이가 내 이름 먼저 불렀다.”

“니가 탑이니까 그렇지.”

“내가 위라는 뜻임?”

“미드는 세계의 중심이라는 뜻이야.”

유치한 놈들.

감히 신성한 게임에서 킬로 내기를 해?

전령을 들고 있는 것은 명예로운 정글러이거늘.

건방지기 짝이 없다.

“너네 전령 압수.”

“개이득.”

“어부지리 개꿀.”

듀엣 공연을 훌륭하게 펼치던 바텀에게 주어지는 합격 목걸이.

사실 최고의 가성비를 따지는 게 당연하지만 이 멍청이들은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굴었다.

“앗, 노!”

“건아, 그럼 당연히 두번째 전령은 경기의 핵심인 미드에..”

“폐하, 쟤는 간신배이옵니다! 저는 태생부터 FWX 출신으로서..”

혈연 지연 나오나?

“나도 FWX 출신 아닌데.”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온다.

“아차, 개망함.”

“잘 하는 사람 준다. 지금부터 라인전 실시.”

“실시!”

“건아 바텀도 껴주냐?”

“...”

그래, 그만큼.

우리 팀이 강해졌다는 뜻으로 생각하자.

#

- (FWX) 속보 신인 차니 스타터팩 구매ㅋㅋㅋㅋㅋㅋ

ㄴ 존나 개부럽다ㅋㅋㅋㅋㅋ 남들과는 다른 스타트

ㄴㄴ 이렇게 따뜻한 데뷔전이 있냐?

ㄴㄴ 구들장 뜨끈뜨끈합니다ㅋㅋㅋㅋㅋㅋ

ㄴㄴ 좋냐? 좋아? 좋냐고

ㄴㄴ 아ㅋㅋ 장작은 해머스였고ㅋㅋㅋㅋ

ㄴ 뉴비 왔는가?ㅋㅋㅋㅋㅋ

ㄴㄴ 일단 권건이 차니 풀템 소매넣기부터 시작했어ㅋㅋㅋㅋ

- (HMS) 신병은 쥐어 뜯기는게 국룰이잖아..?

ㄴ 이건 범법이다..

ㄴㄴ 비이이이겁한 새끼들···

ㄴ 콜드께임 가시조ㅎ

ㄴㄴ ㄲㅈ

#

FWX는 개막전을 압도하고 있었다.

“바텀 라인전을 끝내버린 주유소 듀오가 발이 풀립니다!”

시작 전부터 흉흉했던 FWX 스크림에 대한 소문.

그리고 지난 시즌, 비틀거리면서도 결국 강팀들을 모조리 이겨버린 실력.

‘우리는 수문장이다’ 라는 해머스의 의식은.

‘우리는 약팀에게는 강하지만 강팀에게는 약하다’ 라는 마인드와 일맥상통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FWX는 약팀인가 강팀인가?

“차니 선수가 생각보다 굉장히 잘해주고 있어요! 여전히 탑은 일대일 상황! 이쪽은 라인전을 끝낼 생각이 없어보여요!”

“페이크 무빙! 탑에서 선배인 리모 선수의 스킬을 여유롭게 피해내면서! 비빕니다!”

“대검과 철퇴의 승부! 남자의 싸움이다! 모데는 암흑 탄생 터뜨리면서 정복자 상태로 비비면 굉장히 아픕니다!”

“그러고보면 모데 궁극기가 죽음의 세계고, 아트는 세계 종결자죠.”

“네이밍으로만 보면 엄대엄! 하지만! 다른 곳은 어떤가요!”

“그렇습니다! 지금 해머스의 정글이 완전히 무력화됐어요! 고개를 내밀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너무 이른 타이밍이라!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성장해야 합류를 해서 싸움을 보건! 오브젝트를 챙기건 할텐데! 압박이 너무 심해요!”

- 어어?

- 또 캠프 뽀찌만 먹었어?

- 주작.. 주작이지? 해머쓰발롬들아 제발 거짓말이라고 해줘..

- 이러면 안되는데.. 안되는데.. FWX는 우리 밑에서 순위를 깔아줘야한단말이야..

- 해머스머해 해머스머해

“바텀. 블루로.”

“오케이.”

“혹시 먹으란 뜻은 아니지?”

“은호 형? 세라핌을 잡으니까 블루가 탐나?”

“예성아.. 형이 그냥 궁금해서 그랬어.. 먹으려고 한 거 아니야.. 정말로..”

팀 게임과 솔랭의 다른 점은.

보다 완벽한 협력을 가다듬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팀의 기본이니까.

“아, 블루라도 카정해보려던 아자부 선수의 요공!”

“셰세 조합의 퐁당퐁당! 이거 들어가기 어려워요! 팔이 너무 깁니다! 거의 숨넘어갈 뻔 했어요! 잘 키운 FWX의 바텀, 강합니다!”

“결국 소득을 얻지 못하고 밀려납니다! 블루는 무사히 라온 선수가 챙겨갑니다!”

하지만 이게 단점이 되는 순간이 있다.

해머스 정글러가 완전히 망한 지금.

가뜩이나 시간이 필요한 해머스 입장에서 정글러는 짐이 되고.

팀원들이 무게를 함께 짊어지다보면 본래의 역량이 나오기 어렵다.

“아아아아아! 트런둘! 권건의 트런둘이 숨어있다가 레드를 뺏었어요! 소중한, 소중한 밥그릇이었는데!”

“정직한 정글 차이를 벌리는 중! 정글 드시고 싶으시다구요? 돈 안내고는 못 먹습니다! 돈 없으면 궁이라도 쓰시던가! 봉이 김선달인가요! 지금 이거 완전 정상이 아니에요. 권건 이 선수, 비정상이에요! 비이이이이상! 비상! 비이이이정상!”

권건은 잔인할 정도로 상대를 괴롭혔다.

갱 따위는 생각도 할 수 없을만큼.

“사이드 방향! 자연스럽게! 어, 음, 아자부 선수의 요공이 사일의 푸시 라인을 잡아주고 갑니다!”

- 푸시 라인 잡아준다 = CS 뺏어먹고 감ㅋㅋㅋㅋㅋㅋ

- 미니언이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잠깐만, 태준이형.. 내 라인..”

“진짜 딱 이것만. 진짜 쏘리.”

“나 안그래도..”

미드를 양보하고 아자르 상대로 간신히 버텨내고 있던 김진.

분명히, 라인을 같이 밀어주는 건 고마운 일이긴 한데.

거기에 CS를 뺏어 먹는 옵션은 포함되어있지 않다.

그리고 또 다시 나타난 몽둥이를 든 권건.

트롤왕이 울부짖는 소리가 괴성처럼 느껴진다.

“빨리! 형, 빨리 가! 권건 왔잖아!”

권건을 끼고 2:2를 하느니 차라리 라온이랑 1:1을 하는 게 낫다.

김진은 냉정하게 백태준의 등을 떠밀었다.

“알겠어.. 내가 권건 드리블 한다고 생각할게..”

“좋은 마인드야. 부탁 좀 할게.”

부끄러움이 많았던 막내 미드가 이렇게 냉정한 아이였나..

형의 위엄을 잃은 백태준이 사이드를 담당하던 김진을 떠난지 오래지않아.

FWX가 준동한다.

이유찬.

생일이다.

그는 이미 데뷔라는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아마도, 공짜 승리까지도 받을 것 같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이게 신인에게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탑”이 아니기 때문이다.

탑이 진짜 좋아하는 것은.

모든 것을 다 가져오는 것이다.

알겠다.

정글이 왜 적극적으로 싸움을 거는지.

미드가 왜 메이킹을 신경 썼는지.

바텀이 왜 주유소 조합을 했는지.

그리고 끝내 왜 코치님이 자신에게 모데를 권했는지.

팀이 그에게 기대하지 않은걸까?

아니.

틀림없다.

솔로킬을 따오라는 뜻이다.

탑이 짊어져야하는 무게란 응당 그런 것이다.

문봉구의 의지를 잇기 위해.

탑 중 탑이 되기 위해.

명예로운 전투를.

코치님이 덧붙이던 말이 희미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어, 바텀, 바텀, 바텀! 라온, 라온, 라온이이이이이!”

이유찬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상대. 죽인다?”

적응, 완료.

짐승의 감각은.

언제나 살아있으니까.

“해봐.”

허락은 떨어졌다.

상대가 바텀을 보고 있다고 느껴지는 찰나.

발 밑에 죽음의 손아귀를 드리우자.

아트가 몸을 가볍게 움직여 흘려내보려하지만, 이미 이곳은 이유찬의 세계.

네가 나보다 경력이 길건.

작년 팀 성적이 나았건.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다.

여기는 나의 능력을 가장 완벽하게 발휘할 수 있게 준비된 일대일의 무대.

나의 세계에서.

적은 이 세계를 종결하기 위해 날개를 펼친다.

나는 촘촘히 가시 박힌 철퇴를 하늘을 부술 듯이 들어 올린다.

피할 곳이 없는 좁은 링.

양 측, 파멸의 돌진.

격돌.

때린다.

너는 움직임이 느리게 느껴질 것이다.

때린다.

능숙하게 들어올리던 대검이 무겁게 느껴질 것이다.

때린다.

이 합이 세 번 교차하면.

어느새 네 몸이 피로 물들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일개 지상의 존재로 보였던 나의 불멸에 공포를 맛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등을 돌리는 그 순간.

사슬을 벗어던진 나에게.

너는.

날개가 꺾이고 영혼을 빼앗긴다.

말살.

이것이 나의 정의.

압도하는 이 감각.

“기분. 죽인다.”

FWX의 탑.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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