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워크샵
각자 시간을 보낸 뒤 만난 것은 워크샵에서였다.
인천 공항에서 집결.
거기서, 우리는 문봉구를 다시 만났다.
"왜. 뭐. 형. 내가 그리 반갑나. 고만 좀 봐라."
"아니야."
"봉구형. 지운이 형이 눈물 펑펑 쏟았던 게 민망해서 그래."
"예성이, 조용히 좀 해줄래!"
곽지운은 김예성에게 폴짝 점프해서 헤드락을 걸어보려고 했으나.
우리 미드의 무빙이 심상치 않아 무산되고 말았다.
대신 웃음을 터뜨리던 김예성의 복부를 스쳤다.
"뭐지. 아무것도 없어."
"깍지야. 모든 사람에게 너처럼 뱃살이 있을거라는 생각을 버려."
"인간이면 뱃살은 다 있는거거든? 미안한데 너부터 운동 좀 할래?"
"너하면 나도 함."
"응, 너 운동 해봤자 권밑곽."
"곽밑최."
"행님덜. 고만 좀 하시고. 후배 앞에서 좋은 모습 보여줘야지. 아직도 이래 철이 없어서야."
두 사람은 푸근한 체형의 문봉구를 보고 마음까지 따뜻해졌는지 언쟁을 그만뒀다.
"건이는 뭐하고 보냈어?"
최은호가 슬쩍 다가와서 묻는다.
사실 휴가라고는 해도 항상 LOS에 로그인 되어있다시피하니, 따로 메신저가 필요없기는 하다.
팀 디코방도 있었지만 딱 감을 잃지 않을 정도의 게임만 하고 특별히 다른 사람들과 많이 어울리지는 않았다.
휴가니까.
나는 매번 그랬듯 부모님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내 부모님은 그리 닫힌 분들은 아니었지만.
몇 번을 반복해도 항상 나를 걱정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릴리에게도 틈나는대로 과일들을 잔뜩 쥐여줬다.
하지만 뭐가 그리 바쁜지, 요즘 부쩍 보이지 않는다.
악마에게도 비시즌이 있는건가.
"글쎄요.."
나는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지금 다 말하긴 어렵겠는데요. 왜냐하면, 저기."
그래.
내 휴가를 괴롭혔던 이유찬이 저 멀리서 오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FWX! 퓨처스 리그! 이, 유, 찬! 입니다! 부르심받고 왔습니다!"
"안녕."
"얘 왜 이렇게 뻣뻣해?"
"고장났어?"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들!"
"선수님들, 티켓 받아가세요."
그리고 잠시 자리를 비웠던 감독님과 코치님들, 스탭 분들까지 순식간에 북새통이 되면서 우리는 순식간에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야, 거니거니."
"이름으로 불러."
"알겠어. 근데 나 영어 못하는데 어떡하지?"
"선수님, 우리 제주도 가는 거예요."
옆에서 누군가 속삭여줬지만 이유찬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근데 왜 인천 국제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요?"
“국내선과 국제선이 구분이 되어있는데..”
나는 바보를 스탭님께 맡기고 눈을 감았다.
“목적지가 갑자기 바뀌는 깜짝 여행인 줄 알고 팬티 넉넉하게 가져왔는데..”
“선수님.. 예능 그만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워크샵 인원은 기존 선수 여섯 명에 이유찬, 그리고 감코진.
촬영진을 비롯해 스태프들로 이루어진 작은 그룹이다.
이 바닥은 좁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FWX의 멤버 교체 행보도 알려질거다.
하지만 뭐.
끝까지 비밀로 할 수는 없으니까.
문봉구는 2군으로 샌드 다운, 이유찬이 1군으로 콜 업 예정이다.
2군 탑으로 오래 쓸 계획이라기보다는.
아마 괜찮은 2군 유망주를 구하기 전까지 경험을 전파하는 롤을, 이후 남은 기간 동안은 선수지만 플레잉 코치나 구루 역할을 맡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군 탑에서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으니까.
지난 스톰 전 이후부터 퓨처스 리그의 양태진 감독님과도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말소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우리는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었다.
언제 친해졌는지 곽지운과 이유찬은 문봉구를 옆에 두고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워크샵이긴 한데, 대부분의 공간에는 카메라가 달려있다.
이것도 시즌 콘텐츠다.
그래도 FWX는 개인 공간에 대한 보호는 잘 해주는 편이어서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다.
어떻게보면 처음으로 친해지는 자리.
과연 이유찬은 여기에 적응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문봉구보다 이유찬이 낫냐는 질문에 대해서 답하기는 쉽지 않다.
피지컬, 솔랭 점수, 챔피언 폭 등은 이유찬이 훨씬 낫다.
그 전까지 이유찬은 무력 외에 눈에 띄지 않는 선수였지만, 나를 만나고서부터 뭔가 내면에서 끓어오른 듯이 변화가 일어났으니까.
하지만 내가 1군에 왔을 때도 코치님들이 걱정한 것처럼.
적응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유찬아, 잘 들어. 이제 네가 막내야..”
친한 게 문제가 아니다.
먼저 2군과 1군이 하는 일은 같지만, 다르기도 하다.
언론이나 콘텐츠에서의 노출도도 다르고 팬들의 관심도 다르다.
2군에서야 뭘 해도 주목받지 못했다면.
1군에서는 뭘 해도 주목을 받아버린다.
대포 하나 놓치는 것으로도 며칠을 괴롭힐 수 있는 안티들이 존재하고.
이전 선수와 이런 점이 낫다, 이런 점이 부족하다 등으로 끊임없이 비교당한다.
거기다 2군에서는 형이었던 이유찬이 여기에서는 막내.
“옙. 지운이 형님.”
나야 이런 것들에 대해서 부담을 가지지 않았지만.
여기에 낯선 장소와 새로운 사람들까지 더해지면 문제가 생기기 쉬운 환경이 된다.
뭐, 그거야 감독님과 코치님들께서 알아서 잘 해주실 문제고.
“근데, 저는 제주도가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 전까지 제주도는 저의 개념 속에서만 존재했죠.”
“제주도가 왜 개념만 있어. 지도에도 있고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는데.”
“하지만 제가 가보기 전까지는 그곳이 진짜로 있다고 말할 수는 없죠.”
“그런가?”
“형님은 유럽에 가보신 적이 있나요?”
“없는데.”
“그럼 유럽은 진짜 존재하는 걸까요?”
“당연하지. 유럽에 다녀온 사람들이 있는데. 유럽 서버도 있고, 월챔도 개최하고 그러잖아.”
“만약 그게 우주라면 어떨까요?”
“어.. 우주는 방송에도 나오고, 사진도 있잖아.”
이유찬은 진지하게 이상한 논리를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 우주를 직접 보고 온 사람은 없어요.”
“그건 그래.”
곽지운은 거기에 빨려들어가고 있었고.
“어떻게 직접 보지 못한 것을 있다고 말하는 걸까요? 그런 의미에서 제주도는 저에게 우주와 같았다는 거죠.”
“오..”
뭐라는거야.
“그래서 가끔 생각해요. 사실은 이게. 영화, 그. 탈룰라 쇼 같은 게 아닐까요?”
옆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트루먼 쇼 말하는거지, 쟤.”
김예성이다.
“네 친구.. 좀.. 이상한 것 같은데.”
김예성은 더벅머리 이유찬을 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친 사람 맞아.”
나도 인정한다.
어쩌면 적응 문제는 과한 걱정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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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확실히 날이 따뜻해졌다.
바다에 들어갈 수는 없는 날씨지만 야외 활동을 하기에는 충분했다.
낮에는 족구.
“예성이 얘 완전 물근육 아니야!”
“헬스랑 족구가.. 달라서 그래.”
“이거 처음부터 멤버로 승부가 정해지는 거였어!”
“권건이랑 윤도형 둘이 다 해먹음!”
“정글이랑 족구가 뭐 관련 있는 거 아니냐?”
“감독님은 가서 감독하세요.. 제발.”
“얘들아, 나도 군대에선 족구왕이었다.”
“형님. 그런 꼰대같은 소리 하지마시고 저랑 같이 심판이나 보죠.”
“이리 오세요, 애들 노는 데 그러지 마시고..”
“아니 나는 숫자 맞춰주려고..”
“그냥 예성이를 빼자.”
“두고봐. 나 계속 족구 연습할거야.”
누가 스포츠 선수 아니랄까봐.
다들 대단한 승부욕이었지만 나를 족구로 이기는 건 백 년은 이르다.
특히 김예성은 생각 외로 대단한 몸치여서, 체력 단련과 구기 종목은 전혀 다르다는 걸 보여줬다.
하지만 이 완벽주의자의 모습을 보아하니.. 조만간 족구 학원같은 곳이라도 등록할 것 같다.
그런 게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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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KL_Class
- (사진)
내 소중한 동료들^^
#FWX #FWX클래스 #응원환영
#채육도 #잘해요 #못하는개 #없는 #우리팀^^
ㄴ 워크샵 가신거에요? (이모티콘)
ㄴ 클래스 클래스(하트)
ㄴ 형 이번 시즌도 좋은 모습 보여주세요!
ㄴ 스트레스 다 풀고 이번 시즌에도 바도 유마 가자! 최강 FWX!
ㄴ 뒤에 있는 저 사람은 스태프?_? 어려보이는데
ㄴ 클래스 선수 맞춤법 맨날 틀려ㅎㅎ
ㄴㄴ 여러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께요(이모티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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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는 퀴즈 콘텐츠 촬영.
“파인애플 피자, 먹을 수 있다. 없다.”
진행자를 맡은 문봉구가 카드를 읽으면.
“X!”
“O!”
“야, 팀끼리 맞춰야 된다니까.”
“YB애들은 다 맞는데 우리는 왜 안 맞냐?”
팀별로 같은 대답을 해야한다.
이유찬, 나, 김예성으로 구성된 상체 조합은 동갑내기 YB.
윤도형, 곽지운, 최은호가 동갑으로 OB다.
우리는 모두 O.
“권건 선수는 파인애플 피자 좋아하세요?”
“선호하지는 않지만 권하면 먹습니다. 취향존중 해야죠.”
“라온 선수는요?”
“저는 싫어해요. 그렇지만 팀원들이 O를 선택할 것 같아서요.”
“그럼 차니 선수는 어떠신가요?”
“저는 피자 완전 좋아해요! 먹는 건 다 좋아해요.”
“아.”
이유찬은 카메라 울렁증 따윈 없는지 따봉까지 해주며 웃었다.
마이웨이의 탑, 뭐든지 상관없는 나, 그리고 맞춰주는 미드.
이 밸런스를 천천히 정리한다면 꽤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뭐, OX 퀴즈와 실제 경기는 다른 거긴 한데.
‘몸으로 말해요’에서도 이유찬이 활약해주면서.
저녁 식사 뒷정리 내기 퀴즈는 우리의 압승이었다.
“이건 불합리해!”
“하이고. 우리 깍지 형, 뭐고. 뭔데.”
“OX 퀴즈는 지력이고 몸으로 말해요는 체력이잖아!”
“근디?”
“지력은 마법사 스탯이니까 예성이가 유리하고, 체력은 전사니까 유찬이가 유리하겠지!”
“죄송합니다. 우리 애가 또 실례를..”
“아니, 은호 형. 말리지 말아봐. 제법 그럴듯 한데? 그럼 원딜과 서포터는 뭐여?”
“원딜은 동체 시력! 그림 퀴즈같은 거! 그리고 서포터는 내 알 바 아님.”
“깍지 너 뒤지고 싶냐?”
“아니지. 깍지 형, 헛소리 하지말고 원딜은 설거지하고 서포터는 옆에서 서포팅혀. 도형이 형이 로밍 다니고.”
“봉구가 솔로몬이었다. 나는 이의 없음. 제일 마음 잘 맞아야 하는 두 놈이 트롤해서 졌다. 내가 그릇들 모아서 갖다줄게.”
둘이서 한바탕 날뛰기 시작하자.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선수들도 금방 편하게 대화하기 시작하면서 저녁 식사 시간이 왔다.
메뉴는 평범한 바베큐 파티였지만 맥주를 마신 곽지운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건이.”
“네.”
“내가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곽지운은 알콜에 약한지 한 캔도 안 마신 것 같은데 얼굴이 벌겋다.
그래도 취한 기색은 아니다.
“말씀하세요.”
“너 왜 우리한테 반말 안해.”
“형님. 제가 반말 해드릴까요?”
“유찬이 얘는 너무 과속해서 문제인데. 너는 왜 아직까지도 말을 안 놔?”
“음.”
나는 대답을 아꼈다.
너무 친해질까봐, 라고 하면 좀 이상할 것 같고.
사실 내가 나이가 너희보다 많아서, 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다.
“설마.”
최은호가 끼어들었다.
“혹시 우리를 너무 존중해서?”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이라도 야자타임 한 번 할까?”
“좋다, 좋아.”
“그래. 그러자, 얘들아!”
“이유찬 얘는 진짜 돌았나보다.”
“하라면서.”
“아니, 너 말고.. 아, 사람이 이렇게 꼰대가 되어가는 건가.”
최은호는 머리를 짚었다.
“자, 건아. 편하게 말해봐. 동갑이라고 생각하고.”
“지금부터 우리는 다 너랑 동갑이야.”
최은호와 곽지운이 입을 모아 말한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
콘텐츠 팀에서도 숨을 죽이고 나를 바라본다.
그럼, 한 마디 해줄까.
“바텀 듀오.”
나도 모르게 고개가 삐딱해진다.
“너네들..”
내가 더 말을 이으려고 할 때.
“잠깐! 잠깐, 잠깐!”
“오마이갓. 야. 안되겠다.”
“너도 느꼈냐?”
“어, 어어, 야자 타임 스톱. 스톱.”
아니, 왜.
아직 말은 시작도 안했는데.
“뭔가 엄청 혼날 것 같았어. 이거.. 왤캐 왤캐임?”
“내 말이.. 나 등에서 식은땀 났어. 번개 떨어진 것 같다.”
“우리 그냥 좋은 형과 동생 사이로 지내자.”
허둥대는 두 사람을 보자 그냥 좀, 웃겨서 물을 마셨다.
하지만 올라가는 내 입꼬리를 이유찬이 봤나보다.
“형님, 이 새끼 웃는데요?”
“내, 냅 둬. 제발. 건드리지 말자고.”
뭐, 내 덕분에 다들 친해보이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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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탄산수를 들고 제주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이유찬이 다가왔다.
“야.”
“왜?”
“나, 잘 할 수 있을까.”
아까까지 떠들어대던 것과 달리, 눈빛이 조금 가라앉아있었다.
“내가 봉구 형을 밀어낸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군.
글쎄.
이런 부분에 대해서 할 말은 없다.
그래도 이건 상당히 긍정적인 계승이었으니까.
아니, 어쩌면 그래서 더 부담일 수도 있겠다.
“그럼 잘하면 돼.”
“그건 맞지.”
“열심히. 너도 잘하려고 노력 많이 했잖아.”
이유찬은 휴가 내내 나를 쫓아다녔다.
고등학교 동창.
이사를 가지는 않았으니, 같은 동네라는 뜻이다.
“나는.. 내가 진짜 잘한다고 생각했어.”
“너 잘해.”
“근데 널 보니까 팀 플레이까지 잘하는 게 뭔지 좀 알 것 같다.”
“그래.”
그리고 그 휴가 기간 동안, 이유찬이 나에게서 얻어간 것들은.
언젠가 이야기 할 날이 올 것이다.
이야기 하지 않아도 선수는 경기로 보여줄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탑 좀 밀어줘라.”
“탑은 알아서 해야지.”
“나 막내잖아. 응애, 나 아기 유찬이.”
뻔뻔하게 저 얼굴로 응애?
웃고있으니 불쑥 김예성이 나타났다.
“너네 여기서 뭐해.”
“왕한테 인사 드리는 중.”
“우리가 봉건제야?”
“봉?건?이?”
김예성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건아, 우리 약속 잊지마..”
무슨 약속?
얘도 은근히 주어나 목적어를 생략한다.
“미드..”
“탑..”
우리는 또 다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구름이 걷힌 하늘에서 별이 반짝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