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데뷔, 은퇴
때론 여러 페이즈를 두고 느릿느릿하게 진행되는 한타도 있지만.
이번 전투는 순식간이었다.
“으악, 으악, 으아아아아아아악!”
“아니! 아니! 테러! 테러의 리싱이! 리싱이 날아들어오는 순간! 팬시가!”
“이거 완전히 낚시가 됐어요! 팬시가! 점멸로! 리싱을 깊숙히 낚아 올리는 순간!”
문봉구가 한 번 더 옳게된 반응을 하고.
“권건 선수가 그냥 낚아 챘어요! 그냥 점프 캐치! 마이 볼! 마이 볼! 어디로 들어올 줄 알고 있었나요! FWX 선수들이 확 돌아섭니다! 완전히 예측한 움직임! 이거, 그라가즈 궁 완전히 빗나갑니다!”
“광역기가 광역으로 들어가야하는 조합인데! 미라쥬! 손실이 큽니다!”
FWX의 팀원들이 한 몸처럼 움직였으며.
“또, 또, 또오오오오오!”
“또오오오오오! 또 권건이..! 심장 뽑고 또 뽑고! 이거 너무 잔인해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는 참혹한 광경! 이거 태그 달아야해요, 미성년자 관람 불가!”
“으아아아아아! 테러 선수, 사라집니다!”
권건이 난도질을 하자.
“손절, 손절해! 손절해! 정글 버려! 빠르게 빠집니다, 미라쥬!”
머리를 잃은 상어 떼가 뿔뿔이 흩어진다.
“하지만 따라 들어온 탐 진치는 벗어나지 못하면서! 여기서 함께 쓰러집니다! 어어어, 어어어! 리싱? 리싱? 아니죠! 리싱 아니고 리싱 몸을 뺏은 비예고! 권건, 멈추지 않아요? 멈추지 않아요, FWX?”
- 팬시 아 시발 저 아 시발
- 권건이 리싱을 하고 있는거냐? 혼자 캐릭 두 개 쓰냐?
- ntr 좆되네.. 아.. 오늘 테러 왜 이러냐
- 아ㅋㅋㅋㅋ시발ㅋㅋㅋㅋ 미라쥬 머해.. 분노.. 압도적 분노..!
- 사람을 미끼로 쓰다니.. 그야말로.. 악마적 발상..!!
- 술렁..! 술렁..!
“자이야를 노리는 르블란에게 음파 맞춰놓고! 돌아가는 순간 적진에 침입! 저걸! 저걸 저렇게 이용한다구요! 크윽, 리싱 이 녀석! 몸을 빼앗긴거냐!”
“본체로 돌아온 권건은 너무 강해요! 너무 강합니다!”
그리고 끝내, 진짜 괴물을 마주한 상어들이 경악하자.
“내가 그리도 만만하드나.”
미끼였던 문봉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추모했다.
“게임 흔들립니다! 파괴전차, FWX! 부릉부릉! 부르르르르르릉!”
“큰일입니다, 미라쥬, 비상! 비상! FWX의 낚싯대에 대어가 걸려듭니다!”
“오브젝트를! 먹는! FWX를! 건드려?! 밥 먹을 때는 뭣도 안 건드린다고 했는데?! 전군, 출격! 출격하라!”
“아펠까지 심장이 파괴당하면서! 먹고, 또 먹고, 먹고, 또 먹고! 시체 쑈! 쑈! 쑈! 여기까지! FWX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면서! 바론을 차지합니다!”
해설진은 소리를 높였고, 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경기는 자연스럽게 FWX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압도적으로 1세트를 마치고 난 뒤였음에도.
FWX의 코치 박스의 분위기는 평소보다 엄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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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생각보다 팬시 괜찮지 않아?
ㄴ 폐관 수련 조졌나? 생각보다 좀 치네?
ㄴㄴ 저게 치는 걸로 보이냐?ㅋㅋㅋ 그냥 처음에 잘 빤거지
ㄴㄴ 뽀록임 ㅋㅋㅋ
ㄴㄴ 내려치기 좀 하지마라 근데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함ㅋㅋㅋㅋ
ㄴㄴ 팬시 은퇴 기원 214일차ㅗㅗㅗ
ㄴ 이것이 ‘역발상’의 FWX?
ㄴㄴ 쓰레기 재활용 오지네ㅋㅋㅋ
ㄴ 미친 팬티가 얼마나 착한데;
ㄴㄴ 저 새기들 전부 분탕임ㅡㅡ 잘나가니까 팬인척
ㄴㄴ 어떻게 문방구를 미워할 수가 있지?
ㄴㄴ 쫌 못하긴 해 시발ㅋㅋㅋㅋ
ㄴㄴ 그렇긴한데.. 우린 못났던 시절을 함께 했잖아..
ㄴㄴ 프로가 게임을 잘해야하는 게 맞긴 한데.. 존나 정들어서..
ㄴㄴ 이것이 약팀 감성ㅋㅋㅋㅋㅋㅋㅋ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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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트를 지켜본 미라쥬의 감독, 김병우는 당황했다.
평소를 생각하면 탑을 파는 것이 틀린 전략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생각보다 오늘 상대 탑의 컨디션이 전에 없이 좋아보인다.
마치 배수진을 펼친 사람처럼.
“이건 적의 전략이야!”
그래서 단호하게 선수들에게 경고했다.
“상대가 뭘 골라도, 절대. 절대! 흔들리지 마라. 굳이 탑에 빨려들어갈 필요 없어. 그냥 평소 하던대로 바텀 중심으로 가자.”
그러나.
다음에 나온 픽은 더욱 더 군침이 도는 것이었다.
“이렐리야요?!”
“미드 이렐리야인가요? 아닌데..! 죠이가 탑으로 갈 리는 없으니까! 탑.. 탑입니다! 이게.. 카운터.. 카운터는 맞거든요!”
“레드 진영의 FWX가 마지막으로 탑 이렐리야를 선택했습니다!”
“이게, 이게 정말 FWX의 픽인가요?”
- ???????
-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거임???
- 칭찬 좀 해줬다고 바로 팬시한테 이렐을 주면 어떡해요!
- 조울증있어 FWX?
- 싱글벙글 “이렐은 서부의 권리”ㅋㅋㅋㅋㅋㅋㅋ
- FWX정도면 명예 서부 시켜줄 수 있지 않냐?
- 어? 그럴듯한데?
- 지랄 노
레드 진영에서 마지막 픽으로 FWX가 이렐리야를 가져가면서.
문봉구는 김진승의 냐르에게 칼을 뽑아들었다.
“지금.. 이게 무슨, 저희가 세기말, 세기말 했지만 이건 진짜.. FWX 한정, 정말 새로운 픽입니다!”
“최종적으로 미라쥬는 냐르와 친 짜오, 백스, 아펠, 레오니로 조합을 결정지었고!”
“FWX는 탑에서 이렐! 그리고 비예고, 죠이, 진, 노틸로 진행합니다!”
“FWX의 새로운 시도! 좋습니다! 지금 바로 경기 만나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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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라는 말이 있다.
식사를 함께하는 사이.
그러니까, 음.
뭐랄까.
나는 어느새 제법 이 팀에 정이 들었던 모양이다.
병아리처럼, 엄마 닭을 쫓아 뭘 좀 배워보겠다고.
나 좋다고, 열심히 하겠다며 쫓아오는 사람들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
어차피 내가 궤도에 오르고 난 뒤 들어갔던 모든 팀은 당연히 국내 리그에서 1위를 기록했다.
아마 문봉구가 그대로 있었어도 어떻게든 내가 이 팀을 1위로 만들었을거다.
그럴텐데.
그럴텐데도.
더 나은 팀이 되라며 자기 자리를 양보하는, 개인으로 보자면 프로 실격인.
아예 이해할 수 없는 이 사람을.
“이이이야, 좋다. 내가 이렐을 다 잡아보고.”
나는.
미워할 수가 없다.
“야, 건아. 기억 나나.”
“뭘요.”
“내가, 냐르랑 이렐 구도가.”
문봉구는 웃고 있었다.
미친 사람이다.
“이렐이 좋다고. 기억 나나?”
“네.”
“나도, 사실은 말이지.”
“아, 좀 조용히 좀 해, 문봉구!”
곽지운이 뭐가 그렇게 속상한지 느닷없이 짜증을 냈다.
다 멍청이들이다.
“이렐 좀 친다. 진짜다. 스크림에서도 봤잖어. 믿어. 나, 잘 할 자신 있다. 알았지?”
“안그래도 탑은 안가려구요.”
“당빠지. 오지 마라. 필요 없어. 탑에 아무도 오지마! 남자의 싸움이다.”
그래서 나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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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와. 이거, 어떻게 해야 되냐?”
“나도 존나 모르겠는데.”
이렐리야가 레드 마지막 픽으로 나왔기에.
미라쥬 감독이 남기고 간 말은 짧았다.
탑에 어그로 끌리지 마라.
하지만 이렐리야를 보고 나서는 김병우 감독도 말꼬리를 흐렸다.
선수들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첫 판에서는 갱플.
두 번째 판에서는 이렐리야.
근데 파일럿이 팬시?
아무리 빨려들어가면 안된다고 했다지만.
이건 너무 큰 유혹이다.
이번에도 커다란 청새치가 피를 뚝뚝 흘리며 상어를 유혹한다.
어쩌면 아까보다 더 크고 더 맛있어보인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지?
이걸 어떻게 참아?
분명히 꽁킬이 쏟아질텐데.
하지만 전 세트를 생각하면 또 마음이 불편하다.
“아, 조오오오온나.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만큼 어렵다.”
“이거 얘네 전략 맞냐?”
“몰루? 뭔가.. 이거 진승이 형 때문인 거 아니야?”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형이 옛날에 쟤 괴롭혔잖아.”
“아씨, 그거 사과했다니까. 그냥 나한테 맡겨봐. 내 냐르 칼챔이잖아. 내가 죽여놓을게.”
“형 진짜 실수하지 마라.”
“야. 나 믿어. 오케이?”
“오케이.”
하지만.
정글러 이인혁도, 미드 안희종도.
자꾸만 탑 쪽으로 가는 시선을 어찌 할 도리가 없다.
“일단, 침착하게.. 지금 쟤네 시야 관리한 거 보니까 정글이 탑 쪽 먼저 봐줄 것 같거든?”
“맞지. 아마 팬시가 약하니까 탑 봐주려고 하겠지?”
“아니, 근데 그럴거면 이렐을 왜 뽑아?”
가치관이 충돌하면서 혼란스럽다.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가 없다.
동선 짜기가 불편하다.
“음.. 일단, 그래. 이렐리야가 아니라고 생각하자.”
“좋아. 신경 꺼.”
“흔들리지 말자.”
그리고 게임이 시작된다.
“희종, 혹시 정글 찾아 줄 수 있어? 일단 이쪽 시야엔 안 잡히네.”
권건에 대한 지나친 의식.
“아니, 라온 얘 지금 딜교 좀 빡세게 해서..”
“이렐 무빙 보니까 탑 쪽인 것 같은데?”
“자신감 넘치긴 하네.”
“일단 경계하면서 권건 빨아들여. 나 바텀 가는 중.”
그리고 분명히 뒷걸음질 치는 이미지의 탑이 앞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정보에 교란이 생기고.
“아, 지금, 지금 바텀 방향, 이른 타이밍! 권건의 3레벨 타이밍 직선 갱!”
상대 정글러가 탑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미라쥬의 뒤통수를 정통으로 때린다.
“어어어어어, 지금 반 박자 빨라요? 이거 꼬리를.. 꼬리를! 꼬리를 물 수있나요! 클래스! 낚아챕니다!”
“레오니, 레오니, 헥사 선수! 물립..!”
“이야, 순식간에 퍼블을! 가져갑니다!”
탑을 한 번 봐야하나 했던 약간의 망설임.
이제야 바텀에 도착한 친 짜오는 남은 라인 정리를 도우며 미간을 찌푸린다.
“어, 뭐지. 대체..”
리그는 서로 경쟁 구도라고 하지만, 서로 가까운 구단이 있다.
광주 미라쥬는 사실 다른 팀들과 그렇게 관계가 좋은 팀은 아니었다.
그나마 친한 팀은 대구 유니버스 정도일까.
그럼에도 어깨 너머로 들은 소식에 의하면.
FWX와 경기를 하면 마음을 읽히는 것 같은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가 많다.
선수들의 사소한 습관, 동선, 속도.
그리고 심지어 어떤 상황에서의 선택까지.
갑자기 팬시, 라온, 세자, 클래스 네 선수 중 한 명의 몸에 전설적인 선수가 빙의한 것이 아니라면.
이 변화는 권건에 의한 것이리라는 의견이 많았다.
어떻게 신인 선수가 그런 이해도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경기에서 권건과 마주한 미라쥬 선수들은 눈 앞이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그럼.. 탑은?”
“권건 바텀이었지?”
“어?”
상대 탑이 뭐였더라.
아차.
아차, 상대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말 걸.
정글러 이인혁은 순간적으로 숨을 들이키며 경고핑을 찍었다.
날카로운 소리가 울린다.
“팬.. 팬시, 팬시.. 패애애애애애앤시!”
이건.
함성의 진동인가.
아니면 싸늘해진 몸의 떨림인가.
“솔-로-킬!”
“팬시, 팬시가! 팬시가! 미라쥬가 자랑하는 최고의 갑옷, 사우전드를 뚫고! 솔로킬을! 가져갑니다!”
“아주, 아아아아주 정확한 스킬샷이었어요! 냐르가 폴짝 뛰어봤지만, 쌍검 협무 끝자락에 걸리면서! 그대로! 넘어갑니다!”
“바텀에 테러 선수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부터, 확신을 가지고 돌입했어요! 이 선수가 이렇게까지 잘 하는 선수였나요! 도대체! 매력이 얼마나 많은건가요! 까도! 까도! 매력덩어리! 양파! 양파같은 매운 맛! 여태까지 스스로를 봉인하고 있었나요!”
“아! 요즘 FWX가 진짜 리듬감 넘치는 팀이거든요! 하나의 오케스트라! 리듬감 정말 훌륭했습니다! 난! 가끔! 춤을 춰! 팬시 선수, 춤을 추고 있어요!”
- 미친미친미친미친
- 이거 시즌 최초 아니냐? 팬시 여태까지 솔로킬 기록 있기나 했냐?
- 심지어 상대가 사우전드ㄷㄷㄷㄷㄷㄷ
- 뭐야 진짜 얘 각성함?ㅋㅋㅋㅋ
- 이 정도라면 FWX의 신입 탑으로 받아줄 수 잇을지도ㅋㅋㅋㅋ
- 방금 살짝 탑같았어ㄷㄷㄷ
“오늘에서야, 오늘에서야! 정말로 팬시 선수가 칼챔으로! 데뷔전을 펼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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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봉구는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권건이 진짜로 탑을 안 봐주고 바텀을 먼저 간 건 좀 의외다.
탑에 아무도 오지 말라는 말을 하면서, 와달라고 열심히 눈빛을 쐈는데.
비언어적인 표현에는 서툰 친구로구먼.
“히야. 내가 해냈어.”
벙싯벙싯 웃음이 나온다.
오늘따라 손 끝에 닿이는 키보드 감각도, 마우스의 움직임도 또렷하게 느껴진다.
나를 무시하던 상대 탑에게 복수도 했다.
“매일이, 오늘만 같았으면 좋겄다.”
왜인지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그치? 다들 탑 차이라고 생각하지?”
문봉구는 은퇴식을 하듯이 경기에 몰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