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나의 날은 무수히
문봉구와 김진승의 마찰.
문봉구는 내가 이 이야기를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똑같은 곳을 계속 구르다보면 별별 이야기들이 귀에 들어온다.
뭐, 골자는 단순하다.
김진승의 문봉구 저평가.
그 사이에 욕설이 들어간 것은 물론이다.
이런 사건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자신이 프로가 될 줄 몰랐던 선수가 이런 일을 저지르고 허겁지겁 사과하는 경우도 있고.
모든 계정명을 알고 있을 수는 없으니 상대가 프로나 방송인인 줄 모르고 발언을 했다가 민망해지는 경우도 있다.
이미 종결된 일이라고는 하지만.
문봉구의 마음 속에서까지 사라졌을 리는 없다.
지난 주말, 문봉구는.
팀원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하나하나 시켜놓고.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자리를 비켜주고 싶다고 말했다.
“야, 니들 왜 이러는겨. 웃어, 모두 웃으라구.”
원래는 한창 욕을 먹던 지난해에 이른 은퇴를 생각했었다고.
아직 팀에 적절한 선수가 없었던 탓에 팀에서 문봉구를 잡았지만, 내가 들어온 후.
이제는 자기가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민망하다 했다.
버틸 수 있냐, 없냐의 문제보다도.
가용 챔피언 풀이 좁은 이상 더 위를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문봉구의 한계.
다만 문봉구가 바라는 것은.
항상 놀림받는 탱커 삼신기, 그것만큼은.
그것만큼은 미라쥬 김진승 앞에서 꺼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저, 다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뿐이여. 덕분에 말년에 행복했으.”
이번 시즌, 2군 경기에서 압도적이라는 평가를 듣는 이유찬과.
자신의 데이터를 스스로 들고와서 비교하면서.
이 친구가 경험이 부족하더라도 경기력과 육성 면에서는 나을 것이라고, 직접 설득했다고 한다.
“패배로만 남았을지두 모를 나의 무수한 순간들을, 소중하게 만들어줘서 고마워.”
스스로를 샌드 다운하며 누군가를 콜 업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정말로 있었다.
“이제 나는 자유의 땅으로 떠날 것이여.”
“설마 군대는 아니겠지?”
“끔찍한 소리하지 말어! 말소는 아니여! 갈라믄 깍지 형이나 가!”
#
“지금 시즌에서 비예고가 정글이 느린 챔피언은 절대 아니지만, 시각적으로는 느리다는 이미지가 있거든요.”
“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동작이 크면 좀 그렇게 보이긴 하죠.”
“하지만 지금 권건 선수의 움직임은, 뭐랄까..”
- 아이템이 하나 더 나와있는거 아니냐?
- 몰라 존나 빨라ㅋㅋㅋㅋ
- 저기서 잡는데 왜 초기화 안되냐고ㅋㅋㅋ
- 확실히.. 기본기가 되어있는 선수로군요.
- 니가 뭔데 기본기가 ㅇㅈㄹ?
“네. 굉장히 기민합니다. 오늘따라 동선도 더욱 적극적이구요. 이렇게까지.. 빠른 챔피언이었나요?”
“방금도 분명 리싱도 내려오고 있었는데 기가 막힌 타이밍에 찔러서 아펠을 확 물러나게 만들었어요.”
“아.. 이 선수 진짜 예술이에요.”
“첫 번째 용, FWX에서 가져갑니다!”
“이거 미라쥬 자존심 많이 상해요? 첫 번째 용 획득률이 굉장히 높은 팀이거든요!”
“하지만 이제 시야를 잘 조절해봐야겠죠, 어, 테러! 다시 탑 쪽?”
“다시 한 번 노려봅니다!”
자기 객관화.
나는 미끼다, 내가 가장 약하니까 상대가 나를 가장 먼저 찌를 것이다라는 생각은 쉽게 하기 힘들다.
프로게이머는 하나같이 자존심이 하늘을 찔러서 더 그렇다.
보통은 내 챔피언이 초반에 약해서.
아니면 내가 팀에서 그런 역할을 맡아서.
이런 것들이 핑계가 된다.
프로가 됐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내가 남들보다 잘하니까, 더 강했으니까 이 자리에 온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결국 여기에 도달한 자들은 그걸 어느정도 이뤄낸 사람들이다.
서로 가벼운 잽을 주고 받고, 종적을 감췄던 상대 정글.
“아아아아아, 다이브! 리싱, 다이브!”
하지만 문봉구는 자기가 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조합이 어떻든 상대가 반드시 탑을 찌르러 들어오는 것이.
‘자기가 만만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어어어? 팬시 선수! 귤! 귤! 귤 밑장 빼기!”
“아껴놨던 귤이 있었어요! 이거, 어떻게! 슈퍼 플레이가 됐는데요!”
“여기서 리싱이! 리싱이 끊기면서! 갱플이 킬을 가져갑니다!”
- 이걸 팬티가?
- 이열ㅋㅋㅋ 소 발에 쥐잡기ㅋㅋㅋ
- ㅋㅋㅋㅋㅋ이런 모습 처음이야~
- 드디어 [각성]해버린건가..
그리고 이런 이야기와 별개로.
오늘의 문봉구는 정말 마지막 힘을 뿜어내듯, 제 역할을 잘 해주고 있고.
“야, 이거는 진짜 운이 좋았다. 이걸 들어와주네. 더블 버프 달달헌데.”
“다음 턴 탑 갈게요.”
“나 괜찮은디.”
내 플레이에 마음이 급해진 상대 정글러의 플레이와 문봉구의 집중력이 맞물려 떨어지면서 기분좋은 출발이다.
“아뇨. 리싱 다시 올 거예요.”
“세 번이나 온다고? 설마.”
나는 갑니다 핑을 찍었다.
빨간 띠와 파란 띠를 함께 두른 문봉구?
이건 못 참을거다.
근데.
미라쥬가 잊어버린 사실이 있다.
문봉구가 약하다고 생각하는 건.
FWX가 약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고.
그 FWX는 내가 있는 팀이라는 거다.
#
“아, 내 버프.”
“까비. 못 참고 들어간 거? 인정. 사나이다웠다.”
“귤 심리전 좀 치네.”
이인혁은 한 쪽 눈을 찡그렸다.
전 턴, 바텀과 탑에서 작은 실점.
게임의 균형이 아주 조금 무너졌다.
근처에서 캠프를 챙기며 생각을 가다듬는다.
지금 바텀을 가기보다는.
더블 버프를 되찾기 위해 탑을 한 번 더 찌르는 선택.
“다시 간다.”
빠른 결정과 실행은 이인혁의 장점이다.
경기를 휘두르는 그의 장기.
그리고 각이 보이는 짧은 순간.
터져나오는 그라가즈의 궁극기가 갱플을 아군 진영 쪽으로 당겨오고.
리싱이 음파와 거의 동시에 벼락같이 달려든다.
“어.”
그리고 그 사이를 가로막는.
“아.”
권건.
비예고의 대검.
그 순간.
움직임이 멈칫하면서 정확하게 각을 만드려던 계획이 흔들리고.
함께 반응한 김진승의 그라가즈가 배를 들이밀었지만.
찰나, 궁극기를 사용한 비예고가 대검을 쳐들고 리싱에게 바짝 붙는다.
“지금 나랑 상대 미드 같이 올라가는 중!”
거의 동시에 미드 안희종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갱플, 갱플부..!”
데미지를 입었지만 재빨리 몸을 뺀 문봉구.
성공적인 화약통과 함께 하늘에서 포탄 세례가 쏟아진다.
순간 이인혁의 머리에 아차 싶은 생각이 스쳤다.
상대도 싸움을 보려고 했던가.
집 갔다가 바로 뛴 건가?
아닐 텐데, 그럼 시간이..
“여..!”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순식간에 리싱은 사라지고 만다.
“빼, 빼, 빼, 빼!”
김진승이 다급하게 소리쳐보지만.
이미 리싱으로 몸을 갈아탄 권건이..
권건이, 없다.
자기도 모르게 숨이 막혔던 탑, 김진승은 재빨리 전황을 훑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권-건! 미쳤습니다, 권건!”
“그라가즈를 보는 게 아니라 올라오고 있던 르블란을 향해 접근하는 판단! 이쪽으로 돌아설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순식간에 점멸과 음파로! 아니, 리싱이 원래 자기 몸인 것 처럼!”
“르블란, 점멸 없습니다! 도망칠 수 없어요! 아라와 협공! 어딜! 어딜 가려고!”
마치 맵이 한 뼘도 안된다는 듯.
“이, 이 선수! 순간 판단 돌았어요! 더블 킬! 또 다시 몸을 갈아탑니다!”
대검을 든 지배자가 아군의 마술사를 잡아먹고 입맛을 다시고 있다.
괴물이다.
맛있는 먹이처럼 보였던 상대 탑은.
괴물의 아가리를 향하는 지름길이었다.
아주 잠깐의 유예.
이미 상대 갱플의 포탄 세례는 그쳤지만.
김진승의 귓가에는 어디선가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아라, 아라가 이미 합류했어요!”
“그라가즈, 살아갈 수 있나요?”
탑 라인의 망신거리였던 문봉구가 당당한 발걸음으로 다가온다.
궁극기? 사용했다.
패시브? 돌긴 했지만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이제 르블란의 몸을 차지한 심장 파괴자가.
그리고 그 옆에 선 아라가.
서서히 목을 죄어 오고 있다.
끝내, 김진승은.
“아.. 씨바, 존나 운 좋은 새끼..”
한 마디를 간신히 내뱉으며.
문봉구의 총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탑까지! 이거, 이거, 진짜..”
“완전히.. 완전히 미쳤어요. 방금 스킬샷 미쳤어요, 권건!”
“권건 선수가 턴을 길게 늘여썼거든요? 그러면서 귀환 페이크. 당연히 집에 갔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상대가 올 거라고 확신했나요? 그렇지 않았다면 권건 선수도 굉장히.. 아, 지금 보니 뒤에서 렐도 탑을 향해 움직여주고 있었군요. 완벽하게 예측한 것 같습니다.”
“하, 사실 정글러 입장에서는 더블 버프를 빼앗기고 나면 진짜 마음이 불편하거든요. 범인은 현장에 다시 돌아온다는 말이 있죠. 어쨌든 이렇게 완전히 읽히면 다음 플레이가 상당히 불편해집니다.”
- 탑 3연참은 너무한거 아니냐고ㅡㅡ
- ?팬시? : 저런 애들은 탑이라고 불러주면 안된다, 민폐
- 사우전드는 할만큼 했음ㅋㅋㅋ 아니 테러는 굳이 더블버프 찾으러 탑에 왜감?
- 전에 붙었을 때는 갈 때마다 죽어줬으니까 ㅆㅂㅆㅂ
- 대?몰?락?
- 문?봉?구? 오늘? 최강? 머선 일?
- 미라쥬 게임 존나 감정적으로 하네^^발
- 나라도 문봉구가 탑이면 갱 마려운데;
- 미라쥬 정신 좀 차려! 미라쥬 정신 좀 차려! 미라쥬 정신 좀 차려!
- 치감 가라 빨리
“팬시 선수도 요즘들어 부쩍 좋아진 선수 중 한 명이죠. 그나저나..”
FWX가 이렇게까지 킬 스코어를 유리하게 시작한 경우는 많지 않다.
하지만 오늘은.
마치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처럼.
왠지 화가 나 있는 경기력이었다.
“그가.. 그가 와요.”
경기가 점차 흐르고.
“하..그가 오고 있어요! 발걸음, 발걸음마다! 땅이 뒤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비예고가, 지금. 온 몸에 금칠을 했어요. 지금 완전. 완전 부자였는데. 전재산을 다 탕진하고 왔습니다. 상점 다 휩쓸었어요!”
짙은 안개가 물가를 덮을 때면.
“왕이.. 왕이, 권건이. 협곡을 누비고 있어요.”
미라쥬는 어느새 몸을 움츠리게 된다.
“이거, FWX. 또 다시 시작했어요. 절대 인원수에서 밀리지 않는 운영..”
원래도 잘 해주던 미드 라이너는 정글러의 힘을 등에 업고 배가 되고.
강한 미드는 위 아래로 영향력을 펼친다.
“상당히 이른 타이밍, 바론 앞에서 살짝 싸움 보나요?”
그리고 몇 번의 재고 끝에.
FWX는 비로소 바론으로 손을 뻗는다.
“아, 두 팀!”
“지금 미라쥬는 바론 주기 싫어요! 그리고 싸움을 굳이 피하는 팀이 아닙니다. 지금 진짜 잘 큰 건 상체거든요. 바텀은 비슷한 수준입니다. 이 정도면 싸워볼 만해요.”
“한타 볼까?”
미라쥬의 원딜러 박화준이 물었다.
바텀에서 킬 교환을 해내면서 힘이 없지는 않았지만 상체는 불리하다.
“아아아아, 형, 형, 이거 싸움은 하지 말자.”
하지만 이인혁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정글러의 의견이 가장 존중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그건 오브젝트 앞에서다.
“오케이.”
“자이야랑 렐은 궁 빼놨고, 자이야 플은 있어.”
“가능하면 아라부터.”
“지금 비예고 템 존나 힙스턴데..? 우리 리싱은 왜 알몸임?”
“와우.. 리싱 템트리 아찔하네. 19금이다.”
“아, 나 똥 쌌다. 맞으니까 그만 좀 하라고.”
“권건 쟤 솔직히 진짜 너무 부담돼.”
“쫄?”
“어. 쫄.”
천천히 조여드는 타이밍.
“내가 스틸을..”
“오우, 인혀기.”
“너를 믿고 있숴.”
판단하기 애매하다.
상대의 스펠과 궁은 상당히 많이 빠져있지만, 정글의 성장 차이와 갱플 궁은 껄끄럽다.
싸움을 보는 게 나을까?
스틸을 보는 게 나을까?
성공적인 스틸만큼 좋은 건 없다.
하지만.
“안되겠다. 양보하자. 빼자.”
“아!”
곳곳에서 아쉬움이 터져나온다.
별 수 없다.
정말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권건이 두렵다.
포기하는 게 옳다는 생각에 한 발, 두 발 물러선다.
미라쥬가 뒤로 물러나자 FWX가 바론에 돌입.
“FWX에서 먼저 칩니다! 물럿거라! 물럿거라! 갱플의 포탄 세례!”
“살짝 빠졌던 미라쥬, 미라쥬! FWX는 바론에 몰두하나요? 버스트 가나요!”
“어, 갱플 궁 빠졌다!”
“야야야, 쟤네 친다. 괜찮을 것 같은데? 같이 들어가줄 수 있어. 우리 사고 한 번 칠까?”
미드의 말.
“나 궁 있어. 묶어놓을 수 있어.”
원딜의 속삭임.
“나도 궁 있어. 먹어줄게. 핑퐁 잘하면 될 듯.”
그리고 따라오는 서포터의 첨언.
“갱플.”
그리고 튀어나와있는, 여전히 만만한 갱플의 움직임에.
미라쥬 안에 숨겨져있던 상어의 혼이 순식간에 불타오른다.
전환이 빠른 팀이다.
권건이 보여줬던 당구 킥?
아마도 자신있다.
리싱 권위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대답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
“갱플 쪽 진입해서 바로 궁 없는 자이야 보자.”
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