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83화 (84/326)

83화. 미끼

“우리 워크샵은 어디로 가요?”

“제주도야.”

“다른 게임팀 사람들도 같이 가나요?”

“아니, 우리끼리.”

“야! 봉구야! 우리 워크샵 제주도래!”

만약 여기에 미드 시즌 세계 리그 일정도 있었다면 좀 더 빡빡했겠지만, 지금의 FWX는 참가할 수 없다.

스프링 우승팀이 참가하니까.

다만 일정 설문지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번 시즌 1위가 확정된 인천 트릭스터에서 우리에게 스크림 협조 요청을 해 온 모양이다.

이런 건 내가 빠삭하거든.

FWX의 위상이 제법 올랐다는 뜻이다.

팀 간의 관계는 꽤 중요하다.

큰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선수 입장에서는 크게 관련이 없는 일이지만, 괜찮은 스파링 파트너를 갖게 되는 것은 팀에서 관리하는 중요 사안이다.

물론 1위 팀 입장에서 치명적인 라이벌인 스톰이나 빅스 대신 조금 더 만만한 우리를 고른 셈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런 스크림은 선수들의 실력 향상에도 분명히 도움이 된다.

이른바 선의의 연습 관계.

하지만 장담컨대.

우리는 결국 그들을 잡아먹고 말 것이다.

“어, 밖에 뭐 왔어.”

그리고 갑자기.

배달 음식이 끝도 없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뭐야! 뭔데?”

“지금 동시에 세군데에서 온 거야?”

“혹시 팬분들께서 보내주신 건가요?”

“문어 치킨이다!”

“뭐에요? 갑자기 깜짝 파티?”

“설마 우리 바로 시즌 오프예요?”

“또 왔어, 배달!”

모두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감독님과 코치님은 묘하게 아쉬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

그리고.

다음 경기는 놀라울만큼 빠르게 다가왔다.

“대전 FWX와 광주 미라쥬, 광주 미라쥬와 대전 FWX의 경기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2 라운드의 마지막 주차! 마지막 주차의 첫 번째 경기입니다! 시즌 끝이 성큼 다가왔는데, 아직까지도 순위 변동이 끊임없습니다. 그리고. 정말 혹시나! FWX가 플레이 오프에 진출하지는 않을지!”

“하지만 부산 호넷과 수원 해머스가 만만치 않아요. 일단 오늘 경기에 집중해야겠죠.”

“상위권 싸움도 치열합니다. 특히 빅스와 트릭스터, 스톰이 FWX에게 연달아 꺾이면서 어부지리로 광주 미라쥬가 2위까지 치고 올라왔어요. 플옵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오늘 FWX를 이겨야합니다!”

- 해설진 선정 금주의 매치.. FWX가.. 이걸..?

- 솔직히 우리 이겨놓고 운빨의 미라쥬 못이긴다?ㅋㅋ아ㅋㅋㅋ 이건 못 참지ㅋㅋ

- 트밑미ㅋㅋ 빅밑미ㅋㅋ 스밑미ㅋㅋ

- 아닌데?아닌데?

- 슬슬 FWX 레퍼토리 떨어져가는거 다 티남ㅋㅋ

- 솔직히 여전히 FWX 좆밥팀이지ㅋㅋㅋ

“팀 스탯 먼저 보고 가시겠습니다, 미라쥬는 전체적으로 관리가 잘 되어있죠.”

“그렇습니다. 바텀 싸움과 용을 선호하는 팀인데요. 그래서 오브젝트 관련 지표가 좋은 편입니다.”

“FWX를 보시면, 지금 사실상 FWX가 리그 중앙값이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어요. 이게 그 전까지는 최하위였다가 권건 선수의 콜업 이후 오브젝트와 팀 파이트에서 사실상 지표가 복사가 되기 시작하면서..”

야속한 시즌은 벌써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아, 오늘 진영 선택권이 있는 FWX가 레드 진영에서 시작합니다!”

“두 팀 밴픽 완료됐습니다!”

“그렇습니다. 미라쥬는 그라가즈와 탐 진치로 앞 라인을 적당히 잡아주면서 진영 붕괴를 막을 수 있게 챙겼고, 리싱과 르블란으로 메이킹을. 그리고 아펠로 조합을 완성시켰습니다.”

“FWX는 아라와 렐을 이용해 이니시 주도권을 챙겼죠. 그리고 생존력이 좋은 자이야를 선택했습니다.”

“특이한 점은 팬시 선수가 갱플랑크를 들었다는 부분입니다. 첫 픽이죠? 여태까지와는 조금 다릅니다. 권건 선수 역시 이번 시즌 첫 비예고를 가져가면서 상당히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같아요.”

“네. 두 팀의 픽 자체는 특별하지는 않지만 FWX가 메인 스트림에 가까운 픽들을 가져간 부분이 재밌네요.”

“후반까지 보자면 저는 미라쥬가 좀 더 든든하게 보여요.”

“네. FWX는 미라쥬를 흔들어놔야겠죠? 지금부터 경기 만나보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점점 더 다가온다.

#

“야, 이번 판은 라온 할아버지가 와도 이기기 힘들 것 같은데?”

객석에 앉아있던 최인규는 옆의 지세현을 쿡쿡 찔렀다.

“아니. 이긴다.”

“미친놈. 허언증 도졌냐?”

“증거가 있다.”

“무슨 증거?”

지세현은 휴대폰을 들어 거래소를 보여줬다.

“너에게 받은 코인. 오르고 있다. 이것은 FWX의 떡상의 징조다.”

“기가 찬다.”

지난 빅스와 FWX의 경기.

빅스가 패배하면서 최인규는 지랄발광하는 지세현에게 약속한 코인을 넘겼다.

정확히는 소정의 내기 값.

지세현은 폐하가 내려주신 군자금이라느니 뭐니 하며 고스란히 그 금액과 용돈을 코인에 쑤셔박았다.

웃기는 일이다.

하지만 소액의 코인을 정리한 최인규가 무색하게 코인은 아주 미세한 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증거가 하나 더 있지.”

“뭔데.”

“너 왜 여기 옴?”

“어..”

빅스 팬이었던 최인규는 말문이 막혔다.

솔직히 빅스가 발리는 걸 봤는데도 어딘지 모르게 가슴이 웅장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FWX가 미라쥬를 이겼으면 좋겠다.

“아마.. 라온 때문에?”

최인규는 옆으로 눈을 굴렸다.

자기가 말해놓고도 손에 든 응원 피켓이 민망하다.

“아니지. 솔직히 FWX의 맛에 빠져버린거지. 봐라. 당나귀같은 라인전, 용과 같은 한타.”

“당나귀정도는 아닌데.”

자기도 모르게 부정하던 최인규는 아차싶었다.

“그래. 다 그렇지. 사랑은 원래 그렇게 시작하는거야.”

“그래서 여친은 있고?”

격렬한 대화가 오가기 직전.

카메라는 두 사람을 비췄고.

- 미래에서 왔습니다! 권건 캐리! FWX 2:0 승리!

- 이 팀은 다릅니다! 절.대.승.리.보.장! 즉석에서 펼쳐지는 차력 쑈, 은밀하게 지금 바로 입장 고 #FWX

현지화된 최인규는 지세현과 함께 열광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

착석하면서 눈이 마주친 미라쥬 선수들은 우리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기를 죽이고 싶어하는 것 같다.

아, 이러니까 인기가 없지.

하여간.

미라쥬는 어떤 면에서는 트릭스터와 비슷하다.

트릭스터보다는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체급이 괜찮은 편이다.

한 가지 더.

이 팀의 성향은 잘 풀리는 라이너에게 더욱 투자를 한다는 것.

많은 팀들이 ‘상체 중심 팀’, ‘하체 중심 팀’ 등으로 불리는 것을 생각하면 조금은 차별점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팀은 한 쪽에서 이득을 보면, 그 쪽으로 고개가 돌아오는 팀이다.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자.

물고기들이 군집을 이루는 것을 볼 수 있다.

무리에 속한 물고기들은 리더 물고기의 단단한 통솔 하에 이리저리 고개를 튼다.

이런 움직임은 몸을 보호할 때도, 스트레스를 낮추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미라쥬는 상어떼다.

그럼.

이 팀의 리더 상어는 누구일까.

정글러다.

테러라는 선수명을 사용하는 이 호전적 성향의 정글러는.

사방을 누비고 다니는 존재인데.

“은호 형, 와드 땡큐여.”

거대한 상어를 꾀기 위해서는 청새치처럼 큰 미끼가 필요하다.

오늘, 청새치는 문봉구다.

문봉구는 오늘 갱플을 골랐다.

챔피언의 난이도는 정말 제각각이지만, 감히 이 챔피언이 ‘쉽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 그렇다.

문봉구와 갱플.

게장과 피자 같은 조합이다.

“봉구 형. 항상 조심해.”

“알겠스, 예성! 공격적이지만 안정적으로 하고, 할 건 해주면서도 안전하게 하란 뜻이여?”

“그거 맞아.”

가벼운 웃음이 터진다.

대상을 LOS 플레이어 전체로 보자면 문봉구는 뛰어난 파일럿일테지만.

대상을 리그로 보자면 좋은 점수를 줄 사람은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캠프 스킵하면서 함 오것지?”

“네. 상대 이른 타이밍에 뜁니다. 조심하세요.”

“고마워.”

정글이 온다, 안온다.

이건 정말 반반이다.

이 반반을 확실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사소한 정보가 필요하다.

가장 좋은 건 스타팅 포인트를 아는 것.

그게 아니라면 첫 번째 갱킹이나 다른 시야에서 모습이 드러났을 때 남은 체력이나 아이템을 보는 것.

만약 아주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경우라면 캠프의 리젠 순서 등으로 추리를 해 볼 수 있다.

상대는 정보를 은닉하기 위해 습관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여기 아주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있다.

상대 정글러 이인혁은 리싱을 잡았다.

문봉구의 갱플은 리그 데이터는 거의 없지만, 다른 라인에 비해 플레이어의 수준이 위협적이지 않음.

내 챔피언은 리싱보다는 기동성이 부족한 비예고.

그럼 어떤 결론이 나올까.

본래 미라쥬는 용을 확보하는 것을 선호하지만.

이번엔 빠른 탑 찌르기를 해서 손해 볼 일이 없다는 쪽에 가까운 결론이 나올 것이다.

“나는 살아있는 미끼의 마음가짐이여.”

그래.

FWX라는 배에 매달린, 아주 먹음직스러운 미끼다.

그리고 상어는 한 번 정한 먹잇감을 놓치지 않는다.

“내가 이런 역할이 잘 맞지, 그쟈.”

이것이.

문봉구가 우리에게 거하게 밥을 사면서 요구한 것들 중 첫 번째다.

#

“형, 얘 이거 아나?”

빠른 동선으로 탑에 도착한 미라쥬 정글러 이인혁은 부쉬 끝자락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몰라. 얘네 탑에 힘 안 실어.”

“오케이. 그럼 아주 잠깐만 더 볼게.”

“와, 근데 얘는 진짜 팔자도 더럽게 좋다.”

경험많은 탑 김진승이 느긋하게 라인전을 하며 말했다.

“아씨. 형, 개소리하지 말고 입에 퍼블 넣어줄테니까 집중 해봐.”

“지가 먹을 거면서. 확인.”

꽤 오랜 시간을 LOS판에서 버텨온 김진승은 문봉구를 잘 알았다.

문봉구는 피지컬은 부족하지만 정보 분석 능력은 꽤 뛰어난 편이다.

상대의 아이템과 레벨 등을 보고 이번 턴에 죽을지 안 죽을 지.

얼마나 맞아도 되는지는 안다는 이야기다.

이걸 알고도 문봉구를 노리는 사람이 왜 있냐고?

아는 것과 맞는 것은 별개기 때문이다.

“아, 저거 스킨 무빙 신경 쓰이네.”

“뭔 듣보잡 스킨이네. 스킨도 꼭 지같은 거 써.”

“진승이 형 말 좀 예쁘게 해.”

“나 쟤랑 친해.”

두 사람은 갱플을 바라봤다.

계획한 시간은 딱 이번 웨이브까지.

점멸 빼기?

아니다.

문봉구라면 킬을 줄 것이다.

이건 못 참지.

“안 친하잖아.”

호두까기 인형을 닮은 문봉구의 갱플이 잠시 시선을 빼앗는다.

얼기설기 움직이는 게 파일럿을 닮았다.

“욕 한 번 하고 사과 한 번 하면 친구지.”

김진승은 개인 방송에서 문봉구에게 입을 험하게 놀렸다가 조용히 사과한 적이 있다.

‘방어력이 높다’는 측면에서 문봉구 따위와 비슷한 부류의 취급을 받는 게 불쾌했기 때문이었다.

크게 이슈화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네임 밸류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문봉구라면 욕을 먹어도 싸지, 따위의 의견이 많았다.

“고.”

#

“이거, 예측했죠? 팬시 선수! 오늘 정말 날렵한데요! 스펠 소모 없이 성공적으로 빠집니다!”

“팬시 선수의 괜찮은 연기였죠! 시간을 소모시킵니다! 성공했으면 꽤 큰 득점이었을텐데, 미라쥬 입장에서는 아쉽게 됐어요!”

- 오ㄷㄷ 어떻게 잘 피했네

- ??? : 팬시 저런 애들은 탑이라고 불러주면 안된다, 민폐

- 아ㅋㅋㅋ 싸우전드 진짜 입 좀 조심하라고~

- 근데 팬시 저 새기 버스만 타는거 너무 역겨움

- 요새 좀 나아진? 것? 같기도?하고?

- 나라도 우정권이면 죽어라고 하겠다ㅋㅋㅋㅋ

- 근데 그 사이에 권건 발 풀리고 있는 것 같은데?

5초.

예상에 더해 문봉구가 추가로 벌어준 시간.

3초.

처음부터 상대의 동선을 가정한 상태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안정적인 정글링으로 벌어낸 상대적 시간.

2초.

이제는 내 동선이 노출되어도 되는 타이밍.

지름길을 가로지르며 절약하는 시간.

“지나갑니다.”

“비예고가 날렵하게 미드를 찌릅니다! 아! 벨 선수, 점멸! 빠집니다!”

“여기서 매혹까지 들어갔다면 자칫 퍼블을 내 줄 수도 있었죠!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하지만 이제 좀 더 사려야 할 것 같아요!”

“건이, 나이스.”

잽싼 르블란을 한 번에 잡아내기에는 이르지만.

예상보다 몇 초 빠르다는 것만으로도 점멸을 빼는 데에는 충분하다.

상대 정글러와 나의 상대적인 시간.

정글링의 절대 시간은 정글링 챌린지로도 그 능력을 보여줄 수 있지만.

전체적인 팀 설계로도 더욱 앞당길 수 있다.

그것은 몇 초에 불과하지만.

그것들이 쌓이고 쌓이면 없을 턴도 생긴다.

“카정 들어가는 동선 그리면서 바로 바텀 뜁니다.”

“오케이.”

거대한 상어가 미끼에 정신이 팔린 사이.

내가 군집의 뒤를 노릴 차례다.

자, 노를 높게 들자.

오늘만큼은 더욱 촘촘하게.

오늘만큼은 더욱 빡빡하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