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더 열심히
- [FWX] 이 시대에 마지막 남은 양심 FWX
ㄴ 핸디캡 주는거 봤냐?ㅋㅋㅋㅋㅋ
ㄴㄴ 아 제발 그냥 쉽게 이기면 좋겠다고ㅋㅋㅋㅋ
ㄴㄴ 빅스전 다시보기나 하고 와라
ㄴㄴ 그건 이미 빛이 되어서 볼 수가 없어
ㄴ 아직 너무 불안함ㅇㅇ
ㄴㄴ 나.. 욕심이 많아져버렸다구?
ㄴ 권건 지금도 솔랭 1위인데 그냥 솔랭 1위가 리그 1위하는 걸로 끝내면 안되냐?
- [FWX] 믿고 있었다구..
ㄴ 존나 소름이 다 돋네.. 시발..
ㄴㄴ 존나 잘하네.. 샷건을 든 권건..
ㄴㄴ 그냥 딜찍누 캐리..
ㄴㄴ 땅땅땅빵 ㅈ된다..
ㄴㄴ 그의 이름에도 ‘건’이 들어가기 때문인가..
ㄴㄴ 나도 폭딜 그브 하러간다..
ㄴㄴ 오늘 솔랭 돌리지마라 시발롬들아..
ㄴ 그래서 우리 혹시 플옵 갈수 있냐?
#
“후, 다행이다.”
박진현 감독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실 게임은 정말 크게 휘청였다.
물론 상대는 약팀.
하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FWX역시 약팀이었기에.
예전이었다면 그냥 졌을 경기다.
권건이 오기 전, 미드를 제외한 기존의 두 팀 체급은 비슷하다고 평가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은 짧은 시간 내에 꾸역꾸역 성장을 했고.
지금은 각자 라인전에서 좀 더 우위를 점했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간을 쪼개서 사용한 권건이 멱살을 잡고 끌어올렸기 때문에 이겼다.
“참.. 어떻게 스킬을 저렇게 쓰나 몰라.”
“손이 진짜 빠른가봐요..”
그나마 나오는 말은 이 정도 찬사가 다다.
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종종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챔피언 매드 무비가 있다.
주로 리싱이나 이렐같은 것들.
하지만 권건은 그레이브스를 잡았음에도.
눈을 감으면 궤적만 떠오를만큼 빠르고 깔끔한 플레이를 했다.
쏘고, 쏘고, 피하고, 쏘고, 피하고.
게임이 이렇게 쉬운거였나.
“가자.”
경기는 끝났다.
감코진은 경기장으로 나가서 짐을 챙기는 선수들을 도왔다.
“수고했다, 수고했어.”
카메라는 권건 앞에서 춤을 추며 세레머니를 유도했지만 권건은 그저 정중하게 인사했을 뿐이다.
하지만 팬들은 권건이 포즈를 취해주건 안해주건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지운이, 은호, 모두 다 수고했다.”
“봉구 마우스 패드는 챙겼어?”
“아이고!”
문봉구는 다시 경기장으로 돌아간 김에 권건을 대신해 땅땅땅빵 세레머니를 선보이며 팬들을 향해 웃어보였다.
여기저기서 비명과 웃음이 터져나온다.
FWX 선수단은 대기실로 돌아왔다.
2:0으로 이겼음에도 분위기가 밝지 않다.
보통 이기자마자 극성을 부리는 최은호가 얌전했기 때문이다.
“은호, 왜 그래. 우리 이겼어.”
“하지만..”
“너무 상심하지 마라. 혹시 졌더라도 3세트 가면 우리가 이겼을걸.”
김 코치가 최은호 곁에 바싹 붙어서 토닥였다.
선수의 마음은 갈대와 같아서.
어떤 선수들은 팀이 이기더라도 자기가 지면 경기를 졌다고 느끼기도 한다.
혹은 반대로 경기에서 지면 모든 게 자기 탓이라며 자책하는 경우도 있다.
최은호는 그런 선수는 아니다.
이기면 자기 덕, 지면 남 탓 마인드를 적당히 잘 장착했다.
멘탈 보호에 나쁘지 않은 밸런스다.
하지만 오늘은 누가 뭐래도 실수가 많이 나왔다.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지만 2세트에서 룬도 보호막 강타를 들고 세게 가보려고 했다.
나름 연구한다고 연구했는데.
망하고나니 그냥 기본보다 못했다.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는 건 관심도 못 받았다는 뜻이니까.
만약 졌다면.
졌다면 얼마나 욕을 많이 먹었을까.
최은호는 SNS를 좋아하는만큼이나 외부의 시선에 예민했다.
휴대폰을 살펴보니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들이 보낸 농담 따위가 몇 개 도착해있었다.
오늘 똥쟁이었다느니, 버스 오지게 받았다느니.
서로 흔히 하는 말이었지만 최은호는 그냥 화면을 꺼버렸다.
“화장실 다녀올게요.”
POM은 곽지운과 권건이었다.
“아씨, 쪽팔려..”
솔직히 좀 만만해보여서 그랬다.
순간 손이 굳어서 그랬기도 하고.
하지만 강한 라인전으로 이번 시즌 첫 POM도 받고 싶었다.
POM이라는 거, 서포터에게는 너무 박한 거 아닌가?
이번 시즌 한 번도 POM을 받은 적이 없어서 욕심 좀 부렸다.
그렇긴 한데, 그렇긴 한데..
최은호는 거세게 손을 씻어내렸다.
“야, 야. 최은호. 물 다 튄다.”
옆에는 어느새 F.L.E의 탑 이준솔과 원딜러 이신.
그리고 아직도 얼굴이 새빨간, 1 세트의 서포터 이대민이 서있었다.
저 신인이 울어서 세수라도 시키려고 데려왔나.
괜히 멀리 있는 화장실로 왔다.
“아, 쏘리..”
어색하다.
이준솔과는 꽤 친한 사이였지만, 이신은 불과 몇 분 전에 바텀에서 마주쳤기 때문에 지금 만나고싶지 않았다.
사실상 바텀에서 부숴버린 이대민도 마찬가지다.
얼른 화장실에서 나와 대기실로 돌아가려는 차에 뒤에서 이준솔의 기척이 느껴졌다.
“아, 왜.”
“야, 그래도 인사 좀 하고 가라. 톡도 씹지 말고.”
이준솔이 뒤통수를 긁적였지만 기분 나쁜 말투는 아니었다.
그저 조금 섭섭해보였다.
“그래. 안녕. 됐냐?”
“운동은 잘 하고 있고?”
“어쩌라고.”
최은호는 틱틱거렸다.
“야.”
“왜.”
“부럽다.”
“뭐.”
“부럽다고.”
“어.”
“부럽다고, 새꺄. 그래도 전처럼 징징거리기도 하고 잘난 척도 좀 해라. 내 톡 씹지 말고.”
“잔소리하지 마라.”
“니도 우리 마음 알잖아.”
최은호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비슷한 수준의 팀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변한 것이라고는..
권건 밖에 없다.
“간다.”
자리를 뜨며 간신히 뱉은 말은 이게 다였다.
그랬나?
몇 번인가,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받은 것 같기도하고.
일부러 씹은 건 아니지만, 그냥 최근에 조금.. 신을 많이 냈었던 것 같기도하다.
맨날 욕만 먹다가 여기저기서 잘한다고 칭찬하니까.
한참 패배하다가 승리를 하면 날아갈듯이 기쁜 게 당연하니까.
그게 너무 좋아서 도리어 집중력이 흐트러진 것 같다.
불현듯 요즘 연습이 너무 재밌다며 오랫동안 연습실에 남아있던 곽지운이 떠올랐다.
정말 재밌나 싶었는데.. 아마 그게 아닌 것 같다.
번쩍 정신이 든다.
내가 뭐라고, 나는 아직도 이렇게.. 멍청이같은데.
아직 권건이 없는 FWX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직, 오직 권건만이.
권건의 오더가, 권건의 플레이가.
모두의 부러움을 산다.
빛나는 사람이었다.
계속해서 같은 팀원으로서 어깨를 맞대고 걸어나가려면.
이대로는 안된다.
최은호는 아까 마주쳤던 신인 서포터처럼.
“더 열심히.. 해야 해.”
자신의 얼굴도 붉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
주말.
이번 주는 경기 일정이 일찍 끝나서, 조금 여유로운 주말이다.
해설가 남동현, 동현이 형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 동현이 형 : 안녕하세요ㅎㅎ
- 동현이 형 : 식사는 하셨나요?
- 나 : 안녕하세요, 아직 안했어요
- 동현이 형 : 앗 어서 식사하시길 바랍니다 (이모티콘)
- 동현이 형 : 저,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 동현이 형 : 지금 말고.. 시즌 오프 때 한 번정도..
- 나 : 네
- 나 : 같이 해요
이 형이 생각하는 건 뻔하다.
나에게 과한 요구를 할 리도 없는 사람이고.
- 동현이 형 : 뭔 줄 알고 그렇게 바로 오케이를 해요??
- 동현이 형 : 선수님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절대 그렇게 함부로 말씀하시면 안돼요
- 동현이 형 : 아셨죠?
- 나 : 그럼 하지 말죠
- 동현이 형 : ㅠㅠㅠㅠ
- 동현이 형 : 뭔지 들어보지도 않고 그러시면 어떡해요
- 나 : 듀오 한번 같이하자는 말씀이시잖아요
- 동현이 형 : 어떻게 알았지
- 동현이 형 : 진짜 그 소문이 사실이었던건가?
- 나 : 무슨 소문이요?
- 동현이 형 : 아무튼 약속한거예요?
- 동현이 형 : 이번 시즌, 마지막까지 화이팅!
- 동현이 형 : (큰 응원 못해서 죄송합니다!)
- 나 : 감사합니다 (웃는 이모티콘)
항상 미래는 바뀌지만.
이 형은 놀라울만큼 그대로다.
시즌 말이나 되어서 조심스럽게 하는 연락.
자기 일도 자기 일이지만 혹시나 피해가 갈까봐, 집중에 방해가 될까봐 일정과 시간을 고르고 고른 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런 뻔한 일을 겪을 때 느끼는 것은.
지독한 외로움이다.
나는 상대를 알지만 상대는 나를 모른다.
어쩌면 FWX를 선택한 것은, 내가 이들과 서로 모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진다.
나는 휴대폰을 덮었다.
“자, 다들 집중.”
박 감독님이 순위 시트를 펼쳤다.
벌써 스프링 시즌의 마지막 주.
스프링 시즌을 마치고나면 약 한 달정도 휴식이 주어진다.
물론 그 사이에도 콘텐츠 촬영이나 이런저런 일정들이 있긴 하지만, 잠시 쉬어갈 수 있다.
“일단.. 우리 팀은.”
이번 시즌 7승 9패, 6연승.
그야말로 파죽지세.
“일단 남은 두 경기를 다 이기는 데에 집중하자.”
1라운드 전체를 내다버린 결과다.
승점도 형편 없다.
그래도 감독님의 표정은 꽤 밝았다.
전패 행진을 하던 FWX가 7위까지 상승했기 때문이고, 이번 시즌이 아니라 다음 시즌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LKL의 플레이오프는 6강 토너먼트 식.
지금은 플레이오프 막차 싸움이 활발한 상황.
6위 자리를 놓고 부산 호넷, 대전 FWX, 수원 해머스의 삼파전이다.
사실 플레이 오프 진출이 압도적으로 유력한 것은 부산 호넷이다.
호넷은 이번 2라운드에서 꽤 큰 업셋도 한 번 이루어내면서 시선을 끌고 있다.
우리 입장에서는 일단 상위권 팀인 광주 미라쥬와 대구 유니버스에게 두 번 모두 스윕 승을 거두고 부산 호넷의 패배를 기도해야하는 시점.
거기에 지금 우리보다 승 수가 하나 부족한 수원 해머스 역시 호시탐탐 자리를 노리고 있다.
수원 해머스는 다음 주의 대진이 비교적 유리한 편이었기에 이 역시 쉽지는 않다.
그래서, 사실은.
이미 진출 여부는 우리 손을 떠났다.
“무리하지 말고 할 수 있는데까지 최선을 다하자.”
팀은 조급해하지 않기로 결심한 모양이다.
물론 대충하자는 뜻은 아니지만 압박을 주지 않는 태도라고 해야할까.
팀 단위에서 나를 영입한 뒤의 플레이오프 전략까지는 준비가 미흡했다는 이유도 있었고, 뭔가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다.
“최 코치님. 제가 유럽 서버에서 신문물을 배워왔는데요..”
오늘의 피드백 시간은 휴식 시간과 자연스럽게 걸쳐져있었다.
“응, 지운이. 뭔데?”
“레오니와 블츠 바텀 조합인데..”
“와, 깍지야. 듣기만해도 두려운 조합이다. 근데 내가 레오니야? 아님 블츠야?”
“너한테 한 말 아니거든.”
“나말고 누구랑 하게!”
약간의 잡담과.
“건아. 내가 이걸 노트에 정리해봤어. 봐줄래? 어떻게 보는거냐면, 건이 네가 공격적인 루트로 상단으로 갈 때 하단으로 내려가는 페이크 동선을 같은 방향 한 번, 다른 방향 한 번, 그 다음에 ..”
김예성의 의욕적인 틈새 공부.
“야, 여기 가습기 당번 누구냐. 나 때는 말이야..”
윤도형의 으름장.
“어이구, 행님. 물이 이만치 많은데 괜히 나 갈굴라고.”
적당한 문봉구의 너스레와 함께 휴식 시간이 굴러간다.
“얘들아, 시즌 오프 일정 시트 작성했어?”
김한빛 코치님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일정을 챙기고 있었다.
확실히 시즌 종료가 가까워진 느낌.
“아직요.”
“짬 날 때 얼른 해. 그리고, 웰컴 데이 하는 거 알고 있지?”
“웰컴 데이가 뭔데요?”
곽지운이 묻는다.
“그거잖아. 가족과 친구 데리고 올 수 있는 날.”
옆에서 일정 시트를 작성하던 윤도형이 대답했다.
“아.”
“그 날 맛있는 것도 있고 하니까 데리고 올 수 있는 사람있으면 많이 데려와. 그 날은 사옥 개방이니까.”
“곽지운 친구 없어서 안된대요!”
“윤도형 웃기지 마라. 나 친구 개많음.”
“구라치시네.”
“코치님, 저는 윤도형 초대할게요.”
“저는 곽지운 초대할게요.”
“둘 다 휴가 때 친구 많이 사귀는 걸로 하고. 워크샵 일정도 정해졌으니까 확인해.”
시즌이 끝나가더라도.
반기 면담, 웰컴 데이, 팀 워크샵, 다음 시즌을 위한 장기 컨텐츠 촬영 일정, 귀가 일정 등.
해야할 일들이 수두룩하다.
잠시지만 연말같은 분위기에 무거운 기분을 털어내고 코치님이 건넨 설문지를 받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