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폭풍전야
1세트를 넘겨 준 빅스 선수들은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있었다.
금주의 토요일 일정인 대구 유니버스와의 경기에 집중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난 주에 있었던 대전 FWX의 두 경기.
트릭스터와 스톰 전의 분석이 나오면서 선수들은 모두 주말을 반납했다.
FWX는 결코 쉬어가는 구간이 아니었다.
“음..”
빅스의 하상우 감독은 입천장에 뭐가 붙은 것처럼 껄끄러운 감정을 느꼈다.
선수들이 친정팀이니 뭐니 하지만.
감독들은 으레 반대 감정을 느낀다.
자신들이 놓아준 선수가 다른 팀에가서 개화했을 때.
선수를 보는 눈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리는 기분이 든다.
빅스의 경우에는 단장의 입김이 꽤 센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성이가 체급이 좀, 있긴했지. 근데 우리 팀에 있을 때는 받쳐주는 역할이 잘 어울렸는데. 거 참.”
입 밖으로 아쉬운 말이 나와버린다.
“괜히 아칼린을 풀어준 게 아니었네. 뭐. 연습 좀 했나.”
사실 김예성이 마지막 순간에 자신감을 잃어 픽하지 않은 것 뿐이었지만, 결과를 받아본 빅스 입장에서는 자신감으로 느껴졌다.
“일부러 OP를 양보하고 초반을 세게 가져간다라.. 오늘 세게 나오네, FWX.”
“떱형, 얘네 우리가 한타 볼 거 알고 있었나봐요. 탑 루시언처럼 뚫는 픽 말고 한타 조합으로.”
“형 말고 감독님. 일 할 때는 감독님이라고 부르라니까.”
“네넵, 더블 감독님.”
빅스는 감독과 선수들의 나이 차이가 크지 않은 편이었다.
작전 회의는 빅스 특유의 친근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여기서 기 죽을 필요 없다.
상대는 이제 절대 무시할 만한 팀이 아니니까.
특히 김예성의 연습량과 포텐을 어느정도 들여다보았던 빅스 입장에서는 더욱.
“그럼 어떻게, 카갈 한번 갈까?”
“그거 좋다!”
상체 중심의 전략 제안에 탑 라이너 고재길이 반색했다.
“엑..”
하지만 미드 이지원이 싫은 표정으로 입을 뗐다.
“형, 근데요. 일단 이거 부검 창 먼저 끄고.”
화면에는 딜량 그래프가 띄워져 있었다.
아칼린의 딜량은 한없이 0에 수렴했고.
이지원이 있는 이 자리의 원래 주인인 김예성의 그래프가 눈에 보일정도로 솟구쳐있었다.
“나 잘할 자신 있는데. 이번에 죠이 안돼?”
“죠이? 음, 라인전은 괜찮긴 할텐데.”
“아니면 아라 같은 걸로 메이킹 할게요. 괜찮을 듯?”
하 감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FWX가 평소보다 미드에 힘을 싣는 픽과 전략을 선보였다.
친정팀을 의식하면서도 김예성이라는 선수가 가진 재능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방향.
한번 성공했으니 다음 세트에서도 그렇게 나올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탑이 그리 강하지 않은 팀이다.
“그럼 내가 양보한다. 오늘 치킨 사.”
“아, 진짜! 재길이 형!”
빅스는 빅스의 방식대로 의견을 모았다.
반면.
FWX의 코치 박스.
“예성이, 너어는 진짜 보석같은 친구여.”
“완전 베리 나이스!”
FWX 선수들은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잘했어. 모두 수고 많았다. 피드백 노트도 거의 비었으니까 안심하고.”
웃으며 선수들을 맞이한 박진현 감독이 노트를 들어보였다.
“한 게 없어서 피드백 받을 게 없는 것 같은데.”
“응, 바위게 당번. 니 얘기야.”
“그건 맞지.”
“나는 좋드만. 근데 이번 판에는 뭐 보여주고 싶고 막 그릅니다.”
“나도. 아, 담판 이즈할까요. 은호라도 좀 보내게.”
“그럼 닌 또 타워만 치겠다고?”
잠깐의 너스레에 웃음이 터졌다.
김예성도 그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웃음지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다른 라이너들이 미드에 부담을 주고싶어하지 않는 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예성이 생각은 어뗘?”
“맞아요. 캐리해준 사람 말 따라야지. 괜찮죠, 감독님?”
“그럼.”
“오늘은 네가 주연이다. 하고 싶은 거 다 해.”
분명 게임 초반 흔들렸던 김예성이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예민한 성격이 콤플렉스였던 김예성은 권건을 슬쩍 바라봤다.
“뭐든지.”
하지만 왠지 저 표정을 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당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저는..”
#
- [FWX] 시밸롬들아 라온 가자미형 미드라고 위키에 써놓은 새기 누구야
ㄴ 그거 우리가 쓴 거 아닐걸?
ㄴㄴ 빅스 정보 넘어온거일듯?
ㄴ 가자미가 먼데? 옆으로 쏠린 거?
ㄴㄴ 가자미가 희생플하는거고 도미가 주인공이고 그런거 만화에 나옴
ㄴㄴ 원래 카레-가 화려하다, 가자미의 동음인데..
ㄴㄴ 네 다음 만잘알
ㄴ 오늘 보니까 라온 메가 도미던데?
ㄴㄴ ㅇㅇ 슈퍼스타형인듯
ㄴㄴ 그전부터 꾸준하게 해주긴 함
ㄴㄴ FWX는 희생플레이를 안시켰잖아 그냥 팀이 희생했지
ㄴㄴ 존나 옛날 일 이야기하지마라ㅋㅋㅋㅋ
#
빅스는 레드 진영을 가져가면서 미드를 최대한 뒤로 미뤘다.
팀적으로도 합의된 결과긴 하겠지만, 아마 이지원도 모종의 대가를 지불했겠지.
데스 당 커피 쏘기가 일상인 팀이니까.
덕분에 빅스에서는 내 돈으로 밥이나 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다.
뭐, 어쨌든.
재밌는 점은 빅스의 밴 카드가 부족해보였다는 점이다.
요른을 밴 카드에서 제외했거든.
팀이 예상한대로 정글과 미드 쪽 밴.
이전 세트에서 메이킹을 했던 미드와 정글을 막아보겠다는 거다.
승리 플랜을 동일하게 가져가는 건 흔한 일이니까.
당연하지만 굳이 열어줄 필요도 없기 때문에 괜찮은 선택이다.
하지만 코치 박스에서 김예성이 내놓은 의견은 빅스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었다.
“근디, 예성아. 그거 알어? 갈레오로 트린을 이긴 사람이 있대.”
“거짓말.”
“건이가 말했는디.”
“그럴 수도 있겠다.”
“야, 니 왜 내 말은 안 믿는겨. 예성이 아주 나쁜 사람이었어잉?”
두 사람의 대화에 팀 보이스에 웃음이 번진다.
김예성은 갈레오를 선택했다.
이번 시즌들어 처음으로 하는 픽.
하지만 팀은 알고 있다.
김예성이 빅스에 있었던 시절, 시그니처 픽이라고 불리던 것이 갈레오라는 것을.
잘하기는 했지만,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시그니처는 아니었다.
항상 받쳐주기를 강요받았기 때문에 선택지가 없었을 뿐.
이니시, CC, 탱킹.
이런 역할군의 챔피언들을 꽤 좋아하긴 했지만.
항상 이것만 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팬들에게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싶었다.
가끔은 원톱 주연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배역을 양보했다.
팀원들과 성격까지 맞춰주지는 못하더라도 역할은 맞춰줄 수 있으니까.
“상대 초반 갱 위협적이에요. 바텀은 라인 시야 잘 잡고, 미드 중심으로 단단하게 버텨요. 시간은 우리 편이니까.”
“건아, 탑은?”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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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되겠냐?
- 갈레오 회귀ㅋㅋㅋ 오늘 컨디션 좋아보였는데
- 여기도 결국 라온 희생플로 돌림?ㅋㅋㅋ
- 이제 뭘로 고로시하려고 해도 난 FWX 믿어
- 강자 멸시 DNA가 혈관에 흐른다,,
- 어이어이..빅스도 ‘강팀’이라구?
“탑은 전통의 요른과 냐르 구도인데, 요즘 팬시 선수가 요른에 물이 올랐거든요?”
“하지만 냐르가 요른 잘 때리죠. 두 팀이 모두 한타를 좋아하는 팀이다보니 서로 할 말이 있을 것 같습니다.”
“미드에서는 라온이 오랜만에 갈레오로 아라를 상대합니다! 바텀에서는 FWX에서 이즈와 바도. 빅스에서는 졔리와 유마로 톰과 제리 조합을 가져갔습니다.”
“음, 바도가 다양한 구도를 만들기는 좋지만 난이도가 쉽진 않거든요. 하지만 빅스에서 칼마를 밴으로 걷어내면서 살짝 방향을 바꾼 것 같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잘못하면 그냥 협곡 카페 주인이 될 수도 있는 거예요.”
“정글에서는 빅스가 결국 권건 선수의 손에 그레이브스를 쥐여줬어요.”
“정글 중심의 메이킹을 막아보려고 했고, 그것 하나만큼은 꽤 성과를 봤습니다. 빅스에서는 친 짜오를 들고 경기를 시작합니다!”
최근 상승세와 더불어 직관을 나온 FWX 측의 관중들.
팬들의 기운찬 응원과 함께 경기가 시작됐다.
“아직 큰 사고 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폭풍전야같은 느낌이네요.”
“네. 지금 권건 선수가 과감한 동선으로 정글 이득 보고 있거든요? 대신 약점이 노출될 수 밖에 없어요. 왜 여기가 비어있겠어요! 아, 빅스! 미드 찌릅니다!”
“라온 선수, 스무스하게 빠져나갑니다! 스펠도 사용하지 않았어요!”
“전부터 라온 선수의 진짜 포텐에 대해서는 꾸준하게 언급되어 왔는데요. 시즌 초반에 안좋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 가능성이라는 게 사실은 허상이 아니었냐, 그런 의견이 있었지만! 최근엔 확실히 다릅니다!”
김예성은 첫 번째 세트보다 한결 침착해졌다.
왜 긴장했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매혹을 피해낸 게 유효했죠. 아주 깔끔한 무빙! 갈레오가 말랑말랑한 초반을 노린 좋은 시도였습니다만, 유효타는 아닙니다.”
“돌로 만들어진 챔피언이라기엔 정말 매끈한 움직임이었어요!”
갈레오는 주연이 되기는 어렵지만 좋은 챔피언이다.
리그에서도 메타를 가리지않고 꾸준히 인기있는 편이다.
하지만 평가와 별개로, 원툴 이미지는 아쉽다.
“예성이 나이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뭔가 다르다.
김예성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틈에 권건 선수가 탑 쪽 캠프 스틸? 다 먹을 수 있나요? 아, 무리하지 않네요. 빠르게 따라 붙은 미스터 선수가 나눠먹습니다.”
끝내 빅스를 만나 불편했던 오늘.
분명히 흔들렸던 지난 세트의 초반.
하지만 자신이 떨어져나가지 않게 잡아준 권건.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역할.
권건이 그브를 잡은 이상.
빈 부분을 자기가 메우고 싶다는 기분이 든다.
쪼개진 턴을 벌어주는 것은 정글러만의 역할이 아니다.
미드는 정글과 한 몸이다.
이 말을 이제서야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요른 상태가 애매하다보니, 권건 선수가 같이 라인 밀어주면서 집 타임 잡아주고 있습니다.”
- 보모네 보모
- CS 먹여주는 기계ㅋㅋㅋㅋ출장 서포터ㅋㅋ
- 요른은 입김만 불고 있으면 호로록 다 들어옴
- 아무리봐도 문봉구 캠 존나 행복해보임ㅋㅋㅋ싱글벙글팬티맨
- 나도 줘라 저런 정글ㅋㅋㅋ
FWX 정글은 성장, 빅스 정글은 갱킹 시도.
깔끔하게 한 턴을 종료한 정글러들이 잠시 모습을 감춘다.
“냐르가 요른 상대로 수확낫을 들고 후반 캐리력을 도모하고 있어요. 탱커 상대로 종종 나오는 선택이죠.”
“이제 다음 정글러들의 동선은 어떻게 될까요? 아직까지 메이킹에 좀 더 유리해 보이는 건 빅스거든요! 이득을 봐야하기도 하구요.”
“기태 형, 바텀 한번 봐줄래? 라인 당길게. 상대 여눈 올렸어.”
“오케. 나 저쪽 작골 들어가는 동선타면서 찔러 볼게. 나 플은 없다.”
빅스의 서포터, 진주호는 빅웨이브를 예상해 라인을 묶으며 정글러 김기태를 콜했다.
“여눈 좀 꼴받는데?”
“아니.. 뭐, 이즈야, 뭐.”
“그래도 그냥 싫어.”
“납득.”
원딜 강한빈이 투덜거렸다.
일단 상대가 스택 아이템을 들고 나오면, 그게 눈물이 됐건 인장이 됐건 불편한 게 사람 마음이다.
전 판에서도 김예성의 르블란이 책을 들고 나와서 잔뜩 짜증이 났었다.
여기선 수비만 하던 김예성이?
책을?
찢어버리고 싶었는데 결국 책도 르블란도 찢지 못했다.
심지어 그대로 펜타킬.
아주 사소한 자존심 싸움.
스택 아이템은 현재 상황이 크게 위협적이지 않다는 뜻일 때가 많다.
이 반대는 상대가 말려서 허겁지겁 아이템을 짜깁기 해 올 때다.
이게 기분 좋은 ‘라인전 판정승’이다.
그 하위에는 ‘딜량 승’, ‘착취 스택 승’, ‘마순팔 승’ 등이 있다.
작은 것들이 승부를 가를 가능성이 있는 프로의 세계에서조차 정신 승리에 가까운 것들도 몇 개 있긴 했지만.
전 판의 기억으로.
자기도 모르게 조금 감정적으로 굴고 만다.
그것이 FWX의 이번 세트 승리 플랜인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와서 옆구리 좀 찌르고 가. 스펠 빼면 더 좋고. 그럼 다음 턴에 싸움 볼게.”
“빨리빨리. 권건 오기 전에. 삼거리는 와드.”
바텀 듀오는 함께 재촉했다.
강한빈이 정글러와의 힘의 흐름을 맞추기 위해 스택류를 선택하지 않았기에 더 그랬다.
사실 빅스의 탑 고재길 역시 수확낫을 들고 있긴하지만 그건 알 바 아니다.
어쨌든 스택류 아이템들이 기분 나쁜 이유 중 하나는 타임 리미트다.
완성되었을 때 계단형 성장을 이루니까.
“빅스, 바텀, 바텀, 바텀! 빅 웨이브 타이밍에 뒤 노려보나요? 이거 FWX는 밀고 가고싶을 텐데요!”
빅스는 심기가 불편한 원딜을 이해했다.
김기태가 시야 없는 강가 부쉬로 자연스럽게 몸을 숨기고.
“이거 살짝 타이밍 꼬았습니다, 빅스! FWX, 냄새 맡았나요? 맡을 수 있나요? 지금 바도가 여기 시야 확보 하고싶은 기분이 들거거든요!”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듯이.
조심스럽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한 걸음.
한 걸음.
“졔리, 살며시 벽으로 붙습니다!”
“친 짜오가 숨 죽이고 있어요! 창 끝이 닿기까지, 한 걸음만 더, 한 걸음만 더!”
최은호가 사지를 향해 걸어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