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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73화 (74/326)

73화. 페이스 메이커

김예성은 항상 주머니에 이어폰을 챙겨다녔다.

하지만 정작 끼는 일은 드물었다.

타인의 말소리를 듣고 싶지 않으면서도.

못내 신경 쓰여 듣지 않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빅스에 있었을 때.

빅스의 선수들은 나쁜 사람이라고 콕 찝어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팀 자체가 거리감이 없는 편이었다.

어제 뭘 먹었는지, 게임에서 누구를 만났는지,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심지어 프런트에까지 그 모든 게 공유된다.

김예성은 그게 불편했다.

일에 최선을 다하는만큼 사생활을 갖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것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에이전트부터 그랬다.

유난 떠는 게 아니냐.

프로로서의 커리어를 위해서는 빅스와의 재계약이 맞다.

옳은 말이기도 했지만 김예성은 결국 이적을 감행했다.

유일하게 자기의 마음을 읽은 팀으로.

그리고 FWX에서.

김예성은 그제서야 이어폰을 서랍에 넣어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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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키이이일!”

“라온 선수가 전령을 막아보려는 리벤지 선수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읽었습니다! 리싱이 미드에 투자를 많이 했는데, 결국 빛을 발하네요!”

“이게 심안인가요! 연막탄을 쓰면 뭐해요, 마음을 읽혀버렸는데! 이 선수가 개인기가 꽤 좋은 선수거든요! 라아아아아온!”

김예성은 빛나고 있었다.

“FWX에서 먼저 미드 타워를 터뜨립니다! 이제 라온 선수의 발이 풀렸어요!”

“이렇게 르블란을 잘하는데! 꼭 새로운 모습을 본 것 같아요! 마치 라이크 전성기! 디스 이즈 더 르블란! 여태까지도 참 잘하는 선수라고 생각했지만 방금 플레이는 진짜 아예 다른 차원에 있었어요!”

허상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어떻게 빛이 날 수가 있어.

내 리싱이면 또 몰라.

“와아아아우! 권건 선수! 이 선수 리싱 정말 명품이에요! 올타임 정글 클래식!”

“방금 상대 강타도 뺐고 캠프도 뺏었죠! 이거, 리싱에 비하자면 볼베는 상당히 느린 편이거든요!”

“미스터 선수, 우왕좌왕! 완전히 당황한 모습을 보입니다! 응답하라, 응답하라. 여기는 정글러. 동선이 꼬였다, 오바! 일단 드래곤, 용으로! 용이라도 먹자!”

“FWX가 탑 타워를 쭉쭉 밀어내고 있습니다! 상체 쪽으로 힘을 돌리고 있어요! 이번 용을 내주면서 상체 쪽 시야를 확실하게 잡습니다! 이러면 상당히 위협이 됩니다. 칼리를 가진 쪽에서 생각보다 빠른 바론 타이밍을 잡는 경우가 있거든요?”

“압박 운영 시작합니다. 이거 신경쓰이겠는데요.”

기나긴 LOS 역사에서 미드가 중요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황족에도 비유되는 것이 그 이유다.

“아, 답답한 시야, 답답한 시야를 뚫어보려던 쓰리쉬가!”

“볼베가 바로 옆에 있었는데! 깔끔하게에에에!”

“리싱이 발로 찼는 데 공중에서! 공중에서 르블란의 사슬이 들어간건가요? 두 사람이 곡예 수준의 플레이를 보여줍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곰이 너무 무력해요, 뭘 뚜렷하게 해줄 수가 없습니다! 르블란? 너무 재빨라요. 리싱? 너무 얄미워요! 지금 뭘 하시는거죠? 그건 제 잔상입니다만!”

“루시언은 무난하게 컸습니다만, 합류해도 CC기가 명확하지 않아요.”

- 가지고 노네 가지고 놀아

- 사슬 시발 판정 섹시하네.. 왜 저렇게 되는데..

- 한타의 빅스라며.. 한타의 FWX라며..

- 왜 한타 안해주는데 시발..

- 한타 페이즈 들어가기 전에 끊기네..

힘이 강한 황족 미드가 혼자 차력쇼를 하면 얼마나 이길 수 있을까?

사람의 몸이 그렇듯 균형이 중요하다.

미드의 ‘힘’이 어느 방향이냐에 따라 다를 수 있긴 하지만.

단언컨대, 받쳐주는 사람이 없다면.

미드 단 한 명의 힘만으로는 우승까지 갈 수는 없다.

우승 경력을 가진 선수, 강팀 출신 선수, 밸류 있는 선수.

그 모두를 모으기만 했다고 항상 성적이 잘 나오는 건 아닌 것처럼.

“얘들아 나도 파티에 끼워주지 않을래? 일단 원딜 버렸어.”

“야. 최은호. 내가 너 버린거거든? 타워 혼자 먹을거임.”

“이게 바로 버스 아니것어? 루시언 지금 불편해서 미치고 팔짝 뛴다. 마, 쫄았나.”

“예성, 적 블루 쪽.”

“오케이.”

“지금 르블란이 킬을 너무 잘 먹었어요! FWX에서도 아까 바텀 교전에서 데스가 한 번 발생하긴 했지만 스펠을 다 쓴 볼베를 르블란이 쏙! 빼먹으면서! 지금 괴물이 됐어요!”

“아직까지 빅스의 아칼린이 아무런 역할도 해주지 못하고 있죠. 이미 이른 타이밍에 미드 타워가 밀리면서 주도권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사이드로 보내도 상당히 불안해요.”

“그야말로 정석입니다. 강한 주도권! 그리고 흔들기! 초반에 살짝 미끄러질 뻔 했던 게 거짓말처럼 수복됐어요! 관록이 있어요, FWX!”

“그건 아마 전령 스틸부터였겠죠.”

“그렇습니다. 아칼린이 강하긴 하지만, 그건 성장이 됐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어느정도 초반 주도권은 내줄 수 밖에 없거든요. 라온 선수가 점점 더 집요하고 정교하게 미드를 꽉 잡으면서 그 차이를 더욱 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근거가 하나 더 있습니다. 리싱이 있거든요. 리싱의 활동 반경이 굉장히 넓습니다.”

“맞아요! 우리 팀에 권건이 있어! 이것도 근거인거죠!”

나는 미드를 코어라고 말하고 싶다.

사람도 코어가 중요한 법이다.

상체, 하체 근육의 힘을 잡아 주는 코어.

“이거. 위험해요, 빅스. 빅스. 전략 바꿉니다. 이제 누워야겠다. 시간은 우리 편이다. 조합 자체는 나쁘지 않거든요. 초중반 싸움의 볼베-진 다이브 호응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어차피 AD가 한 명 더 있습니다.”

“네. FWX에도 냐르가 있긴 하지만 퓨어 탱커라고 보기는 힘들죠. 타이밍만 잘 잡으면 아직 충분히 해볼만합니다. 르블란과 리싱 전성기에 굳이 맞대응하지 않고 꼭 필요할 때 나가서 한 번에 싸우는 쪽이 낫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아니, 근데. 이게 놀라운 점이! 운영이 안 되고 있으면, 저희가 이걸 해보면 어떠냐, 저걸 해보면 어떠냐. 막 말을 해요. 말로만이지만. 어쨌든 이렇게 경기를 밖에서 보다 보면 저런 참견을 하기 마련이거든요? 근데 지금 FWX! 제가 뭘 말하기도 전에 움직이고 있어요!”

코어 운동에서 중요한 건 무엇일까.

호흡이다.

나는 이번 세트.

김예성의 페이스 메이커가 된다.

“예성, 시야 노출 안되도록 와봐. 이쪽 피해서.”

“어.”

제어 와드를 박으면서 레드 진영 정글 부쉬로 들어가 잠시 숨을 죽인다.

“루시언 들어올거야.”

그리고 나는 유유히 빠져나간다.

충분히 거리를 둔 어느 순간.

“엇.”

귓가에 스치는 전투음에 빠르게 돌아서서 합류한다.

“아아아아아니! 아아아니! 라아아아온!”

“루시언, 루시언을 노렸어요! 순식간에 리싱이 합류까지! 킬은 르블란에게!”

“하필! 하필 여길! 아니! 여기 미드 바로 옆 우리 부쉬잖아요! 여기는 솔직히 미드 라인이라고 쳐주잖아요!”

“아무리 누웠다곤 해도 이 정도 제어와드는 지우러 갈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하드캐리형 DPS 챔피언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온 루시언인데요? 이러면 좀 곤란합니다.”

“너무 억울해요, 지금 토이 선수 너무 억울합니다! 자세도 억울하게 죽었어요!”

“리싱이 빠져나갔잖아요. 그걸 시야로 봤거든요! 근데 그 안에 르블란이, 아! 시야에 전혀 안 보이는 곳에서 들어왔군요!”

“계략에 빠졌습니다. 이건 아주 무서어어운 계략이에요. 여태까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던 루시언이 드디어. 드디어 쓰러졌습니다. 이거 백귀야행이에요. 어두컴컴한 시야 속에서 번쩍하면서 귀신같이 르블란이 나타나고, 리싱이 나타나고!”

- ㅈ됐다 암만 약팀이라도 미드 정글 저래버리면 못이긴다

- 루시언 ㄴㅍ

- 이번 세트는 망한것 같다 쿨하게 버리자

- 아니 저 새낀 우리 팀에서는 똥만 싸더니 왜 저기가선 잘함

- ㅋㅋㅋ라온 빅스에서는 잘했는데? FWX에서 똥쌌었는데?

- 그러게 누가 버리래?ㅋㅋㅋㅋㅋㅋ

- 누가 물어봄??

- 감히 누워? 당장 멱살 잡고 일으켜서 다시 패ㅋㅋㅋㅋㅋ

“와우.”

“대박. 말을 들으면 킬이 나와. 나도 뭐 좀 시켜주라. 건아. 나도 뭐 좀 시켜줘.”

“그럼 깍지 형은 바위게 먹어주세요.”

“오! 오케이!”

곽지운은 바위게를 잡으면서 최선의 칼리스터 무빙을 보여줬다.

사실 한타랄 게 일어나지 않으니 지루할지도 모른다.

“바위게 공격 다 피해버렸죠? 너무 달고.”

아닐 수도 있다.

“라온 선수,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딜, 어마무시합니다!”

“안 죽겠다는 이야기죠. 이 선수, 인터뷰 할 때 보면 참 말이 없는 선수인데 은근히 승부사 기질이 있어요!”

“권건 선수와 호흡을 맞추기 시작하면서 가장 많은 플레이 스타일의 변화를 만든 선수입니다. 특히 오늘,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지금 용 쪽 주도권도 꽉 잡고 있어요, FWX!”

“빅스에서는 용은 내주더라도 절대 바론만큼은 안된다고 판단하는 것 같습니다. 누워있는데 불쑥 바론 들고 찾아오면 그거만큼 난처한 게 없어요. 똑똑. 누구세요? 실례합니다, 바론 들고 왔는데요.”

“하하, 그거 참 원치 않을만한 상황이네요. 이번에는 좀 더 호위 병력을 강화해서 시야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정글러는 심장이다.

없으면 살 수 없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생각해보니 없으면 게임이 안되는 건 맞긴 하네.

어쨌든.

정글러는 힘차게 맥동하는 혈류를 신체 곳곳으로 돌리는 역할을 한다.

이 힘이 끊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단 한 순간도 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팀의 넘치는 에너지와 기세를 실어 나른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빅스!”

“포위, 포위됩니다!”

“한타, 한타 했지만 이건 원하는 한타 구도가 전혀 아닌데요!”

“냐르, 냐르, 냐르! 팬시 선수의 냐르가 발목을 붙잡으면서! 로칸, 로칸! 클래스 선수가 튀어나왔어요! 진입합니다!”

“지금 이거 돈 차이가 꽤 많이 나는 싸움이에요! 최대한, 최대한 피해 없이 빠져야 게임이 끝나지 않습니다, 빅스!”

“안돼요, 이미 늦었어요!”

“탑 2차 타워 없어요! 도망칠 수가 없습니다! 텔, 텔, 텔! 오고 있습니다!”

“리싱, 리싱, 르블란! 르블란을 조심해야해요! 적장! 적장이 나타났다!”

“아아아아아! 로칸, 로칸은 잡히고 맙니다! 하지만 볼베와 루시언 끊깁니다! 르블란 더블 킬! 이러면, 이러면 뭐 할 수 있나요? 진은 다가가줄 수 가 없어요!”

“이거 지금 세자 선수의 칼리스터는 저 뒤에 있거든요! 아직 합류 중입니다!”

“아, 아아아! FWX 백귀야행 서커스단! 마술 하나 보여줄까? 안돼요, 보기 싫어요! 안됩니다!”

“아칼린, 뭘 보여줄 수 있나요? 보여줄 수..! 없습니다! 어, 아! 르블란의 릭트 쇼! 트리플 킬! 쓰리쉬까지 쓸어담으면서! 쿼드라 킬!”

“잡아, 잡아, 잡아! 내가 타워 맡을게!”

“야! 한 거 없는 애! 예성이 펜타 킬 줘!”

“내가 진 쬐끔 때려놨어! 내가 때려놨어! 여기! 여기 타워! 내각 타워 앞에!”

분위기가 급격하게 올라가면서 눈 앞에서 번개가 튄다.

이건, 기회가 맞다.

“아아아아아! 지금 이 플레이는 1,000명 중 1명의 르블란이에요! 라온! 너무 강해요!”

이적하고 나서 빅스와 처음 맞붙었을 때, 2:0으로 무력하게 스러졌던 우리 미드의 마음을 다시 일으킬 기회.

“빈스 선수, 도망갈 수 있나요! 어떻게든 미래를 도모해볼 수 있나요? 하지만 탑, 탑 웨이브 함께 밀려들어가고 있습니다!”

“야, 덤벼, 덤벼! 1 대 4 한번 해보자! 드루와! 나는 쌍둥이 타워가 있어!”

“보여주나요, 빈스 선수?”

“안됩니다, 안됩니다! 히이이이이익! 리싱, 리싱! 이쿠우우! 아니, 궁을 아껴놨다고! 궁을! 아직도 아껴놨었다고요!”

“배달, 배달! 아아아아아아아아앗! 날아갑니다아아아아!”

성격이 안 맞아서 헤어졌든.

호흡이 안 맞아서 헤어졌든.

어쨌든 이별한 상대가 후회하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짜릿할 것이다.

그렇지만 말재주가 없는 나라서.

지금의 네 선택이 꽤 나쁘지 않았다고 칭찬해주는 방법이라고는.

“라온 타임.”

너를 이 무대의 주연으로 만드는 것밖에는 모른다.

- 펜타 킬!

“라아아아아아온! 펜-타-킬! 라온 선수가 이번 시즌 FWX의 첫 펜타킬을 가져갑니다!”

“FWX의 미드 라이너, 라온! 라아아아아아온, 앳, 월즈! 이제는 FWX의 핵심이라고 불리고 있는 선수입니다!”

“최고의 플레이! 상대를 박살내는 움직임! 권건 선수와의 환상적인 호흡으로! 첫 세트를 움켜쥡니다! F-W-X! GG!”

이게 나고.

너는 내 팀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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