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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68화 (69/326)

68화. 봄이여 오라

뚫어야만하는 사람과 뚫리지만 않으면 되는 사람.

어느 쪽 부담이 더 클까?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공성하는 측이 백만 대군이고, 수성하는 측이 다 무너져가는 성벽만 끼고 있다면?

그럼 좀 더 답이 쉬워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이렇다.

사실 LOS에서는.

누가 더 지원을 많이 받을 수 있는가가 문제라고.

#

1승 1패의 3세트.

“와, 흥미진진한 경기네요. FWX가 이렇게까지 활약해줄줄이야!”

“말로만 하던 플레이들이 많이 나왔죠. 그야말로 그림같은 한타, 특히 요른의 시야가 월클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탱딜 밸런스가 기가 막히게 맞아들어가고..”

“돌진, 박치기 타이트한 게 여간내기가 아니었는데요. 원래도 요른이 팬시 선수의 방패였거든요, 근데 지금은 최고의 방패이자 최고의 검이 됐습니다.”

“그럼 스톰은 어떤 식으로 대응할까요? 브리움?”

“그을쎄요. 일단 스톰의 성격 상, 그런 식으로 가지는 않을 것 같고..”

“아! 요른, 인정받았는데요? 밴 됩니다!”

스톰에서는 깔끔하게 문봉구를 밴으로 막았다.

“칼 들고 나올거다.”

“맞심다. 제가 두렵겠죠.”

“하하, 그렇긴..하지.”

박 감독은 문봉구의 자신만만한 말투에 가볍게 웃었다.

용기도 있고, 회복이 빠른 녀석이다.

마음 속에 상처가 남았음이 분명할텐데도.

“탑 밴 됐으니까 대신 우리 좋은 픽 가져오면 되죠, 안 그렇심까.”

“그래. 그게 맞다.”

FWX는 의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탑이 터지는 것이 문제라면.

탑을 터뜨릴 수 없게 한다.

거기에 권건이 얹은 말이 주효했다.

스톰 탑과 정글 사이에 갈등이 있다고.

실제로도 어슬렁 어슬렁 퍼지고 있는 말이었다.

두 선수 모두 체급으로는 제법 뛰어난 편이었다.

그러나 둘 다 주인공이 되고 싶어한다.

게임의 판도를 뒤집어놓을만한 대단한 정보는 아니지만, 기존의 작전에 확신을 가지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결국 스톰에서 이렐리야를 꺼내들었습니다!”

팬들의 환호가 울려퍼진다.

유독 인기 많은 픽들이 있다.

리그 단위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픽들.

강한 공격력, 큰 리스크.

스톰은 다시 한 번 FWX를 향해 칼 끝을 겨눴다.

“블루 진영을 가져간 스톰이 상당히 공격적인 픽들을 가져갔습니다. 그러면서 미드에서는 스탠딩 메이지 빅터르를 챙겨서 게임을 길게 가져가도 힘이 빠지지 않게 구성했죠.”

“상당히 괜찮은 선택입니다. 사실, 라인전에서 체급이 약한 팀은 아니거든요. 이번에는 스톰의 바텀도 사미레로 진짜 힘을 보여줄 생각인 것 같네요.”

“반면 FWX에서 울라프를 가져갔죠. 정글로 기용합니다. 글로리 선수의 1 세트 울라프가 조금 부담되어서 뺏은 걸까요?”

- 뭔데 챔프 폭 뭔데ㅋㅋㅋㅋ 밴 해봤자네ㅋㅋㅋ

- 벌써 10개 가까이 되는 거 아님?

- 예사롭지 않은데?

- 그럼 누누 정글 좀 해죠

- 마이나 워웍 제발

“그런 면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미드 오리안느나 바텀 키이사 렐 조합이 초반에 약할 수 있는 부분들을 정글 주도권을 통해 꽉 붙잡아 줄 수 있을 것같은데요.”

“그래요? 권건 선수의 울라프는 또 어떤 맛일지! 지금부터 경기 만나보시죠!”

#

냐르를 잡은 문봉구는 아까보다 밝아 보였다.

“삼신기 아닌데 괜찮아?”

“아니, 형까지 삼신기니 뭐니 그른 말을 허면 어떡혀?”

“그런가? 냐르는 이렐 상대로 어때?”

“엄청 괜찮지.”

“오.”

“이렐리야가..”

“역시 문봉구..”

우리는 가볍게 웃었다.

나도 이 용감한 탑을 응원해주고 싶다.

어떻게 하면 자신감을 불어넣어 줄 수 있을까.

“건아, 탑 잘 부탁한다.”

“봉구 형.”

“응?”

“탑 갈레오로 트린을 이기는 사람도 있어요.”

“그거 먼데? 머선 소린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으떠케 가능한긴데?”

어쨌든 도움이 되면 좋겠다.

#

“지금.. 굉장..히..!”

“굉장히! 전투가 길어지고 있어요!”

“두 팀 선수들 모두 빼지 않습니다, 바텀 바위게 방향! 아니, 아직 10분도 안됐는데!”

“절대 양보하기 싫은거죠! 아니, 이게, 서로 주도권을 절대 내주고 싶지 않은 두 팀!”

“두 팀 미드 모두 엉덩이가 무거운 데 정신없이 싸움에 동참합니다! 이거, 안 움직이면 우리 팀이 밀려요!”

“지금 이거 빠른 무한! 님만 오면 고! 계속 옵니다! 전투가 계속 돌고 있어요!”

“아, 자리 났어요! 자리 났어요! 빅터르 쓰러졌습니다!”

“그럼 노틸 와야죠! 왔습니까? 왔습니까? 그럼 싸움 다시 고! 땡땡땡!”

“오리안느, 오리안느 죽습니다! 아니, 다시 살아나서 오면 돼!”

- 시이바ㅋㅋㅋㅋㅋ

- 이게 무슨ㅋㅋㅋ

- 멱살 잡고 서로 자동공격 온ㅋㅋㅋㅋ

- 개꿀잼이네ㅋㅋㅋ 바닥에서 구르는 평타 싸움ㅋㅋㅋ

- 속보 빅터르 살아남, 오는 중

“마주치자마자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상남자! 권건! 여태까지 상당히 섬세하고, 그, 뭐라고 해야할까요? 뇌지컬적인 그런 면이 있었거든요! 근데 지금은 꼭 뒤가 없는 것처럼 하고 있어요!”

“울라프의 맛이 그거죠, 근데 초반에 울라프와 마주치는 건 정말.. 이거, 사실 스톰 입장에서는 이렇게 커질 싸움이 아닌데!”

“서로 바위게에 고집을 부렸어요!”

“더 오래 싸우면 라인이 다 타요!”

“사실 이미 다 탔어요!”

해설진은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일어난 전투 해설에 열을 올렸다.

사실, 전투 자체는 해설할 만한 내용이 그리 많지 않았다.

양쪽 모두 레벨이 높지 않은 상황.

하지만 주도권을 절대 빼앗기고 싶지 않은 양측이 거세게 맞붙었다.

“바위게는 어디로 갔죠?”

“이미 싸움 중에 밟혀 죽었습니다! FWX가 쌍바위게 컨트롤!”

“이번 전투로 FWX 바텀에서 퍼블을 가져갔지만 스톰의 사미레가 더블 킬을 가져갔습니다. 근데 또 사미레와 그브가 울라프에게 잡히고 그 뒤에..”

“네. 저레벨 단계에서의 매서운 맛이 나왔죠!”

“그렇습니다. 치열한 4 대 4 교전 끝에 킬 교환은 3 대 3, 동수 교환입니다!”

“근데 계산서를 뽑아보면, 지금 결국 끝까지 살아남았던 건 울라프고! 그브는 이제 막 다시 정글로 뛰고 있습니다. 이러면 정글 상당히 유리하게 출발하는데요.”

“그렇습니다. 스펠이 대거 빠지면서 정글러들에게 어디로든 문이 열렸습니다. 양 측 모두 조심해야해요!”

하지만 이렇게 싸우는 중에도.

하계와는 분리되어있는 공간이 있다.

“근데 이렇게 협곡이 불타고 있는데, 재밌는 점이 있어요!”

“네. 저와 같은 곳을 보고 계신가요? 탑이 고요합니다. 진짜 숨도 못 쉴 정도로 고요! 해요!”

“아예 각이 없어요. 글로리 선수가 냐르 상대 전문가거든요! 근데, 지금 팬시 선수가 장기를 보여주고 있죠!”

“그렇습니다. 지금 물아일체 상태에요. 자연과 하나가 된 것처럼, 하나의 오브젝트인 것 처럼!”

- 탑 형들 디코 좀 들어와..

- 바텀에서 싸움 났어ㅋㅋㅋㅋ

- 듣고 있어?ㅋㅋㅋㅋㅋㅋ

문봉구는 사실 조금 두려웠다.

지난 시즌이었던가.

상대 탑은 냐르를 상대로 이렐리야를 들고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물론 그 때의 냐르는 자신이 아니었지만.

픽이 되자마자 알았다.

아니, 느꼈다.

상대의 자신감.

언제든지 너 정도는 이겨버릴 수 있다는 마음.

“후우.”

문봉구는 연습 시간을 좋아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LOS를 하는 게 좋다.

우연히 적으로 만나도 즐겁고, 아군으로 만나면 더 좋다.

벌써 몇 년 째 프로게이머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LOS가 좋다.

“건이야. 시간 나믄..”

그래서 지는 건 싫다.

작년부터 리그에서 연패하면서 자기에 대한 의심을 끊임없이 해왔다.

내가 사실은 못하는 게 아닐까?

나는 사실 기가 막히게 운 좋은 챌린저인가?

“탑 함 봐줄래.”

이제는 알겠다.

운이 좋았던 게 맞다.

랭크 운이 아니라, FWX에서 권건을 만난 게.

그리고 밀리는 자신을 위해 시선을 돌려주고.

상대 탑에게만 온전히 시선을 꽂을 수 있게 도와주는 팀을 만난 게.

작년.

은퇴를 할지 말지 고민했었던 시간을 버텨낸 건.

“갈게요.”

틀림없이 운이 좋았던 게 맞다.

#

주문은 성공적으로 이행됐다.

지금의 메타는 다른 메타에 비해 라이너들의 정글 개입 필요도가 낮다.

캠프 경험치의 조정 때문이다.

라이너들이 라인전에 치중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상대 정글은 내가 건 초반 자존심 싸움에 응했고, 각 팀의 선수들이 불려나와 태그 매치.

갑자기 불려나와 싸우는 것과 계획적인 전투에는 차이가 있다.

적은 엉덩이를 뺐지만 우리 팀은 죽어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교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붐보이는 내 도끼를 피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타입이니까.

아주 건방진 생각이다.

“아아아아아아아! 도끼! 도끼! 울라프의 도끼가 이렐리야의 등 뒤를 스칩니다! 빠져나갈 곳이 있나요, 글로리!”

“어디로든! 문! 탑입니다! 탑으로 문이 열렸어요!”

“탑, 탑, 탑, 으아아아! 너에게 닿기를!”

“몸이 깊습니다, 역주행, 역주행 시도합니다! 글로리!”

“이러면 따라가기 쉽지 않아요! 처형, 처형 노려보나요!”

“처형.. 처형, 실패로 돌아갑니다! 냐르에게 킬이 들어갑니다!”

이제 내 도끼는 하늘을 두 쪽 내버릴 도끼다.

이 기가 막히는 광전사 챔피언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지금 언제 어디서 울라프가 튀어나올 지 몰라요, 조심해야합니다!”

“이거, 이러면 붐보이 선수가 먹을 캠프가 남아나나요? 아예 자기 땅인 것 처럼 돌아다니잖아요!”

“안됩니다. 울라프가 아까 바텀 개입에 성공하면서 지금 최고로 강할 타이밍이에요. 일단은, 일단은 숨을 죽여야합니다.”

나도 모르게 한 명의 도살자가 되어버린다.

“아아아! 이거 너무 무서워요! 미드, 미드 찌릅니다! 나 좀 내버려둬! 파밍만 좀 할게!”

“바텀에서도 백업을 왔습니다만! 빅터르의 소중한 미드, 소중한 미드 타워 반이 날아가버립니다! 이렇게 스탠딩 대 스탠딩 메이지 구도에서는 미드, 정말 귀한 거거든요!”

“전혀 속도를 늦출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FWX!”

탑 차이가 나는 걸 내가 억지로 끼어들어서 뭔가를 해줄 수는 없다.

그저 좀 더 촘촘하게 정보를 전달해주고.

팀 전반이 전투에 나서서, 탑의 등에 실린 무게를 나눠 들어주는 수 밖에.

모두 선뜻 나섰다.

실패하면 각자의 라인전이 폭발해버릴 수도 있는데.

마인드는 제법이다.

이제와서 스톰이라는 팀에는 미련이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소소한 원한이 있다.

붐보이.

귀국했다는 저 정글러.

나에게 밀려난 뒤 내게 심한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한다는 변명이, 중국은 한국과 감성이 달라서 트래쉬 토크정도는 얼마든지 해도 된다는 것.

“붐보이, 카정에 들어갔지만 완전히 밀려납니다! 이거 도와줘야해요!“

말이 되냐?

트래시 토크를 아군한테 하는 사람이 어딨어.

“추격, 추격, 추격! 붐보이, 밀려납니다! 아직까지 그브로 맞대응하기에는 무리가 있어요!”

그립다, 그리워.

어쩌면 네가 중간에서 훼방만 놓지 않았더라면.

내가 다시 스톰을 선택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을 것을.

그래서 지금.

멀어지는 당신을 아스라이 좇아봅니다.

“아, 레드 쪽 정글에서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만! 와 줄 수 있는 팀원이 없습니다! 드리블? 드리블 되나요? 아뿔싸, 붐보이! 벽을 넘지 못했어요!”

“통곡의 벽!”

도끼 하나에 네 욕설과.

“울라프, 다시 도끼 줍습니다!”

도끼 하나에 네 이간질.

“이렐리야는 너무 멀어요! 아아아아아아! 도망칠 수가 없습니다!”

이렇듯 당신의 허리가 휘는 것은.

아직 내 울라프의 유통기한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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