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화. 역배의 상징
나는 1세트의 탈리아로, 곽지운은 2세트의 시비루로 POM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오늘 POM을 받은 권건, 세자 선수 모셨습니다. 저는 박현아입니
다.”
“안녕하세요.”
놀랍게도 곽지운은 경기를 할 때보다도 훨씬 얼어있었다.
나는 인사를 하라는 뜻으로 곽지운의 허리를 툭툭 쳤다.
“어!”
“왜 그러시죠, 세자 선수?”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곽지운은 어딘가 고장나보였지만, 박현아 아나운서는 곱게 웃어보이고 전문가
답게 진행을 계속했다.
“저도 곽지운 선수와 만나 뵙게 되어 정말 기쁘네요. 자. 팬분들께서 기다리
고 계시니까 경기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데, 준비되셨나요?”
“네, 네.”
- 세자 표정ㅋㅋㅋㅋ순박하네
- 눈나 헤으응ㅋㅋㅋㅋ 성불하는거 아니냐
- 누나 예뻐요!
- 저런 애였냐고ㅋㅋㅋㅋ
- 인터뷰를 처음봐서 모르겠는데ㅡㅡ
- 아
아나운서를 만나서 좋다는 건 그저 그 사람이 예뻐서, 좋아서만은 아닐거다.
우선 매치승을 따내야하고.
“두 번째 세트에서 세자 선수가 새로운 스타일의 플레이를 선보이셨는데요..”
거기서도 돋보여야만한다.
LKL은 두 명의 아나운서가 로테이션으로 돌아가며 인터뷰를 진행한다.
그래서 좋아하는 아나운서를 만나려면 POM을 자주 받아야한다.
하위권 팀의 선수는 한 시즌을 보내도.. 아예 인터뷰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니까 순전히 ‘누나’를 만난 것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자리가 낯선거다.
“어, 그러니까 플레이요. 내가 뭐 했지? 아, 아니. 제가 하려던 말은 이게 아
닌데. ”
아, 물론 예쁜 누나 앞에서 부끄러울 수 있기도 하지.
평소에 그렇게 말을 잘하더니.
초등학생같다.
어떻게든 인터뷰를 마무리해 갈 무렵.
"그럼 세자 선수, 앞으로의 각오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우리 자린이 화이팅!"
갑자기 어디선가 큰 소리로 팬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세자라서 자린이인가?
나랑 보는 눈이 비슷한 팬이다.
어쨌든 그 소리를 듣고 곽지운은 제법 기운이 난 것 같았다.
단 한 명도 자리를 뜨지 않은 듯, 모여있는 모든 FWX 팬들이 박수를 보내줬다.
곽지운은 엄청나게 감동 받은 얼굴로 입을 한참 오물거리더니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여러분들의 감사와 응원에 사랑합니다.”
여전히 뭔가 잘못 말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끝내, 한마디를 덧붙인다.
“그리고.. FWX같은 명문 팀에서 뛰고 있는 저는,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와우.
누가 FWX를 명문이라 했는가.
이런 우완 에이스 같은 말을 하다니.
이것이 1군 주장의 품격인가?
"권건 선수도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곽지운이 저렇게까지 말하니 뭔가 좋은 말을 해야할 것 같은 느낌이다.
질 수 없지.
"저희가 지금 몇 위인가요?"
"9위죠."
"그럼 저희가 이긴 트릭스터는요?"
"1위였죠."
"그럼 저희가 다 이길 수 있다는 뜻이네요."
"그게 그렇게 되나요?"
박현아 아나운서가 웃는다.
"네. 그럴겁니다. 긴장하세요. 성남 스톰."
내가 던진 이 말에.
포럼과 커뮤니티는 불타올랐다.
#
[ (포토) FWX ‘라온’ 김예성, ‘보기 드문 환한 웃음’ ]
[ (포토) FWX ‘클래스’ 최은호, ‘기쁨의 함성’ ]
[ (인터뷰) “아직 봄은 끝나지 않았다” 박진현 감독의 다짐 ]
[ (트릭스터) 이길준 감독, “방심했다. FWX는 강팀.” ]
[ FWX 권건(GwonGun), 친정팀 성남 스톰을 향해 선전 포고 ]
ㄴ ㄹㅇ패기ㅋㅋㅋㅋ
ㄴㄴ 성남 스톰, 나와!
ㄴㄴ ??? : 다음은 너다
ㄴㄴ ??? : 나를 내보내?
ㄴ 팀 이름만 가리고보면 유니버스인줄 알았음
ㄴㄴ 난 빅스ㅎ
ㄴㄴ 다 꺼져; 그딴 전략이 두 번 통할거같음?
ㄴㄴ 응 이제 안만나~
ㄴㄴ 코이츠www PO생각은 하지도 않는
ㄴㄴ PO가 뭐예요?
ㄴㄴ 보여줄게 완전히 달라진 나
ㄴ 밴픽때문임ㅡㅡ
ㄴㄴ 이길준 감독 LOS 선출 아니라서 그럼
[ 권건, 성남 스톰 2군 출신의 그는 누구? ]
ㄴ “스톰이 쏘아올린 작은 공”
ㄴㄴ 침투력 ㅅㅂ
ㄴ 이제 성남 스톰한테 지면 갓벽ㅋㅋ
ㄴㄴ 북산 엔딩ㅋㅋㅋㅋ
ㄴㄴ 쉿..
- 권건 매드 무비 보고 가라
ㄴ 정말 보배다
ㄴ 고맙고 또 고맙읍니다..
ㄴ 성불하고 갑니다..
#
아직 겨울 날씨.
돌아오는 길은 추웠다.
하지만 춥지 않기도 했다.
차 안이 승리의 열기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뭐, 열기는 열기고.
“아, 미친 자꾸 어깨동무 하지 말라고!”
“사진 찍어야 된다고!”
“그냥 다른 포즈 취하면 되잖아!”
“깍지야 너는 기쁘지도 않아?”
“와, 씨. 기분 좋긴 하지. 인정.”
이 승리 후 당장 달라진 것이라면, 아주 보기 드물게 선수들이 오래 붙어 있
었다는 점이다.
합숙을 하다보면 선수들끼리 긴 시간을 함께 지내기 때문에 거리감이 희미해
지는 경우도 있다.
그냥 스킨십을 좋아하는 선수도 있고.
하지만 이 팀에 그런 스타일은 없다.
팬이라면 환장하는 최은호를 제외하면, 손 끝만 닿여도 경기를 일으키는 편.
평범하다.
경기장에서는 승리의 기쁨에 함께 부둥켜안고 소리를 질러대던 곽지운은 차
안에서야 어색한 마음이 들었는지 셀카를 찍던 최은호를 밀어냈다.
“그래도 니 손 너무 더러워.”
“금손이라고 불러줄래?”
“금손이러거 붤러쥴뤠?”
“깝치지 마라.”
“친한 척 하지 마라.”
입에서 나오는 말이 어쨌든 바텀 듀오는 아주 기분이 좋아보였다.
문제가 있다면.
- 바텀 듀오 침투력이 커서 감독님 목소리가 안들려요..
- ㅋㅋㅋㅋ오늘은 신나도 돼..
- 마음껏 즐겨..
- 진짜 오늘 너무 멋있었어요ㅠㅠ 선수분들 수고하셨어요!!
다음 경기 일정이 무척 가깝기 때문에 돌아가자마자 다음 경기를 준비해야해서.
차 안에서 라이브를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괜찮습니다. 재미없는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구요. 거기, 신난 애들.”
카메라는 떠들던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앗.”
정작 렌즈를 마주하자 모두 입을 쑥 다물었다.
저게 그렇게 긴장되나,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여러분을 이렇게 자주 만날 줄은 몰랐어요..”
최은호의 진심이 담긴 표정을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긴 하다.
카메라도 자주 봐야 익숙해지니까.
“지운아, 오늘 내 플레이 어땠니?”
그래도 비교적 소통을 자주하는 최은호가 대화를 이끈다.
“굿.”
“그게 다냐?”
“나이스.”
“좀 더 길게!”
“아주 나이스.”
“얘가 이래요. 원딜이 아주 상전이라니까? 그 때 그거 어땠어. 내 유마. 공포
탄 겁나 많이 쏴줬잖아.”
“어.”
“라인전 너무 좋았지?”
- 시비루 유마? 그거 진짜 좋았어요
- 감코진분들 고생하셨습니다ㅠㅠ
- 세자 클래스! FWX 영원하라~
“어..”
곽지운의 대답이 시원치않다.
“아, 왜! 잘했잖아!”
“근데..”
곽지운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못 맞출거면 타곤산 끼고 해라.. CS 니가 먹잖아.”
“내가 언제 CS를 먹었어!”
“공포탄 쏠 때마다 먹던데? 고의 아니었음? CS 유도 미사일이었고.”
“그건 상대가 피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거고.. 와, 진짜 원딜같은 소리
하네..”
“내 이름은 세자. 원딜러죠.”
- 칭찬 좀 해줘라ㅋㅋ
- 인터뷰 때의 무게감 있는 주장 어디갔어ㅋㅋㅋ
- ㅋㅋㅋㅋㅋ 이것이 원딜의 마음?
- 도둑고양이는 못참지ㅋㅋㅋㅋ
- 견제하다보면 먹을 수도 있지!
두 사람의 대화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유마의 존재 이유까지 넘어가자.
“자, 자. 행님덜. 쉿.”
“어허, 형님들 이야기 나누시는데. 어허, 봉구.”
“행님덜, 그래서 오늘 승리 소감이 어떻다고?”
“아이 좋아!”
“아이 행복해!”
문봉구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여러분덜. 항상 감사합니다.”
팬들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면서 카메라를 받아들고.
“거, 뭐냐. 일단 우리의 보배를 소개합니다. 베리 울트라 영 카이저 마제스
티, 권건이!”
나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댄다.
- 짜잔
- ㅠㅠㅠㅠㅠㅠㅠㅠ아 얼굴에서 빛나는 것 같아
- 후광이 느껴진다ㅠㅠㅠㅠ
- 얼굴도 프로네..
- 진짜..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거.. 어디보자.. 팬분들 질문이.. 아, 그래. 진짜로 3연전 다 이겨주시나요?”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진짜로? 혹시 우리 7층의 수호자가 될 수 있나요?”
문봉구의 눈에서 기대감이 느껴진다.
사실 가장 기뻐한 건 문봉구였다.
정말 최선을 다했거든.
다른 선수들이 피나는 노력을 했다면, 문봉구는 지옥에서 올라 온 사람처럼
했다.
트릭스터도 트릭스터지만 다음 대진 때문이다.
글쎄, 그건.
“우리 팀에게 달려있죠.”
한 번 뱉은 말은 지켜야 하는 법이다.
그렇게 만들 것이다.
나는 문봉구의 등을 두드렸다.
두꺼운 패딩에서 펑, 펑하고 따뜻한 소리가 난다.
#
빡빡한 일정답게 스톰 전은 트릭스터 전 바로 이틀 뒤.
FWX는 놀라운 저력을 보여주긴 했지만 이것이 오래 갈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건 FWX 콘텐츠 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계단에서 뛰어내리는 것보다 하늘에서 떨어졌을 때의 낙폭이 더 크다.
한참 화제가 되고 있는 지금.
“와, 하필. 진짜 하필.”
“주말이라도 꼈으면 좋았을텐데요.”
“그게 너무 아쉬워요.”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물 들어올 때 노 저읍시다!”
“일주일 조회수가 만을 넘어가는 걸 오랜만에 봐요!”
콘텐츠 팀은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누가 엠바고라도 걸어놨던 것 처럼 눈치 보던 콘텐츠들을 자유롭게 풀 수 있다.
때맞춰 팀 채널에 업로드된 콘텐츠들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 천상계 팬시의 아이돌 덕질 100분 ]
[ 세좌/클래스좌, 탑에서 귀인 만난 썰 ]
[ 오더형 솔킬 머신, 권건 ]
[ 인내와 시련, 그리고 내일 | Burn it up all EP.2 ]
[ 저희는 FWX입니다 ]
게다가 첫 승리 후 업로드한 FWX 소개 영상이 트릭스터 전을 통해 역주행을
타며 인기몰이를 했다.
LKL의 팬들조차 FWX라는 팀 자체에 관심이 없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주 짧은 인기.
혹은 권건이라는 개인에게만 쏟아질 관심.
이것이 끊어지지 않게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다음 승리다.
“근데 다음 경기는 스톰인데, 지면 어떡해요?’
“응? 괜찮아요. 어차피 우리는 역배의 상징이 됐으니까. 지금 완전 LOS킹이야.”
“아하.”
“또 이기면 좋겠는데.. 사실 상대가 상대인지라.”
“성남 스톰..”
스톰은 만만치 않은 팀이다.
얼마 안되는 팬들이 일정 논란을 언급한 것처럼, 숨막히는 대진.
FWX를 상대로 여유를 부렸던 트릭스터가 육각형 팀이라면, 스톰은 상체가 강
력한 팀이다.
LKL에서 가장 유연한 미드 라이너와 무력으로는 최고로 꼽히는 강한 탑을 보
유하고 있다는 평가.
그리고 이번에 중국에서 돌아온 정글러를 영입했다.
시즌 초, 새로 들어온 정글러와 호흡이 완벽하지 않아 주춤한 탓에 순위가 약
간 아래로 떨어져있었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
지난 시즌 1위가 성남 스톰이다.
FWX 감코진도 이 문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일정 정신 나갈 것 같네.”
어마어마한 업셋을 이뤄냈지만 FWX는 이 승리를 즐거워할 겨를이 없었다.
감코진과 선수들 모두 이번 승리를 우연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대진표가 너무 촘촘하다.
트릭스터에 바로 이어서 스톰이라고?
차라리 중간에 F.L.E가 들어왔다면 좀 나았을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모든 팀을 만나는 풀 리그다.
성남 스톰은 성난 스톰이라고도 한다.
플레이 스타일이 매섭다.
특히 탑은 거의 극상성이나 마찬가지였다.
굳이 따지자면.
상위권 팀 중에서도 FWX에게 가장 어려운 상대.
“그럼 그때 이야기 했던 방향으로 가고..”
“상대 예상 픽은..”
시간을 쪼개고 쪼개도 부족하다.
이긴 직후였음에도.
새벽 동이 틀 때까지 합숙소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