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화. 두 글자
“얘네. 생각보다 잘하네.”
“지운이형 존나 밉상이다. 원딜의 자존심을 버렸어.”
트릭스터 원딜 고수호는 부글부글 끓었다.
고수호는 FWX의 곽지운이나 호넷의 목해인 등 원딜러들이 모인 ‘왕자님 모임’
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이름의 채팅방 소속이었다.
물론 이 이름은 선수명조차 ‘세자’를 사용하는 곽지운이 지었다.
처음에는 미친 채팅방 이름에 학을 뗐지만, 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가벼운 분위기에서 얻을만한 정보도 제법 있었고.
원딜들이 내심 왕자님이라는 표현을 마음에 들어했기 때문이다.
왕자란건 결국에 왕이 된다는 뜻이니까.
“한타에서 보여줘.”
“오케이. 시비루 먼저 찔러버려. 라인전만 끝내면 저거 아무것도 아니야.”
하나뿐인 왕좌에 오르기 위해서는 다른 왕자를 먼저 죽여야한다.
“음.”
하지만 정글러인 김은검은 불편한 소리를 냈다.
“은검. 괜찮아. 침착해. 우리가 무조건 이겨.”
탑 이상하는 충분히 좋은 성장을 이뤘다.
각이 나오지 않아 솔로킬은 내지 못했지만 CS 차이를 벌려뒀다.
아쉬운 건 그 이상으로 정글 간의 성장 차가 벌어졌다는 점이다.
하지만 상대 정글은 뽀비.
첫 번째 세트의 탈리아같은 캐리력을 가지지는 못한다.
“얘들아. 집중하자. 우리가 쟤네보다 잘한다. 믿어.”
이상하는 트릭스터의 정신적 지주다.
“오케이!”
“상하형 믿고 가보자고!”
트릭스터는 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상대는 여전히 FWX니까.
#
“좁은 길목! 좁은 길목!”
“이거, 어느 새 진영이 뒤바뀌었어요! 미드를 압박하다가 내려온 트릭스터가
레드 진영 쪽 좁은 길목을 뚫으려고 시도합니다!”
“시야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아요, 트릭스터! 최선을 다해 뚫어야 하는데요!”
“하지만 레나타, 레나타의 위협도 대단합니다! FWX, 조심해야 해요!”
일촉즉발.
용 앞 전투에서 모든 관중은 숨을 죽였다.
소리를 내는 것은 오로지 해설진과.
“비예고 무시. 깍지 형. 돌아 들어와. 냐르한테 각 주지 마. 곧. 들어간다.”
“오케이.”
선수들 뿐.
이기고 싶다.
꼴찌는 싫다.
LOS를 잘 하고 싶다.
하지만 길을 잃어버렸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었다.
그렇지만 지금.
게임의 환경음조차 멀어진 것 같은 아득한 집중력의 세계에서.
FWX 선수들은 새로운 경험을 했다.
“사이언과 뽀비를 앞세운 FWX의 선제 공격!”
해설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전해져오는 공기의 진동.
“뽀비가 굳건한 태세! 좁은 길목, 역장으로 틀어막으면서!”
“가장 먼저 불편한 냐르를 궁극기로, 홈런! 홈런입니다! FWX의 4번 타자 권건!”
마치 신인으로 처음 무대를 밟았을 때 느꼈던 것 같은 떨림.
“돌입합니다!”
하지만 집중이라는 긴 터널 속에서 빛을 봤을 때의 느낌.
“사이언, 달립니다!”
갑작스럽게 붙기 시작하는 가속도.
바람 한점 없는 경기장에서, 뭔가 뺨에 닿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우측 측면으로 아자르! 아자르! 아자르 셔플! 황제의 진여어어엉!”
“돌아온 냐르! 냐르으으으! 벽, 벽, 벽! 냐르 궁극기는 아자르 벽에 들어가지
않아요!”
“유마, 유마, 유마! 대단원! 대단원! 움직일 수 없어요! 길이 좁아요!”
얼굴의 솜털들이 흔들리는 느낌.
그리고 그것이 희열이라는 감정을 알게되는 순간.
“순식간에! 순식간에! 순식간에에에에! 트릭스터가 탈출 경로를 찾지 못합니다!”
“여기가아아아아아아! 지옥입니다아아!”
“FWX!”
함성이 터져나왔다.
#
- 얘네 진짜 잘하는거 아니냐?
준비 빡세게 한 거 같던데?
두 번째 세트 보니까 왤캐 왤캐임..?
ㄴ 1세트 우연인 줄 알았는데 뭔가 있긴 있는듯
ㄴㄴ 그거 우연 아님 안 싸워주는 것도 운영임
ㄴㄴ 질거같으니까 올려치기하지마라ㅋㅋ 추릭스터야 트하다ㅋㅋ
ㄴㄴ 나 트릭스터 팬 아닌데
ㄴ 시비루가 저렇게 했을 때 뽀비가 못 털어먹었으면 그냥 거기서 게임 끝나
는거잖아
ㄴㄴ 정글러를 믿었나 봄
ㄴㄴ 리스크 너무 큰거 아님?
ㄴㄴ 정글러를 믿었나 봄
ㄴㄴ 무사가 만만해?
ㄴㄴ 정글러를 믿었나 봄
ㄴㄴ 져도 다음 판 있어서 해본 듯
ㄴㄴ 이거 맏다
#
“오늘 경기력 굉장합니다, FWX.”
“강팀을 마주했는데도 기세가 전혀 꺾이지 않았어요. 아주 여유롭습니다.”
“사실상 유마가 주인공인 느낌이에요. 유마는 상황을 바꾸는 챔피언이라기보
다는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굳히기 좋은 챔피언이거든요. 한없이 유리합니다.”
“한타에서 크게 실점하면서 트릭스터가 갑자기 크게! 크게 얻어맞았어요. 남
은 오브젝트만 챙길 수 밖에 없습니다. 이건 너무 빡빡해요.”
“좀 더 스마트했어야했어요.”
스코어가 기울기 시작했다.
“트릭스터가 공격적인 픽을 두 세트 연달아 잡았는데, 이러면 플레이에서의
방향 전환이 쉽지가 않거든요.”
“또 옵니다. 또 옵니다! 이번에는 탑! 안돼요, 냐르는 희망입니다 죽으면 안
돼요!”
“뽀비 혼자가 아니에요! 유마가, 유마를, 유마를 태우고 온 뽀비입니다! 여기
서!”
“냐르가! 잡히고 맙니다!”
성장에서 밀렸던 챔피언들의 밸런스가 정상으로 돌아간다.
“뽀비! 뽀비가 물렸습니다!”
“안녹아요! 안녹는다구요! 세 명한테 맞았는데! 시간이 너무 끌리면 지원군이
와요!”
“또 다시 홈런! 호오오오옴런! 3연타석 홈런입니다! 뽀비의 맛!”
한 쪽은 투자에서 손실을 보고.
“그 사이에 시비루가 라인을 쭉쭉 밀어넣고 있습니다! 막아야해요! 트릭스터!
시간을 너무 많이 썼어요!”
한 쪽은 이득을 본다.
“레나타의 폭탄 목걸이! 띠릭! 띠릭! 띠릭! 살고 싶으면 싸우세요! 아아아아!
싸울 곳이 없어요, 싸울 사람이 없다구요! 잡아줘, 해 줘!”
“우겨도 소용 없습니다. 결국 죽고 맙니다. 트릭스터, 녹다운인가요? 레프리?
레프리! 심판!”
“여기 사람 있어요! 아직 할 수 있습니다! 더 싸울 수 있어요! 트릭스터도 결
코 약한 팀이 아닙니다. 이번 시즌 폼이 부쩍 올라온 좋은 팀이거든요! 살짝,
살짝 방심했을 뿐입니다! 아직 싸울 수 있어요!”
“이걸 피한다고?”
“이거 누가 들어가도 된다고 했는데.”
“저거 뽀비 홈런 치는 거 진짜 돌아버리겠네.”
“나 지금 혀가 얼얼하다.”
“씹었냐?”
“이쪽에 있나? 아, 어딨지? 반대 방향 돌았나?”
“나 지금 상상 속의 뽀비랑 싸우는 것 같은데. 개무섭네. 얘네 어딨어?”
“이거 시비루 너무 OP인것 같다. 라인 미는 속도 말이 안된다.”
“형, 형, 상하형. 이제 어떡해?”
트릭스터의 생각이 바뀐다.
상대가 예상보다 강하다.
정보에 확신이 없어져간다.
이건 예상에 없던 일이다.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경기 전까지 몇 달, 며칠, 혹은 몇 시간 동안 주입해온 기준이 바뀐다.
분명히 이런 플레이는 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해버린다.
“아직 눈은 뜨고 있습니다, 트릭스터!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요! 가드 올려야
합니다!”
“근데 왼쪽 어금니는 이미 나간 상태란 말이죠? 아파요.”
FWX 역시 여기까지 오면서 실수를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라인전에서 아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솔로킬을 내주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줄 건 주더라도 반드시 다른 부분을 가져간다.
물론 여러번 통할 전략은 아니다.
그러나 승리는 경험치가 될거다.
“트릭스터가 반 쯤 무너진 것 같습니다. 아직 KO가 아니다 뿐이지, 지금.. 상
황이..”
“정말로 오늘 상상도 못했던 업셋이 나오나요?! 승리가 코 앞이에요. 무사가
스스로 상황을 만든 적이 없습니다. 바텀 푸시에 계속해서 흔들렸어요!”
- 우정뭐?우정뭐?우정뭐?
- 라이너들 정글 안 봐주고 뭐해
- 지금 메타에선 정글러에게 과투자를 할 필요가 없음
- ^^발 그런거 따질 때임??? 니 팀 버려???
- 무사 개샛기야 겁쟁이 신발이라도 빨리 사라고!!!!!!!
- 멘탈 나감?
- 포지셔닝 시이발 존나 킹받게 하네
“무사 선수가 야수의 심장을 가진 정글러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완전히 힘을
잃었습니다.”
“이거, 트릭스터가 이기려면 FWX가 던져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냥 던지는 것도 아니에요! 대애애애역 죄인! 대역 죄인이 나와야합니다.”
트릭스터의 눈 앞이 서서히 흐려졌다.
이렇게까지 불리한 상황이 낯설다.
이제야 상대를 너무 얕봤다는 걸 인정할 수 있다.
“춥네요. 게임이 너무 차갑습니다. 북풍한설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4 용 넘어
갔습니다.”
“가드가 다 풀렸어요, 트릭스터.”
“부상이 너무 심합니다. 사실.. 이젠..”
“FWX가 마지막으로 바론을 치나요? 상당히 이른 타이밍입니다. 딱 반대쪽에
와드 뿌려놓고 지우는 시간 동안 치는 거거든요. 너네, 이거 먹어. 이거라도
먹어!”
“트릭스터! 미니언이 이미 억제기 너머로 들어가고 있어요. 상대의 바론을 알
아차렸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나요, 트릭스터! 집에서 막나요? 아니면 바론
쪽에서 싸워보나요?”
하지만 여전히 믿을 수 없다.
FWX를 상대로 양자택일의 상황에 처했다고?
사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다.
그래서 트릭스터는 더 자신있는 방향을 선택했다.
“갑니다! 트릭스터, 갑니다! 싸워! 그냥 싸워!”
“안됩니다, 트릭스터!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지금 싸움을 보는 건 안돼요! 이
건 복싱 만화가.. 아닙니다!”
트릭스터의 전투.
“전투! 전투가! 어! 어어어어어? 어어어어! 바론이 아니라?”
“아아아아아아!”
“텔! 텔! 텔!”
그리고 예상의 예상.
- 잠깐만
- 설마
- 진짜로?
- 이걸 이렇게 한다고?
“FWX! 상대가 올 걸 알고 있었나요? 아, 아아아아! 아자르 텔! 아자르 바텀
방향! 바텀 방향! 본진! 본진 막아야해요! 본진!”
“바론, 안쳐요! 바론 안쳐요! FWX의 반전!”
“트릭스터, 트릭스터! 트릭스터 완전히 당황합니다! 집, 집으로! 집으로 가야
해요!”
“FWX의 남은 인원 동시에 돌아서서 전투로 전환합니다! 집만 막으면 돼!”
“이거 이지선다! 가불기! 가불기에요! 함정에 빠졌습니다! 으아아아아! 비상!”
트릭스터가 완전히 의표를 찔린 상태에서.
기울어진 마지막 싸움이 시작된다.
“키이사부터.”
“키이사! 키이사! 키이사!”
“예성아, 천천히 해. 무조건 이겨.”
“죽여! 죽여! 죽여!”
“아라 텔, 텔 끊어. 텔 끊어.”
“잡았어, 잡았어, 잡았어, 잡았어!”
“오키! 오키 다 됐스! 다 됐스!”
“야, 야! 야아아아아아아아!”
“나 내렸어! 내렸어! 어디가! 서폿끼리 놀자! 어디가!”
“거의 다 깼어! 나 다 깼어!”
“이겼어.”
“이긴거 맞아? 맞아? 맞냐고!”
“우리가, 우리가 이긴거 맞아? 맞아? 예성아 타워 다 깼어?”
“다..!”
화면이 멈춘다.
세상에서 가장 느리게, 상대의 넥서스 방향으로 화면이 움직이면서.
미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트릭스터의 챔피언들을 지나.
“이겼다.”
넥서스가 터져나간다.
화면에 두 글자가 새겨진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겼어! 이겼어! 우리가! 어캐 이겼누!”
“으아아아! 해냈어! 우승! FWX 우스으으응!”
“우승 아니야 미친놈아!”
승리.
벗어던진 헤드셋 너머로 엄청난 함성이 쏟아져들어온다.
당장 자리에서 일어난 선수들은 서로 부둥켜 안았다.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오랜 시간이었다.
잃어버렸던 자신감, 끝난 줄 알았던 시즌.
“우리의 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아아악! 대전 FWX가! 인천 트릭스터를 상대
로! 매치 승을 가져갑니다!”
“GG!”
시즌은 지금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