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화. 기대컨
3월은 겨울이다.
예전에는 1, 2월이 지나가면 봄이 온다고 생각했는데.
눈이 녹았다고 해서 봄이 오는 건 아닌 모양이다.
아직 쌀쌀한 날씨다.
물론 여기에는 몸에 열이 많다고 반팔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다.
한 겨울에도 맨발에 슬리퍼를 신는 남자, 문봉구.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인지 모르겠다.
춥지도 않나?
아니면 내가 외형은 늙지 않지만 사실 몸 안은 늙어가고 있다거나.
분명히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는데도 그렇다.
그래도 운동은 습관이 되어서 그럭저럭 해나가고 있다.
잠에서 깨고 나서 10분간 스트레칭.
오후 스크림을 마친 뒤 5시 쯤에 트레이닝 룸으로.
FWX의 운동 시설은 훌륭하다.
연습실이 있는 건물에 있는데, 숙소와 건물이 연결되어있으니 바로 실내용 운
동화를 신고 갈 수 있다.
그리고 조용하다.
여기에 규칙적으로 오는 사람은 박 감독님과 김예성 정도다.
트레이너는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특정 시간대에만 오기 때문에 마주칠 일이
없다.
FWX 소속의 다른 게임팀 사람도 종종 보이긴 하지만 알고지내는 사이는 아니
라 데면데면하다.
[ 운동은 왜 하는거야? ]
종종 김예성과 같이 나오기는 하는데 오늘은 아니다.
넓은 트레이닝 룸에는 나 혼자밖에 없었다.
“그냥.”
[ 운동이 재밌어? ]
릴리는 나를 따라 운동하는 흉내를 냈다.
“자세 틀렸는데.”
[ 벌써 노잼이다. ]
건방진 초딩이군.
바른 자세로 운동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이런 건 미리 잡아놔야..”
[ 요즘 조공이 좀 뜸한데? ]
릴리가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다.
요즘 바빴던 게 사실이다.
우리 모두가 빡빡하게 시간을 보냈다.
특히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스크림 요청이 들어왔기에 비는 시간이 없었다.
“뭐 먹고 싶은데?”
[ 나는 그 때 먹었던 젤리랑, 초콜렛이랑. 입에서 살살 녹는 거. ]
‘파베?’
운동을 마무리하기 위해 유산소 존으로 옮겼다.
천천히 빨리 걷기부터 시작한다.
[ 응. 그 때 선물 상자에 들어있던 거. ]
이 시기에 선수단에 들어오는 선물로는 초콜렛, 사탕 등이 있다.
팬들이 발렌타이 겸 화이트 데이라며 보내주는 선물들이다.
구단도 SNS에 몇가지 이벤트를 진행한 모양이고.
그런데 내가 초콜렛을 꽤 많이 챙겨갔더니 단 걸 좋아한다고 소문이 났는지
계속해서 들어온다.
사실 별로 안 좋아하는데.
‘다음에 또 갖다 줄게.’
[ 니가 사줘. ]
‘다 먹고 나서 사달라고 해.’
[ 아니.. ]
릴리는 입을 실룩거리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왜지?
다른 게 먹고 싶었나?
#
대전 FWX와 인천 트릭스터의 경기는 생각보다 많은 주목을 받았다.
바로 직전에 있었던 경기인 광주 미라쥬와 성남 스톰의 경기가 전문가들 사이
에서 이번 주 최대의 매치로 꼽히기도 했고.
FWX가 다시 한 번 기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왕왕 있었기 때문이다.
- 업셋 “해줘”
ㄴ ㄲㅈ
ㄴㄴ 트릭스터가 나타났다
ㄴㄴ ㅋㅋㅋㅋㅋ제발져라제발져라제발져라
ㄴㄴ 빨리 자기 자리로 돌아갔으면ㅋㅋㅋ
ㄴㄴ ㅇㅇ순혈 1위는 스톰
ㄴㄴ 유니버스지;;
ㄴㄴ 위풍당당 미라쥬가 나가신다
LKL 리그는 5위까지의 팀들이 치열한 양상을 보였기에 더 그랬다.
- 트릭스터 무사(Musa) “덤벼라, 이 풋풋한 풋내기야”
ㄴ 역시 우리 은검잇^^ 나믿너믿
ㄴㄴ 찬란한 실버쏘드
ㄴㄴ 신인 거품 박살낼 “정글의 신”
ㄴ 보너스 스테이지 개꿀
ㄴㄴ ㅋㅋㅋ경기 안 볼 예정ㅋㅋㅋ
ㄴㄴ ㅋㅋㅋ구라 자제좀ㅋㅋㅋ 원래 약팀 패는 게 젤 재밌음
ㄴㄴ ㄹㅇ 강팀이면 중요해서 봐야하고 약팀이면 찰져서 봐야함ㅋㅋ
ㄴ 맞아봐야 정신이 들지?
ㄴㄴ 비빌걸 비벼라ㅋㅋㅋㅋ
ㄴㄴ 탱킹 뿌셔ㅋㅋㅋ FWX 가지고 스포츠 팬 ㅇㅈㄹ
결국 어부지리로 1위를 넘보는 팀들끼리 지나친 도발까지 해가며 난장판이 벌
어졌고.
소수에 불과한 FWX 팬들은 커뮤니티에서 밀려나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 [FWX] 우리 애들 멘탈 안 깨졌으면 좋겠다
ㄴ 야.. 기대컨 잘해라.. 너무 기대하진 마
ㄴ 솔직히 이기면 좋겠지만 걍 노력만 해도 괜찮을 것 같아
ㄴㄴ 지금 까지 보여준거만 해도 다음 시즌 충분히 볼만함
ㄴㄴ ㅇㅇ 여태까진 방치만 한 것 같았는데 정신 차린듯
ㄴㄴ 우리 팀 FWX 화이팅
ㄴ FWX 아직도 말소 안됐음?
ㄴㄴ ㅂㅁㄱ
#
데이터상 우리와 인천 트릭스터 사이에는 압도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트릭스터에는 스타 선수도 없었지만 선수들의 지표가 뛰어나고 특별한 단점이
없다.
탑은 안티 캐리를 선호하지만 체급 자체가 높다.
정글은 챔피언 폭이 넓은 베테랑.
미드는 다재다능한 미드필더형.
원딜은 스스로 메이킹이 가능한 수준.
그나마 조금 아쉬운 것이 서포터다.
하나하나 비교해봤을 때 잡아내기 쉬워 보이는 경기가 아니다.
하지만 해야한다.
그냥, 그런 마음이 들었다.
가만히 지금의 팀원들이 쓸려나가는 걸 보면서 ‘최선을 다했지만 역시 강한
적이었다’ 따위의 말을 하고 싶지 않아졌다.
팀은 정말 최선을 다해 준비했으니까.
나도 지는 걸 싫어하기도 하고.
“긴장하지 마라. 우리가 준비한 대로 침착하게 하고, 보여줄 수 있는 걸 다
보여주면 돼.”
감독님은 결연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꼭 이겨라. 예성이를 위해서.”
김예성이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그럼 오늘 밴픽은..”
이번 경기는 우리가 홈 배정.
진영 선택권으로 블루를 선택했다.
하지만 트릭스터를 상대로는 당당하게 뽑을만한 선픽이 없다.
굳이 따지자면 미드 선픽이나 원딜 선점 정도가 있겠지만, 트릭스터는 교묘하
게 밴을 했다.
이렇게 되면 뭘 골라도 트릭스터의 선수들이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
이럴 때는 오히려 선점보다 뺏기면 안될 것을 먼저 고르고.
상대의 두 픽을 보고나서 방향성을 가늠한 뒤.
다음 턴에 두 개를 동시에 완성시키는 게 낫다.
상대는 우리의 탑 카드를 훤히 알고 있다.
사실 모르는 팀이 없긴 하다.
최근에 문봉구가 탑 그윈을 사용하긴 했지만 트릭스터 탑 이상하를 상대로는
어림도 없는 소리다.
그 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뭘 들고 가도 힘을 쓰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나도 이번에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유리하다고 평가받는 블루 진영에서도 이렇게 부담을 감수해야할 때가 있다는
것을.
“냐르로 가자.”
“좋심다. 제가 한번 잘 맞아보겠심다.”
“오늘은 맞기만 하면 안돼.”
“옳으신 말씀임다. 습관적으로. 미스테이크.”
분위기는 엄중했다.
팀원들은 지나치게 긴장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복잡한 기분이 드는 것 같았다.
밴픽 구도를 충분히 함께 돌려봤는데도 그렇다.
“음.”
상대가 바로 갱플랑크와 르블란을 가져간다.
경험 많은 트릭스터의 이상하의 대표 카드 중 하나다.
갱플을 잘 하는 선수는 그리 많지 않다.
언뜻 쉬운 것 같지만 난이도에 한계가 없는 챔피언이다.
팀 게임에서는 더 그렇다.
문봉구와의 손싸움뿐만 아니라 심리전에도 자신감이 있다는 거다.
하지만 충분히 예상했다.
트릭스터는 우리를 경계하기는 하겠지만 과대평가하지는 않고 있을 것이다.
미드 선픽은 호재다.
트릭스터가 생각해온 싸움 구도가 있는 것 같다.
밴픽은 계속 이어졌다.
“유마..”
예상에서 벗어난 픽이 나왔다.
상대 서포터 강민찬은 이니시 부담이 쏠릴 때 넘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몸이 들어오는 이니시에이터 역할을 유도하려고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도 이정도면 우리 계획대로 됐다.”
“해볼만 할 것 같아요.”
“라인전에서 너무 위축되지 말되, 절대 빨려들어가지만 마라. 시간이 필요해.”
감독님은 선수들의 어깨를 한번 씩 툭툭 두들기고 걸어나갔다.
잠시 발걸음이 멈칫하는 것 같았지만 그대로 멀리 멀어졌다.
잘 누워있는 것도 실력이다.
그리고 나는 그 시간을 벌어줄 수 있고.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게임을 하게 될거다.
실력을 보여줄 시간이다.
가자, FWX.
#
“FWX가 탈리아와 카사딤으로 픽을 마무리 짓습니다!”
“진짜 이게 나오나요? 카사딤이라니, 이거 되나요?”
“정 반대의 전략을 짜올 줄 알았는데! 눕는 조합이에요! 이거 정말 괜찮을까
요, FWX?”
“바텀에서는 셰나와 탐 진치를 가져갔는데요. 이러면 완전히 숙면을 취하겠다
는 이야기에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해설진들은 FWX의 방향에 의문을 표하며 열을 올렸다.
“트릭스터는 끝까지 정글 픽을 숨기다가 결국 비예고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권건 선수의 데이터가 아직 확실하지 않은 점을 경계했나보군요.”
“생각보다 치열한 밴픽 싸움이었는데요. 양 팀의 구도, 어떻게 보십니까?”
“업셋의 조건이라는 게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보통 약팀이 강팀을 상대할
때는 초반 교전이나 예외성 같은 걸 이용해서 게임을 빠르게 가져가려고 하는
편이거든요!”
“그렇습니다. 운영 단계까지 넘어가게되면 아무래도 상대적 약팀이 불리하다
는 평가를 받죠.”
“그런데 이렇게 되면 FWX는 뭘 해보기도 전에 게임이 터져버릴 가능성이 높아
요. 상대는 강팀 트릭스터입니다!”
- 좆망..
- 하나만 해.. 하나만.. 셰나에 카사딤 개에바
- 또 딜누해 감? 권건 학대 좀 그만해라
- 딜찍누 vs 딜누해..
- 봉구한테 딜 시킬거니?
- 존나 기대가 1도 안됨ㅋㅋㅋㅋ
“그럼 트릭스터의 조합은 어떤가요?”
캐스터의 물음에 해설진들은 잠시 고민했다.
트릭스터의 조합이 최고라고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최근 성적이 좋은만큼 쉽게
말하기 어렵다.
“음.. 트릭스터요.”
하지만 생각해보니 FWX도 그렇다.
분명히 계속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순위가 9위인 것과 달리 권건이 합류한 FWX를 순위로만 보는 전문가는
드물었다.
거기다 왠지.
FWX에는 의외의 맛이 있다.
“트릭스터의 조합은 마지막 자리가 비예고가 되면서 개인기 조합이 됐습니다.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포킹을 할 수 있는 챔피언들이죠.”
“그렇군요.”
“네, 체급까지 고려했을 때 각 라인에서 전혀 밀리지 않고 거리 유지만 된다
면 굉장히 강력해요.”
“상대 탐 진치를 보고 유마를 뽑은 것도 좋은 선택입니다. 굳이 탐 진치를 상
대로 탱커류 챔피언을 하면 불편한 구도가 만들어질 수 있거든요.”
“바텀은 서로 성장하면서 가져가되, 중반부터 유마가 르블란을 타고 다니면서
FWX에게 간섭하면 좋은 그림을 만들 수 있겠죠.”
“하지만..”
갑자기 멀리서 FWX 팬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FWX 화이팅, 그리고 뒤로 알아들을 수 없는 외침이 들리다가 곧 작아졌다.
“트릭스터의 조합에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있죠. 그리고, FWX는
항상 저희의 상상을 뛰어넘곤하는 팀이니까요.”
현수진 해설은 자기도 모르게 기대감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어.”
“왜 그러시죠?”
“갑자기 이 경기가 재밌을 것 같아요.”
“하하, 현수진 해설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기대해보도록하죠. 자! 지금부터
대전 FWX 대 인천 트릭스터, 인천 트릭스터 대 대전 FWX의 경기를 시작하겠습
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