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화. 아직은 무겁다
트릭스터의 원딜 고수호는 오미래와 떠들어대고 있었다.
“쟤 진짜 잘하는 것 같아.”
“어. 보니까 우리보다 형은 아니더라.”
“그래도 캐리해주면 형이긴 해.”
“그건 맞지.”
“근데 건이 형 개잘생겼던데.”
“니 개망했네.”
“뭘?”
“경기 때 건이 형이랑 비교될 듯.”
“응, 내 옆자리 너라서 괜찮아.”
“응, 내가 누누고 니가 윌람프.”
“난 니 얼굴만 봐도 흥겹다.”
두 사람은 말씨름을 하면서도 권건의 바텀 갱을 깔끔하게 호응했다.
“홀리.”
“진짜 너무 신기하네.”
“나도.”
오랫동안 플레이를 같이 해온 두 사람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나랑 되게 오랫동안 같이 했던 사람인 것처럼 한다.”
오늘처럼 정글, 원딜, 서포터로 바텀에서 만나보니 더 그랬다.
핑을 찍지 않아도 의도를 알고 움직인다.
“그러니까. 호흡 딱딱 맞네. 뭐지.”
“얘 자기네 팀원들이랑도 이렇게 잘 맞나?”
“너 피드백 시간에 잤냐? 요새 얘네 한타랑 밴픽 연구 분석 자료 많잖아.”
슬슬 메타가 잡혀가는 2라운드에서 등장한 새로운 픽이나 전략은 많은 팀들의
관심을 끌었다.
호넷 전에서 나온 세주아리, 리싱, 리산드리.
리리싱 상체 조합이라고 불려진 픽같은 것들이 그랬다.
물론 승리했다고 그것이 바로 좋은 픽이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고, 어떤 아이템과 룬을 사용했는지, 그리
고 우리 팀의 특성에 맞는지 등을 분석팀에서 연구해볼 만한 가치는 있다.
그리고 상대가 다시 그 조합을 구성했을 때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서도.
슬슬 자료가 퍼지면서 다른 팀에서도 FWX와 권건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FWX지. 다행이다. 빅스나 유니버스 안가서.”
“그건 진짜 인정. 거기 갔음 좀 거슬렸을 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FWX를 경계하는 상위권 팀은 없었다.
“그래도 얘 승률 좋은 이유를 알 것 같긴해. 그러니까 혼자 포인트도 승천했지.”
“존나 잘 받쳐줘. 저거 봐. 정인이형 행복사하는거.”
“아.. 깍지형 좀 부럽긴 하네.”
깔끔하게 고속도로를 뚫어버린 누누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눈덩이 굴리기를
하고 있었다.
#
- 퓨릭스터 트처(럭스) : 우정권! 우정권!
- TRT Gogumi(코구모) : 우정권! 우정권!
- 정글맘에안드네(누누) : ㅇㅈㄱ
“트릭스터 애들 자꾸 저러네.”
김예성은 어딘가 불편해보였다.
이번 판을 미드 중심으로 안 풀어서 그런가?
하지만 우리 미드는 갈레오다.
“그냥 밈이야.”
게임이 끝나간다.
- 정글맘에안드네(누누) : ㅊㅊ
오늘도 명예를 수거한 나는 최정인의 친구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 사람은 대단한 새침데기다.
만약 오늘 받아주지 않았다면, 음.
경기장이든 어디서든 음험한 시선을 받게 됐을거다.
“휴게실 갈 사람.”
김예성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지금 게임이 끝난 사람은 우리 둘 밖에 없는데.
그렇게 말하면 나한테 가자는 소리잖아.
“가자.”
“그래.”
우리는 또 별 말 없이 휴게실로 향했다.
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김예성의 팬들은 애정을 담아 예성2라고 부르기도 했다.
데뷔 2년차의 스프링, 서머에 연달아 2위를 달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FWX로 이적 후 그대로 기억상실증.
김예성 하나만 보고 FWX를 응원하는 팬들도 있기 때문에 아칼린으로 좋은 모
습을 보여줬을 때 반응도 대단했다.
이런 미드가 FWX에 있는 건 다행이긴 하지만, 왜 여기에 오게 된 건지 궁금하
기도 하다.
“커피?”
“나는 옥수수차.”
워낙 말을 안하니.
우리는 잠시 어색한 시간을 보냈다.
나는 들고 있던 차를 반 병쯤 마시고 일어나려고 했다.
“가디건 잘 샀다.”
유찬이와 일도, 지호가 선물한 가디건이다.
“아는 애들이 줬어.”
“좋은 친구들이네.”
또 다시 잠시 침묵이 있었다.
“나는 연습실에 뭐 묻은 티셔츠 입고 오는건 별로야.”
갑자기?
“그리고 리그가 진행 중이더라도 머리는 깎아야 한다고 생각해.”
그건 그렇지.
“발 안씻고 맨발에 슬리퍼 신는 것도 싫어.”
정상이다.
“너는 안 그래서 편해.”
아하.
어쩐지.
처음부터 깔끔한 인상이더라니.
세 개를 동시에 다 하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뭐 한 두 개 정도는 그냥저냥
하고 다니는 선수들이 꽤 많다.
밥먹다가 뭘 흘려도 무시하는 곽지운이라던가.
맨발의 문봉구라던가.
“감독님도 안 그래서 좋고.”
이 판에는 감독에 따라 팀을 선택하는 선수들도 종종 있다.
김예성도 그런 모양이고.
뭐, 물론 감독님이 티셔츠를 잘 갈아입고, 머리를 잘 깎고, 맨발에 슬리퍼를
지양하기 때문만은 아닐 거다.
두 사람의 유대가 꽤 깊어 보였으니까.
“왜?”
별 생각 없이 물었는데 김예성은 꽤 진지하게 대답했다.
“팬분들께 실례잖아. 촬영팀도 자주 오고, 경기장에서 경기도 하는데. 좋은
모습 보여드려야지. 단체 생활이니까.”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김예성은 큐를 돌리면서 남는 자투리 시간에도 과거 경기 영상을 찾아볼 정도
로 열심인 사람이니까.
모든 면에서 완벽주의자인 마인드.
“그건 좋지.”
얘도 나름대로 이 분야에 대한 철학이 있구나.
새로운 사실을 알았네.
“야식이나 먹을래?”
“너무 배부른 거 말고 적당한 거 먹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데.”
“어.”
“너는 우리 정글이지?”
#
LOS에는 여러 라인이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뚜렷한 이미지를 가진 라인은 탑이다.
가장 중요하면서도, 때론 가장 중요하지 않은 포지션.
탑들은 좋지 않은 별명을 가지고 있지만, 또 동시에 가장 남자답다고 불리는
라인이기도 하다.
아랫것들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특유의 멋과 로망.
고립된 채 자신만의 길을 걷는 라인.
다른 라이너들과는 어딘가 다른 한타의 개념.
종종 볼호그와 스타플레이어 사이를 오가는 자들.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의 이유찬은 아직 볼호그에 가까웠다.
거기다 머리까지 길렀다.
김예성이 보면 질겁을 할거다.
이유찬이 장발을 할 생각은 아니었겠지만, 귀찮다는 이유로 미루다보니 뒷머
리가 덥수룩했다.
그리고 머리숱이 너무 많아서.. 삽살개같다.
- 탑병이유찬 : 야
- 나 : ?
- 탑병이유찬 : 야식?
- 나 : 먹고있는데
- 탑병이유찬 : 아뿔싸
- 나 : 머리나 좀 깎아
- 탑병이유찬 : 어쩐지 요즘 몸이 좀 무겁더라니
- 탑병이유찬 : 깜빡했네
- 탑병이유찬 : ㄳ
#
FWX는 트릭스터 전을 꾸준히 준비해왔다.
사실 선수들이 다른 경기를 준비하고 있을 때도 팀 전체는 꾸준히 그 다음,
그 다음 일정을 위해 계속해서 작업하고 있기도 하다.
오늘의 분석 회의는 유독 길었다.
“트릭스터 다음도 지옥 일정이지?”
“그 다음에는 바로 성남 스톰과 경기가 있고, 그 다음 주에는 빅스에요.”
“이번 주 순위 어때?”
“트릭스터가 11승 1패, 세트 득실차 13점으로 1등. 스톰이 7승 5패, 득실차 5
점으로 4등. 그리고 빅스가 8승 4패, 득실차 9점으로 2등이에요.”
“스톰이 이번 주에 죽을 쒔나.”
분석팀 스탭이 긍정의 의미로 어깨를 으쓱했다.
데이터 공유를 마친 분석팀이 우르르 빠져나갔지만 박 감독과 최수철 코치는
연습실로 바로 가지 않았다.
FWX는 3승 9패.
세트 득실차는 -9점이었다.
“음.”
남은 경기는 여섯번.
대진이 만만치는 않지만 해 볼만한 팀도 두 팀이나 된다.
하지만 반 이상을 이겨야 플레이오프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라도 해볼 수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연달아 강팀 대진이라는 점이다.
“쉬어가기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전부 이기기는 어렵죠. 선택과 집중을 해야할 것 같아요.”
리그에는 분명히 상성이 존재했다.
업셋이 흔치 않은 것은 그것 때문이다.
물론 기가 막힌 밴픽과 좋은 플레이, 상대의 실수가 겹쳐진다면 업셋이 일어
나는 경우도 있다.
FWX 감코진은 지금의 팀 레벨을 조심스럽게 상향 조절했다.
권건의 존재 때문이다.
야구에 세이버메트릭스가 있다면 LOS 리그에는 캐리 레이팅이 있다.
LOS가 동시다발적 팀 게임이라는 점에서 야구보다는 축구에 가까운 면도 있지
만 스포츠들은 닮아있다.
기본 API와 데이터의 추가 가공을 통해 얻어낸 KDA, GPM, DPM, DPG, XPD15,
STL, KP% 등.
뿐만 아니라 와드의 위치와 동선 궤적 등을 별도의 협력 업체를 통해 다양한
자료를 뽑아내고, 이를 분석팀에서 다시 한 번 훑는다.
하지만 이건 객관적인 정보일 뿐.
권건이 내리는 오더를 완벽히 수치화할 수는 없다.
흔히 방사형 그래프로 표현되어 선수들을 평가할 때마다 빠지지 않았던 이 수
치들은 짧은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래도.. 점점 더 좋아질 것 같아요.”
권건은 새로운 연결 고리였고.
동시에 인플레이에서의 현장 감독이었다.
감코진이 게임을 분석하고 방향성, 전략을 제시하면.
인게임에서 권건이 모든 정보를 아우른 뒤 당장 필요한 역할을 부여하고, 팀
원들이 수행한다.
싸워라, 싸우지 마라, 상대는 뭘 하고 있다, 세 발자국만 뒤로 물러나라.
정답에 가까운 오더가 틀림없이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해준다.
팀이 준비한 자료들이 전보다 유용하게 쓰이기 시작하니 전체에 활력이 돌았다.
“확실히. 이번 가설은 맞아들어갔네.”
권건이 출전한 경기에서.
FWX 선수들의 지표는 확실히 개선됐다.
그래프로만 본다면 이전과 완전히 다른 선수처럼 보일 정도.
스포츠 과학을 전공한 팀원들도 통계의 함정에 속지 않기 위해 여러 번 비교
하고, 감코진과 경기 흐름을 복기했다.
표본에 수원 해머스가 들어오면서 이것은 꽤 유의미한 변화가 되었다.
팀 플레이에 관해서만 포인트가 상승한 게 아니라 개인 솔랭 기량 역시 변화
의 조짐을 보였다.
데이터만으로는 볼 수 없는 부분.
좋은 오더를 들으며 플레이해 만들어진 향상성, 그리고 선수들의 자신감 등이
상승 효과를 만든다.
“그럼 타겟을 어떤 방향으로 잡으면 좋을까. 인터뷰 결과는 어때?”
김한빛 코치가 노트를 내밀며 대답했다.
선수들과 인터뷰하며 적은 내용들이다.
“지표는 이번 강호 3연전에 힘을 쏟기보다는 미라쥬와 유니버스, 그리고 하위
권 팀 F.L.E를 노리라고 말하고 있지만.”
노트에는 트릭스터와 빅스에 동그라미가 쳐져있었다.
“선수들은 가장 잡고 싶은 팀으로 트릭스터와 빅스를 꼽았어요.”
“음.. 중요하지.”
“예성이는 트릭스터를, 봉구와 지운이는 빅스를 꼭 잡고 싶대요.”
“그래? 의외네. 예성이가 빅스 출신이라 친정팀에게 복수하고 싶어할 줄 알았
는데.”
박 감독의 말에 김 코치가 가볍게 웃었다.
“그래서 봉구와 지운이가 그래서 빅스를 골랐다고 하네요. 여기 온 걸 후회하
지 않게 해주겠다고.”
“하하, 그거 좋네. 근데, 예성이는 트릭스터에 왜?”
“그건 말을 안하던데요.”
김 코치가 어깨를 으쓱했다.
박 감독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건이는?”
김 코치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박 감독도 무슨 말이 나올지 알 것 같아서 입꼬리가 올라갔다.
“전부 다요. 다 이길거라던데요.”
“하, 참. 허.”
“맹랑하죠?”
“응. 아주.”
두 사람은 잠시 마주 웃었다.
“아직은, 아직은 무겁네. 부담이 된다.”
“저도요. 그렇습니다.”
“근데 어쩌지. 나도 성남 스톰에 갚아줄 빚이 있는데.”
“다 이겨야겠네요.”
“별 수 없네.”
감독과 코치는 고개를 마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