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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54화 (55/326)

054화. 기세

FWX의 팬들은 오랜 시간동안 설움을 이겨내왔다.

리그 팬들은 다양한 팀을 동시에 응원하는 경우도 많았고 철새들도 많았기에

진짜 ‘순혈 FWX 팬’들은 없다시피 했다.

처음에는 복지가 너무 좋으니 선수들이 해이해진 게 아니냐고 까였고.

그 다음에는 최근 다섯 시즌 간 7-9-8-9-8위를 기록하며 모 야구팀이 생각난

다며 까였으며.

최근에는 인성까지 박살난 팀으로 욕을 먹었다.

그렇게 팬들이 차근차근 떨어져나갔다.

그런데 최근 두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 데 이어.

나름 굳건하게 중위건을 지키는 수원 해머스에게서 첫 세트를 가져갔다.

사실 대부분의 관중들에게 정말 중요한 건 밴픽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결과다.

얼마나 멋진 플레이를 했는지, 솔로킬은 몇 번 땄는지, 상대를 압도했는지,

그리고 결과는 어떻게 됐는지.

거지같은 조합을 짜왔건 완벽한 조합을 짜왔건간에 결국 이기면 그만이다.

다만 졌을 때는 감독이 패배의 유력 용의자가 될 뿐.

하지만 FWX 팬들이 준동하고 있었다.

“야. 내가 말했지. 이제 진짜 다르다고.”

LOS 파크 첫 직관을 온 지세현이 옆의 최인규에게 떠들었다.

“이 판 이기잖아?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다.”

사실 처음에는 권건이라는 선수 개인의 팬이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이 팀에 스며든다.

꼴찌였던 팀이 하나씩 이겨나간다?

오히려 좋아.

“꼴찌는 아니겠네.”

“내일 피닉스가 지면 일단 9위.”

“FWX도 아직 우리랑 경기 안했는데.”

“봐라. 빅스도 이긴다.”

“뭐래. 똥믈리에 새끼. 비빌 걸 비벼야지.”

빅스 팬인 최인규는 지세현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관전방이니 매드무비니 해서 제법 유명세를 얻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봤자 FWX다.

상위권 싸움에 끼어드는 건 이르다.

“이기면?”

“내 코인 줌.”

“그거 존나 파랗잖아.”

“어쩌라고.”

“오케. 우리가 이기면 코인.”

“그러던가.”

빅스와의 경기는 아직 열흘이나 남았다.

#

“아, 권건 선수의 헤크림이 꽤 유명했죠.”

“사실 여태까지 한 모든 픽들이 그랬을 것 같아요. 특히 리싱은 더 그렇구요.

탑 밴이 자주 되지 않는 건 상대적으로 그 가치가 덜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문봉구보다는 내가 좀 더 위협적이니까.

밴이란 건 기분 좋은 일이다.

특히 메타를 덜 타는 리싱 밴 같은 경우에 그렇다.

“이번에는 해머스에서 헤크림을 선택하면서 좀 더 적극적으로 압박을 하려는

계획인 것 같습니다. 흥미롭네요. 탑 그윈, 미드 사일런트를 챙기고 바텀에서

는 징크시와 탐 진치로 구성합니다.”

하지만.

“FWX는 권건 선수가 새롭게 친 짜오를 사용하네요. 이 선수가 친 짜오도 잘

해낼 수 있을까요?”

밴으로는 나를 막을 수 없다.

상체를 막고싶다면 가용 카드가 적은 탑 밴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아직 깨닫지 못했겠지만.

“FWX는 그라가즈, 아라, 자이야, 레오니까지 고르면서 밴픽을 마무리합니다!”

“얘들아. 잘 할 수 있다. 해머스 하체 싸움 조심하고, 믿는다.”

박 감독님은 전보다 훨씬 괜찮은 표정으로 우리를 토닥이고 무대 너머로 사라

졌다.

이제 우리 차례다.

헤크림이 순조롭게 성장하게되면 점점 다이브에 최적화된다.

그래서 상대는 자이야와 로칸 조합이 완성되지 못하게 막았다.

마음대로 억까를 하겠다는 거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

“바텀 갈게.”

“오케이.”

상대가 우리 소중한 원딜을 억까하겠다면.

그 전에 상대를 억까해버리면 된다.

함무라비 법전에도 명시되어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유수의 전통.

그 명맥을 이어보자.

“요즘 LKL을 중계하면서 느끼는 점 중 하나인데요. 게임에서 퍼블이 나오는

시간이 상당히 당겨졌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번 세트는 교전 중심의 챔피언들이 대거 포진되어있죠. 지금

구도는 사실 일대일만 보면 탑이..”

“어, 해머스 바텀 지금 집에 가야하거든요. FWX는 친 짜오를 뒤에 붙입니다!”

바텀에는 고집쟁이들이 산다.

이 고집쟁이들은 수시로 탭을 눌러가며 상대와의 CS 차이에 집착한다.

탑과 바텀은 서로 대척점에 있는만큼 다르지만 동시에 비슷한 점이 많다.

내가 너보다 아이템 빨리 나왔어, 내가 너보다 세.

이런 자존심이다.

바텀에서의 기싸움은 라인 홀드를 저지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감히 웨이브를 쌓으려고 해?

너무 건방지다고 생각하겠지.

상대는 복귀 후에 돌아 올 손해를 참을 수 없다.

“해머스는 앞으로 쭉 밀고가면서 FWX가 라인 홀드를 하지 못하게 풀어놓고 가

고 싶을 거거든요?”

“그래서 이런 상대 심리를 예측하는 건데, 아!”

탑 싸움이 보통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과 달리 바텀은 아니다.

라인을 둘이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잠깐만요, 눈치 채지 못했나요! 아, 바로 레오니가 싸움 걸어주면서!”

하지만 이걸 다르게 말하면.

탑에서는 반쯤 죽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만한 상황도.

“탐 진치가 도망갈 수가 없습니다!”

바텀에서는 하나가 죽어나가는 각이 된다는 이야기다.

“기가 막히게 들어갔어요! 짜오, 짜오! 짜오가 바로 퍼블을 가져갑니다!”

“나이스!”

“징크시 점멸 빠졌다.”

“좋아요, 좋아요, 이게 바로 원딜 차이.”

곽지운이 신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괜찮은 출발이다.

다시, 전장으로.

#

“아. 좆됐다. 이거 역캠이었네.”

“개빨리 왔네. 아직 안 왔을 줄 알았는데. 미니언 시야 끝에 안 걸쳤었나.”

“좀만 기다려봐. 나 궁 찍고 바로 바텀 다이브 가자.”

하지만 해머스의 전략은 의미가 없었다.

“바텀을 찔렀던 친 짜오가 미드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찌르고! 아, 사이드 스탭으로 사일런트 흘리면서! 돌격! 파고듭니다!”

“아라의 매혹 호응!”

“일조격, 이조격, 삼조격! 에어본 됩니다! 이 타이밍에 사일이 점수를 또 다

시 내주고 맙니다!”

- 짜오 W플ㄷㄷㄷ

- 존나 깔끔하네;

- 삼조격이 세 방에 끝내라고 삼조격이냐고

- 미드 차이 시발

- 억울하면 니네도 정글 불러

“야, 방금 바텀에서 죽었는데 그걸 당해주면 어떡해. 상대 짜오인데.”

“탑 쪽에서 내려왔는데.”

“집중. 집중하자, 얘들아!”

연달아 패전 소식이 전해진다.

“해머스도 알고 있어요! 이번엔 탑입니다!”

“부쉬 안에 시야가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권건 선수 그냥 서 있어요!

노골적으로 윽박지르고 있어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야, 너 한번 해

봐. 그윈으로 CS 얼마나 잘 먹나 함 보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아요!”

“여기 빨리 와줘. 빨리.”

“잠깐만. 가는 중. 가는 중.”

헤크림을 잡은 백태준은 정신이 어지러웠다.

상대의 가속도가 놀라울 정도다.

바텀으로 향하려 했지만 탑으로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초반 주도권을 이용해 정글 쪽을 파고들거라고 생각했는데 친 짜오는 헤크림

을 완전히 무시했다.

“이 사람 갱에 미친 사람인 것 같아.”

“야, 탑에 있는 거 확실하냐?”

“맵에 보이잖아. 정신 차려.”

백태준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해머스 라이너들은 확보해둔 시야에

친 짜오가 들락거릴 때마다 불안해했다.

전 세트의 자르반이 생각난다.

한 판이 끝나면 전 판의 패배를 잊어야하는데.

잊혀지질 않는다.

해머스는 차라리 오브젝트 싸움을 하기로 했다.

“해머스 전부 전령 쪽으로 합류 중입니다! 비켜! FWX! 우리 그윈 괴롭히지 마

라!”

“하지만 그만큼 성장이나 지금 상황 자체가 좋지는 않다는 이야기에요!”

“두 팀 모두 용에 관심이 없어요. FWX가 싸움, 싸움을 계속해서 유도하고 있

어요!”

한 쪽은 오브젝트에 관심이 없고.

한 쪽은 오브젝트에 관심을 가질 수가 없다.

해머스는 첫 세트 후 FWX가 정글을 앞세워 돌격하는 게임을 준비해왔다고 확

신했다.

그래서 돌격기를 가진 정글러 중 권건이 좋은 모습을 보여줬던 헤크림을 뺏었다.

그런데 뭔가 잘못됐다.

친 짜오를 했어야 했나?

아니면 밴을 했어야 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끝이 없다.

“잠깐, 잠깐, 먼저 치나요? 먼저 치나요 해머스? 근거가 완전히 없지는 않아

요. 바텀 합류가 좀 더 빠릅니다!”

“아, 잠깐만요, 너무 혼란스러운데요! 아!”

“지금 짜오 너무 전성기에요, 뒤로 돕니다, 돕니다!”

해머스가 전령을 치는 사이 FWX가 전령 뒤쪽으로 돈다.

이 사실을 알고있는 해머스도 전령을 최대한 빼면서 공략하려고 하지만.

“솔방울탄! 넘어온 것은 그라가즈와 친 짜오입니다!”

“순간적으로 권건이 돌격합니다!”

적진 가운데로 뛰어들어간 권건에 해머스가 반응했다.

이대로 둬선 안된다.

꽤 강타 싸움에 감이 좋은 선수다.

아직 전령 체력은 넉넉하다.

일점사해야한다.

어쩌면 궁극기를 쓰기 전에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그로를 확 끌어당기면서 현월수호! 아아아아! 적들을 쭉 밀어냅니다!”

“스킬을 많이 낭비했어요, 해머스!”

하지만 속절없이 밀려나간다.

챔피언의 크기나 무게에 관계 없다.

얼마나 적절한 타이밍에 쓴 건지 친 짜오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아직 전령은 살아있다.

찰나, 해머스는 판단해야했다.

해머스의 정글러 백태준은 충분히 해볼만하다고 느꼈다.

아직 궁이 남아있다.

그리고 실행은 빨랐다.

“싸움 봐!”

“헤크림이 그림자 맹습! 전령 둥지 쪽으로 들어갑니다!”

“아!”

“어?”

“야!”

소리가 뒤엉킨다.

“그라가즈 궁극기가!”

“헤크림이 빠르게 사라집니다! 해머스, 도망쳐야해요! 애애애애애앵! 사이렌

이 울립니다! 퇴각! 퇴각하라!”

해머스의 정글러는 홀로 빨려들어가면서 잡아먹혀버렸다.

“히이이이이! 안돼요! 등을 보이는 건 위험합니다! 아아아! 추격, 추격합니다!”

“FWX가 전령을 그대로 챙깁니다!

경기장에 큰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급격하게 텐션이 올라갔던 해설진은 다시 평정심을 되찾으며 차근차근 리플레

이를 짚었다.

“친 짜오가 어그로를 쫙 빨아들이고나서 해머스의 선택이 약간 엇갈린 것 같

아요!”

“헤크림은 들어가서 싸우려고 마음 먹었는데 나머지 선수들은 약간 뒤로 빼면

서 보려고 했던 것 같죠? 그 위로 팬시 선수의 술통 폭발이 터지면서 진영이

두개로 완전히 갈렸습니다!”

“그러면서 그 뒤에 아라까지 추격에 들어가면서 완전히 패전했죠!”

“FWX, 경기력이 날이 서있어요! 압도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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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머스 멘탈 나갔냐 오늘 왜그러냐 진짜로

- 힘의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 정글 부럽지가 않어.. 전혀 부럽지가 않어..

- 해머스 이제 정신이 좀 들어? 해머스 이제 정신이 좀 들어?

- 뭐야 우리 왜 지고있어???

“다같이 싸움 보지. 짜오 플 빠졌고 나 궁 있는데.”

맞는 말이었다.

해머스는 정글러의 말에 순간적으로 침묵이 맴돌았다.

백태준이 들어간 순간은 ‘싸움 봐’라고 내뱉은 말 중 ‘싸’정도의 타이밍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이니시는 그렇게 일어난다.

어쩌면 이득을 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권건을 라인에서 마주쳤던 해머스의 라이너들은 싸움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그 순간에 그랬다.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짜오한테 스킬 많이 빠져서..”

해머스의 누군가가 간신히 대답했다.

왠지 숨이 막혀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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