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화. 블루는 중대사안이지
"건사시부리."
"깍지 형."
멘탈이 꽤 괜찮은 선수다.
어쩌면 그 멘탈이 다른 차원에 존재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막내. 다음 경기가 호넷이라는 걸 알고 있나?”
곽지운은 괜히 근엄한 목소리를 냈다.
“네.”
“이제 슬슬 날먹 사기챔들이 기어올라오고 있다는 것도?”
“암살자요?”
“옳은 말이다. 불로소득 적폐놈들.”
확실히 암살자 메타는 원거리 딜러들의 인내심을 시험할 때가 많다.
“적폐 중에서도 적폐가 바로 호넷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지. 바로 안우진이다.”
안우진이라.
기억난다.
부산 호넷이 성적으로 그리 뛰어난 팀은 아니었지만, 미드 라이너인 바젤만큼
은 허리를 든든하게 잡아준다고 호평이 자자했다.
“그 새낀 아칼린 장인이다. 분명 날 찢어버리고 싶겠지. 최대한 빨리 컷 해버
리자고. 이 임무는 너에게 맡긴다.”
하지만 미드에 서있는 건 내가 아니라 김예성이다.
안우진은 우리 미드 김예성이 상대 못 할 사람은 아니다.
김예성도 꽤 괜찮은 미드거든.
“예성이를 못 믿으시는 건가요?”
“야! 큰일 날 소릴. 예성이 믿지. 믿는데. 근데 난 안우진이 블루도 못 먹었
으면 좋겠어. 존나 잘생겼으니까. 게임이라도 불편했으면 좋겠어. 하, 내가
뺏을 수 있는 게 블루밖에 없다니.”
이 얼마나 소박한 이유인가.
하지만 이 이야기는 하필 지나가던 김예성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형.”
사람이 눈빛만으로도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블루를 왜 뺏어? 비원딜 할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이제 원딜이 블루도 먹어? 선 넘네?”
“니 이야기가 아니라.. 어! 나 야식 배달 왔다. 너네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봐.”
갑자기 곽지운이 사라져버리자 김예성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블루?”
“아니.”
“그럼 됐어.”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간신히 김예성이 입을 여는 순간.
“그..”
“야! 이리와! 내가 피카츄 돈가스 30개 주문했어!”
쩌렁쩌렁한 곽지운의 목소리가 들린다.
“괜찮아요.”
"예성이도 이리 와! 빨리 먹어!"
의외로 곽지운은 다양한 팀의 선수들과 두루 친했다.
아마 호넷의 안우진과도 친할거다.
하고싶은 말을 다 해버리지만 선을 넘지는 않고, 뒤끝이 없는 타입이라.
정작 인맥 관리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서포터 최은호는 친구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니가 안오면 건이 혼자 먹어야하는데?"
김예성은 나를 흘긋 보더니 무표정하게 나를 따라왔다.
그리고 나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물어봤다.
"돈이 없어?"
응?
이건 또 무슨 얘기지.
"피카츄 돈가스.. 몸에 안좋은거잖아. 불량 식품."
"예성아 뭐라고?"
사옥 입구로 배달 음식을 가지러갔던 곽지운이 뭔가 잔뜩 들고 들어오면서 물
었다.
설마 정말로 저게 다 피돈?
"형.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엥. 이거 맛있잖아. 맛있는거 시키면 다 나눠먹어야지. 이거 너네 둘이 먼저
먹고 있어. 나 싹 돌리고 올게."
"네네."
곽지운이 양손 가득 종이 봉투를 들고 떠나자 카페테리아에는 우리 둘만 남았다.
"이거 불량 식품 아닌데?"
"피카츄.. 좋아한단 말이야."
이건 또 무슨 소리?
피카츄 고기로 만들어졌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하려는 건?
"아, 아니. 기분이 좀 이상해서."
김예성이 살던 동네 피시방에서는 피카츄 돈가스를 팔지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성인이 되고나서 처음 봤다나.
조금 놀려주고 싶어졌다.
“근데 사실..이건 '돈'가스가 아니야.”
“그, 그럼 설마.”
“맞아. 사실은..”
“닭으로 만든거였어?”
“어..”
이걸 아네.
나는 어렸을 때 피카츄 돈가스가 피카츄로 만들어진 거라고 믿었는데.
이래서 눈치빠른 꼬맹이들은 재미없다니까.
“피카츄 갈아 만든 피카츄 돈가스! 빨리 와서 드세요!”
음, 아니군.
나처럼 순수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나보다.
#
다음 대진은 부산 호넷과의 경기다.
곽지운이 말한 대로 부산 호넷은 암살자 메타를 제법 즐기는 편에 속한다.
이맘 때 쯤 성적이 꽤 좋았으니까.
목요일에 있을 경기를 대비해서 우리는 메타 연구에 몰두했다.
윤도형이 패배로 번 시간은 꽤 유용했다.
- 부산 호넷 vs 대전 FWX
ㄴ 호넷이 정배지
ㄴㄴ 정배충 out
ㄴㄴ 올해 지긴 했는데 원래 상성상 FWX가 좀 강한 모습을 보였음
ㄴㄴ 무슨 상성; 상상 성공임?
ㄴㄴ 아니 원딜 상성ㅋㅋㅋㅋㅋ
ㄴ 탑 라인 둘 다 농사, 미드 라온 우세, 바텀 맨날 반반 아님 fwx세자클래스
쪽이 조금 우세
ㄴㄴ 근데 이제 신인 정글러를 곁들인
ㄴㄴ 권건 나온다드나?
ㄴㄴ 안나오기만 해봐 씨바 좃같은 놈들 내가 본사 가서 다 부셔버릴거야
ㄴㄴ 행님 여기서 이러시지 마시고 같이 갑시다
ㄴ 근데 호넷이 성남 스톰 이겼잖아 그럼 2등 이긴거니까 1등 아님?
ㄴㄴ 트릭스터를 이긴 스톰을 이긴 호넷을 이긴 제주 F.L.E가 올 시즌 1등임
우리 팀과 호넷의 대결 구도는 꽤 인기가 많았다.
내가 출전했던 피닉스 전에서 보여줬던 화끈한 경기를 다시 기대하는 사람이
많았고.
호넷은 그 자체만으로도 인기있는 구단이었기 때문이다.
- 난 사실 우리 우진이가 최존엄인줄 알았는데
권건 FWX 인스타 같은 데 올라오는 거 보면 좀 치이는 것 같애ㅠ
본명이랑 선수명 같은 것도 너무 귀엽게 느껴져
(탈호넷 아님 그냥 그렇게 느꼈다는거임)
ㄴ몬가 정글 도는 게 너무 섹시하게 느껴짐.. 시간에 칼같은? 느낌ㅋㅋ 내가
칼날부리 하고싶어ㅋㅋ 나 ㅈㄴ금사빠임?
ㄴㄴ ㅅㅂ 난 돌골렘할래ㅋㅋㅋ 이렇게 덕질할 맛 나는 경기,, 오랜만이야
ㄴㄴ 우리 바젤이랑 거니랑 둘 다 잘했으면 좋겠어ㅠ 나 주포 탑인데 둘이랑
같이 할 방법 없나
ㄴㄴ 오늘부터 존나 달려ㅋㅋㅋㅋ 만나러 간다 챌 팬미팅
다만.
호넷의 본진 중 하나인 팬덤이 들썩인 것이 호넷의 마케팅 팀에 불을 붙인 모
양이었다.
- 오늘의 포토, Bazel(안우진) 선수 많은 응원 부탁드려요
- 여러분께 승리를 가져다 드릴게요(병아리 이모티콘) Semo(장민성)
원래도 가장 활발하게 SNS를 운영하는 호넷이다.
호넷은 경기 일정이 다가올 수록 이런 저런 선수 사진들을 많이 풀었다.
리그 팬들은 결코 특정한 나이, 성별, 연령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세 살짜리 야구팬, 여성 훌리건, 중년의 스포츠 악플러가 있는 것처럼 세상은
다양하다.
팬들이 오로지 성적만보고 특정 팀의 팬이 되지 않듯, 이 모든 니즈를 아울러
야만 흥행할 수 있는 거니까.
“허!”
화젯거리 역시 흥행의 한 요소가 된다.
그리고 호넷은 이 쪽 방면의 전문가다.
급기야.
“얘들아, 이쪽으로 와봐. 호넷 애들이 우리 도발하는데?”
최수철 코치님은 SNS 게시글을 들어올리며 기가 차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 (사진)
이번 주 목요일, 마무리 잘 하고 오겠습니다!
일견 연습실 선수들 사진같지만 뒤쪽에는 자연스럽게 연출된 화이트 보드가
있다.
거기에는 우리 팀의 선수 닉네임이 하나씩 적혀있고 X가 쳐져있다.
X가 없는 것은 내 이름 뿐이다.
“뭔데요?”
곽지운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지만 자칭 SNS 전문가 최은호는 당장 발끈했다.
“와, 미친. 이거 뒤에 안보여?”
“그러니까 이게 뭐? 우리 닉네임 아니야?”
“X표 해놨잖아. 우리 다 한 번 제꼈다고! 건이는 만나본 적 없으니까 안 친거
고!”
“근데 맞는 말이잖아.”
“깍지 너 진짜 돌았어? 이건 우리의 명예를 훼손한거라고!”
“그럼 우리도 하면 되잖아.”
“아니! 그럼 안돼! 더 참신한 걸로 받아쳐야한다고, 하, 이런 감수성 없는 숟
가락같으니라고.”
“너 지금 숟가락이라고 했냐?”
또 다시 바텀 듀오의 말다툼이 시작되려고 하자 최 코치님이 나서서 말렸다.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야. 더 열심히 경기 준비 해야지.”
“그럼 제가 봉인해놨던 두레이븐 한 판 할까요? 다 머가리 박살 내버리게.”
최 코치님은 더 이상 설명하기를 포기했다.
“니 맘대로 해라, 숟가락 놈아.”
#
그 주의 목요일, 오후 8시.
FWX와 호넷은 경기장에서 만났다.
어느 정도 도발이 오고 간 것과 달리 무대 뒤에서의 두 팀은 제법 사이가 좋
은 편이었다.
하지만 경기에서까지 그럴 수는 없는 법.
“오늘 경기의 주요 포인트를 짚어 드릴 차례입니다!”
“네! 지난 번 폴리 선수가 다시 한 번 패배하면서 그 자리를 권건 선수가 메
웠는데요. 지표로 봤을 때는 아직까지 완벽한 모습이죠?’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제 한 경기 출전을 했을 뿐인 권건 선수니까요. 앞으
로의 선발이 어떻게 결정될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오늘도 좋은 모습을 보여준
다면 어쩌면 더 자주 얼굴을 보여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이번 경기로 진짜 증명이 될 수도 있겠군요. 현재 호넷은 4승을 달성하며 7
위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FWX가 뭔가 보여준다면! 어쩌면 동부의
호랑이가 탄생할 수도 있겠죠?”
“FWX는 이미 저점이거든요. 긍정적으로 보자면! 올라갈 일 밖에 남지 않았어요!”
해설진은 뉴타입 FWX의 기세를 높게 평가했지만 2라운드 남은 경기를 전승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권건을 좋아하는 남동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 동현이 형 : 권건 선수!
- 동현이 형 : 오늘은 얼굴을 못 보겠네요.
- 동현이 형 : 컨디션 관리 잘 하고, 패기를 보여줘요. 화이팅!
남동현은 어디까지나 2군 출신 정글러가 리그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정
도의 도움을 주는 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어차피 권건의 포텐이 제대로 나오는 것은 다음 시즌부터일 것이라고 생각했
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번 시즌에 괜찮은 가능성 정도라도 보여주기를 바랬다.
다음 시즌에 배팅하기 위해서.
하지만 권건의 생각은 달랐다.
[ 꼴지.. 탈출도.. 한 걸음.. 부터.. ]
‘...’
[ 등.. 고.. 자.. 비.. ]
‘우리 착한 릴리. 속담 공부는 다른 데 가서 해줄래?’
[ 쟤네 잘 알지? ]
‘당연하지.’
[ 쟤네가 또 이기면 이 다음엔 어떻게 놀릴까? ]
‘...’
[ 네 이름 위에도 X 표시가 올라가겠지? 아니면 더 독하게? 어휴. ]
‘처음부터 이길 생각이었어.’
[ 그럼그럼, 내가 네 성격 잘 알지. ]
‘최선을 다 할 생각이었다고.’
[ 그으럼 그으럼. 알고 말고. ‘신인 정글러요? 아직 공부를 더 하셔야겠습니
다.’ 이런 인터뷰를 볼 순 없지. ]
‘박살을 내줘야겠네.’
[ 그래, 그래야 내 정글이지. ]
악마는 사라졌다.
이제 기어올라가는 것 밖에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