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40화 (41/326)

040화. 꼴찌부터 시작하는 프로 생활

오더는 어떻게 나뉘는가?

하나의 절대적인 사령탑을 두는 팀도, 상체와 하체의 두 갈래 오더로 나뉘는

팀도, 각자의 포지션에서 정보를 교류하는 팀도, 심지어는 거의 오더를 하지

않는 팀도 있다.

5명이 모이는 팀이니만큼 정답은 없다.

팀의 사정, 성격, 능력에 맞추어 다양한 형태로 변환되는 구조다.

나는 주로 메인 오더를 맡아왔다.

내가 반드시 사령탑이 되어야한다는 사명감같은 게 있는 건 아니지만 항상 자

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오더의 종류도 여러가지가 있다.

각 라인에서 모여든 정보를 기반으로 직접 판단해서 지시를 내리는 것.

팀원들에게 의견을 묻고 토의를 진행하는 것.

놓칠만한 정보를 다시 뿌리는 것.

팀원을 격려하는 것까지.

이런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좋은 오더’를 만든다.

“야! 막내 잘한다! 나같은 원딜에게 걸맞는 사람을 찾은걸지도!”

곽지운이 큰 소리로 말하자 최은호가 후다닥 다가와서 곽지운의 한쪽 팔을 눌

렀다.

“이 새낀 눈치도 없이..”

“아, 왜!”

최은호는 슬쩍 나를 잡아당겨 연습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연습실에서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다시 말문을 열었다.

“건아, 너 되게 나랑 잘 맞더라. 너 덕분에 내가 한결 편해진 느낌? 너도 그

렇지? 2군에 있을 때보다 확실히 수준 높은 느낌 아니야?”

이 사람은 물음표 살인마다.

어차피 바라는 대답은 하나 뿐이다.

“형 덕분이죠.”

“역시. 근데 깍지 쟤는 왜 저렇게 눈치가 없냐. 연습실에 도형이도 있는데..

하, 진짜. 내가 입 단속 잘 시켜놓을게. 잘 지내야지. 그치?”

최근의 스크림 자리는 대부분 내가 차지했다.

1라운드의 마지막 경기 데뷔를 위해서라고 하는데.

스크림 결과에서 자꾸만 차이가 벌어지니 은근히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내가 들어간다고해서 모든 경기를 이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정보의 질은 달라졌다.

그것을 느끼지 못할 선수는 없다.

“너도 조심해. 도형이가 나쁜 애는 아닌데.. 최근에 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서. 괜히 마찰있고 그러면 좀 그렇잖아. 알았지?”

최은호는 나에게 든든한 형님 포지션을 잡고 싶어 한다.

좀 뻔하긴한데 그렇게 거슬리는 것도 아니다.

스크림 중 한두 번 오더에서 부딪히긴 해서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내 쪽으로 손이 들리자 미련없이 포기한 것 같았다.

대신 이렇게 와서 자신의 공로를 계속해서 어필하는 편이다.

끝까지 텃세를 부리는 것보다는 낫다.

“나는 좀, 정신적인 지주같은거잖아. 맞지?”

히죽 웃은 최은호는 문봉구가 나에게 다가오는 걸 보고나서 자기는 곽지운에

게 가보겠다며 먼저 쑥 들어가버렸다.

“어이~ 막내야, 커피 마실라꼬? 내가 내리주까?”

“괜찮아요.”

“그르지 말고. 혹시 과자는 안 땡기고? 형 돈 있다.”

“정말로.”

“하이씨, 우리 막내 애들은 왜이렇게 다 어려버. 차갑고, 무뚝뚝하고.”

나는 가볍게 웃었다.

사람 대 사람으로 보자면 나쁜 타입은 아니다.

그냥 게임을 좀.. 못한다는 게 문제지.

“형이라꼬도 잘 안부르고. 나는 정말로 속상해.”

아직까지 좀, 뭐랄까.

FWX의 사람들이 익숙해지질 않는다.

프로게이머라면 더 독해야하는 게 아닌가.. 하고.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던 내가 이런 말을 할 처지인가 싶기도 하면서도.

잘 모르겠다.

“봉구형. 그러면 커피 내려주세요.”

“오야, 오야. 이건 공짜인데. 그래도 괜찮고? 그럼 이거 받고, 형한테 다음번

에는 킬 한번 먹여주고 그럴래? 킬도 공짠데.”

“그럴까요.”

그래도 일단 어울린다.

어떤 감정이 손에 잡힐 것 같기도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

[ LKL - ‘랭킹 1위’의 유망주. 피닉스전서 데뷔 ]

FWX 팬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소문의 유망주가 데뷔한다.

FWX는 오늘 오후 LOS 파크에서 열리는 ‘리그 오브 서머너즈(LOS) 코리아 리그

(이하 LKL)’ 스프링 스플릿 울산 피닉스와의 경기에서 정글러 ‘권건

(GwonGun)’을 선발로 내세웠다.

올 시즌 중 2군에서 콜업된 권건은 시즌 중 랭킹 1위를 달성하면서 화제가 된

바가 있으며 혁신을 주도할 주요 선수로 꼽혔다.

이 날 FWX는 탑으로 ‘팬시’ 문봉구, 미드에 ‘라온’ 김예성, 바텀에는 ‘세자’

곽지운과 ‘클래스’ 최은호가 출전한다.

.

.

.

- 보셨습니까. 오늘. FWX. 선발.라인업. 권건 권위자 찌세가 말합니다. “승리”

ㄴ -거니님의 승리를 응원합니다-

ㄴ 권 : 권투 건 : 건강

- 드디어 떴냐?

- [PNX] 너네는 왜 우리랑 할 때 유망주 내보내냐? 그럼 이길것 같냐?

ㄴ 응 9등 어서오고~ 니네가 만만해 니네가 샌드백이야~

ㄴㄴ 순위 안보십니까? FWX가 꼴등입니다

ㄴㄴ 오늘부터는 “다를 것”

ㄴㄴ 꼴지 주제에.. 말대꾸?

ㄴ 거 하위권끼리 돕고 삽시다

ㄴㄴ 오히려 이득 아님? 솔랭에서 날리던 신입들 죽쓰는거 하루이틀임?

ㄴㄴ 근데 킹상치않음 진짜 잘하던데

ㄴ 서로 비슷비슷한 불불이들끼리 잘 지내보자고ㅋㅋ아ㅋㅋ 한판만 져주라~

ㄴㄴ ㅇㅋ 봐줌

ㄴㄴ 니가 뭔데

ㄴㄴ 봐준대도 난리;

ㄴㄴ 그럼 봐줘

ㄴㄴ 꺼져

#

- 정일도 : 형 오늘 데뷔한다며?

- 이지호 : (난리법석 이모티콘) 나도 들었어!

- 이지호 : 부럽다 형 거기 서폿은 어때? 혹시 에이징 커브가 오지는 않으셨대?

- 정일도 : 짖호ㅗ야 그런 말은 좀

- 이지호 : 형은 왜 뻐큐를 날리고 그래? 선수님 건강 걱정한 거야

- 나 : 고마워

- 정일도 : 그게 무슨 건강 걱정이야; 건이형 얘가 아직 철이 없으니까 이 톡

은 비밀로 좀..

- 이지호 : (슬픈 이모티콘) 건이형 우리는 형 없으니까 물 속에서 겜하는거같애

- 이지호 : 일도형은 여전히 야쓰오의 손맛을 못잊었어

- 이지호 : 밤마다 야쓰오 동영상ㅇ

- 정일도 : ㅎㅎ 건이형

- 정일도 : 데뷔전 꼭 이기면 좋겠다. 나는 형이 잘 될거라고 생각해. 최선을

다해서 플레이하고, 후회 없이 했으면 좋겠어. 항상 응원하고 있어.

- 탑병이유찬 : 정일도가 이지호 처치함

- 탑병이유찬 : 권건

- 탑병이유찬 : ㅎㅇㅌ

- 나 : 다들 고마워

그새 꽤 정이 들었는지 마음이 좀 푸근해진다.

신기한 일이다.

2군 선수들과 오랫동안 연락을 나눈 적이 많이 없었던 것 같은데.

내가 연락을 안했다기보다는 2군 선수들이 나에게 연락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기 때문이다.

다른 세상에 가버린 사람인 것처럼.

하지만 이지호가 만든 채팅방에서는 메시지가 올라오곤 했다.

내용은 야식을 추천해달라느니 하는 사소한 것들이다.

나는 자주 대답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 방을 보고있으면 잠시 경쟁에서 벗어난 것 같다.

[ 기분은 어때? ]

온순하게 웃으며 릴리가 말을 건다.

왠지 오랜만인 것 같은데.

어디 다녀왔나?

‘난 언제나 준비되어있지.’

[ 그거 말고. ]

‘다른 게 또 있어?’

[ 사람들은 좀 어때? ]

‘나쁘지 않아. 최악으로 생각했던 것 치고는. 그럭저럭 쓸만해.’

[ 흐음. 알겠어. ]

오늘은 과일을 달라거나 하는 말을 안하는건가?

입술을 오물거리던 릴리가 내 손을 톡하고 건드린다.

실제로 닿였다는 느낌보다는 왠지 따뜻한 느낌이 퍼진다.

[ 응원. ]

릴리는 손을 꼼지락거리더니 작게 박수를 짝, 쳤다.

[ 이기고 돌아와서 맛있는 거 많이 사줘. 기다릴게. ]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LKL 스프링 첫번째 라운드! 1 라운드 마지막

주차의 첫번째 날을 여러분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남동현, 이승수 해

설 위원과 함께 합니다! 그리고 저는 캐스터 안은우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준비된 경기는 대전 FWX와 울산 피닉스, 성남 스톰과 부산 호넷의 경기

를 소개해드립니다. 우선 첫번째 경기인 FWX와 피닉스를 살펴볼까요!”

“네, 오늘 첫번째 경기는 그야말로 치열한 싸움이라고 볼 수 있겠죠. 지금 10

위를 차지하고 있는 FWX와 9위를 차지하고 있는 피닉스의 경기입니다.”

- 하위권 싸움에 가슴이 웅장해진다

- 우리가 낫지ㅋㅋㅋ 0승따리 FWX가 어딜

- 어차피 수준 떨어지는 건 비슷한 거 아님??

- 감독 좀 잘라라

“피닉스같은 경우에는 그래도 수원 해머스와 제주 F.L.E를 상대로 한 경기씩

을 가져가면서 2승을 챙긴 상황입니다. 그리고 지더라도 꾸준히 세트승을 챙

기려는 노력을 보였죠.”

“FWX는 많이 힘든 상황입니다. 아, 지난 시즌 분명 8위였었던 FWX인데요. 한

번도 승리를 챙기지 못하면서 지난 시즌 앞섰던 F.L.E와 피닉스에게 모두 밀

리고 있어요. 그리고 중요한건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 승리를 따내지 못했다

는 점이겠죠.”

“그것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FWX가 새로운 무기를 들고 나왔습니다!”

“네! 맞습니다. FWX는 콜업한 2군 정글러 권건 선수를 오늘의 엔트리에 올렸

습니다! 생각보다는 이른 데뷔죠?”

“네. 바로 투입되는 선수들이 잘 없는데 이정도면 상당히 FWX에서 서둘렀다고

볼 수 있겠어요. 분위기를 반전시키고자 하는 FWX의 노력이 느껴집니다.”

관중석에 앉아있던 FWX의 팬들의 얼굴에 기대가 서렸다.

새로운 선수가 불어올 바람을 기다리는 간절한 얼굴이었다.

- 뭐야 오늘 데뷔함?

- 아까 라인업 떴었음

- 드디어

- 전패팀 신인ㅋㅋㅋㅋㅋ쟤도 데뷔하기 싫을 것 같은데ㅋㅋㅋㅋ

- 꼴리 대신 욕받이로 내세운거 아님???ㅋㅋㅋㅋ

- 쟤 솔랭 1위임

- 그거랑은 다르지 ㅋㅋㅋ

- 솔랭 성적보고 뽑았다가 똥싸는거 한두번 보나

“아하! 전에도 봤지만, 이 선수 굉장히 잘 생겼군요?”

“네! 그렇습니다. 사실 제가 권건 선수와 조금 아는 사이인데요.”

“그렇죠! 퓨처스 리그도 담당하고 계시는 우리 남동현 해설! 현수진 해설께서

도 그러시더라구요. 언더독의 반란, 퓨처스 리그 최강 아웃풋. 뭐 이런 말씀

을 하셨다구요.”

“이 선수가 정말 재치있고 놀라운 플레이를 보여주는 선수거든요! 그래서 저

도 콜업됐을 때 많은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활약해줄 모습이 기

대되네요.”

“하하. 다른 선수들도 역시 새로운 선수를 위해서 많이 신경쓰고 있을 것 같

네요!”

“좋아요. 아주 기대가 됩니다. 그럼 오늘 경기, 데이터부터 살펴보시죠!”

해설진이 경기의 기본 정보를 소개하는 사이 선수들은 모두 자리에서 세팅을

확인하고 있었다.

김한빛 코치는 권건에게 다가갔지만 이미 권건은 자연스럽게 모든 것에 적응

한 것처럼 보였다.

“얘들아, 준비 다됐어?”

“코치님. 아. 저 지금 싱싱미역 상태.”

“얘 지금 이런 말하는 거 보니까 긴장 안한 것 같은데요.”

바텀 듀오가 먼저 대답하고 선수들이 각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괜찮겠지. 괜히 우리 주장이겠어?”

김 코치의 너스레에 웃음이 터지며 긴장이 흩어진다.

“예성이는?”

“괜찮아요.”

“봉구는.”

“괜찮심다. 열심히 해볼게요.”

“야, 우리 오늘 막내 첫 경기다. 너네들 다 잘 챙겨줘야돼. 막내 긴장하지 말

고, 알았지!”

“오케이.”

“경기 막상 해보면 별 거 아니야.”

최은호가 팀원들에게 소리치자 여기저기서 권건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려는 듯

호응이 터졌다.

“니들이나 잘해..”

김 코치는 약간 쓰게 웃었다.

선수들도 아마 알고 있을거다.

계속 지기만 했던 자신들이 막내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게 조금 우습다는 걸.

“건아. 어떻게, 괜찮아? 불편한 점은 없고? 혹시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바

로 말해줘.”

“괜찮아요.”

김 코치는 항상 괜찮다고만 말하는 권건이 믿음직스러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주전, 한 경기라고했지만.. 너무 부담가지지 말고 게임해. 또 출전할 기회는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까.. 한 세트정도 져도 괜찮아.”

그리고 혹시나 져서, 적응하지 못해서 이 선수가 심리적 타격을 크게 받을까

봐 두려웠다.

과거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코치님.”

“응?”

“이길거니까 걱정마세요.”

하지만 과거에 매여있는 것은 김한빛 뿐이었다.

무뚝뚝하던 권건은 여유있게 웃고 있었다.

결국 김 코치는 또다시 얼빠진 표정으로 웃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픽 페이즈가 시작되고,

“녹턴에 릴리야?”

김 코치의 마음은 다시 덜컥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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