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화. 수비형↔탑
증명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참, 거짓, 혹은 참도 거짓도 아님을 논리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증명이
라고 한다.
프로 스포츠에서의 증명이란 나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고 보이며 소리치는 것
이다.
내가 이 곳에 있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내가 당신들을 열광시킬 수 있다는
것을 참의 방향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자신을 증명할 기회가 주어지지는 않는다.
나는 오로지 내가 ‘옳다’는 것만을 증명하기 위해 프로의 길을 밟기로 했다.
힘들게 다가온 기회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그래.
그랬던게 나다.
그런데 왜 지금 나는 쉬고 싶고, 무력감을 느끼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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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달리 조용한 연습실에는 김예성과 나, 둘 뿐이다.
이 성적에 집에 갈 생각이 들까 싶으면서도.
이 때라도쉬지 않으면 빡빡한 시즌을 버텨낼 힘이 없을 수 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선택이다.
“너.”
김예성 얘는 표정이 항상 이런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붙어있어 본 적이 있어야지.
“뭐 잘해.”
“네?”
“미드에서 일대일 한 판 하자.”
못 해줄 것도 없지.
김예성과 나는 연습 게임을 만들었다.
“뭐 할래?”
“편하신 거 하세요.”
“그럼 너 정글이니까 리싱.”
잠시 뒤, 먼저 죽은 김예성이 게임을 나갔다.
“정글 챔 어렵네? 이번엔 이즈 해.”
또 다시 먼저 죽고 게임을 나갔다.
“막판 하자. 신드리.”
드디어 주포챔을 꺼낸 김예성은 잠시 뒤 또 다시 게임을 나갈 수 밖에 없었다.
미묘하게 눈썹을 들어올리며 주먹을 꽉 쥔 김예성이 입을 열었다.
“그럼..찐 막판..”
“그러다가 찐찐막판, 찐찐찐막 가겠어?”
옆에서 나타난 감독님이 김예성의 어깨에 손을 툭 얹었다.
“감독님 저 추했나요?”
“좀?”
“왜 자꾸 지지? 이상하다. 나도 좀 하는데. 아니야?”
김예성이 이마를 찌푸렸다.
확실히 김예성은 힘만큼은 대단한 선수였던 게 맞다.
근데, 뭐.
“그러게요.”
“이겨놓고 그렇게 말하니까 개열받네. 너 빡세다?”
말투와는 달리 눈꼬리가 살짝 휘어있다.
지금 혹시 장난걸고 있는건가?
“그래서 친구비는 다 받았어?”
“네.”
감독님이 내 표정을 보고 덧붙였다.
“예성이가 너 실력 궁금하대. 같이 뛸 동료라면 알아 둬야 한다고.”
저 표정은 쑥스러워하고 있는 건가?
무슨 말을 해도 싸늘한 표정이라서 잘 모르겠다.
“너 나랑 동갑이야.”
“예성이가 말 놓으라고 하네. 나도 존댓말 반말은 편한대로 하라는 주의지만
동갑끼리는 놓는게 좋을 것 같다.”
감독님은 츤데레 번역기인가?
“그래.”
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감독님을 바라봤다.
감독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세상을 짊어진 표정으로 입을 연다.
“1위 축하한다. 내일 있을 스크림 미리 준비하자.”
올 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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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WX의 미래, ‘GwonGun’ 권건 - “기대에 부응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
야심차게 콜업된 선수가 있다.
이번 시즌 최대 기대주라고 불리는 ‘권건’이다.
퓨처스 리그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여 많은 사람들에게 눈도장을 찍은 이 선
수는 리그 4주차의 시작과 함께 콜업되어 당당하게 1군 로스터에 이름을 올렸다.
권건 선수의 나이는 스물 한살, 아직까지 풋풋함이 남아있는 이 나이대의 선
수들은 하루이틀사이에도 크게 바뀌곤 한다.
콜업 이후 LOS 랭킹 1위를 달성한..
Q. 목표는 무엇인가요?
A. 월챔 우승입니다. 언젠가는 제 손으로 우승컵을 들어올리고 싶어요. 꼭.
Q. 팬들에게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A. ‘정글’하면 생각나는 좋은 선수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제가 대명사가 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응원해주시는 분들께 보답할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Q. 데뷔는 언제쯤일까요? 그리고 각오를 말씀해주세요.
A. 일정은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승리하겠습니다.
.
.
.
ㄴ FWX 정신에 걸맞는,, 옳게된,,선수다
ㄴ 이게 바로 그 [소문의 유망주]? ㅋㅋㅋ 까비 스톰이 얘를 놓쳤네
ㄴ 그래서 출전 언제하냐고 그래서 출전 언제하냐고 그래서 출전 언제하냐고
ㄴ 권건이 다 알아서 해줄거야..
ㄴㄴ 선수 한명이 알아서 하긴 뭘 다 알아서함ㅋㅋㅋ
ㄴㄴ 니들이 뭘 알아? 니네가 꼴등해봄? 다 알아서 해준다는게 우승시키라는
건 아니잖음? 그냥 승리라도 좀 챙겨달라 이거지 전패로 끝날 것 같은 이 기
분을 알기나함? 너 어디 응원함? 어디 살아? 전화번호 뭐예요?
ㄴㄴ 울지 말고 천천히 말해보세요
ㄴㄴ 그는 진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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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림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진다.
국내 팀과의 스크림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론 해외팀과도 스크림을 잡기도
한다.
내 첫 1군에서의 스크림은 국내 팀과 잡혔다.
스크림도 팀끼리 수준이 맞아야 유용한 법이다.
수준 차이가 난다면 굳이 놀아 줄 필요가 있을까?
시간 낭비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 팀은 사실 스크림 잡기가 아주 편하지만은 않다.
“아직 건이가 오더가 부족할 수도 있어. 그 부분은 지운이가 같이 콜하자.”
“네. 열심히 해볼게요.”
“그렇다고 하지 말라는 건 아니야. 이전 팀에서 했던대로, 한번 해봐. 조율하
는 단계니까.”
“네.”
우리 팀 선수들이라고 해서 나와 솔랭에서 마주치지 않은 건 아니다.
전생을 모두 포함하자면 솔랭에서도, 리그에서도 그렇다.
무수히 만나봤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직접 내 오더를 들어본 적은 없다.
“탑은 자원 투자 안해도 된다잉.”
문봉구가 먼저 말을 했다.
실제로 만나본 이 탑 라이너는 꽤 독특하다.
국내 최고 리그에서 “탑”이라는 이름을 달 수 있는건 오로지 10명.
예비 엔트리를 포함해도 그 숫자가 10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탑들은 얼마나 “탑”적인 선수들일 것인가?
그들을 부르는 수많은 호칭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내게 가장 와닿는건 -탑-이다.
탑을 탑이라는 말말고 뭐라고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탑은 다른 포지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남성호르몬을 많이 가진 위치다.
LOS가 등장한 이래.
10년을 넘는 세월동안 쌓여온 데이터로 만들어진 이 라인별 성격 유형 검사는
놀라울 정도의 정확도를 가지고 있다.
“제이슨이네잉. 나는 말파로 그저 든든하게 버티고 있을테니까는.”
하지만 문봉구는 조금 다르다.
처음부터 그랬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픽이 수비적인 챔피언으로 수렴
한다.
수비적인 챔피언이라고 해서 결코 난이도가 더 낮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라인전에서 버티기는 좀 더 쉽다.
하지만 거기에서 떼어낸 만큼의 다른 역할 수행을 해줘야 완성될 수 있다.
최악은 ‘죽기만 하는’ 탑이겠지만 그렇다고 ‘죽지만 않는’ 탑을 선호하는 팀
은 없다.
사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문봉구는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한 것 같다.
라인전 실력에서는 그렇다.
지난 경기에서 봤던 엉망진창 그라가즈가 그랬다.
컨디션이 나빴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나온다면 문봉구에게 무력 탑솔러의 면모를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래도 오더에 일조하거나 중요한 순간에 보여준 장면들, 분명히 괜찮았던 과
거들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저런 사람이 프로냐’ 라는 말을 버텨내고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저 성격 역시 이 팀과 잘 맞는 것처럼 보인다.
2군 탑인 이유찬이 끝내 1군에 올라오지 못한 이유는 아마 여기에 있을거다.
리그의 원딜 캐리, 탑 탱커 메타.
그리고 무던한 성격과 활동 경력.
내가 FWX에 와서 느낀 감상은 이 팀의 엉덩이가 아주 무겁다는 것이다.
2군은 1군의 요람이니 뭐니 하는 지나치게 미래지향적인 말을 하는.
뭐, 이런 점이 선수들을 아끼는 데에는 좋을 수도 있겠다.
당장 선수를 갈아 넣고 신인에게 트라우마를 만들어버리는 팀들도 있으니까.
“하고 싶은거 하고 오믄 대. 가끔 들러만 줘이. 알았제?”
어쩌면 신인 정글러의 부담을 줄여주는 말투로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내 귀에 이 말은 투자를 하지 않아도 되니 많은 걸 기대하지 말라는
말로도 들렸다.
카운터 픽이지만 솔로 킬은 생각지도 않는 것 같다.
물론 갱을 받지 않고도 세계 대회에서 우승한 선수도 있지만, 문봉구는 아니다.
나는 그냥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탑이 누워있고 싶어 한다면 나는 천천히 그걸 깨우면 된다.
나도 더 참여하고 싶다, 더 기여하고 싶다, 캐리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끔.
메타는 계속 바뀐다.
그 미래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 사람의 한계도 알고 있다.
그래도 그 전까지는 쓸 수 있는 카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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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그렇게 한거야?”
“네.”
“왜?”
“그쪽이 더 괜찮다고 느꼈습니다.”
피드백이 끝난 후 권건과 면담을 잡은 박진현 감독은 웃음을 터뜨렸다.
피지컬과 담력이 뛰어난, 하지만 경험은 부족한 신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제법
이었다.
“탑은 투자 안해도 된다고 봉구가 그랬잖아.”
“콜만 했는 걸요.”
박 감독이 느끼기에 첫 스크림 진행 시의 오더는 확실히 탑 쪽을 많이 주시하
고 있었다.
건네받은 기존 콜 데이터에 비해 약간 상체 콜로 쪽으로 쏠린 느낌이었다.
‘어디서 이런 보물이 굴러들어왔지.’
자원을 투자한다는 뜻이 아니다.
언제 상대 돌거북을 비상 식량으로 빼먹을 수 있을지.
다이브를 당하고 있을 때도 얼마나 드리블을 하면 아래쪽에서 이득을 충분히
챙길 수 있을지.
그 타이밍은 언제인지를 탑 라이너의 시야에 맞춰 콜을 해줬을 뿐이다.
탑에서 웅크리는 문봉구의 특성에 맞추되 지나치게 강요하지 않았다.
“봉구가 편해보이더라. 콜을 다 따라간 건 아니지만.”
동시에 바텀 쪽 콜은 기존 오더의 한 축을 담당했던 최은호가 충분한 발언권
을 가질 수 있을 만큼 적당히 조율한다.
덕분에 걱정과 달리 최은호도 오늘의 스크림에 크게 만족한 기색이었다.
“저는 정보를 줬을 뿐이고 나머지는 봉구형이 알아서 해주신거죠.”
말파는 라인전 상성에서 충분히 제이슨의 카운터다.
하지만 원래의 문봉구는 불필요한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는 선수.
솔로킬은 따면 좋지만 혹시라도 실패하면 도리어 팀원들에게 부담을 준다.
솔로킬을 딴답시고 궁극기를 썼다가 한타에서 쓸모가 없어지면?
역으로 킬각이 나와버리면?
스스로의 피지컬에 자신감을 많이 잃어버린 문봉구는 점차 타워 안 쪽으로 몸
이 쏠리기 시작했고, 올 시즌의 경기는 전부 그런 모습 뿐이었다.
“그러게. 비공식 솔로킬 최강 문봉구.”
오늘의 피드백이 끝나고 나서 붙은 별명이었다.
스크림 상대 역시 문봉구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방심했다.
문봉구는 권건이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그 틈을 노렸다.
처음에 주춤하던 문봉구가 연달아 솔킬을 두 번 올리며 기세를 타자 의표를
찔린 상대방이 약속한 스크림 시간을 끊어 사용하자며 한번 더 경기를 요청했다.
하지만 FWX는 오늘 목표가 권건의 적응이었기에 거절했다.
그런데 얻은 것은 권건의 적응 뿐이 아니었다.
문봉구의 새로운 모습을 봤다.
“건이, 오더 잘하네.”
오랜만에 괜찮았던 결과에 박 감독은 책상을 툭툭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어디서 배웠어?”
“양태진 감독님께 배운거죠.”
“하석준 감독이 아니고?”
“스톰 2군 감독님요? 글쎄요.”
권건은 어깨를 으쓱 했다.
딱히 양태진에게 배웠다고도 할 수 없지만 하석준은 더욱 아니다.
“음. 일단 오늘 수고 많았고, 이제 나가봐도 돼.”
권건이 몸을 돌려 나가려는 순간 박 감독은 다시 입을 뗐다.
“건아. 고맙다. 수요일, 데뷔전 잘 해보자.”
작은 목소리였지만 박 감독의 눈빛은 희망으로 바뀌어있었다.
어쩌면 이번엔 다를지도 모른다.
동남풍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