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화. "ON"
[ 난 말이야. 아직도 잘 모르겠어. ]
‘뭘?’
[ LOS는 어떻게 해야 더 잘 할 수 있는거야? ]
어떻게 해야 더 잘하냐고?
그건 나도 모른다.
못해본 적이 없으니까.
릴리의 손에는 얼굴만한 한라봉이 쥐어져 있다.
선수단에 설 선물 세트로 들어온 과일과 군것질거리들이 꽤 많았다.
팬들이 보낸 게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온 의례적인 선물이어서 서슴없이 챙겨
왔다.
릴리에게는 작은 한과 세트도 들려보낼 생각이다.
[ 나도 잘 하고 싶다. ]
‘너.. LOS 하니..?’
[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
‘솔직히 말해라.’
[ 내가 어떻게 해, 나는 컴퓨터도 없는걸? 당연히 못하지이! ]
더 의심스러운걸?
그래도 그냥 고개를 끄덕여줬다.
[ 이, 이건 좀 시네. ]
덜 익은 한라봉이 시큼한지 얼굴을 사정없이 찡긋거리는 모양이 귀엽다.
‘근데 말이지. 잘 하는 방법이 있어.’
[ 뭔데? 뭔데? ]
‘잘 하는 사람이랑 하는거야.’
[ 버스는 내 실력이 아니잖아! ]
‘버스는 또 어떻게 알아? 타기만 하라는 게 아니라 같이 하면서 배우라는거
지. 리플레이를 보는 것도 방법이고, 관전 강의나 영상을 듣고 보는 방법도
있고.’
[ 음, 음. ]
‘근데, 내 생각에는 이겨보는 게 결국 제일 도움이 많이 되더라. 이겨야 재밌
고, 재밌어야 늘어. 이겨야 이기는 방법을 알게 돼.’
[ 으, 으음. 그럴듯해. 이겨야 재밌으니까. ]
‘너 진짜 LOS..’
[ 아니! 아니라고! ]
릴리의 얼굴을 봐서 모르는 척 해주기로 했다.
[ 그럼, 그래서 너네 팀이 꼴등인가? ]
‘잠깐만. 나 방금 3번 갈비뼈 나갔어.’
[ 캐리도 못하는 게 까불어. ]
릴리가 조그만 주먹을 마구 흔들어 보인다.
‘난 정말 하기 싫다니까..’
[ 거짓말, 또 거짓말 하지. 너만큼 이기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다고. ]
‘...’
#
콘텐츠 팀에서 LOS 팀에 협조 요청을 해온 것은 낮의 일이었다.
내용은 권건의 솔로 랭크 내용을 편집 영상으로 올리고 싶다는 것.
“몰랐는데, 최근에는 전용 관전방까지 생겼더라구요. 너튜브 반응이 워낙 좋
아서 저희가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죠.”
콘텐츠 팀 스탭의 얼굴은 무척 밝았다.
LOS 담당인 그에게 오랜만에 할 일이 생겼다.
이번 시즌 들어 계속 패배만 하니 무슨 영상을 올릴지 난처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라면 차라리 시즌 오프일 때가 나았다.
그 땐 기대감이라도 있었지.
하지만 권건에 대한 반응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것이 기존 정글 윤도형 논란의 반대 급부인지, 권건 자체의 스타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콘텐츠 팀도 이제는 일을 하고 싶었다.
월급 도둑도 이런 월급 도둑이 없다.
허구한 날 지고 나서 ‘다시 한 번, 우리.’, ‘어려운 도전’, ‘더 나은 내일’
따위의 다큐멘터리 콘텐츠만 올리자니 조회수가 뽑히질 않는다.
“패배, 각오, 감동 컨텐츠는 이제 레퍼토리가 떨어졌어요. 우리도 슈퍼 플레
이 영상 좀 뽑아야죠.”
미소지으며 팩트로 때리는 스탭에 김한빛 코치는 속이 쓰려오는 걸 느꼈지만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방송으로요?”
“방송 계약 시간 좀 끌어다 써도 되지 않을까요? 제발요.”
“매드 무비 편집까지만 하면 어떨까요.”
콘텐츠 팀과 줄다리기를 하던 김한빛 코치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요청 자체를 받은 게 오랜만이어서다.
‘콜업하길 잘했다.’
처음에 권건의 콜업을 반대했다.
그리고 여전히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그다.
그리도 지금은 살짝 다른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지 마시고. 그럼 개인 채널은 아직 안 팔테니까요, 공식 채널에서 짧게
방송을 하면 어떨까요? 연습실 말고 스트리밍실에서요. 그리고 인터뷰도 한번
진행하면 좋을 것 같아요.”
“인터뷰도요? 인터뷰는 괜찮을 것 같고.. 방송은 일단 선수 의향을 물어보고
최종 결정 하는 쪽으로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최대한 빠른 일정 부탁드릴게요. 영상도 연휴 전까지 업로드하고
싶어서요. 관련 일정안 짜왔습니다.”
꽤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마친 김 코치와 스탭은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주고받
았다.
그리고 다가온 스탭이 목소리를 낮춰 슬쩍 물었다.
“근데, 권건 선수 데뷔전은 언제예요?”
“그건 아직..”
“혹시 엔트리 바뀌면 꼭 알려주세요. 우리 채널 살릴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뿐
입니다. 아셨죠? 코치님, 채널이 잘 되어야 우리 다 잘됩니다. 우리 채널 지
금 갓난아기 같아요!”
“아, 네. 알겠습니다.”
채널 부활을 위한 강한 집착에 김 코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건 전문가들에게 맡기는게 맞다.
“그리고 저도 팬이라고 좀..”
속닥거리고 멀어지는 스탭을 보며 김한빛 코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데뷔전도 안했는데 왠지 인기가 많은 것 같은데?
#
[ FWX, 과감한 콜업으로 분위기 전환 꾀해. 유망주 권건 콜업! ]
[ (인터뷰) ‘PerBe’ 박진현 감독, “권건은 좋은 선수, 지금은 적응 중” ]
[ FWX에 합류한 FWX FL의 괴물에 대해서 알아보자 ]
ㄴ 스톰 2군이었을 땐 이런 애 있는 줄도 몰랐음ㅋㅋ 우리 팀이 버린 애 주워감?
ㄴㄴ 스톰 2군 감독님^^ 가서 발닦고 쉬세요^^ 우리가 주워서 느네 팀 다 박
살냈어요^^
ㄴㄴ 뽀록이지ㅋㅋㅋㅋ 밑천 드러날까봐 재빨리 숨긴거 아님? 어차피 쓰레기팀
ㄴㄴ 어그로좀작작끌어라
#
경쟁이 있다면 승리와 패배가 있는 법.
그래서 한 경기를 하더라도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패자가 된다.
FWX는 주로 패배자였다.
프로게이머 중 패배에 의연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랬다면 이 자리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다.
나조차도 2군 리그를 거쳐 여기까지 올라왔다.
아무리 한심해보여도 그들 역시 수많은 지망생들을 밀어내고 올라온 사람들이다.
“아, 왜 진거지.”
다만, 이렇게 패배가 계속 된다면 자기가 가지고 있던 원래의 열정이 다른 감
정에 가려진다.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하고 있던 사람도 주변의 시선이나 평가에 흔들릴 때가
있다.
이게 정말 내 꿈이 맞나, 내가 좋아하는 일이 맞나?
어쩌면 나는 미래의 시간을 끌어다 쓸데없는 데에 투자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남들이 현실에 충실할 때 나 혼자만 소외되는 건 아닐까, 하는 것들이다.
이건 프로게이머들에게도 다를 바 없다.
가까운 부모님부터 친구들.
혹은 얼굴도 모를 익명의 사람들에게 받는 압박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예전보다 인식 개선이 많이 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불안정한 직업이라는 선
입견이 남아있다.
그래서 불안해하는 선수들이 참 많다.
“진짜 이길만 했는데. 스크림에서는 괜찮았는데.”
최은호는 내 옆에서 중얼거리고 있다.
나를 불안감을 해소해주는 걱정 인형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건가.
“막내야, 너는 어때?”
“글쎄요.”
“내 오더는 어땠어?”
“나쁘지 않았어요. 항상 깍지형 대신 정보 전달 해주고 계시는거 아닌가요.”
“역시 넌 알고 있었구나.”
문제는 이야기에 몰입하기에는 내가 솔랭을 돌리고 있다는 거다.
연습 시간에는 가서 연습을 하라고.
“근데 벌써 9층이네? 막내가 호랑이였네.”
최은호는 항상 인맥 관리에 열심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내게 관심이 많다는 거다.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뭐..
이런 게 패배감을 벗어나는 방법이라면야.
“네. 열심히 해보고 있습니다.”
나는 연습 시간이 많다.
분석 자체에는 참여하지만 1, 2차 스크림 시간은 비워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거기에 기존 연습 시간까지?
이 정도면 나를 증명할 시간으로 충분하다.
나에게 필요한 건 시간 뿐이니까.
“너 방송 한다며.”
“네.”
“내가 스크림 끝나고 한번 갈게. 너무 놀라지 말고. 뭐 좋아해?”
아하.
“전 아메리카노면 됩니다.”
“오키, 오키. 알겠어. 막내 화이팅!”
그렇구나.
방송한다는 사실을 알고 얼굴이라도 비추려고 하는건가보다.
후배와 우애가 좋은 스타일, 뭐 이런 거.
고개를 끄덕거린 최은호는 자리를 떴다.
“건아, 가자.”
그리고 곧, 내 게임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신 김 코치님이 엔지니어님과 함
께 나를 스트리밍실로 데려갔다.
같은 층 반대편에 있는 곳인데 1인실로 분리되어있다.
“오.”
FWX는 스트리밍실도 시설이 괜찮다.
방음이이나 기기의 스펙에도 신경 쓴게 보였다.
쏘닉스 제품으로 꽉 메워져 있었는데, 이걸 보니 지호 생각이 난다.
제트로니카 제품을 쓰고 싶어했었는데.
지금은 어떠려나.
“오늘은 공식 채널로 방송 송출을 하는 거에요. 선수님, 방송 해보신 적 있으
세요?”
“네.”
“좋습니다! 그럼 여기 장비를 세팅을 좀 하고..”
잠시 뒤에 모든 설정이 끝났는지 몇가지 테스트를 해보던 엔지니어님이 만족
스러운 표정으로 일어났다.
“매니저 팀에서도 지원하고 있으니까 방송 흐름은 걱정하지 마세요.”
코치님과 몇마디 이야기를 나눈 엔지니어님이 나가고, 방송 대기 상태.
김한빛 코치님이 팀 내 이벤트 관련 부분을 맡고 있는 모양이다.
“건아.”
김 코치님은 조금 머쓱한 표정이었다.
“이게 말이지, 우리가 공지를 하긴 했어도 시청자 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을거
야. 그러니까 너무 기대하지 말고.. 그냥 연습 게임 녹화 한다고 생각하고 편
하게 해. 방송 채널 따로 파면 더 나올거야. 알았지?”
뭐라도 말해보려고 하는 코치님 마음도 이해는 간다.
아무래도 프로게이머라고 방송을 켰는데 일반 BJ보다 시청자 수가 낮게 나온
다면 자존심에 금이 갈 수도 있으니까.
“괜찮아요.”
거기다 따로 방송 채널을 파도 인기가 없는 선수는 끝까지 인기가 없다.
차라리 마스터 일반인이 낫지.
성적이 나쁜 그마 프로는 방송에 들어오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별로 신경쓰이진 않는다.
시청자 수야 금방 올라갈 일이니까.
잘하면 된다.
내가 말주변이 있건 없건간에 실력 방송은 먹힌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건 팀의 성적이고.
방송은 주전 자리를 얻어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네가 너무 어른스러워서 더 걱정인데. 미안하다. 우리 채널이 인기가 많은
편은 아니라서..”
코치님은 몇 번이나 나에게 위로의 말 비슷한 걸 남기고 옆에서 발만 동동 구
르고 있었다.
그래도 처음이라고 옆에서 조금 살펴보다가 가시려는 모양.
어쨌든 나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마이크를 켜고, 화면을 걷어냈다.
방송을 켜자 매니저님이 즉시 접속하고 천천히 몇 명씩 유입이 시작됐다.
어차피 연습 겸 켠 거니까 별로 신경쓰지 않고 큐를 돌리기 시작한다.
“안녕하세요.”
- 건하
- 팬이에요ㅜㅠ 기다렸어용
- 누구? 캠 저거 맞음?
평범한 반응들이 이어진다.
“FWX 권건입니다.”
화면을 입맛에 맞춰 세팅하고 있자니 오른쪽 하단이 깜빡거린다.
- 찌세(zzise화. 332) 님이 347명의 시청자를 보냈습니다
“어, 어어. 뭐지. 왜지. 뭐지?”
코치님은 옆에서 입을 바보처럼 벌리고 서있었다.
하필이면 캠을 올려놓은 상태라 코치님이 정면으로 잡힌 건 실수다.
- 저 사람은 누군데 옆에서 저러고 서있음ㅋㅋㅋ
- 입쩍벌 ㅋㅋㅋㅋ
- 뭐야 ㅋㅋㅋ 꼴랑 350명에 놀란거임? 소박하다 소박해ㅋㅋㅋㅋㅋ
- 코치 아님? ㅋㅋㅋㅋㅋ 선 채로 죽었어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