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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36화 (37/326)

036화. 개같이 멸망

그래도 꽤 괜찮은 타이밍을 잡아 용을 챙긴 FWX의 정글이 조금씩 안정감을 찾

아가고 있었다.

귀환 후, 조심스러운 탑 갱.

“상대 레넥 보자. 조금 엉덩이 흔들어봐줘.”

이번에는 정글러 윤도형의 콜이 나왔다.

“오케.”

자르반을 잡은 윤도형과 탑 그라를 쥔 문봉구.

상대 레넥을 노리며 크게 포위망을 그린다.

“쟤네 모른다. 애들이 탑 보는 거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노림수 나쁘지 않은데요?”

코치 박스 안에서 감코진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냥 양 손을 잡고 기도하면서 다음 세트를 준비하는 것 밖에는.

바보 연기인지 진짜 미스인지 모를 그라의 스킬이 어이없이 빠졌다.

찬스다.

딜교를 위해 레넥이 앞쪽으로 접근기를 사용했다.

이 순간을 노리던 우리 팀의 탑과 정글이 아슬아슬하게 킬을 올렸다.

“도형이형 나이스!”

“화이팅 화이팅, 집중력 유지하자!”

킬 스코어는 2:1.

용을 차지하고 올라와서 탑 갱을 성공시켰으니 턴을 잘 썼다.

처음에 교환해준 킬이 아쉽기는하지만 굴릴만한 기반은 갖춰졌다.

“좋았어!”

“최고다! 역시, 방구방구 문봉구!”

감코진 모두 주먹을 불끈 쥐고 기뻐한다.

내가 코치 박스 안에 있었던 경우는 잘 없다.

그래서 이런 감정 변화를 보는 지금이 좀 신기하기도 하다.

난 항상 경기 구역에 들어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여기 감코진, 리액션이 아주 후한 편이다.

경기를 이기기라도 하면 대체 무슨 리액션을 할까?

진짜 춤이라도 추는 거 아니야?

이렇게 관전만 하면서 나였다면 어땠겠다 하는건 의미가 없다.

하지만 벌써 윤도형의 부정확한 콜과 플레이에서 아쉬운 점이 여럿 보인다.

정글러 윤도형만 그런 게 아니다.

지적하고 싶은 게 수두룩하지만 아직은 막내 코스프레 중이니까 자제하도록

하자.

하지만 손을 대긴 해야 할텐데.

이 팀, 어디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까.

#

“FWX, 분위기가 좋습니다!”

“지금 선수들이 승리에 아주 목말라있거든요! 오늘이야말로 드디어 승리를 딸

때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겁니다.”

“지금 미라쥬의 오리안느는 플래시가 빠졌어요. 압박이 좋습니다.”

“나이스죠, 아주 나이스합니다. 라온 선수의 과감한 궁극기 사용에 빠질 수

밖에 없었어요. CS도 곱게 먹었습니다. FWX가 전체적인 주도권을 잡으면서 파

이크의 발이 풀리고 있어요.”

“하지만 아직까지 마음을 놓기에는 이르죠. 지금 턴을 버리지 말고 드래곤 쪽

시야를 더 차지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열정적인 스타일의 현수진 해설가와 다소 분석적인 면의 강기수 해설.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지금 파이크가 탑 방향으로 로밍을 올라갑니다. 상체 쪽 시야를 많이 뺏긴

미라쥬라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은데요.”

“아주 적절한 동선입니다. FWX 서포터 클래스 선수는 과감한 로밍으로 상대의

타이밍을 뺏어오는데에 강점이 있죠.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같은데 이걸

알아챌 수 있을까요, 미라쥬?”

파이크가 탑 쪽으로 합류하며 미라쥬의 레넥튼을 압박한다.

자연스럽게 FWX의 정글 자르반까지 발걸음을 옮기며 수정초를 터뜨린다.

“아! 이제 안 것 같은데 꽤 늦었죠!”

“방금 순진하게 순간이동으로 탑으로 올라온 레넥튼인데, 이대로 죽으면 손해

가 너무 커요!”

“바로 미라쥬에서도 합류를 위해 탑 텔을 탑니다! 이거 잘못하다간 둘 다 죽

을 수도 있어요!”

탑에서 벌어진 교전에 양 팀은 합류를 서둘렀다.

“파이크가 잡아올리고! 자르반이 궁극기를 통해, 어딜! 생각보다 레넥이 좀

단단합니다!”

“아! 잠깐, 이게 뭔가요! FWX!”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레넥튼을 잡기 위해 달려든 셋이 거의 동시에 스킬을 쏟아붓지만 순서가 잘못

됐다.

파이크가 잡아당기고 자르반이 가둔 레넥튼을 향해 그라가즈가 궁극기를 사용

했다.

- 투웅!

“레넥튼이 살아서 나갑니다, 딜이 조금 부족했죠!”

아주 잠시 해설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모두 당황한 것이다.

기껏 가둬둔 상대를 그라가즈가 궁으로 부드럽게 밀어주면서 예쁜 방생각이

나왔다.

아쉬운 것도 아니었다.

완전히 미스다.

하지만 해설가들은 서둘러 안타까움을 표하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 씨발?

- 내가 뭘본거임

- 존;나 어질어질하다

- 이게 전패 팀?

- 전패는 아님; 한세트는 잡은 적 있음;

- 딜이 조금 부족했죠? ㅇㅈㄹ

- 스킬 좀 똑바로 써요 팬시!!

- ㅋㅋㅋㅋ낼름 개꿀

레넥튼은 방생으로 뒤로 빠졌고, 뒤늦게 합류한 오리안느가 탑 라인을 자연스

럽게 받아먹으면서 미라쥬는 오히려 이득을 챙겨갔다.

주요 궁극기가 빠진 FWX는 뒤로 물러 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 용 앞에서 벌어진 5 대 5 한타! 쓰리쉬의 멋진 그랩으로 자르반이 끊깁

니다!”

- ?

- 나만 봤냐?

- 믿을 수가 없다

- 저 상황에 제어 와드를 왜 쳐 미친놈인가

- 끌려가더라도 궁이라도 누르고 죽었어야지

- 와드는 어쨌냐? 서폿 뭐함?

- 미친놈들인가 거기 몸을 왜 들이대

- 용 싸움에서 정글 먼저 내주고 시야 확인하기 ^오^

- 진심 이게 프로가 맞냐?

와드가 부족한 상황.

급한 마음에 용 쪽 시야를 밝히기 위해 한 걸음 앞에 나갔던 자르반이 클릭

미스라고 밖에 할 수 없는 행동으로 먼저 끊겼다.

그리고 미처 몸을 빼지 못했던 팀원들마저 휩쓸리며 FWX는 대패했다.

“미라쥬의 테러 선수가 킬을 쓸어담습니다! 이러면 울라프 유통기한이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죠!”

“FWX, 비상! 초반에 한 푼 한 푼 끌어모았던 종잣돈이 줄줄 흘러내려요! 지금

와서 아, 아까 용을 한 스택이라도 더 쌓아놨더라면! 후회해도 늦습니다. 지

금부터라도 집중해야해요!”

- QWER만 누르면 프로 할 수 있는거 맞냐?

- R까지 안누르셔도 됩니다 합격^^

- 팬시 글가는 QWER 아무거나 누르더니 폴리 이새낀 R도 안누르고 죽는게 문제네

- 욕설 논란 폴리 욕설 논란 폴리 욕설 논란 폴리

- 욕설은 아니라고 했음; 심판진한테 항의한거지

- 오늘 FWX 2군 정글 콜업함

- 2군따리가 와서 뭐하겠냐

- 걔 잘하던데? 유명함

- 뭘 해도 폴리보단 낫겠지ㅋㅋㅋ 궁만 쓰고 죽어도 합격임

오랜만에 유리하게 시작한 초반에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졌던 FWX 팬들이 실

망했다.

결국 킬 스코어가 역전되고 말았다.

“이제는 미라쥬에게 주도권이 넘어갔죠.”

“FWX에는 발언권이 없어요. 사이드는 혹시 이것 좀 먹어도 될까? 하고 허락받

고 먹어야합니다. 초반 상대 라인을 압박했던 바텀 구도도 완전히 뒤집혔어요.”

“조금 더 집중해야합니다. FWX.”

“하지만 미라쥬가 빈 틈을 보이지 않아요. 자연스럽게 날개 운영으로 넘어가

면서 손해가 누적되기 시작합니다. 자꾸만 잽을 맞고 있어요. 아, 또 미드 라

온선수의 플래시가 빠집니다.”

점점 기세가 꺾여가는 것이 눈에 보이던 FWX는 힘이 빠진 듯 수동적으로 움직

이기 시작했다.

“다음 용을 내줘선 안되겠죠? 첫 용 이후 느긋하게 운영한 댓가를 톡톡히 치

르고 있어요!”

“말씀하신 순간, 아! 또! 어딘가 기시감이 드는 장면!”

다섯 번째 용 앞에서도 쓰리쉬에게 자르반이 똑같이 끌리는 장면이 다시 연출

됐다.

- ㅋㅋㅋ 경기 하기 귀찮다고 다시 보기를 틀어주시면 어떡해요~

- 이거 말고 진짜 경기 보여달라고ㅋㅋㅋ

- 아ㅋㅋㅋ장난 치지 말라고ㅋㅋㅋㅋ씨발놈들아···

- 그믄흐르그..

그리고 기울어졌던 경기가 정말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미라쥬의 테러, 헥사 선수가 폭발적인 시너지를 보여주면서 경기를 지배합니

다! 고점이 폭발한 것 같아요! 테러 선수의 울라프가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못 막아요!”

“오늘의 주사위는 6! 6입니다!”

“넥서스가 터지면서 게임이 마무리 됩니다! GG!”

#

“팀 운영이 완전히 망가졌었어.”

“미라쥬가 대단한 운영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용 타이밍 시야 다 놓치고, 끊

기고, 미드 모여에 우왕좌왕했잖아.”

코치 박스는 침울했다.

하지만 감코진은 방금 전까지 말하던 의견들을 최대한 감추고 일단 선수들을

달랬다.

피드백은 돌아가서 해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일단, 수고했다. 다음 경기 준비하자.”

1세트 종료 후 내가 겪은 감정 변화는 놀라웠다.

저걸? 저렇게? 여기서? 이렇게?

이 기분을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도대체 FWX의 팬들은 뭐 하는 사람들일까?

내가 봤을 때 감독과 코치의 실력은 그렇게 뛰어난 편도, 그렇게 모자란 것도

아니었다.

그럼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팀에 구심점이 없어.”

그래.

저 말이 옳다.

이 팀은 구심점이 없다.

더 자세히 파고 들어가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잘 나가는 팀들도 모든 선수들

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단점이 없는 팀은 없다.

하지만 이 팀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단단한 중심이 잡혀있지 않다는 거다.

물론 그 외에도 자잘한 문제점이 많지만.

“이번 판 졌으니까, 다음 판 좀 더 잘해볼게요. 미리 맞았다고 생각하고.”

주장 자리를 딱지치기로 딴 건 아닌지 원딜러 곽지운은 멘탈을 유지하고 있었다.

상체가 터졌는데 원딜 혼자 그 구멍을 다 막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침착하고, 다음 게임 가보자. 얘들아. 막내한테 좋은 모습 보여줘야지.”

연패 중이라고해서 패배에 무감각해지기는 어렵다.

창백한 표정으로 감독님이 선수들을 도닥여 다음 경기에 대한 의지를 불러일

으키려고 애썼다.

“우웩. 우웩.”

직전 세트를 가장 안정적으로 플레이 해줬던 미드 라이너 김예성이 헛구역질

을 했다.

김예성은 조금 섬세하고 예민한 구석이 있었는데, 아마 여러가지 감정적 불안

이 겹친 것 같아보였다.

“오늘 준비했던 탑 요소가 뭐지?”

“다이브 피하고, 가능하면 상대 플 빼놓고, 전령 때 플 없는 거 이용해서 시

야 가두기, 그리고 든든하게 플레이 하기요..”

“그래.. 알면 됐다.”

탑은 대답은 잘 하지만 실수가 너무 잦다.

실제로 플레이에 적용하고 있는지 미지수.

“...”

정글은 세상 잃은 슬픈 표정으로 벽에 기대어 있고.

“다음 세트도 잘 해보자. 할 수 있어. 연습한대로 침착하게 가자.”

금세 다음 세트가 시작됐다.

그리고 FWX는 개같이 멸망했다.

#

그 날 밤, FWX 공식 너튜브에는 권건의 소개 영상이 올라왔다.

- WELCOME, GwonGun.

ㄴ 어서와요 지옥으로

ㄴ 신인임? 얼굴 보고 뽑았누ㄷㄷ

ㄴ 드디어ㅠ 꼴리님 쉬실 수 있나요? ㅠ 건강이 너무 걱정되네요 ㅠ 집으로

돌아가서 푹 쉬세요^^;

ㄴ 오늘 경기 진짜 심했어요 용 싸움이 미리 준비가 되어 있어야지 젠 4초 전

에 도착하는 게 말이 되나요 상대 주먹구구식 운영에 휘둘리기만 하는데 이런

식으로 하면 차라리 제가 감독을.. (더보기)

ㄴ 솔랭 영상 봤어요 권건 선수 파이팅!

ㄴㄴ 어디서 봄?

ㄴㄴ 다시 보기 관전방 운영 중입니다 (링크)

한 신인 선수의 소개 영상일 뿐이었지만, 반응은 이번 시즌 올라온 영상 중

가장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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