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35화 (36/326)

035화. 어떤 고통을 선사해줄까

그 날이 왔다.

내 인생 최초 FWX 직관.

사실 그렇게까지 볼만한 경기를 하는 팀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이번

삶에서의 우리 팀이다.

여기가 마지막 팀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이동하겠습니다.”

“건아, 가자.”

“건이 나랑 갈건데. 넌 빠져.”

동갑내기 바텀 듀오는 날 양쪽에서 잡아당긴다.

“깍지 얘가 꼰대짓 하던걸 떠올려봐. 이런 애랑 친하게 지내면 안돼.”

상냥한 최은호의 목소리가 속삭이듯이 들려온다.

서포터 포지션의 최은호는 나와 가장 먼저 친추를 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가 유독 친한 척 군다.

“아닌데? 아닌데? 얘 나한테 갚을 거 개많아.”

반대편은 나에게 수도 없이 당했던 원딜 곽지운이다.

그 뒤로 같은 팀으로도 한 번 걸렸는데, 딱 그 반대로 황제 대접을 해줬더니

나에게 꼬불쳐뒀던 도라지즙을 주면서 비밀 친구 서약을 받아갔다.

아, 물론 투덜거리면서 가습기 물도 채웠다.

사실 선수들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긴 하지만.

호감을 사는 게 이렇게 쉽다.

10대건, 20대건, 30대건 LOS 캐리면 일단 친구가 된다.

“어서 가자.”

감독님은 허허롭게 웃으며 선수들을 챙겼다.

나머지 선수들은 경기장에 도착할 때까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원래 정글러인 윤도형이 제법 말을 많이 하는 편이라는 것 같다.

하지만 요즘들어 말수를 부쩍 줄였는지 조용하다.

대기실에 일찍 도착한 우리는 간단한 식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얘들아. 오늘 경기 좋은 결과 내자. 곧 설 연휴잖아. 승리 챙기고 쉬는 게

좋지.”

“아.. 대진 너무 어렵네요.”

오늘 경기가 광주 미라쥬라면 일요일에 다가오는 경기는 대구 유니버스와의

경기였다.

지난 순위를 아쉽게 4위로 마감한 전통적인 강팀이다.

사실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었지만 1라운드를 전패로 끝낼 수는

없다.

어떻게든 기운을 내야한다.

그게 설 휴가 전이면 더 좋을거다.

연패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걸 상상하면..

이건 나도 싫다.

아쉽지만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코치님이 말씀하셨던 누나와의 만남은 없었다.

[ 나이가 더 많아야 누나 아니야? 그러면 누나 아니잖아. ]

‘예쁘면 누나지.’

[ 나도 너보다 나이 많은데. ]

릴리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 흥, 됐어. ]

왠지 약간 삐진 것 같은 릴리의 말투에 뭐라고 대답해줘야할 것 같긴 한데 정

말로 뭐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릴리가 귀여운 것도 귀여운 거지만 얘는 너무 작다.

여덟살 정도나 될까?

혹시 알고보면 본 모습이 따로 있거나 한건가?

그건 또 약간의 기대가..

“라인전에서 실수가 나오는 건 그럴 수 있어. 그래도 한타 할때는 도형이랑

은호 오더 잘 들어주고.”

어느새 감독님이 마지막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항상 침착하게, 여태까지 준비해 온 것들 보여준다는 마음 가짐으로 가자.”

곧 출발해야 할 시간이다.

#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25 LKL 스프링 첫번째 라운드, 4주차 경기

를 만나러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오늘은 강기수, 현수진 해설 위원과

함께 합니다. 캐스터 안은우입니다.”

캐스터가 매끄러운 멘트로 일정의 시작을 알렸다.

오늘 경기 일정 중 절반은 하위권 팀이었고, 평일 이른 시간대였기에 시청자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매 주 새로운 소식을 알리는 코너는 필수였다.

“오늘 경기에 앞서 로스터 변경과 몇가지 변경 사항에 대해서 소개해드리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강기수 해설 위원?”

“네, 이번 패치가 적용되면서 주요 변경 사항으로는..”

몇 가지 변경 사항들을 설명한 해설 위원들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번 주부터 적용될 새로운 로스터에 대해서 공지드립니다.”

“수원 해머스에 멘탈 코치로 윤하운 전 프로가 영입되었고..”

“대전 FWX에 정글러, 권건 선수가 콜업 되었습니다.”

“새로운 분위기를 꾀하려는 FWX의 한 수로군요?”

“네, 권건 선수는 본명과 선수명이 같은 선수입니다. 2군에서는 거니라고 불

렸던 것 같아요. 현재 파이어웍스 퓨처스같은 경우, 요 며칠 주춤한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여전히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올해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죠.”

“그 원동력이 권건 선수다, 이 말씀이신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안정적인 정글링을 하면서 동시에 상당한 담력을 가지

고 있어요. 적재적소에서 게임을 풀어나갈 줄 아는 선수입니다. 콜업 이후에

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네요.”

“그러고보니 우리 남동현 해설이 2군 경기를 해설하시는데, 오늘 이 자리에

없는 것이 아쉽군요.”

“제가 남동현 해설께 권건 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좀 들었는데요.”

“오, 네. 말씀해주시죠.”

화면에는 권건이 팔짱을 낀 자세로 새롭게 찍은 선수 사진과 한 마디가 노출

되어 있었다.

“언더독의 반란을 이끌 선수라고, 퓨처스 리그 최강 아웃풋이다, 뭐 이런 말

을 하시더라구요.”

“남동현 해설의 동부 사랑은 유명하죠. 저도 권건 선수의 콜업으로 FWX가 새

로운 바람을 만들어 낼 지가 기대됩니다. 요즘 FWX가 주춤하는 기세인데 이대

로 끝날 팀은 절대 아니거든요!”

“과연 이것이 남동현 해설만의 자랑거리가 될 지, 아니면 LKL의 자랑으로 거

듭날 지! 새로운 선수에게 많은 기대를 걸어보면서, 오늘 준비된 첫번째 경

기! 광주 미라쥬와 대전 FWX의 경기를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해설가들의 코멘트가 끝나자 캐스터가 경기 시작을 알렸다.

LOS 파크에서 진행되는 1군 리그는 FL과 달리 인파로 가득했다.

그 중 대부분은 광주 미라쥬의 팬들로, 어웨이 석에도 미라쥬의 팬들의 숫자

가 적지 않았다.

“얘들아, 집중 집중. 아까 이야기 했던 대로 시작해보자.”

밴픽이 시작됐다.

#

모니터링이 제공되는 코치 박스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에는 제한이 있다.

로스터에 포함되는 코칭 스태프, 선수, 전력분석관, 그리고 단장까지 입장 할

수 있었는데 이 안에서도 복장 규정은 지켜져야 하기에 나는 유니폼을 입고

코치 박스 내에 앉아 있다.

지급받은지 얼마 되지 않은 유니폼에서 새 옷 냄새가 솔솔 올라온다.

코치 박스 안은 방음이 잘 되어 있다.

그래서 밖의 소리가 들어오지도, 안의 소리가 새어나가지도 않는다.

바깥 소리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보다는 감코진이 판단한 정보가 선수들의 경

기 구역으로 빠져나가면 안되기 때문이다.

옛 이야기지만 부스의 방음이 완벽하지 못해 해설이나 감독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더라, 귀맵을 했다더라 하는 이야기들은 꽤 유명한 이야기다.

리그가 성장할수록 주최측은 시설과 인공 소음 등의 수단으로 방음에 완벽을

기했고 그게 지금이다.

그래서 코치 박스 안에서는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감독님과 코치님의 숨소리, 마우스 클릭 소리, 그리고 사각거리는 필기 소리

정도.

이 장소에 처음 도달하는 선수들은 퓨처스 리그와는 다른 이 분위기에 상당한

압박감을 느낀다.

경기 구역이 아닌 여기서조차 공황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이 자리에 있는 것도, 경기 구역 안에서 게임을 하는 것도 부담감을

느껴 적응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신인들이 많다.

가장 편안한 공간에서 게임을 하는 것과 수많은 사람들의 인기척과 시선이 나

를 향해 쏟아지는 곳에서 게임을 하는 것은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내게는 익숙하고 편안한 장소 중 하나지만, 뭐.

내 반응을 살피려는지 한빛 코치님이 곁눈짓으로 나를 흘끔거리는 게 느껴진다.

“얘들아, 얘들아 집중하자.”

코치 박스로 경기 중인 선수들의 목소리가 전달된다.

들려오는 것은 서포터 최은호의 목소리다.

“아래 쪽 시야 따고 와드 바꾼다음 위쪽 합류할거야.”

“오케이.”

기본적인 오더 스타일이다.

이 팀의 주 오더는 서폿 최은호와 정글 윤도형.

어쩌면 당장 내가 투입되지 못한 것이 오더의 부재에 대한 염려 때문일 수도

있다.

윤도형이 어떤 비중을 차지하는지 봐 둘 필요가 있다.

“바텀 주도권..”

옆에서 긴장한 듯한 소리가 들린다.

우리 바텀은 준비했던 이즈와 칼마 조합은 아니었지만 루시언 파이크 조합을

들었다.

상대적 강팀에 맞서기위해 스노우볼링에 많은 것을 건 모양이다.

파이크는 리그에서 그리 자주 기용되는 픽이 아니다.

잘 풀리지 않았을 때의 역풍이 꽤 큰 편인 서포터다.

“파이크 발만 풀리면 은호 형이 설계각 잡기 좋겠는데요.”

“건이.. 네 말이 맞다.”

“잘 되겠죠.”

항상 미래는 바뀐다.

이 작다면 작은 리그에서도 매 역사마다 나오는 픽, 나오는 밴은 달라진다.

나비 효과라는 걸까.

그것도 고정되어있었다면 정말 우승이 쉬워졌을텐데.

하지만 무수히 바뀐 역사 속에서도 FWX가 잘 풀렸던 적은 없다.

오늘 경기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긍정적일거라는 생각은 들

지 않는다.

나도 한 마디씩 거든다.

너무 긴장한 것 같지도, 너무 나태하지도 않은 정도로.

지나치게 냉정한 시각으로 보지도 않아야하고 그렇다고 편파적으로 말하는 것

도 별로다.

딱 우리가 생각할 수 있을 만큼만.

“상대 원딜이 수비적 성향이니까 괜찮을 것 같아요. 오늘 왕지우 선수가 잡은

챔피언도 평소 주력 픽이 아니라 쓰리쉬니까. 쓰리쉬 숙련도도 낮은 편이고.

공격적으로 나오진 않겠네요.”

“잘 아네. 수철 코치가 벌써 선수 공부도 시켰어?”

“아뇨, 정보야 데이터 베이스에 있지만 아직 건이에게 전달은 안했습니다.”

“관심이 있어서 조금 봤어요. 우리가 우승해야 할 리그니까요.”

감독님이 감동받은 눈빛으로 바라본다.

“와, 우승이래. 진짜.. 오랫동안 입 밖으로 안 꺼냈던 말이네. 좋다. 이게 젊

은 감각인가.”

“우리 이번 라클하고 싸움 볼게, 깍지 가능하겠어?”

잠시 잡담을 나눴던 우리의 귓가로 최은호의 보이스가 들린다.

다들 다시 모니터링에 집중했다.

“오케이. 나 가능.”

“정글은?”

“적 정글 체크 중. 봐줄 순 없는데 싸워도 돼. 거긴 없을 가능성?”

아니다.

적 정글은 근처에 있다.

윤도형의 말이 떨어지자 코치 박스 내에서는 작은 탄식이 흘렀다.

그래도 싸움을 걸어볼만한 거리다.

“지금! 건다, 아래쪽, 쓰리쉬부터!”

바텀에서 싸움이 벌어진다.

미라쥬의 바텀은 상당히 특이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원딜이 라인전을 길고 안정적으로 가져가려는 편이고, 서포터는 시그니처 픽

을 다양하게 보유하고 있다.

이 특이한 챔피언 풀로 인해 미라쥬를 상대하는 팀은 밴픽이 쉽지 않다.

하지만 내가 말한 것 처럼 미라쥬의 서포터는 오늘 숙련도가 그리 높지 않은

쓰리쉬를 들고 나왔다.

네임밸류로 보자면 조금 밀리지만 충분히 해볼만한 구도의 싸움.

“나이스!”

“아, 잘했다! 다행이다!”

바텀에서 아군의 첫 킬이 터져나왔고 환호보다는 안도가 먼저 나온다.

“이대로만, 이대로만!”

하지만 백업을 온 상대 정글러의 대응으로 최은호의 파이크도 죽고 말았다.

퍼블을 먹긴 했지만 킬 스코어는 바로 1 대 1.

“아, 이런.”

코치님들은 피드백 노트를 빠르게 작성하고 있다.

꽤 날카로운 각을 본 전투였다.

하지만 상대 루트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정글에서의 콜이 기껏 딴 이득을

최소화 시켰다.

이렇게까지 초반부터 미스를 낸다고?

“괜찮아. 퍼블 먹었어. 아직. 아직은. 일단은.. 이득이야.”

응?

이렇게 아쉬운데 괜찮다고 한다고?

돌아본 감독님은.. 그래.

이를 악 물고 괜찮지 않다는 표정으로 입으로만 괜찮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과연.

이 지옥이 FWX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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