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화. '마그네슘' 대신 '다이브'는 어떨까요?
프로 스포츠는 프로페셔널 스포츠다.
아마추어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목적이 수익성이라는 거다.
선수들은 연봉을 받고, 스폰서나 구단은 경기를 통해서 이익을 얻는다.
그런 의미에서 프로 스포츠는 생각보다 다양하다.
야구, 축구, 농구, 골프 뿐만 아니라 족구나 핸드볼 등 인지도는 각각 다르지
만 세상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체육 종목들이 프로 스포츠로서 인기를 얻고있다.
그 중에서도 내가 속해있는 이 스포츠는 일반적인 프로 스포츠들과는 다른 부
분이 있다.
이름부터 E가 붙어있는데, 이건 일렉트로닉이다.
콘솔부터 컴퓨터까지.
오프라인이 아니라 온라인의 개념이다.
이 배경은 또 다른 차이를 부른다.
우리는 육체로 플레이 하지 않는다.
스포츠가 육체와 정신, 두가지 요소로 나뉘어있다면 프로게이머는 정신에 많
은 부분을 투자하는 마인드 스포츠 플레이어다.
아마 서로 닮은 스포츠로는 바둑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10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9의 시간을 연구에 집중한다.
게임사에서 제공하는 패치 노트와 새로운 조합, 아이템의 개발, 플레이 등에
끊임없이 시간을 쏟는거다.
에너지를 내부로 밀어넣는 것과 외부로 발산하는 것은 상당히 많은 차이를 만
든다.
이건 소위 말하는 책상머리 스포츠이기 때문인데, 그래서 기본적인 신체 능력
이 일반인보다 떨어지는 프로게이머들도 많다.
내가 청소년기의 신체 활동이 정신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던가?
“와, 씨, 야, 아! 뭐야!”
정신 건강은 항상 중요하다.
나약한 정신은 멘탈 바사삭을 만든다.
“이거 개 억까야 진짜!”
그리고 새로운 주장, 곽지운은 운동 부족의 대표 주자다.
나약한 정신과 운동 부족이 정말 관계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나도 모른다.
원딜러 히스테리 때문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이번 판.
나는 가습기 당번을 피하기 위해 악귀가 된다.
고작 그런 거에 왜 몰입하냐고?
호구 막내 이미지는 사절이니까.
“막내가 게임 더럽게 해요, 코치님!”
“지운이가 너 극찬한다.”
그러고보니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은 마그네슘을 섭취하면 좋다고 한다.
하지만 새로운 내 원딜이 마그네슘 따위에 의지하게 둘 순 없다.
스스로 극복할 수 있게 다이브를 선물하는 게 어떨까?
“다이브를 계속 치잖아요, 저 새끼 나한테만 오고 게임 안해요! 이거 트롤이야!”
“쟤 용이랑 전령도 다 먹었던데?”
“막내 미쳤나봐! 바텀 오지 말고 이제 정글 돌라고!”
옳은 말씀이다.
나는 정글러니까.
그러니까 버프를 챙기자.
“아! 내 레드 없어!”
나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사람을 열받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춤을 추거나 인장을 띄우는 건 하수나 하는 짓이다.
그럼 특정인에게 분노 유발 고수가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까?
LOS를 1:9 게임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다.
분명히 바텀이 억까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든 팀원들이 알고 있긴하지만,
플레이를 하는 중에 풀타임으로 바텀을 보고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중간중간 탭을 눌러 스코어 보드를 확인할 때마다 우리 바텀이 대체
얼마나 못하고 있으면 저럴까 궁금해지는 상황을 만들어주면 된다.
이런 궁금증은 랭크의 고저와 관계가 없다.
때론 데스의 이유를 넘어 사적인 다른 것들이 궁금해질 수도 있겠지.
쉽게 말해, 적으로 만난 우리 팀 주장은 벌써 6데스째다.
라인을 받아먹기조차 힘들어 레벨도 낮고 돈도 없다.
왕자님으로서는 차마 버텨내기 힘들 서민 체험이다.
- 퓨릭스터 트처(백스) : 우정권! 우정권!
- 흐켱맨(쓰리쉬) : 실례지만
- 흐켱맨(쓰리쉬) : 혹시 적 바텀에 부모님의 원수가 있으신가요
그렇다고 원패턴으로만 가면 적에게 읽혀서 게임 자체를 져버릴 수도 있으니
까, 아주 섬세하게 가자.
집중력 풀가동.
망해버린 왕자님을 손절하고 외화라도 벌러 온 서포터 역시 이국 땅에서 모진
풍파를 이기지 못하고 계속해서 데스를 기록한다.
“아씨 한 턴만! 원코! 원코 줘!”
“깍지 점수 막내가 호로록.”
“개웃기네. 깍지 리폿 좀 해라. 사람 아님.”
게임은 끝났다.
“이제 가습기 물 채워주세요, 애송이 깍지 형.”
내가 수줍게 웃어주며 약속한 결과를 요구하니 우리 주장이 너무 좋아서 나쁜
말을 한다.
하지만 그 덕분에 주변의 다른 팀원들은 더욱 화기애애해졌다.
애들은 이런 식으로 친해지는거지.
아니라고?
어쩔 수 없다.
내 짬에 가습기 물이나 채우고 있을 순 없잖아.
#
“한빛아, 수철아. 들어봐봐. 다음에 우리가 어웨이라서 레드 진영이야.”
“네.”
“먼저 칼마랑 이즈를 먹어.”
“바텀 주도권 좋겠네요.”
“그리고 볼베나 갈레오를 먹어.”
“네네.”
“그런 다음 밴 안당하면 트페. 아니면 랴이즈를 먹자.”
“막힐 것 같긴 한데, 그럼 마지막으로 정글 보시게요?”
“응. 다이아나나 자르반. 어때?”
“나쁘지 않죠. 정글 봐줘야하는 부담감도 적고.”
FWX 1군 감독 박진현과 코치진은 수요일에 있을 경기를 대비해 밴픽 시뮬레이
션을 돌리고 있었다.
팀은 전력분석관 직책을 로스터에 올리지는 않았으나 구단 내에 별도의 분석
팀은 있었다.
수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친 귀중한 정보가 감독과 코치들의 손에 들려있다.
“이런 식으로 풀면 미라쥬는 무난하게 헤크림 먼저 들고갈 것 같아. 그치?”
“풀면 가져가겠죠. 근데 막으려면 밴 자리가..”
하지만 머리가 아프다.
귀중한 정보가 있으면 뭘하나.
상대의 카드는 많고, 우리의 카드는 적다.
수요일의 상대는 광주 미라쥬다.
지난 시즌 6위에 그쳤다고는 하나, 사실 미라쥬는 FWX보다 역사가 짧은 팀이
었다.
그런데도 전체적인 성적은 한 수 위고 평점 역시 그랬다.
무엇보다도 지금 FWX는 승리를 단 한번도 챙기지 못한 단독 10위.
작년까지 아랫순위로 놓고 있었던 제주 F.L.E도, 울산 피닉스도 각각 2승을
챙기며 훌쩍 앞서나가고 있었다.
“하아..”
박진현 감독은 머리가 아팠다.
“애들이 패배에 익숙해지면 어쩌지.”
잠시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아직 시즌 초입니다. 다들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괜찮을겁니다.”
코치도 할 수 있는 말이 그것 밖에 없었다.
“그래도 건이 들어오고나서 약간 분위기가 올라갔다고는 생각해요.”
뜻밖에 긍정적인 의사를 표현한 것은 권건의 콜업을 반대했던 김한빛 코치였다.
“연습 집중도가 엄청나요. 애들도 막내가 들어와서 좋은 모습 보여주려고 하
는 것 같아요. 지난 번 세트 승 때도 제법 먹혔잖아요.”
“그건 그래, 그래도.. 그 소식 듣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한 세트 따긴 했
지. 결국 졌지만.”
그런 의미에서라면 권건이 행운의 상징같기도 했다.
“건이는 적응 잘 하고 있는 것 같아? 애들이랑 말은 놨고?”
“적응은 괜찮은 것 같아요. 반말 스타일은 아닌 것 같구요.”
“응, 뭐. 그건 선택이지. 얼른 적응할 수 있게 도와줘. 플레이는?”
“잘해요.”
“코치가 할 소리니.”
박진현 감독이 웃어 넘기려고 했지만 최수철 코치가 갑자기 손을 덥썩 잡았다.
“다 잘해서 그럽니다. 일단 팀에서 막내는 확실히 아니에요.”
“그, 그래?”
“진짜, 진짜 잘합니다. 건이 앞에서는 이런 말을 못해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몰라요.”
“일단 우리 다음 경기 준비할까?”
“후.. 좋습니다. 다음에 30분쯤 시간을 따로 내주세요.”
초상집같은 분위기를 완전히 뒤집어버린 최수철 코치의 광신도같은 눈빛에 박
진현 감독은 시선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
#
- 탑병이유찬 : 거기 밥은 어떰?
- 나 : 어떻긴 뭐가 어때 같은 카페테리아인데
- 탑병이유찬 : ?
- 탑병이유찬 : 숨겨진 식단은?
- 나 : 그런게 어딨어
- 탑병이유찬 : 엥
- 탑병이유찬 : ㅇㅋ
- 탑병이유찬 : 거기 컴퓨터에 비하면 우리 컴퓨터는 콩순이 컴퓨터라던데
- 탑병이유찬 : ㄹㅇ?
- 나 : 그런거 아니던데
이유찬이 카톡으로 이상한 음모론을 펼쳤다.
원래 유찬이가 자기 번호를 저장해 주면서 ‘탑신유차니’ 같은 걸 이름으로 넣
어놨는데 내가 바꿨다.
타워 다이브 치고 살아나올 때가 되면 바꿔주도록 하자.
- 나 : 연습 안해?
- 탑병이유찬 : 요즘 나는 슬럼프에 빠짐
- 탑병이유찬 : 갑자기 게임을 하기가 싫어..
5분 짜리 슬럼프인가?
그 전까지 플레이 기록이 남아있다.
얘는 모든 게임을 재밌어한다.
나도 예전엔 그러긴 했는데, 유찬이는 정말 무한 동력이다.
덕업 일치가 제대로 이뤄진 스타일.
- 탑병이유찬 : 다음주 월요일에
- 탑병이유찬 : 니가 없다고 생각하니
- 나 : 질 것 같아?
- 탑병이유찬 : 이런 시
- 탑병이유찬 : 련이
- 나 : ;; 말을 왜 그따위로 끊어서 써
- 탑병이유찬 : 하지만 나는
- 탑병이유찬 : 퓨체탑
- 탑병이유찬 : 상체는 내가 책임진다
뭐지, 이유찬.
자아가 여러개인가.
“여자친구야?”
“아뇨.”
나도 모르게 싸늘한 표정을 지어버렸는지 코치님이 머쓱하게 웃었다.
“아. ‘여자’친구가 아닐 수도 있지. 하하, 편견이 좀 있었니? 내가 말 실수를
했다.”
아니? 무슨 편견?
이 코치님도 이상한 사람인가?
사람을 대체 뭘로 보는거야.
“연습 열심히하네. 훌륭하다. 화요일 로스터 제출 때 네 이름도 올라갈거야.”
“감사합니다.”
내 연습을 종일 지켜본 수철 코치님은 묘하게 얼굴이 달아올라있었다.
나는 달리 뭐.. 고맙다는 말 외에 할 말이 없다.
다가오는 이번 주간이 끝나면 LKL은 설 연휴로 한 주 쉬어가게된다.
그래서 이번 주에 올라가는 쪽이 마음도 편하긴 하다.
“LOS 파크에 가본 적 있어?”
물론 무수히 많다.
하지만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막상 가면 그 분위기에 적응하는 것도 시간이 걸릴 수 있어. 경기 지켜보면
서 많이 보자. 가면 해설진 분들도 있고, 분석 데스크 분들도 있고, 예쁜 아
나운서 누나들도 있어. 인사 시켜줄게. 응?”
코치님은 몇 가지 전달 사항까지 나에게 말해 준 뒤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리
를 떴다.
가만 보면 우리 최수철 코치님은 멘탈 코치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 같다.
나에게 잘 먹히는 위로의 말은 아니지만 마음이 약간 녹는다.
누나 때문이 아니다.
불안할 수도 있는 선수들의 마음을 달래주려고 하는 노력이 묻어나니까 그렇다.
뭐, 어쨌든 내 관심사는 저쪽이 아니다.
콜업과 샌드다운으로 인한 로스터 변경은 1주일에 1회 가능하다.
그리고 경기의 첫 번째 세트 엔트리는 전날 제출해야 한다.
하지만 일단 로스터에 들어있다면 두 번째 세트부터 변경이 가능해서 다음 세
트에 출전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내가 이번 주부터 출전할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다.
이 거북이같은 팀이 그런 식으로 할 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궁금하긴 하다.
FWX 경기는 내가 상대했던 때를 떠올려보자면.. 그저, 의문의 판단을 내리는
약팀이었다.
기억조차 희미하다.
2군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같은 팀이라도 FWX 1군은 그리 좋은 교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전에서는 어떤 팀이려나?
좋은 쪽으로 나를 놀라게 해주면 좋겠는데.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