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화. 우리 정글 권건
최근 솔랭에서의 권건은 꽤 인지도가 있는 선수였다.
가리는 챔피언이 없어 팀원들이 요청하는 정글이 있다면 대체로 해주는 편이
었고, 스왑도 곧잘 해주며 쓸데없는 말을 하거나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없었다.
소위 말하는 기본이 된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게임을 잘한다.
“와우, 우정권!”
“그게 뭔데.”
“우리 정글 권건.”
“권건이 누군데. 아는 사람이야?”
“아니. 온라인으로.”
“아, 온라인 친구?”
“아니. 그냥 가끔 솔랭에서 만난 사이인데.”
“친한 척 무슨 일?”
“내 맴임. 근데 요새 이 형님 느낌 좋음. 만나기만 하면 이겨.”
“아, 형이야?”
“모르는데.”
“미친 놈.”
인천 트릭스터의 원딜러 고수호는 솔랭을 돌리면서 옆 자리에 앉아있는 미드
라이너 오미래와 낄낄거렸다.
“근데 님 그거 암? 나 상대편임.”
“꺼지라고. 어차피 니 이렐할거잖아.”
“어, 이렐은 원딜을 찢어. 닌 또 코구모함? 고구마성애 지린다.”
3주차까지의 성적을 5승 1패로 마무리한 인천 트릭스터는 분위기가 좋았다.
비록 득실차에서 밀려 3위였지만 1, 2위 팀과의 득실차는 불과 1점.
다음 주의 일정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아 연습 시간이 유쾌한 분위기였다.
“아니, 우리 형이 이겨줄거.”
“저 사람 2군 아니야? FWX 달려있는데. 그럼 형 아닌거 아니냐.”
“잘하면 형이라고.”
“어쩌라고.”
두 사람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건간에 게임은 시작됐다.
“어, 코구모 개 말렸죠? 시작하자마자 죽냐?”
“아니 왜 쟤네가 선 3렙이야? 나 진짜 이해가 안돼. 이걸 못잡고 죽어?”
같은 팀의 동갑내기 두 사람은 꽤 호흡이 잘 맞았다.
경기를 할 때도 그랬고, 함께 어울려 지낼 때도 그랬다.
쉴 틈도 없이 이어지는 연습 일정에서 이렇게 놀릴 수 있는 친구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근데, 야, 우리 정글은 왜 안오냐.”
“너네 정글 다 보임.”
“눈맵하지 말라고 했다.”
“눈맵 그게 뭔데. 어떻게 하는건데.”
“이 사람 옆에서 자꾸 눈맵해요!”
“아! 아니라고. 건이형이 찾아주는거라고. 수정초 모르세요?”
게임이 계속됐지만 미드에서 이렐리야를 플레이하던 오미래는 찝찝한 마음에
계속 옆자리를 괴롭혔다.
“니 눈맵 아님?”
“오미래 집착 이제 지겹다 진짜.”
아닐 걸 알고 있지만 이상하게 게임이 안풀린다.
분명히 갱각이 나오는데 상대 미드가 나오질 않는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정글러가 상대 정글을 찾아서 위치를 알려주는 것은 물론 고마운 일이다.
가능하면 좋고, 그걸 실패한다고 해서 갱을 당한 라이너 탓이 없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이건 정말 이상할 정도의 일이다.
“우리 정글 왜 눈뜨고 코 베이냐 자꾸?”
“존나 이상하지? 그것이 우정권이다.”
“진짜 조용히 좀 구다사이.”
그리고 자연스럽게 게임이 터진다.
초반에 바텀에서 라인 솔로킬을 따였던 바텀 듀오는 두어번에 걸친 갱킹으로
회복 후 게임을 터뜨리기 시작했고, 오미래의 이렐은 궁극기 대사를 채 맺지
도 못하고 죽기 바쁘다.
게임은 깔끔하게 서렌으로 끝났다.
지고나서 자리에서 일어난 오미래는 옆자리의 고수호의 마우스를 빼앗았다.
“뭔데, 리플레이 좀 보자.”
“아 무슨 리플레이야. 원딜 캐린데.”
“니는 그냥 안전벨트 메고 있었던 거고. 빨리 나와봐.”
“다시 한 번 니 패배를 감상하고 싶다면야.”
그렇게 돌려본 리플레이는 정글 차이였다.
사실 그것보다 좀 더 디테일한 차이가 있지만, 프로라고 한들 자기 주 라인이
아닌 정글의 초단위 플레이까지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보는 눈만큼은 있다.
지금은 리그의 대세는 받쳐주는 정글러다.
캠프 경험치는 그리 높지 않고 정글러들에게 갱 혹은 오브젝트 관리가 강요된다.
라이너들의 큰 투자 없이 스스로 자생해 오브젝트를 챙길 수 있는 정글러면서
동시에 아군을 상대의 갱으로부터 보호해야한다.
랭크전에서까지 이런 요건이 완전히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리그는
언제나 메타의 핵심을 꿰뚫는 편이다.
그래, 그러니까.
“정글 차이네.”
“정글이 잘했네. 닌 한거 하나도 없음.”
“너 때문에 형님이랑 친추 못함.”
“친추 자리도 없잖아. 솔직히 친추 할 생각도 없으면서 또 공수표 날리지.”
“아니, 진심. 진심 거니 코인 떡상 예정임.”
“그래?”
“킬 양보하는 거 봤어? 이 시대의 진정한 정글러다.”
“숟가락 마인드 지렸다.”
사실 오미래는 리플레이에서 미드에 찍히는 권건의 경고핑을 눈여겨봤다.
얼마나 편할까?
쓸모있는 경고핑 한 번은 기분 나쁜 경고핑 백 번과 비할 바가 아니다.
진짜 의미있는 정보 전달을 하는 걸 보니 꽤 괜찮긴 하다.
“그러니까 너 때문에 말도 못 붙여보고 나왔잖아, 책임져. 거니형 벌써 큐 돌
렸겠지? 바로 탑승했어야 되는건데.”
“야, 지금 FWX 정글이 누구더라?”
“폴리 아니야?”
“아아. 도형이 형?”
“아는 사이야?”
“아니, 모름.”
“친한 척 지렸다.”
“지는.”
“딴 짓 하지 말고 연습 합시다, 우리. 이번엔 내가 우정권 간다.”
“그건 내거야.”
낄낄거린 두 사람은 다시 큐를 돌렸다.
자기도 모르게 같은 큐 정글 라인에 FWX GwonGun이 뜨길 기다리면서.
#
감독님의 말은 놀랍게도 진심이었다.
나는 스크림에 참여하지 못했다.
와, 이 팀. 정말. 놀랍다.
“건아, 솔직히 좀 답답하지?”
오늘도 내 옆에 최수철 코치님이 붙어있다.
이거 혹시 굿캅, 배드캅 전략 뭐 그런건가?
설마 나한테 약속한 주전 약속이 취소된다거나?
제 아무리 나라도 호흡 한 번 안 맞춰본 팀원들과 플레이 해서 멱살 캐리를
할 자신은 없다.
2군이면 또 몰라.
LKL은 그래도 세계 1, 2위를 다투는 리그다.
만약 얼렁뚱땅 넘어가거나 자꾸 미룬다면 어쩔 수 없다.
나를 사 줄 팀을 찾아서..
“약속은 지킬테니까 걱정 마라. 감독님이 좀 보수적이셔서 그렇지 거짓말을
하는 타입은 아니야.”
“...”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내가 표정 연기가 서툴렀나?
[ 거니거니, 지금 표정 되게 자기 증명 못한 청소년같아. ]
그렇군, 릴리는 자기 객관화에 확실히 큰 도움이 된다.
내 몸 속의 알맹이가 뭐든간에 내 외형은 스물 한살의 애송이다.
“내가 여기 있잖아. 봐라. 딱 붙어있는 걸 보면 너를 얼마나 고평가 하고 있
는지 알 수 있지.”
이건 진짜 애송이 취급이고.
나에게 말이 안먹히는 것 같았는지 최수철 코치님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인다.
“일단 돌아오는 수요일에 노티도 될거야. 네 이름이랑, 사진이랑. 1군 선수
로. 어때, 멋있지 않아?”
이것도 영 별로다.
보통의 선수라면 처음으로 1군 선수로 소개되는 순간을 영광이라고 생각할 지
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아니지.
“에이. 미안하다. 너도, 애들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서 그래. 일단 도형이도
열심히 하고 있거든. 경쟁이 그렇다. 계기가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예를 들어..”
코치님이 무슨 말을 하고 있지만 더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적응 ? 계기?
아하.
이 팀은 그런 식이구나.
이해 완료.
수줍어서 나를 못 쓰는 거였구나.
명목이 필요하다, 이거지?
[ 그거 맞아? ]
맞다.
분명 맞다.
봉인된 증명을 꺼낼 때가 왔다.
좀 귀찮은 작업이라서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이렇게 낯을 가리는
팀이라면 직접 보여주는 수 밖에.
[ 앗, 열정맨 됐어! 뭐에 꽂힌거야? 맨날 이러면 좋을텐데! ]
옆에서 신난 릴리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거야 당연하지.
내가 벤치에 앉아있게 된다고?
그럼 차라리 개인 방송을 하고 말지.
내가 아무리 쉬고 싶어도 그건 아니다.
그래도 내가 들어온 팀인데, 가볍게 국내 리그에서 이름정도는 떨쳐야하는거
아니야?
이대로 가다가는 이 팀, 진짜 꼴찌를 해버린다고.
그건 내 역사에 먹칠하는 거다.
#
- 퓨릭스터 트처 : 드디어 걸렸다
- 퓨릭스터 트처 : 우정권!
- 흐켱맨 : ?
연습용으로 랭크를 돌리고 있는데 아는 선수가 있다.
확실히 랭크가 높아진 모양인지, 선수들이 연습하는 시간대에 돌리면 프로 선
수들이 많다.
아까도 트릭스터였는데 이번에도 트릭스터인 모양이다.
- 퓨릭스터 트처 : can swap?
- 퓨릭스터 트처 : all champ
- FWX GwonGun : 릴리야 선픽 하셔도 됩니다
1픽 위치에 걸린 퓨처 선수가 스왑이 가능하냐고 묻는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많아서 영어로 묻는 모양이다.
어쨌든 내가 후픽이니 군말없이 바꿔준다.
나야 연습할만한 걸 정하고 하거나, 충분히 바꿔줄만 하니 크게 신경쓰지 않
는다.
미드가 상대 픽을 보고나서 픽을 한다는 건 유동적으로 픽을 바꿀 것이라는
뜻이니 오히려 반기는 편이다.
- 퓨릭스터 트처 : thx
- 퓨릭스터 트처 : 거니형님 캐리 부탁드립니다^오^
뭐지?
내가 알기로 트릭스터의 퓨처 선수는 숫자로는 나보다 연상이다.
이번 삶에서는 인연이 없었을텐데, 왜 나를 거니라고 부르지?
이유찬 생각나게.
궁금한 마음이 들긴하지만 굳이 묻지는 않는다.
어떻게든 접점이 있거나 우연이겠지.
LOS를 하면서 말을 많이 하는 건 흑역사 생성기가 된다.
정말 오래 게임을 해왔지만 채팅이 어느쪽으로든 도움이 됐던 적은 거의 없다.
“어, 애송이! 나와 적으로 만난 건가?”
이번에 상대로 만난건 우리 팀 원딜러, 곽지운이다.
자기 입으로 자기가 세짤이라고 말하던 그 사람이다.
“야 나 우리 막내 만났어! 형이 ‘힘의 차이’ 보여준다.”
곽지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방 뛰며 연습실에 있는 모두에게 공지했다.
요령은 없지만 막내라느니, 형이라느니 하며 나름 친한 척 해주고 있는 것 같다.
“막내야. 깍지 쟤는 뜨거운 맛을 좀 봐야돼. 지가 잘하는 줄 알아.”
“그르네잉~ 보여죠, 그리고 가습기 물 채워주고잉.”
서포터와 탑에게서 호응이 돌아온다.
깍지는 곽지운을 부르는 일종의 애칭같은 건가보다.
곽지운은 정글 윤도형, 서폿 최은호와 함께 가장 나이가 윗줄이고 주장을 맡
고 있었지만 그리 무게감있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다.
2군에서 일도가 주장을 맡았던 걸 생각하면 이미지가 많이 다르다.
둘 다 원딜러라는 공통점은 있었지만 성격적인 부분에서는 정반대.
하지만 주장이라는 건 다양한 기준으로 선출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팀을 상징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다음이 팀원들을 멘
탈, 오더 플레이, 합숙 생활 등에서 보듬을 수 있는가다.
후자의 요건들은 사실 모든 구성원들이 나누어 짊어질 수 있는 부분이지만 전
자는 아니다.
2군 주장 정일도는 이유찬과 함께 FWX 소속 기간이 가장 길었고, 이유찬보다
는 훨씬 팀원들을 잘 보살피는 섬세한 성격이었다.
처음부터 새로 들어온 팀원들의 비품을 챙기는 모습부터 남달랐었지.
1군 주장 곽지운은 FWX에서만 프로 생활을 해 온 상징성이 있는 선수였고,
음.. 성격적인 부분은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어두침침한 성격은 아닌 것 같다.
주변 반응을 보니 호구같은 스타일인 것 같긴 하지만.
“애송아, 이번 판 지는 사람이 가습기 물 채우기 하자?”
이걸 이니시를 거네.
그럼 나도 호구 코인에 탑승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