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화. 1군
“다들 인사 나눠라. 오늘부터 같이 생활하게 된 권건이다.”
“반갑습니다.”
숨막히게 어색한 분위기다.
2군과 1군은 같은 사옥에 있었지만 여러모로 분리되어 있었다.
1군은 좀 더 윗층을 사용하며 사옥 내에 숙소가 있다.
일과 업무는 구분되어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연습실과 같은 건물은 아니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는 바로 옆 건물이다.
그리고 식사 역시 사옥 내 카페테리아에서 항상 제공되지만 기본적으로 정해
진 식사 시간은 1군이 먼저다.
입시 준비로 바쁘다는 이유로 고등학교 3학년에게 먼저 식사할 권리나 이런
저런 우선권을 주는 것과 비슷하다.
2군은 사실상 헬스장같은 부대시설 정도나 함께 쓰는 정도.
이전까지는 뭐, 막혀있는 것은 아니지만 올라갈 이유가 없었던 사옥의 윗층이다.
더 넓은 연습실과 피드백 룸, 협찬 받은 여러가지 괜찮은 물건들이 비치되어
있는 휴게실이 딸려 있다.
와우.
경기장이 있는 서울 한복판과는 사옥이 좀 떨어져있어서 불편하다고 생각했는
데 이렇게까지 시설이 좋을 줄이야.
2군에서 느끼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반가워, 생각보다 빨리 만나게 됐네.”
“아는 사이야?”
최은호가 먼저 아는 체를 하자 옆에서 묻는다.
“어, 우리 친추되어있어. 아는 사이야. 친구지, 친구. 반갑다. 환영해.”
넉살좋게 최은호가 먼저 다가와서 악수를 건넨다.
“또 뵙겠습니다.”
“건이가 몇 살이더라?”
옆에서 최수철 코치님이 말을 거들었다.
“스물 한살입니다. 많이 배워갈게요. 다들 형님들이시죠?”
“와, 인싸다. 말을 한다.”
“지운아. 너도 충분히 인싸다.”
눈을 동그랗게 뜬 저 선수는 곽지운이다.
오랜 시간 FWX의 선수였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다.
프랜차이즈 스타라는 거겠지.
“제가요? 아닌데요?”
“우리 지운이 몇 살?”
“나? 세 짤.”
“우리 원딜이 좀 이래. 이해 해줘. 스물 세살이나 처먹고도 정신머리가 없어.
나랑 지운이랑 동갑이야. 스물 세살 바텀 듀오.”
최은호는 곽지운의 번역기라도 되는 것 같았다.
어딘가 하나 나사가 부족한 것 같은 원거리 딜러, 그리고 번역기 서포터.
확인.
“반가워여엉. 잘 부탁혀.”
“쟤 또 이상한 사투리 쓴다.”
“나는 스물 둘이어라. 문봉구. 문방구 아니고 문봉구.”
넉살좋게 웃는 사람은 탑 라이너 문봉구.
아재 느낌 물씬 나는 말투를 썼는데 아무 지역 사투리나 다 섞어서 사용한다.
“쟤 완전 서울 사람이야. 사투리에 동경같은 게 있나본데 아무튼 서울 촌놈임.”
“이것이 나의 말투인 것을 으쩐댜. 반갑다.”
그래도 그 컨셉을 빼면 그리 나쁜 인상은 아니다.
내 기억 속에 문봉구는 리그에서 가장 수비적인 탑 라이너였다.
리그에서 꺼냈던 카드 대부분이 사이언, 요른, 우르갓 등이었는데 이 시기의
메타에는 딱 맞는 챔프 폭이었기에 탑의 역할을 크게 무너지지 않고 수행해냈다.
하지만 메타는 금방 변한다.
거기에서도 이 사람이 적응할 지는 미지수다.
왜냐면 메타를 가리지 않고 이 사람은 언제나 나에게는 간식거리에 불과했었
던 선수였으니까.
“반가워요.”
가볍게 주먹 인사를 나누고 돌아보니 두 사람이 남았다.
한 명은 미드, 한 명은 정글이다.
“안녕.”
“나도 안녕.”
생각보다 정글러 윤도형은 침착했다.
어떤 선수들은 대놓고 경계심을 드러내기도 하기 때문에 조금 의외였다.
처음 몇 해를 제외하고 나는 재계약이 아니라 시즌 중에 1군으로 바로 콜업되
곤 했는데, 대부분 큰 기대를 받고 있는 상태로 올라갔기에 기존 정글러들은
내 존재를 매우 불편해하곤 했다.
사실 지금도 날 불편해하는 게 맞다.
여론이 많이 기울어있거든.
여론이 아니더라도 한 게임이면 주전은 내가 될거다.
꼭 사고가 나야만 자리를 뺏을 수 있나?
리그는 성적이 우선이고, 실력이 전부다.
이기적이고 뻔뻔해보여도 별 수 없다.
팬들도 결국 이겨주는 선수를 사랑한다.
이걸 모르는 프로는 없다.
수많은 ‘적당한’ 프로들이 나름의 인기를 얻었다가도, 경기에서는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기억 속에서 잊혀진다.
그런데 이렇게 침착하다는 건, 자신의 실력에 굉장히 자신이 있거나.
“바로 건이가 투입되지는 않을거야. 처음에는 분석과 모니터링 교육에 집중할
거다. 다들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 바란다.”
혹은 팀에게서 어떤 ‘보장’을 받았거나다.
이번엔 후자인 모양이다.
아아, 어쩐지 감독님이 참 상냥한 사람이더라니.
나에게만 그랬을 리가 없지.
‘덕장’이라는 표현이 항상 좋지만은 않다.
이 칭호가 명장과 같은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는 선을 가장한 우유부단함을, 때로는 덕만 베푸는 졸장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아마 저 1군 정글러는 여러번이고 반복해서 멘탈 교육을 받았을거다.
괜찮을거다, 선의의 경쟁이다, 너는 경험이 많으니 미래를 위해 후임을 키운
다고 생각해라, 네가 아플 수도 있지 않냐, 그것도 아니면 이번 논란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등.
내가 감코진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말들이 수도 없이 떠오른다.
감코진도 잘할지 어떨지 모를 나를 올려놓고 바로 1군 정글러를 골방에 처박
을 수는 없는 노릇일테니까 이해는 한다.
이런 성향일 수 있지.
팬들 고구마 백 개 먹은 기분이겠지만.
감독이 이럴 수도 있지.
그래, 나는 어른이다.
근데.. 나.. 어째서.. 짜증이..?
LKL 우승팀 MVP였던 내가.. 이런 최하위권 팀에서..?
여기가.. 이세계?
[ “해 줘.” ]
접수.
#
어영부영 자리를 파하고 각자 연습하러 갈 시간이었다.
새로 지급받은 캐비닛에 내 짐을 채우고 있는데 내 캐비닛을 들여다보는 사람
이 있다.
“어, 안녕하세요.”
“안녕.”
옆에 서 있는 건 아까 별로 말이 없던 미드 라이너다.
작년까지 빅스 소속이었고, 경력은 화려한 편이다.
하지만 그게 성격이 좋다는 뜻은 아니지.
과연 이 사람은 김창민보다 나은 성격일 것인가.
“옷..”
“네?”
“옷, 이게 다야?”
“아직 덜 가져왔어요.”
“뭐 있어.”
“저지랑 아노락이요.”
“음.”
잘 모르겠다.
왜 이런걸 묻는거지?
“피부과 다녀?”
“아뇨.”
“피부 좋네. 그럼 팩 해? 팩 뭐 써.”
“팩 안해요.”
“불공평하네. 기다려봐.”
몇 칸 옆의 자기 캐비닛을 연 김예성은 팩을 몇 개 꺼내서 나에게 건넸다.
불공평하다고 말한 것 치고는 김예성도 피부가 꽤 좋았다.
길가다 들어간 이발소가 아니라 브랜드 미용실에 가서 자른 것 같은 머리, 잘
정리된 손톱, 명품 티셔츠.
미남이라고 말하기는 애매하지만 상당히 깔끔한 스타일이다.
근데 캐비닛이란 건 보통은 꼬불쳐놓은 과자나 잃어버렸던 양말, 쓰레빠 같은
게 나오는 게 아닌가?
대충 안들고 다녀도 되는 모든 것들이 모여있는 곳.
캐비닛에서.. 팩이 나와?
“이거.”
이번에는 드러그스토어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일회용 온열 안대가 나온다.
이 사람 뭐야, 템빨 쩔어.
김예성은 내게 우르르 선물을 안겨줬다.
뭐지, 이 상황?
정작 표정은 여전히 탐탁지 않은데.
“생일 언제야?”
“아, 저는..”
“뭐해, 아. 이제 예성이가 선배라고 챙겨주는거야?”
옆에서 나타난 건 서포터 최은호다.
최은호는 살갑게 웃으며 다가와서 나한테 어깨동무를 했다.
“생일이 뭐가 중요해. 더 늦게 들어 온 사람이 후배지. 예성이가 내리사랑을
잘하네.”
최은호가 끼어들어 말하자 살짝 만족스러운 눈빛을 한 김예성이 어깨를 으쓱
여 인사를 하고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쟤가 좀 무뚝뚝해. 원래 막내였거든. 막내답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너랑 동
갑이라고 잘 지내보려고 하는 것 같다.”
막내라.
가습기 셔틀을 기대했다면 그건 어려울 것 같다.
나는 막내를 하기에는 너무 늙어버렸거든.
새로운 막내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개봉 박두.
#
식스맨이라는 제도를 모든 팀에서 성실하게 활용하지는 않는다.
체급이 높은 5인 체제로 가는 것이 보통이다.
팀원 수가 많지 않은 LOS 프로 리그 특성상 언제 5인의 시너지가 개화할 지
모르기 때문인데, 여기서 식스맨이 등장하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손만 빨면서 개화를 기다리다가 시즌이 끝나기도 한다.
어쨌든 더블 스쿼드를 도입했던 수많은 팀들이 몰락하면서 식스맨은 유명무실
해지고, 어느 순간부터 식스맨은 은퇴 직전의 선수들이 플레잉 코치 역할을
하기위해 차지하는 자리이거나 완전 신인 선수의 자리가 됐다.
그럼에도 식스맨에 대한 팬들의 시선은 좋지 않다.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의 자리를 위협하는 선수처럼 보이기 때문에 식스맨이
출전했다가 성과를 내지 못하면 역풍을 맞기 일쑤다.
뭐, 이것마저도 하위권 팀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이야기긴 하다.
이렇게 해도 지고, 저렇게 해도 진다면 다양한 시도라도 해보라는 거다.
물론 지면 또 팬들이 화내는 건 똑같지만.
근데, 그 자리에 내가 들어가면 다르다.
내가 하면 식스맨이 6인분을 해서 식스맨이다.
[ 음, 음. 그럼 총 몇 명이 게임을 하는거야? ]
그리고 릴리는 산수에 약한 것 같다.
내 입으로 열 명이니 뭐니 하는 유치한 이야기를 하기엔 좀 민망해서 나는 얼
른 서랍을 뒤졌다.
이유찬 코골이 방어용으로 꼈던 귀마개를 두고 갔기 때문이다.
오늘 이후 출입증을 반납하기로 했으니 이게 마지막 방문일거다.
정 안들었던 2군 숙소, 안녕.
나는 1인실이 있는 숙소로 간다.
개꿀, 이제 귀마개 버릴까.
“와, 1군 선수님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숙소에 남아있던게 창민이다.
“안녕.”
저렇게 비꼬는 말투로 어그로 끌 때는 먹이를 주면 안된다.
나는 성격이 나쁜 편은 아니지만 팀 게임도 할 줄 모르는 프로 미달에게 상냥
한 사람은 아니다.
[ 자기 평가가 후한 편이네. ]
왜, 사람이 생각은 할 수 있지.
주변 사람들이 다 허섭스레기로 보인다고 하더라도 겉으로 말만 안하면 되는
거 아냐?
[ 응, 아닌데? ]
악마의 인간 세계에 대한 이해도가 이렇게 낮다.
어쨌든 이제 참아줄 필요가 없다.
너랑 이제 안볼거거든.
“왜 불렀어, 2군 선수?”
“어?”
“왜 불렀냐고.”
당황한 창민이가 어버버거린다.
얘는 전부터 자기가 먼저 해놓고 남이 똑같이하면 깜짝 놀라더라.
“아니, 인사 할 수도 있지. 기만자냐? 말을 그따위로 하고.”
“니가 내 이름 놔두고 먼저 그렇게 불렀잖아.”
“아니, 어.”
어차피 알아서 몰락할 사람이다.
이딴 미드와 한동안은 함께 해야할 신인 정글러에게 심심한 애도를.
[ 이걸 그냥 두고 봐? ]
내 옆에 있던 릴리의 눈썹이 들썩거린다.
‘뭐, 딱히 방법은 없지. 내가 새 미드 구해줄 것도 아니고.’
“아니, 시발, 1군 좀 갔다고 존나 잘난척하네. 그거 내 자린데. 운 좀 좋았다
고.”
[ 와, 이거 보게? ]
LOS의 채팅으로 단련된 내 멘탈은 고작 이정도로는 타격감이 없다.
이 새낀 그냥 과몰입이다.
하지만 릴리한테는 다른가보다.
[ 정신 좀 차리세요. 열정 한 방울 없는 똥멍충이가. 정의구현 마렵네. ]
여기도 좀 과몰입인 것 같은데?
“언젠가 네가..”
내가 말문을 열고 있는데 갑자기 창민이의 머리가 우수수 빠진다.
어, 이거 나 알아.
릴리가 탈모빔으로 정리해준 내 헤어 라인은 아직도 깔끔하다.
영구 제모 아니야, 이거?
“내가 1군에 간 이유를 알 수 있다면 그땐 너도 쓸만한 미드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창민이가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우물거리고 있지만 대꾸를 하지 못
했다.
여기저기 듬성듬성 빠진 창민이의 머리숱이 어깨에 소복소복 쌓인다.
저거 어쩌냐?
안그래도 비호감 외모가 실시간으로 깎여 나간다.
“그 전에 아카데미 선수들한테 밀려나지 않는다면.”
더 시간을 소모할 이유가 없어진 나는 그냥 돌아서서 나갔다.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긴 하는데 더 들어줄 이유도 없다.
김창민을 놔뒀던건 팀 플레이를 위해서지 좋아서가 아니니까.
근데 기껏 주어진 혜택이 시스템 창도, 절대 회피 능력도 아닌 탈모빔이라니.
나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