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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30화 (31/326)

030화. 죽음은 바람과 같지

“뭔데.”

빅스 감독은 혼란스러웠다.

상대가 뽑은 픽은 신드리, 그윈, 야쓰오다.

신드리는 아마 미드일거다.

원딜 포지션으로 가기도 하지만, FWX 원딜러가 비원딜을 들고나온 적은 없다.

그럼 그윈은 어디일까?

탑 아니면 정글일거다.

요즘 공격적인 픽을 주로 하는 FWX 탑에게 쥐여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

었다.

그런데 야쓰오는 대체 뭐지?

보통은 미드, 아주 드물게 탑이나 원딜 포지션을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애당초 리그에서 거의 볼 일이 없는 챔피언이다.

한 개 정도라면 포지션을 확정할 수 있었을 텐데 모두 다 돌리기가 가능한 픽

들이라 불안하다.

거기다 FWX의 미드와 원딜은 챔피언 폭이 그리 넓지 않을텐데.

도대체 야쓰오를 어디다 쓰려고?

응원?

“원딜이 야쓰오? 아니면 신드리?”

“그윈을 정글로 돌리고 야쓰오를 탑으로 가져가는거 아닐까요?”

“탑? 그럼 아무거나 골라도 찢길 것 같은데. 얘들아, 저쪽 원딜 솔랭에서 뭐

하더라?”

“다들 비원딜 찍먹은 하는데.. 보통은 평범한 원딜 하죠..”

“그럼 야쓰오 정글인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게. 뭐지?”

빅스는 최대한 밴을 천천히 늦추며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지만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급하게 이런 저런 의견을 물어봤지만 이미 밴픽은 말렸다.

저런 이상한 걸 꺼내들다니.

이건 양날의 검이다.

잘 나오지 않는 픽들은 이유가 있는 법이다.

제대로된 데이터도 없는데 숙련도가 높을 리가 없다.

그런데 불안하다.

“최대한 우리 플레이에 집중하자. 우리 조합도 나쁠 거 없어.”

상대의 그 다음 픽은 그라가즈였다.

“뭐야, 시벌.”

“탑 그라, 정글 그윈, 미드 야쓰오, 바텀 신드리 아닐까요?”

“쟤네 미드 AP밖에 못하잖아요.”

“AD를 야쓰오한테 다 맡긴다고? 아닐걸. 셰나 밴 해 일단.”

이런 밴픽은 솔직히 스트레스받는다.

분명히 불안정한 밴픽인데, 감코진의 전쟁터가 이 곳이기 때문에 불편한 감정

이 드는 것이다.

근본없는 조합은 평범한 조합에게 반드시 얻어맞는다.

시간만 흐르면 반드시 이긴다.

하지만 왠지 밴픽은 지고 들어가는 기분이다.

양태진, 이 망할 놈!

왜 하필 우리 경기에서 이러는거야.

“마지막 픽 뭘까?”

“미드 트타?”

“미드는 AP밖에 못한다며. 모르겠다. 일단 까봐야 알겠지. 얘들아, 각자 플레

이에 집중하자.”

어차피 거의 손을 떠나버린 밴픽이다.

빅스 감독은 그저 팀원들에게 게임 자체에 힘을 쏟을 것을 지시하며 기다렸다.

뭘 픽 할지 고민된다는 것 처럼 이것저것 다양한 챔피언의 초상화를 돌린다.

그리고 결국 FWX가 고른 마지막 픽은 아크산이다.

“아.. 짜증난다 진짜.”

‘무난한’ 픽을 선택했기에 빅스의 탑은 아트렉스다.

얻어맞을 그림이 보인다.

그럼 뭐냐.

“아크산, 그윈, 신드리, 야쓰오, 그라.”

“그럼 우리는 친 짜오로 마무리해. 정글 주도권 꽉 잡고. 바텀 부셔버려.”

키플레이어인 상대 정글러의 선택을 보고 고르기 위해 끝까지 정글 픽을 뒤로

미뤘지만 결국 큰 이득을 가져오지 못했다.

그래, 그래도 아마 이렇게 하면 될 거다.

밴픽을 하고 나가면서 FWX의 양태진 감독과 마주한 빅스 감독은 평소보다 유

독 주먹을 꽉 쥐고 인사를 나눴다.

하지만 양태진 감독은 아무래도 좋다는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

조합이 불안정하면 어떻게 플레이해야할까?

솔랭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닷지다.

하지만 경기에서는 스노우볼.

상대의 의표를 찔러서 경기를 흔들어버리면 된다.

우리 조합은 정말 개인기 조합이다.

어떤 의미로든 각자 한 시대를 풍미한 챔피언들.

잘 풀리면 한없이 재미있게 게임을 하겠지만, 잘 안풀리면 사지가 분해되기

딱 좋다.

LOS판에는 그런 클리셰가 있다.

난이도 있는 조합, 증명해야 하는 조합이라고 불리는 조합을 선택한다는 건

무슨 뜻일까?

더럽게 어려운데 한 번이라도 죽거나 끊기면 게임이 터지는 불균형한 조합이

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런 말도 있다.

사고가 나지만 않으면, 시간만 벌면 좋은 조합이라는 말.

그건 무조건 사고가 난다는 뜻이다.

“권건 선수의 그윈이 매복을 하고 있는데 친 짜오는 아무것도 모르고 레드를

먹고 있어요!”

“이걸 설마 뺏기나요? 그러면 완전히 망하고 시작하게되는데.. “

경기 시작 후, 불과 1분 50초.

“아! 짜오가 레드를 빼앗기고 맙니다!”

“뒤를 추적하는 그윈, 설마, 여기서!”

- 선취점!

“퍼블이! 넘어갑니다! 정글링이 완전히 망했어요! 과감한 결단, 권건 이 선수

정말 대단해요! 담력이 보통이 아닙니다!”

“건이형 나이스으으으으!”

일도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엄청나게 커졌다.

“하.. 속이 뻥! 건이형! 기억하고 있었던거냐구!”

뭘 기억하고있다는거지?

생각이 날 듯 말 듯.

[ 쟤, 첫 날 제일 먼저 죽었었어. 손 벌벌 떨다가. ]

아하.

기억났다.

역시 우리 릴리.

[ 후후후. 나는 기억력이 좋지. 칭찬해줘. ]

일도가 그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구나.

꽤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우리 왕자님.

하긴, 생각해보면 나도 어이없게 죽었을 때는 기억이 오래 가는 편이긴 했다.

생각해보니 두번째 삶 쯤에서 빅스한테 된통 깨진 적이 있는 것 같기도..

이건 못 참지.

다 죽인다.

“죽음은.. 바람과 같지.”

아씨, 뭐야.

이런 오그라드는 대사를 치려던 건 아니었는데?

“형들 조심해. 일도 형이 미쳤어.”

“소오올!”

얌전하던 사람이 운전대를 잡으면 성격이 변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자동차라는 물건이 스피드도 그렇고 힘도 본래의 신체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

인데, 이 안에 고립되어있으면 일종의 우월감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원래 다소간의 감정 과잉이 생긴다거나 대인 관계에서 쌓인 분노를 표

출하기 쉬워진다는 거지.

“더 이상 도망치지 않는다. 바람을 맞이하라!”

그래, 그게.. 바로 야쓰오의 탑승감이다.

원거리 딜러라는 나약한 인간의 몸뚱아리를 벗어던진 일도는 한 줄기 바람이

되어 자유를 즐긴다.

조용하고, 진지하고, 유순하고, 침착한 우리 원딜러 어디갔어?

지금 우리 원딜러는 검 하나만 믿고 먼 길을 나선 한 명의 검귀가 되었다.

생각해보니 이름도 정일도다.

뭐야, 이거.

처음부터 야쓰오의 운명을 타고난 남자?

개소름.

“일도형, 입으로 딜 하는 중?”

지호의 만류 아닌 만류도 먹히지 않는다.

내가 추천한 비원딜은 저게 아니었는데..

어쩐지 야쓰오를 하고싶다고 하더라니, 숨겨진 부계정 같은게 있었나.. 야쓰

오만 하는..

“후후.. 고독을.. 마신다..”

“형 포션 다 떨어졌거든? 집이나 좀 다녀와.”

아무튼 일도가 광기에 물든 것과는 별개로 라인전은 쉽지 않았다.

상대가 정상적인 원딜 서폿 조합이라면 어떤 조합을 만나도 그럴 거다.

그래도 분위기는 제법 유쾌했다.

내가 레드를 뺏어오고 퍼블을 따면서 상대 정글은 최소한 10분간은 아무 쓸모

가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나 하기에 따라 이 시간은 더 늘어날 수도 있다.

“미드 딜갱 조심. 짜오 경험치 받아먹으러 미드 쪽에 서있을 수 있다.”

“오케이.”

나머지는 순탄하다.

가장 먼저 가져온 신드리는 창민이가 어느정도 자신있어하는 픽이었고.

“탑 죽여놓는 중.”

큰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유리한 상성인 아크산 대 아트의 탑 구도는 당연하다.

이 말이 무엇인가하면.

“차-니! 거-니! 차니거니 듀오가 탑에서 또 한번 점수를 올립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역킬각이었어요, 옵저버님은 시야의 마술사인가요? 우리까

지 속였어요! 부쉬 속에 권건 선수가 숨어있었습니다!”

“그래서 녹턴 옵저버라고 불리죠. 세상에. 저도 이번만큼은 빅스가 득점할거

라고 생각했는데! 옵저버에게 감쪽같이 당했어요, 나쁜 사람!”

“벌써 정글이 3레벨 차이가 납니다. 완전히 망해버렸는데요!”

상대가 상상했던, ‘시간을 벌자’는 전략은 이미 개박살이 났다는 뜻이다.

“술통! 배치기!”

“우리에게 돈!”

“형, 야쓰오 궁극기 대사 그거 아니야.”

우리는 경기를 난전 구도로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럼 스킬을 쓸 때마다 입으로 기술명을 외치는 바텀 듀오에게도 잡아먹히는

수밖에 없다.

안에서 볼 때 정상이 아닌 이번 게임은 지극히 정상적으로 흘러갔다.

“내가 엉덩이 흔들어볼게! 아, 잠깐, 잠깐 형들 너무 화가 나셨는데?”

낚시를 하러갔던 창민이가 아쉽게 죽기도 하고,

“등의 상처는 검사의 수치다! 하세기!”

마검에 잡아 먹힌 일도가 끊기기도 했지만 기세는 전혀 사그라들지 않는다.

“낭만닥터 아크산!”

“살려줘요 아크산!”

“나믿너믿? 준비하시고, 부활!”

잘 큰 닥터가 그면상과 함께 돌아다니며 한대씩 쥐어박으면 순식간에 무한 환

생 시스템이 갖춰진다.

“나믿너믿! 나믿유믿!”

“하와와 FWX쟝, 이유찬 보유 구단인 것이예요.”

생각보다 킬 스코어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아마 관전 보드에 보이는 골드 차이는 7,000골 이상일 것이다.

오늘만큼은 거기서 왜 죽냐는 말이 나올만한 데스들이 희생이라는 단어로 바

뀌었다.

“이건 변수인데?”

“아니? 그냥 변인데?”

적들이 어쩔수 없이 킬 교환을 통해 현상금이라도 얻어가기 위해 들어와도 우

리는 당황하지 않는다.

이제 모두들 기세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 적을 우습게 보고 한명씩 매드무비를 찍으려고 하는 것만 아니라면 질

일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래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보험이 몇 개나 있으니까.

“얘들아, 이제 끝내자.”

내가 가벼운 말투로 말을 꺼내자 방금 전까지 들떠있던 팀 보이스가 약간 잔

잔해진다.

내가 뭐 실수했나?

“형, 나 계속 이렇게 게임하고싶다.”

그래도 다들 손을 계속 움직인다.

“이따위 조합으로도 합이라는걸 맞출 수가 있구나. LOS.. 재밌다.”

다들 한 마디씩 입을 연다.

“진짜 재밌었어. 리그 경기도 재밌을 수가 있구나.”

한타가 시작됐지만, 다들 전황에 관한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더가 나오거나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누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다들

알고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것 같은.

어떤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FWX가! 그윈의 쿼드라 킬과 함께 에이스를 띄웁니다!”

멀리서 환호성이 들리는 것 같다.

“다음에도 우리 또 같이 할 수 있을까?”

누군가 물었다.

아무도 그 말에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은퇴하고 나서라도, 이렇게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자신이 1군까지 갈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예감한 누군가도 작은 목소리로 말

한다.

“거니거니.”

유찬이가 나를 불렀다.

“왜.”

“나를 잊지 말고 있어라. 아이디를 거니거니로 바꾸도록해.”

“이유찬.”

내가 돌아본 유찬이는 언제나처럼 세상에서 LOS가 제일 좋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너는 제어 와드나 좀 사라.”

낭만이 가득했던 2군에서의 마지막 게임은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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