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화. 쇼 앤 프루브
나는 이번 주부터 2군 스크림에 참여하지 않는다.
내 자리에는 나를 대신해서 새로 들어온 정글러인 한울이가 들어갔다.
스크림은 경기가 없는 날에는 이른 오후와 늦은 오후에 잡혀있는데 그 시간에
사옥 다른 층에 있는 분석실로 가기로 했다.
이것저것 1군 스타일을 배우고, 1군 소속의 분석관이나 코칭 스태프들과 상호
교류하는 적응기간이라고 한다.
1군 정글러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니 이정도 시간이면 되려 서두른
것같다.
생각보다 절차가 조심스럽고 명확해서 놀랐다.
이런 걸 안챙기고 대강대강 꼬라박는 팀들도 많거든.
맛집으로만 알려졌던 FWX, 당신들은 대체..
여길 탐방하고있자니 파워 블로거가 된 것 같다.
성적이 나쁘고 구단은 친절해요.
“반가워요. 나는 최수철. 브라보 코치님이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말 편하게 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래! 야, 반갑다. 나 너 엄청 보고싶었어.”
아, 또야?
내가 미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보자 최수철 코치님이 박장대소했다.
“솔직히 감독님이 나 버리고 직관 갔을 때 엄청 배신감 느꼈다니까. 너 진짜
잘하더라.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평가도 좋아. 지금 랭크 점수는 몇 점이지?
아, 벌써 100위권이야? 하. 기분 좋다.”
최코치님은 꽤 수다스러운 스타일인 것 같았다.
나이도 어려보인다.
아마 이십대 후반?
“내가 너 좀 밀었어. 기억해야해. 아, 물론 이런 일 때문에 우리팀 도형이를
밀어내고 싶었다는 뜻은 아닌데. 어쨌든 코치가 되면 욕심이 많아지더라고? S
급 카드는 다 모으고 싶고 그러잖아. 난 지금 다이아야. 놀리면 안된다. 은퇴
하고 나서는 손이 내 맘대로 안움직이거든. 지금 주포는 탑이고 주챔은 마오
차이. 건이 넌 뭘 좋아해?”
코치님은 친구처럼 편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는지 많은 이야기를 꺼냈다.
박진현 감독님과는 새삼 다른 분위기다.
왜 이 사람을 나에게 가장 먼저 붙였는지도 알 것 같다.
“그러니까 편하게 지내자. 일단은 네 스크림 데이터랑 올해 데이터는 다 내려
받았어. 이쪽으로 와서 앉아.”
탑 마오 유저라니 왠지 친근감든다.
시작이 나쁘지 않은걸.
#
“거-니, 차-니! 후욱, 후욱. 지구 최강의 상체 듀오!”
그래도 3주차 마무리까지 경기를 함께 한다.
월요일에 호넷을 이기면서 남은 경기는 총 세번.
상대는 수원 해머스, 제주 F.L.E, 서울 빅스다.
우리는 이미 박살낸 적이 있던 세 팀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실 우리에게 패배를 안겨준 대구 유니버스를 뺀 모든 팀이 그랬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에게 긴장하기보다는 서로에게 집중했다.
“형, 내가 올라갈 때까지 다른 팀 가기만해봐. 내 자리 만들어놔야해.”
지호는 나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내가 서포터 자리를 어떻게 만드냐?
지호는 종종 채팅으로 말을 걸어오는 1군 서포터 최은호와 말을 할 때마다 어
떻게 알고 왔는지 무서운 눈으로 바라본다.
꼭 다른 고양이를 만나고 온 집사를 보는 눈빛이다.
“건이형..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형과 함께한 시간을 절대 잊지 못할거
야. 나에겐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
사실 저런 지호보다 더 무서운건 진지한 일도다.
진심인거야, 농담인거야?
얘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키가 커진 것 같아서 뭐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가서, 그, 감독님한테 내 말도 좀 해주라. 형 잘 하는 사람이니까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심지어 창민이까지 이런다.
나는 뭐, 묵묵하게 들으면서 척추 측만증을 예방하는 운동 자세를 취했다.
짬날 때 마다 이런 운동을 해주면 좋다.
프로게이머에게 상체는 생명이니까.
“날 국회로 보낼거라는 팬들의 응원이 이어지고 있어.”
오늘의 경기는 수원 해머스와의 경기였다.
양태진 감독님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팀원들을 따뜻하게 챙겼다.
“감독님, 애들한테는 그런 거 찾아보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근데 어쩌나? 자꾸 보이는 걸. 내가 정글러를 잘 키웠대. 푸흡.”
“감독.. 아, 진짜. 태진이 형. 형이 키우긴 뭘 키워요. 건이가 혼자 컸지. 푸
흡..”
싱글벙글 두 사람은 기분이 무척 좋아보였다.
대기실에서도 그랬고, 밴픽 때도 그랬다.
“뭐 할거야? 살릴 거 말해줘.”
“우리 나라 경제 좀 살려주세요.”
“유찬이 개소리하지 말고.”
게임 자체에 큰 부담감이 없었다.
우리는 1등이었고, 밴픽은 한없이 유리했다.
수원 해머스에게는 경기에서도 스크림에서도 져본 적이 없다.
“아! 수원 해머스, 밀려들어오는 미니언들을 막기가 힘듭니다!”
“막아줘야하는데, 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요. 모두 숨을 죽입니다. 이러면
안돼요, 해머스! 망치같은 기세를 보여줘야합니다! 안돼요, 막아야합니다!”
“끝까지 항전해보려고 하지만,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국 해머스가 넥서스를 내주고 맙니다. GG!”
물론.
정말로 해머스는 우리의 상대가 아니었고.
“제주 F.L.E는 지난 경기에서 FWX에게 아쉬운 패배를 겪었죠!”
“하지만 절대 이렇게 쓰러질 팀이 아닙니다. F.L.E는 지난 시즌 우승 팀이에
요. 지금도 단독 3위까지 따라잡았습니다! 오늘, 다시 한 번 보여줄 수도 있
겠죠. 우리는 아직 건재하다! 하고 말입니다.”
“다만 선수들이 경계해야할 점은 지난 FWX전에서 거의 퍼펙트게임을 당할 뻔
했다는 사실인데요. 그때 권건 선수의 킨드리드가 궁극기 하나로 한타를 압도
적으로 뒤엎으면서 안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두 팀 모두 아주 강력한 팀이니만큼 오늘 경기를 기대해주신 팬분들
이 아주 많았을 것 같은데요.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F.L.E 역시 강력한 팀이었지만 우리 팀원에게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부
족했다.
“일도야.”
“예, 코치님.”
“져도 된다.”
“예?”
“바텀 라인전에서는 져도 돼. 대신 5킬 먹고 져라. 그럼 상체가 알아서 해줄
테니까.”
“베리 굿. 제가 10킬정도만 먹고 라인전 지도록 하겠습니다.”
일도는 만족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웃기지만 내가 떠난다는 사실이 확정되고 나서야 팀원들이 완전히 나를
신뢰해주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 전에도 그랬지만, 뭐랄까.
지금은 나한테 잘보이려고까지 하는 느낌?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어린 애들이라서 그런가.
그것도 아니면 여기가 FWX라서 더 그런 건가.
프로게이머는 정말 힘든 직업이다.
그나마 LOS는 운이 좋다.
게임이 성장 곡선을 타면서 리그가 함께 성장했다.
하지만 수많은 게임 리그들은 존속되지 못하고 사라진다.
하루아침에 자신의 운명을 걸었던 리그가 사라져 실향민 신세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안정적인 리그 내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쉽지 않다.
수많은 지망생들이 있고, 아카데미에서도 걸러진다.
그 이후에도 2군을 거쳐 1군까지 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속에서도 지옥같은 일정이 이어진다.
이렇게 어렵게 도착한 곳에서조차 수명은 짧다.
아이돌을 해 본 적은 없지만 어쩌면 이건 아이돌보다 힘든 길이 아닐까.
그래서 이 극단적인 피라미드 속에서 살아남은 선수들은 더욱 강한 열망을 가
진다.
어쩌면 이 집중력은 지금이 가장 자신들의 모습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
는 걸 알고 있는, 살아남아 위로 가고 싶은 사람들의 진심일거라고 생각한다.
나처럼 좋은 선수가 있었다는 사실은 팀에게도 꽤 도움이 된다.
이미 승리의 맛을 본 선수들은 결코 그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을거다.
그때를 다시 상상하고 싶지는 않을테니까.
“F.L.E! 기분이 나빠요, 권건 선수의 강타가 다시 한 번 드래곤을 빼앗았습니
다!”
“흥분하면 안됩니다. 어떻게 하면 이 게임을 뒤집을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상황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어요! 지금처럼 감정적인 플레이는 아무 도움이 되
지 않습니다!”
“지금 선수들이 약간 힘들어하는 게 보이는 것 같은데요. 너무 성급합니다.
어떻게든 침착하게 플레이 해야하죠? 계속해서 손해가 누적되고 있어요!”
“아, F.L.E! 왜 바위게를 욕심낸걸까요? 지금 바위게를 굳이 먹어야 할 이유
가 전혀 없는데!”
F.L.E는 지나치게 나를 의식했는지 플레이 자체가 붕괴됐다.
이런 경기는 놀라지만 않으면 쉽게 가져올 수 있다.
조심성이 많은 편인 일도는 상대의 적극적인 플레이에 혼란스러워했지만 내가
밝혀낸 시야에 안정감을 되찾았다.
그래, 그러니까.
“GG! FWX가 7연승을 달성합니다!”
“정말 멋진 경기력이었어요. 오브젝트를 단 한번도 내주지 않고 경기를 마무
리합니다!”
여태까지의 경기 중 가장 쉽게 이겼다는 이야기다.
나는 경기 일정이 없는 시간에는 윗층으로 출근해 최수철 코치님이나 박진현
감독님, 그리고 새로 소개 받은 단장님, 김한빛 코치님 등과 이런저런 준비
작업들을 했다.
첫 스크림 참여 일정은 언제라던가 하는 것들.
1군의 팀원들과는 이번주 토요일 경기가 끝난 뒤, 일요일에 인사를 나누기로
했다.
그래서 2군의 금요일 경기가 끝나고나면 토요일은 하루 휴일이었다.
시즌 중에 휴가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나를 특별히 배려해주신 모양이다.
[ 뭐 할거야? ]
그건.. 모르겠지만 아무튼 휴일은 좋다.
어쨌든 지금은 당장 마지막 경기가 남아있다.
길다면 긴 기간동안 합숙했던 친구들과는 나름 조금 정이 들어서, 완벽하게
경기를 마무리 지을 예정이었다.
#
LOS는 구장이 바뀌지는 않지만 수많은 챔피언들이 있다.
그래서 매번 다른 게임이 된다.
이스포츠만의 매력이다.
“오늘. 쇼 앤 프루브합니다. 슈슉.슈슉.슉.슉 이유찬 출동.”
이전에 탑 배인으로 재미를 본 뒤부터 양태진 감독은 이유찬에게 조금 더 적
극적인 픽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FL에서는 어느정도의 쇼맨십도 중요하다.
정말 선을 넘는 픽이 아니라면, 관객들이 열광할만한 픽으로 이 선수의 가능
성을 전시하는거다.
그 중에서 서울 빅스는 FWX의 개막전을 함께한 팀이었다.
정일도가 이번 메타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해 벌벌 떨며 긴장했던 것이 엊그제
처럼 느껴져 팀원들은 모두 가볍게 웃었다.
스프링, 서머 두 시즌으로 이루어진 리그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도 있다.
어쩌면 팬들은 1년 중 2/3가량을 리그와 함께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선수 개개인에게는 하루하루, 한 경기 한 경기가 프로게이머로서의 인
생에 주어진 몇 안되는 기회 중 하나를 소모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일도는 그저 웃으며 오늘만큼은 다를거라고 말하며 이유찬의 자신감
을 흉내내려고 애썼다.
“나야말로, 쇼, 쇼 앤 프, 프루브.”
FWX는 재미있는 픽을 짜왔다.
견제를 받을 가능성은 없었다.
빅스는 상상하지도 못하고 있었으니까.
“낭만 조합 가나요?”
선수들은 오늘이 권건과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싶지는 않았지만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는 다들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준비한 조합이기도 했다.
리그나 메타를 신경쓰지 않고 선수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상상한, 꼭 한번 쯤
해보고 싶은 픽.
그리고 각자 재밌게 할 것 같은 픽.
FWX는 자기 주관대로 픽을 시작했다.
먼저, 신드리.
그 다음으로는 그윈.
그리고 그 다음은 야쓰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