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28화 (29/326)

028화. 자만추

정말 무지성 다이브였다.

“너 죽을텐데.”

CS도, 솔로킬도 든든하게 챙겨먹은 우리 탑 배인은 과감한 다이브 끝에 상대

비예고를 잡고 킬을 헌납했다.

마무리를 할 뻔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실패했다.

그래도 상당히 멋진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단 스킬은 다 피했으니까.

하지만 그럼 뭐해?

포탑은 피할 수 없다.

“뭐야, 형. 죽었잖아. 다이브 왜 했어. 완전 에바.”

최고는 아니었지만 유찬이의 개인기 덕분에 차선정도는 됐다.

기세를 완전히 뺏었다.

상황은 충분히 유리했기에 팀원들도 괜찮은 분위기에서 유찬이를 갈궜다.

탑과 정글이 죽었지만 적은 서폿을 제외한 전원이 실점했다.

우리가 당장 턴을 써야할 오브젝트는 없었기 때문에 무난하게 억제기까지 철

거 후 정비했다.

“죽을 줄 알았음. 하지만 쟤가 우리 정글 죽임. 그대로 둘 수 없다.”

“오. 난 귀환 빨리 하려고 죽은 줄.”

“복수 인정.”

“킬 먹은 유마는 멀쩡히 살아서 도망갔는데. 죽을 줄 알아놓고 왜 들어가? 다

잡지도 못할걸.”

내가 피식 웃자 이유찬은 약간 기세가 살았는지 덧붙였다.

“그걸 알면서도 싸우는게 탑이다.”

그건 맞지.

#

“다리오스가 정통으로 카운터를 맞아버렸네요.”

“네, 다리오스 장인으로 예전부터 유명했던 선수였죠. 아주 오랜만에 꺼내들

었는데 차니 선수에게 그대로 잡아먹혀버렸어요.”

“사실 처음부터 상당히 어려웠던 조합이 아닙니까? 아마 이렇게까지 FWX에서

극약 처방을 할 줄 몰랐겠지만, 호넷 입장에서는 탑 다리가 적당히 성장하면

바텀에서 키워낸 유마를 붙여서 이득을 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랴이즈로 기

동성을 더하고 싶었을 것 같구요.”

“생각대로 됐으면 제법 무서운 조합이 됐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 처음에 저희가 했던 이야기가 있죠.”

“네, 사고없이 잘 크면 좋은 조합일 거란 말이었죠.”

“사실 정말 어려운 말이죠. 사고 없이 잘 커야한다는 건 주도권을 상대에게

넘긴 것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일반적인 탑을 상대해도 어려운 조

건인데 차니 선수가 배인을 가져가면서 이게 정말 어려워져버렸습니다.”

“그러면 지금 호넷이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벌써 억제기가 두개나 나

간 상황이긴 하지만, 여긴 FL이 아닙니까? 화장실만 다녀와도 결과가 뒤집히

곤 하잖아요. 펜타킬을 먹고도 지고, 장로를 먹고도 아차 하는 사이 게임이

넘어가는 곳! 그곳이 우리 퓨처스 리그 아닙니까!”

캐스터의 말에 해설가는 잠시 대답이 어려운 듯 머뭇거렸다.

퓨처스 리그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리그이니만큼 캐스터가 표현한 대로 역

전극이 심심치않게 펼쳐지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주로 이기고 있던 팀의 미숙한 선택에 의해 나오는 결과였고,

올 시즌의 FWX 퓨처스는 항상 최선의 선택을 하는 팀이었다.

“아! 물론 그렇죠. 그게 또 퓨처스 리그의 매력이겠죠? 요즘의 FWX의 폼으로

봐서는 정말 어려운 이야기겠지만.. 음.”

잠시 생각한 해설가가 말을 이었다.

“일단 민초 선수의 레나타가 혼자 시야를 잡기 위해 고립됐을 때 먼저 끊고,

뒤늦게 합류하는 상대들을 진이 지원사격 하면서 유마를 태운 다리오스가 랴

이즈 궁을 타고 적 딜러진 가운데에 떨어져서 헤집어 놓는 사이 비예고가 성

장이 잘 된 챔프들로 하나하나 갈아타면..”

“랑팡 해설님, 그렇게되면 호넷이 이길 수 있는게 맞습니까? 지금 ‘판타지 소

설을 쓰는거냐’, ‘이계무쌍’ 같은 채팅들이 올라오고 있는데요.”

캐스터도 자신의 말이 상상일 뿐이라는 것을 아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FWX에 초시계나 수호천사가 없다면 가능할 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꼼짝

도 못하고 서서 죽거나요. 하지만 CC기의 부재가 크죠. 그만큼 호넷의 상황이

어려운데요.”

“반대로 FWX는 정말 분위기가 좋습니다. 실수 없이 오브젝트를 챙겨나가고 있

어요. 아, 그래도 호넷 선수들이 결심을 한 것 같습니다. 용 4스택을 순순히

내주다가보면 게임까지 넘겨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렇죠, 그렇죠. 이것도 주고, 저것도 주고! 그러다보면 세간 살림 다 빠집

니다! 안돼요! 이번 한타를 노려보려는 호넷, 드디어 다리오스 드랍 가나요?”

“아, 하지만 자리를 잡기가 너무 어려워요! 결국 랴이즈의 택시를 타고 댜리

오스가 적진으로 드랍되지만..!”

“유마! 유마가 못탔어요! 고양이가 미처 탑승하지 못했는데 버스가 출발해버

렸습니다! 실패, 이건 실패에요!”

“권건 선수가 여유롭게 용을 마무리하고! 순식간에 호넷 선수들이 정리됩니

다! 이대로 끝날 것 같은데요?”

“끝날, 네, 끝날 것 같습니다. 마지막에 또다시 배인이 앞으로 굴러 우물 레

이저에 처형되면서, GG!”

“FWX가 승리를 거머쥐면서 첫번째 라운드를 8승 1패로 마감합니다!”

선수들이 하나둘 일어나 하이파이브를 나눈다.

그래프를 살피며 설명을 이어나가고 있는 해설진을 뒤로하고 FWX는 관객석을

향해 인사했다.

월요일이지만 꽤 많은 관객들이 모여서 응원 피켓을 흔들고 있었다.

탑 배인이 활약해버렸으니 오늘은 랭크전을 조심하라는 둥의 소리가 들렸다.

기분좋게 웃어보인 선수들은 대기실로 돌아갔다.

#

“권건 선수!”

퓨처스 리그의 쉬는 시간은 매우 짧다.

LKL과 달리 분석 데스크가 따로 진행되지 않기 때문인데, 정말 화장실을 간신

히 다녀올 수 있을 정도의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대기실로 찾아온 것은 해설가다.

“아, 랑팡님.”

하도 나를 다급하게 불러대서 일단 남동현 해설을 향해 다가가 가벼운 악수를

나눴다.

“많이 좋아하고 있습니다.”

“예?”

“아니, 그런게 아니라 팬입니다.”

상당히 이상한 뉘앙스여서 잠깐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긴 했지만 워낙 시간이

촉박할테니까, 뭐.

“소식 들었습니다. 1군으로 가신다구요.”

“...”

나는 성급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남동현 해설은 아차 싶은 표정을 짓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희도 다 커넥션이 있거든요. 확실하지 않은 정보였다면 사과드립니다. 그

런데 우리 모두 권건 선수가 가실 줄 알고 있었어요. 저 가끔이지만 1군 경기

도 해설해요. 또 만날 수 있겠죠? 제가 해설하는 날 나와주시면 좋을텐데. 휴

대폰 번호 알려주시겠어요? 빨리요.”

일방적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내뱉고는 불쑥 휴대폰을 내민 남동현 해설

이 손동작으로 나를 재촉했다.

사실 남동현은 항상 잘 알고 지냈던 형이다.

이제는 형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시간이 지났지만 그냥 관성에 따라 형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따지면 부모님도 부모님이라고 부르기 민망할걸?

어쨌든 중요한 건 이 형도 프로 시절을 정글러로 보냈고, 꽤 말이 잘 통한다

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언제나 내 팬이었다는 점.

동현이형은 내가 국내 리그에서 우승했을 때, 자기도 같이 울었다.

그래서 편파 해설이라는 말까지 들었던 사람이다.

아직도 이유는 모르겠다.

내가 지난 삶에서 월드 챔피언십에서 우승에 실패했던 날.

그날도 울었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이 형이 중계를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집에서라도 펑펑 울었을 사람이다.

어쩌면 나만큼, 아니면 눈물조차 나오지 않던 나보다도 더 슬퍼했을 것이다.

지금은 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꽤 괜찮은 사람이었기에 나는 군말없이

번호를 찍어줬다.

“고마워요. 근데 나 말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이렇게 번호 쉽게 주면 안돼요.

알겠죠? 연락할게요?”

동현이형은 돌연 윙크를 날리더니 폰을 흔들어보인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대기실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POM 인터뷰 준비해주세요, 차니 선수!”

어떻게 왔나 했더니 스태프 대신 온 모양이다.

손인사를 하고 허겁지겁 달려나가는 모습을 보니 시간이 촉박하긴 했나보다.

유찬이는 동현이형이 뛰어나가는 걸 보더니 스태프인 줄 알았는지 같이 따라

서 뛰기 시작했다.

“다, 다녀오겠습니다!”

우리는 잠깐 유찬이를 기다리며 대기실에서 방송을 봤다.

인터뷰를 하는 유찬이는 또 다시 채팅창에 소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 ‘다리오스는 훈련용 허수아비’

- ‘허수아비 치듯 그냥 때리면 이깁니다’

- 그냥 RQ평평E평평

- 또차니 말넘심ㅋㅋㅋㅋㅋ

- 탑 배인 할 때 정글이 뒤봐주면 나도 저만큼은 할듯

탑 다리를 어떻게 상대하면 좋겠냐는 물음에 허수아비 때리듯이 때리면 된댄다.

아마 침착하게 사거리를 이용해서 상대하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지만 아무

도 그 진의를 알고싶어하지 않는다.

“크크크, 유찬이형 진짜 바보같다. 말 엄청 더듬어.”

“오늘은 내가 받을 줄 알았는데. 나도 원딜 대신 탑챔하면 받으려나?”

“그럴걸. 카시같은거 해봐.”

나도 웃으면서 바텀 듀오의 이야기에 대답해준다.

지호와 일도는 이 상황 자체가 팀에 대한 주목도를 올려준다는 것을 알고 있

어서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아, 돈무새인 지호는 POM을 받으면 조금씩 주어지는 상금에는 관심이 많았지

만 유찬이가 POM을 받을 때 마다 슬슬 졸라서 게임 머니같은 것들을 얻어내곤

해서 불만이 없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서포터가 POM을 받는 것이 상대적으로 어렵긴 하다.

“하..”

하지만 한 구석에서 분위기를 박살내는 깊은 한숨이 흘러나오고 있다.

“솔직히 나 오늘 잘하지 않았나? 왜 또 POM 아니지.”

창민이는 한쪽 귀를 긁으며 불만을 뱉었다.

미드에서 르블란으로 랴이즈를 상대로 나쁘지 않은 플레이를 하기는 했다.

다만 POM이라는 것이 꼭 KDA로 정해지는 건 아니다.

게임에 대한 영향력, 팀에 대한 기여도, 혹은 슈퍼 플레이같은 것들이 모여서

선정된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일방적인 게임을 했고, 그 중 가장 흥미를 불러일으킨 것

은 솔로킬을 두번이나 딴 배인이다.

“어. 담에 미드 루시언 해봐. 그럼 받을 듯.”

놀랍게도 창민이에게 대답해준 건 지호다.

두 사람이 완전히 틀어진 줄 알았는데, 지호는 아직 어리지만 팀이 유지되기

위해 뭐가 필요한지 알고 노력하는 것 같다.

“루시언? 쌉가능이지, 오키오키.”

창민이가 기분이 좀 좋아진 것 처럼 낄낄거렸다.

하지만 지호는 심술을 부린거다.

창민이가 순수 AP챔만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

뭐, 저런 말에 자극받아서 진짜 챔프 폭이 넓어진다면 FWX에게는 호재겠지만.

일도는 모든 상황을 이해한다는 평온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얘야말로 FWX의 전신, 보살이다.

“건이 형. 숙제가 있어.”

“뭔데?”

“이번 주에 다 이기고 가. 내가 그럼 형을 놔줄 수 있을 것 같아..”

항상 진지한 일도는 이런 말도 진지하다.

얘랑은 전생부터 알고 지낸 적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조용하고 묵직한 스타일

이다.

어쨌든 저음 목소리가 참.. 좋기는 한데.

왜 자꾸 남자만 꼬이는 것 같냐.

필요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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