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화. 니네 정글 쩔더라
내가 다른 라이너로 포변을 한 적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아마 릴리가 내 플레이 화면이 상당히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걸 지켜볼 정도
의 눈썰미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리고 게임을 집중해서 봤다면 이걸 알고 있
는 유일한 사람일거다.
[ 다, 당연히 알지. ]
나는 권태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포지션으로의 변경을 해봤다.
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포지션은 미드다.
어딘지 모르게 유사 정글러의 느낌이 있다고 해야하나.
그렇게 로밍다니는 개념에서는 서포터도 괜찮았던 것 같다.
서포터.. 이야기를 하자니 원딜도 꽤 재밌었고.
아예 힘 싸움을 생각하자면 탑도 시원시원했다.
근데 결국엔 정글러다.
다른 포지션은 깔짝깔짝 맛만 봤다는 얘기다.
솔직히 이미 정글 그 자체가 되어버린 나는 도저히 다른 라인에는 적응할 수
가 없어서..
[ 거니거니야. 나 입이 심심하다. ]
‘과일 시켜줬잖아. 조금만 기다려.’
[ 히히, 좋아. ]
우리 공주님은 이제 너무 까칠하다.
왜 공주님이냐고?
원딜도 왕자님인데 릴리라고 공주 못할 건 뭔가.
‘너 먹어보고싶다고 했던거 넣었어. 멜론이랑, 딸기랑.’
[ 주머니 사정은 괜찮아? ]
이렇게 배려가 깊을 수가.
메마르고 척박한 LOS만 하다가 이렇게 인간미 넘치는 대화를 할 수 있다니 마
음이 정화된다.
반복되는 연습이 이렇게 사람을 미치게한다.
‘어.’
돈은 뭐, 별로 문제가 안된다.
사실 2군의 연봉은 내 기준에 턱없이 적다.
하지만 나도 나름 경력이 있는 2군으로 스타트를 찍어서 그냥저냥 쓸만큼은
받는다.
거기다 여기는 FWX.
한번도 와본 적 없는 팀이긴 한데, 괜찮은 숙소에 훌륭한 식사, 운동 시설,
심지어 보험까지 풀 코스로 제공된다.
내가 돈을 쓸 일이 없다.
- 똑똑
잠시 침대 옆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네.”
“바쁘니?”
“아, 코치님.”
“잠깐 시간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그럼 지금 시간 좀 내줄래?”
“배달 시켜놓은 게 있어서.. 지호에게 말해두고 갈까요?”
“다른 애들한테는 알리기가 좀 그런데.”
코치님은 엷게 웃고 있었다.
아, 그쪽이구나?
“마침 제가 운동갈 시간이어서요. 요령껏 말해두고 갈게요. 어디로 가면 될까
요?”
“그래? 그럼 이쪽에서.”
코치님은 짧게 숙소 근처의 카페를 알려주시고 자리를 떴다.
[ 모야? 모야? ]
‘과일 먹으면서 기다릴래?’
[ 응, 좋아. ]
릴리는 눈치가 빠르다.
나는 지호에게 과일도시락 배달 수령을 부탁하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섰다.
카페에는 초췌한 기색의 박진현 감독님이 앉아있었다.
“안녕, 이렇게는 처음 만나네.”
저런.
이 퍼즈 및 태도 논란은 예전에도 쭉 있었던 일이다.
정해져있던 패치가 변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FWX가 어떻게 대응하고, 어떻게 했는지는 잘 모른다.
결과적으로 1군에서는 윤도형이 올해까지는 계속 활동했다는 것 밖에는.
그래도 우리 팀이 되고나니 윤도형에게 안타깝다는 생각은 든다.
뭐, 그렇다고 신경이 많이 쓰이진 않는다.
내가 누굴 밀어냈고 누구 자리를 차지했는지 다 기억하다보면 여러번의 삶을
사는 데에 지장이 온다.
어쨌든 활기차게 박장대소를 하던 박감독님의 초라한 몰골을 보자 이쪽에게
훨씬 불쌍한 마음이 든다.
승패와 관계 없이 항상 프로 계에서 인성 좋기로 소문이 났던 사람이라서 그
렇기도 하다.
“안녕하세요.”
“응. 반갑다. 눈치가 빠른 모양이던데, 내가 왜 왔는지는 알고 있고?”
“예.”
“의견이 궁금해서 왔어. 너무 긴장하지 말고. 양태진 감독님도 알고 있어. 이
야기 나눴다.”
박감독님은 미리 내 취향까지 알았는지 아메리카노를 내밀었다.
“우리 사정은 알지?”
“네, 들었습니다. 그 때 라이브로 보고 있었거든요.”
“경기를 라이브로 챙겨봐?”
“가끔 스크림 취소되거나 할 때는요.”
지호 덕분에.
“그래? 그거 기쁘네. 솔직히 이야기해서, 우리는 아직 고민하고 있어.”
나는 조용히 경청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아닌게 아쉽지만 이런 분위기에서는 아이스가 나은 것
같다.
“네가 가능성이 있다는 부분에서는 코치진과 스카우트 팀 모두 동의했지만,
주전 자리를 약속해주지는 못해. 적응도 쉽지 않을테고. 그리고 네가 분위기
환기를 위해서 어느정도 소모될 가능성도 있다.”
솔직하게 말한다고 했지만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한다고?
나는 입 안에 들어있던 커피를 뱉을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얌전히 꿀꺽 삼켰다.
와, 이래서 아이스로 시킨거구나.
“그래도 긍정적인 부분이라면 연봉 협상이 다시 진행될테고, 어쩌면 기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너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
박감독님은 맑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박진현 감독님은 아주 보기 드문 사람이다.
대전 FWX의 상징같은 사람이라고 해야할까?
5년간의 선수 생활 중 마무리 2년의 선수 생활을 FWX에서 마감했다.
그 중 마지막 해에는 플레잉 코치를 겸하며 활동했고, 그 후 잠시간 팀 소속
으로 활동하다가 군 복무 후 다시 FWX로 돌아왔다.
그리고 계속해서 지도자의 길을 걸어나가고 있다.
FWX가 유명한 팀은 아니지만 박감독님은 팀에서도 상당히 존중받고 있고, 그
가 팀을 사랑하는 마음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도 익히 이 사람의 평가에 대해서 알고 있긴 했지만 실제로 면대면으로 이
런 이야기를 나눠본 건 처음이다.
좀 참신한 느낌이 든다.
감독답지 않다고 해야하나.
이런 것들은 대부분은 구단의 인사 관련 팀들을 통해 진행된다.
특히 2군에서 1군을 가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내가 다른 팀으로 스카우팅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정성스러운 접근을?
“물어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마워. 에이전시에 문의하는 것이 맞았을까?”
“아닙니다. 계약 관련해서만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그래, 그럼 네 생각은 어때?”
“저는..”
#
“수형아.”
“안나와요.”
“수형아.”
“정말로 없더라구요. 채팅을 안합니다. 말도 잘 안해요.”
“수형아!”
“학교 생활도 깨끗해요! 라이너 CS도 안 뺏어먹는 놈이에요! 뭘 만들 수가 없
어요!”
“미친, 파이어웍스 개 쓰레기팀! 정글러가 자기 챔피언 스킬도 모르고 게임을
해? 그걸 그냥 뒀어? 박진현, 무능한 새끼!”
성남 스톰 2군 소속 하석준 감독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상황이 생각보다 너무 빨리 돌아간다.
이러다간 정말 권건이 1군으로 콜업되어버릴거다.
그럼 프론트에서는 자신의 실력을 의심하겠지.
“그건 그렇죠. 우리 애들한테도 좀 더 주의주겠습니다.”
민수형 코치는 텅 빈 눈빛으로 대충 대답했다.
지랄도 하루 이틀이다.
민수형도 하석준이 남 앞에서는 좋은 사람인 척하면서 자기 앞에서만 저렇게
있는대로 성질을 내는데에 이골이 났다.
“당연하지. 추가 피드백 잡고, 애들 숙지했는지 퀴즈도 내.”
“퀴즈요?”
“어. 그게 다 공부야.”
“네, 네.”
민수형은 기가 막혔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하석준의 퀴즈는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강압적인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할 때마다 이 사람이 선수들을 프로 취급을 하는건지, 애들 취급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어질 정도였다.
“그래서 어떡할거냐고.”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걔가 잘하는 걸.’
민수형은 한숨을 쉬며 권건의 지난 시즌 모습을 떠올렸다.
그다지 말이 없는 선수.
피지컬과 승부욕은 뛰어났지만 말을 많이 하지 않아서 오더에 지장이 있었다.
너무 수줍은 것도 아니었고, 지나치게 밝은 성격도 아니었다.
교우 관계도 나쁘지 않다.
그냥 그게 다였다.
하지만 지금의 플레이는 너무 압도적이다.
실제로 진행된 경기는 몇 번 되지 않지만, 스크림은 수도 없이 많이 진행됐다.
스톰과 했던 스크림도 그렇지만 FWX를 상대한 다른 팀들에서 흘러나오는 정보
들은 전부 한 사람을 주목하고 있다.
확실히 여기에 있을 선수가 아니라는 것.
이 나이대의 선수들은 1, 2년 사이에도 금세 변하곤 한다.
그것이 신체적인 부족함이 될 수도 있지만 성장이 될 수도 있다.
선수를 데려오는 건 스카우트 팀의 역량일 수 있지만 일단 팀 안에 들어온 선
수의 가치를 보는건 감코진의 실력이다.
2군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민수형은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냥 1군에서 확실히 밟히길 기대해야죠.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요.
긴장할 가능성도 있고.”
“운에 기대자고?”
“그런 뜻이 아니라요. 아마 바로 선발로 나오지는 않을겁니다. 그 전까지 좀
더 찾아보죠.”
“못 참겠는데.”
“그럼 퍼베 감독님께 쓰지 말라고 말해보시던가요.”
민코치는 참다 못해 한마디 뱉었다.
퍼베는 박진현 감독이 프로일 때 사용하던 선수명이었다.
“오. 박진현이한테? 그 생각을 왜 못했지?”
하석준의 반응에 민수형은 당황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야, 괜찮아. 얘랑 나 친하다.”
초조해하는 민수형을 보던 하석준이 피식 웃고 바로 전화를 건다.
민수형은 받지마라, 받지마라하고 빌었지만 딸깍 소리와 함께 상대가 전화를
받아버렸다.
“어. 퍼베야.”
- 석준아, 무슨 일이야.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야 전화하는 사이인가? 우리 바텀에서 호흡을 맞췄던
운명공동체 아니야.”
- 언제는 도구라더니.
휴대폰 너머로 작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민코치에게는 너무 불편한 분위기였다.
“야. 그래서 어떡하냐? 너네 정글러. 잘 좀 가르치지 그랬냐.”
- 그런 말 하려고 전화했어? 그럼 통화는 여기까지 하고 싶은데.
“아! 아니아니. 그런게 아니라. 그, 뭐더라? 걔 그 2군 애 콜업 하냐?”
‘감독님 연기 진짜 추하다..’
민수형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 정보가 궁금해?
“그렇게 황급하게 콜업해간다고 뭐가 돼?
- 아직 콜업한다고 안했는데?
“야. 전 동료 좋은게 뭐냐? 내가 비밀 하나 말해준다. 걔 성격이 별로다. 우
리가 그래서 내보낸거거든. 어?”
- 그럼 데려가기 전에 알려주지. 그랬음 좋았을텐데.
“지금이라도 조심하라는거지.”
- 그래? 근데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게. 우리도 크로스체크해줄 팀원들 있거든.
대화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자 열받은 하석준은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렇게 좋은 팀원들이 많아서 니네 정글은 그딴 실수를 하냐?”
- 그러게. 그렇게 됐다. 팀 운영이라는 게 마음같지가 않네.
옆에서 듣고있는 민수형 입장에서는 박진현 감독이 보살같았다.
보살팀, 보살팀 하더니 감독마저도 저렇게 되어버린건가?
아님 서포터 출신이라 그런가?
근데 좀 부럽기도 하다.
- 근데, 석준아.
“어, 어어.”
- 잘 키워줘서 고맙다. 이제 우리가 잘 쓸게.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기습 공격에 하석준 감독은 넋이 나간것처럼 휴대폰 화면을 다시 들여다보지
만, 전화는 이미 끊겼다.
“씨이이이..바아아..”
민수형 코치는 지금이 도망칠 타이밍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재빨리 회의실에서 나가서 문을 꽉 닫아버렸다.
등 뒤로 알아듣기도 힘든 괴성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