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화. 퍼즈
“아직도 퍼즈야?”
누워서 폼롤러에 몸을 풀고 있던 일도가 말했다.
“응. 아, 지금 왜 퍼즈였는지 들어온 것 같은데.”
“지호야 뭐래? 나 이제 그냥 연습 하려고.”
“어.. 들어볼래?”
일도가 폼롤러 정리를 위해 자리를 뜨자 지호가 볼륨을 높여줬다.
“기다려주신 여러분,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지금 막 소식이 들어왔는데요.”
귀에 낀 인이어를 통해 정보가 전달되고 있는지 캐스터는 말을 잠깐씩 쉬어가
며 했다.
“어.. 그러니까, 지금 FWX의 정글 폴리 선수가 스킬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고 이의를 제기 한 상황인데요. 문제 상황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도록 하겠
습니다.”
느린 화면의 리플레이가 나온다.
“아, 어떤 부분인거죠?”
“지금 다시 한 번 스킬을 사용 할 수 있도록 표식이 활성화되어야 하는데, 활
성화가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거든요.”
“지금 자세한 내용을 확인 중에 있습니다.”
잠시 화면에 잡힌 정글러는 약간 화가 난 표정으로 무언가 강하게 항의하고
있었다.
아.
기억난다.
“자세한 내용이 전해지는대로 곧 전달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패시브에 들어가 있던 효과가 E 스킬을 올리고 나서야 적용되도록 패치가 되
었던 내용인데, 이번 패치에 반영됐다.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지만 놓치면 안될 만한 부분이다.
“이번 패치 부분을 폴리 선수가 놓친 것 같은데요..?”
“예, 이번에 적용된 버전부터는 스킬을 찍어야만 표식이 묻어날 수 있도록 변
경됐죠. 그러니까 최소한 3레벨을 찍어야만 발동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충분히.. 헷갈릴 수 있는 부분이죠. 현재 내용을 선수에게 전달 중에 있는
모양입니다.”
쉽게 패치 내용을 떠올린 해설진들이 조금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선수를 비호
했다.
다만 약간 민망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 머야?
- 패치 노트도 안 읽음?
- 난 저런 패치 있었던거 몰랐는데; 버그 아니었음?
- 버그 ㄴㄴ 당연히 알아야지 쟤넨 프로잖아
- 정글이 주포면 한두번만 플레이해봐도 바로 아는거임
- 뭐하냐? 연습 안하고 노냐?
- 꼴리 방송할 때도 노가리만 깜ㅋㅋㅋㅋㅋㅋ 이럴 줄 알았다
- 그래서 이것 때문에 지금 20분 째 퍼즈한다고?
- 저새낀 대체 왜 화내고 있는거임?? 자기가 틀려놓고??
- 경기 안하냐??????
LKL은 FL과는 비교도 안되는 속도로 채팅이 올라왔다.
눈으로 따라잡기 힘들 정도였지만 대부분은 FWX 1군 정글러 윤도형에 대한 비
웃음과 비난이었다.
확실히 패치 노트만 읽어서는 금방 알아채기 힘든 부분이다.
하지만 두어번 해당 챔피언으로 플레이를 한다면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
기도 하다.
때문에 수많은 유저들도 인지하지 못했을 내용이었지만 모두들 물만난 고기처
럼 윤도형을 물어뜯고 비난한다.
아마 커뮤니티 사이트도 이 내용이 화제가 되고 있겠지.
하지만 나도 어느정도 동의한다.
기본적인 내용이다.
거기다 심판진을 향해 저렇게 화가 난 표정이라니.
“뭐야?”
지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본다.
“정글러가 저걸 놓쳤다고?”
그리고 번갈아가며 나를 쳐다보며 신뢰감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대박.”
#
박진현 감독의 표정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통곡의 벽을 못넘는 것?
흔하다.
발이 묶여 있는 상대에게도 스킬을 못 맞추는 것?
그럴 수 있다.
백번은 더 피드백했던 내용을 깜빡하는 것?
제발 안 그랬으면 좋겠지만, 또 피드백을 하면 된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저렇게 끝까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리그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건
너무 프로답지 못한 모습이다.
가뜩이나 정글러 윤도형은 팬들의 사랑으로 자리를 보전하는 면이 있다.
그런데 도대체 저런 행동은 어디서 나온 걸까?
패치 노트는 이미 요약해서 전달도 했다.
다 떠먹여줬는데 대체 무슨 확신을 가지고 저렇게까지 강하게 항의를 하고,
시간을 끈단 말인가.
어느정도 결과가 나왔는데도 자기만 화가 났다는 듯이 표정을 풀지 않고 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상대 팀에게도 미안하고, 주최측에게도 미안하고, 팬들에게도 미안했다.
인과 확인이 명확하게 완료되자 경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재개됐지만
기세는 완전히 넘어갔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아군이 힘이 날리가 만무하다.
“페널티.. 받겠지.”
“받겠죠. 퍼즈 오용으로.”
옆에 앉아있던 김한빛 코치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라이브 화면에는 윤도형의 얼굴이 잘 잡히지 않게 됐지만 감독은 윤도형이 잔
뜩 화가 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어린애같은 면이 있는 선수다.
하지만 프로 스포츠에서 그런 것을 이해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이지.”
“...”
모두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
지세현은 오늘도 커뮤니티에 머무르고 있었다.
최근들어 2군 경기에 몰입한 지세현은 1군 경기에 관심이 없었기에 글들을 휙
휙 넘기기에 바빴다.
지세현이 푹 빠진 것은 2군 FWX.
잘하는 놈들만 모여서 잘났다는 듯이 싸우는 것 보다, 2군 게임은 실수도 쏟
아져 나오는 게 좀 만만해 보였다.
그 안에선 FWX가 맹수나 다를 바 없다.
프로 게임에서도 양학이 있다는 게 매력 포인트였다.
아직 몇 경기밖에는 자료가 없었지만 FWX 정글러 권건은 한장면 한장면이 양
학이란 표현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상대를 가지고 노는 것도 그렇고, 솔직히 지세현 입장에서 동선이 얼마나 좋
은 건지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프로게이머 출신인 해설자가 열변을 토해내는
걸 보니 진짜 잘하는 건가보다 싶다.
언더독인 것도 새콤달콤한 맛이 있다.
아무도 모를 때 나만 이 사람의 진가를 알아본다?
이게 진짜 꿀이다.
“다들 보는 눈이 없네. 쯧쯔. 2군 경기까지 보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건가?”
이런게 커뮤니티를 하는 방법이다.
매니악한 주제를 선점하는거다.
아직은 조회수가 별로 나오지 않지만 분명 떡상할 가능성이 있다.
그때가 되면 나는 이렇게 괜찮은 선수를 일찌감치 알아본 안목 높은 사람이
되어있겠지.
그럼 그걸 기회로 잡아서 관전방 같은걸 열어볼까?
권건이 뜰 수록 내 이름도 알려질지도 모른다.
근데 오늘따라 올라오는 글들에 FWX 정글러가 많다.
“뭐야, 이거.”
- 이게 프로냐? feat. 폴리 퍼즈
뭔가 작년부터 계속 느끼는 건데
FWX 팬질하는거 이제 지침
솔직히 꼴리 이 새끼 팬서비스도 좋고 소통 방송 할때 찰지고해서
하하호호 좀 햇엇는데
시바오늘은 진짜 내가 얼굴이 다 화끈거리더라
쇼부는 정글에서 치라고 심판한테 되도안한걸로 쇼부치지말고
ㄴ 3년전만해도 멀쩡햇엇는데
ㄴㄴ 그게 대체 언제임?
ㄴ 변명의 여지가 없음; 꼴리 미스오더도 오짐 유명함
ㄴ 존나노답버리고 트릭스터로 갈아타라 지금 타면 박수 증정
ㄴ 눈물좌가 꼴리 야리는건 봄? ㄷㄷㄷㄷ
ㄴ 따지고드는거 보니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다 제발 꺼져조
찾아보니 프로 게임을 며칠 찍어 먹은 지세현이 받아들이기에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오우야. 이게.. 프로게이머?”
타이밍이 좀 이른 것 같지만 영업 찬스다.
어쩌면 기회가 좀 더 빨리 온 걸지도 모른다.
권건 코인을 탈 찬스가.
#
[ 착오로 경기 중단 ‘폴리(Poly) 윤도형.. LKL, 패널티 부과 ]
경기 중 일시 정지(퍼즈)를 요청한 대전 FWX에 패널티가 부과됐다.
정글러 ‘폴리’ 윤도형은 플레이한 챔피언의 표식 효과가 발동되지 않았다며
퍼즈를 신청했으나, 이는 선수의 숙지 부족으로 인해 발생한 일로 밝혀졌다.
이로 인해 대전 FWX에 패널티가 부과되었으며, 심판진에게 의견 제시를 하는
과정에서 다소 강한 발언을 했다는 등의 증언이 있어 확인 중에 있다.
이가 사실로 확인될 시 규정에 따라 조치할 예정으로..
.
.
.
또 졌다.
시즌이 시작되자 마자 내리 졌다.
세트 연패로 따지면 8연패다.
아침에 일어나니 낯뜨거운 기사가 떠있다.
“감독님.”
오늘 예정되어 있던 짧은 컨텐츠 촬영은 취소됐다.
이런 상황에서 촬영따위가 제대로 진행될 리 없다.
“감독님?”
박진현 감독은 선수들을 탓하기 전에 반성을 먼저했다.
감독이라는 것이 이렇게 어렵다.
분명히 잘 풀렸던 적도 있지만, 잘 풀리지 않았던 적이 더 많았다.
어린 선수들을 다루는 것은 이론과 달리 쉽지 않았다.
방송 계약이 잘못이었을까?
아니면 연습 시간을 탄력제로 바꾼 것?
“박감독님!”
박감독은 눈을 번쩍 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앞에 앉아있는 코치 둘이 눈에 들어온다.
“그냥, 반성.”
슬퍼보이는 감독의 눈빛에 코치 둘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다시 이겨나가봐야죠. 어떻게든.”
최수철 코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괜찮을겁니다. 일단 일정은 미뤘어요. 팀 패널티는 받았지만, 당장 실제로
불이익을 받지는 않아요. 경고에요. 저희 뜻도 잘 전달했고, 상황이 더 심각
해지지는 않을 것 같아요.”
김한빛 코치도 말을 이었다.
“고맙다.”
“...”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콜업 할까요.”
최코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누구를 말하는지는 모두가 다 알고 있다.
“저는, 아직 조금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김코치도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글쎄..”
박감독도 입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순간의 판단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건만 감독의 한마디 한마디는 너무 힘이 실
린다.
머리가 아프다.
“미안하지만, 조금 더 이야기 해줄 수 있을까. 도움 좀 받아야겠다.”
박진현 감독은 배려심이 깊고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감독의 성향을 알기에 최수철 코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콜업 하더라도, 당장 도형이를 내치자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팀원들도 그렇
고 팬들도 저항이 있을테구요. 연습 기간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콜업을 하는
게 여론을 진정시키고 연패하는 환경을 환기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겁니다.”
“저는 반대로 생각해요. 선수들이 불안해 할겁니다. 예성이나 봉구 모두 도형
이한테 신뢰가 깊어요. 실수가 조금 크긴 하지만 우리 지난 겨울 다 같이 열
심히 준비했잖아요. 아직은 좀 더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겨우 2
주 지나갔을 뿐인데요.”
최한빛 코치가 조심스러운 반대 의견을 내비친다.
“그리고, 권건 선수를 위해서도 그래요. 여론 진정이나 환기를 위해서 섣불리
콜업했다가 상황이 바뀌어버리면요? 괜히 경계만 사고 1군에서 적응 못하거
나, 2군에 돌아갔을 때 불편해질까봐도 걱정입니다.”
말을 마친 최한빛 코치도 침착한 눈빛으로 박감독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의실에 앉은 세 사람은 다시 말이 없어졌다.
얼음이 녹아가는 소리만 달그락거린다.
“애들이 많이 불안해할까.”
박감독이 입을 열었다.
“일단 은호는 아닐겁니다. 은호는 친구 추가도 해뒀더라구요. 그리고, 걔는
영악한 부분이 있어서요.”
“예성이는 불안해할겁니다. 조금 예민한 편이니까요.”
“봉구는.. 모르겠다. 걔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서.”
박감독은 간신히 얇은 웃음을 지으려고 노력하며 마른 세수를 했다.
“일단, 태진이한테 연락을 좀 넣자. 건이랑 조용한데서 면담이나 한 번 해볼게.”
“네. 감독님. 저는 프론트와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세 사람은 각자 할 일을 안다는 듯이 조용히 회의실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