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화. 예비 열사님
게임은 자연스럽게 승리로 끝났다.
나는 게임을 바로 종료하는 습관이 없다.
정확히는 있었다가 고쳤다.
프로 게임에서 강제 종료를 할 순 없잖아.
느긋하게 수고를 많이 해준 팀원에게 명예를 눌러주고 결과창으로 나오니 나
를 찾는 사람이 있다.
- 거북꼬북 : 권건님
- 거북꼬북 : 담엔 제가 정글 할게요ㅎㅎ
- 거북꼬북 : 나 권건님 팬인뎅 나중에 밥 한번 먹어요
- 거북꼬북 : 진짜루
나는 별 말 없이 결과창을 껐다.
친구 추가가 와있었지만, 무시한다.
“방금 그 사람 선수 아니야?”
“누구? 거북꼬북?”
먼저 게임을 끝내고 기다리고 있던 유찬이가 이마를 찌푸리고 뭔가 떠올리려
고 하는 듯 했다.
“아, 많이 봤는데 누구더라..”
“찾아보면 되지.”
“그건 내가 참을 수 없어. 내 머리야 힘을 내!”
결국 유찬이는 한참을 끙끙거리다가 포기했다.
전적 사이트에서 검색 한번이면 될 거가지고 고집부리긴.
하지만 나도 굳이 찾아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따로 검색하진 않았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걸 보면 그렇게 중요한 선수는 아니겠지.
“그래서 어땠어?”
“음, 좀 재미없다는 기분이 들었어.”
“네 기분 말고 플레이.”
“아니야, 들어봐 거니거니. 찌릿하고 소름돋는 느낌이 있거든? 그런 감각이
있어. 근데 요새 혼자 하면 그런 게 없다고 해야하나..”
어쩌면 유찬이는 나와 호흡을 맞추기 시작하면서 일반 솔랭이 재미없게 느껴
졌을지도 모른다.
나와 플레이하면 자기 실력을 온전하게 발휘할 수 있으니까.
“하긴. 네가 피지컬로는 1군 탑라이너들보다 나을지도 몰라.”
이건 진심이다.
유찬이는 불안한 것처럼 연습실 근처에 누가 없는지를 살피고 조심스럽게 대
답했다.
“그건.. 내가 가끔 한 생각인데. 다른 선수들 만나면서 어렵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
1:1은 그럴만하다.
이유찬은 긴장하는 타입이 아니니까 더 그렇다.
“내가 이런 말 했다는 건 비밀이야.”
“다들 알걸?”
내가 피식 웃자 유찬이가 허겁지겁 입을 막는다.
“내 실력이 세상에 알려지는건 어쩔 수 없지만 오만한 건 실패의 지름길이라
고 했지.”
“누가?”
“우리 누나가.”
누나가 있었구나.
왠지 뜻밖인걸.
누나가 말한 건 마인드셋을 말한 것 같지만 어쨌든 유찬이는 자기 생각을 비
밀로 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1군과 2군의 차이는 두뇌 플레이다.
유찬이는 팀적인 전략과 수행 능력에서 많이 부족하다.
1군 선수들이 모두 챌린저가 아닌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협업 능력과 분석 능력은 생각보다 큰 면을 차지한다.
“나도 할 수 있을까?”
유찬이는 확신이 없는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불안했겠지.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그렇다.
아주 특별한 몇몇을 제외하면 수명은 지극히 짧고, 그 시간 안에 이뤄내야 하
는 것들이 버겁다.
“글쎄..”
나는 확답을 주지 않는다.
일단은 이유찬을 1군에서 본 적이 없으니까.
“지금처럼 열심히 해봐.”
어쩌면 충분할지도.
지금 FWX 1군의 성적은 전패다.
3패, 세트조차 따내지 못해 0-6.
주말에 있을 경기도 불투명하다.
FWX 팬들이 항상 마이너, 언더독, 꼴찌 취급을 받는 게 이런 이유일지도 모른다.
성적이 좋았던 적이 없다보니 반대로 꽤 인기가 있다.
리그 형성 초기부터 훌륭한 복지로 밀어붙인 팀이어서 호감을 꽤 얻었고 늘
노력한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서다.
모 야구팀의 이미지와 비슷한 면이 있다.
FWX를 응원하는 팬과 결혼하면 결혼 생활이 편안하다던가, 보살 드립이라던가.
이게 다 우스울 정도로 처참한 성적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시즌은 더 하다.
올해는 다를지도 모른다며 기대했던 팬들은 화가 나있다.
보살이 되고 싶어서 보살이 되는 사람이 어디있겠나.
화가 날 일이 없는 게 제일 좋다.
그래서 2군 경기에까지 기웃거릴 정도다.
LKL을 봐도 남 좋은 일만 시켜주는 팀이니까 잘 풀린다는 2군 경기라도 보면
서 미래의 단꿈이라도 꿔보는거다.
퓨체탑 소리를 듣는 유찬이나 1군에서 잠깐 요양차 내려온 정글러 취급을 받
는 나는 FWX 팬들의 희망이 됐다.
“미니맵은 잘 봤어?”
“딜 교환 할때는 심취해서 보기가 좀.”
“그래? 게임 재밌게만 했네?”
유찬이는 바짝 얼어버렸다.
“아니, 아니, 이번 판 잘 안 풀렸어. 적이 E 찍었을거라고 말하면 귀신같이 Q
찍고. 채팅 인식 게임인줄?”
“몇 분 볼까?”
“어, 나 8분 초반.”
이제 유찬이는 순간이동을 사용하는 요령을 천천히 구체화하고 있다.
킬을 수급하거나 라인 복귀를 위해서가 아니라, 팀을 커버하거나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을.
이것도 몰랐던 사람이 마스터 이상 갈 수 있는가?
놀랍게도 갈 수 있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다.
하지만 좋은 프로가 될 수는 없다.
이유찬은 이제 LOS를 잘하는 사람을 넘어 좋은 프로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
1군 감독님이 경기장을 다녀간 뒤 분위기는 묘하게 뜨거워졌다.
꼭 신데렐라 구두를 들고 온 왕자님의 행차같은 느낌이다.
“이게 간택인가?”
창민이는 그 이후 며칠 내내 설레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평소보다 훨씬 더 입조심을 하고 스크림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정작 경기에는 DPM이나 KDA 관리에 지나치게 열심이라 불편한 점은 있었지만
게임을 던지는 것 보다는 낫다.
“날 직접 데리러 오신거 아님? 내가 지표가 꽤 준수하잖아.”
팀원들이 잘 깔아놓은 판 위에서 미드 라이너가 해야하는 부분을 수행한 것
뿐이지만.
나로서도 박감독님이 얼굴을 비친 후부터 게임들이 좀 더 편해졌다.
팀원들이 내 말을 찰떡같이 잘 들어주거든.
유찬이나 바텀 듀오는 당연하고, 딜량에 목숨 걸던 골칫덩어리 미드가 데스를
관리하기 위해 사려주는 것만으로도 훨씬 낫다.
창민이만큼은 아니지만 다들 좀 더 신경쓰는 모습을 보였다.
어쨌든 상상은 자유다.
하지만 아직까지 콜업이나 샌드다운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있다.
주말인 오늘도 우리의 일상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다들 연습실에 모여있었다.
하지만 늦은 오후 스크림이 취소됐다.
올해의 우리 팀은 인기가 많은 편이라 급히 다른 스크림을 잡을 수도 있었지
만, 감독님과 코치님은 약간의 고민 끝에 이 시간을 자율 연습시간으로 돌렸다.
그래도 아무도 자리를 뜨는 사람이 없다.
아직 조금 이른 저녁시간이었는데 아이스크림을 먹던 지호가 연습실 가운데에
위치한 관전용 TV를 켰다.
“저녁 먹으면서 경기 볼 사람?”
“나 볼래.”
일도가 굼실굼실 움직여 소파로 향한다.
손에 들린 건 과일 도시락이다.
모두들 일도가 채식과 과일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놀라워했는데, 일도는 ‘진
짜’다.
배달 앱으로 과일을 배달시켜먹는다.
멜론, 딸기, 오렌지, 포도같은 것들을 조금씩 손질해서 배달하는 걸 과일 도
시락이라고 불렀는데 여름에는 수박을 씨도 발라서 보내준다나.
이런건 진짜 왕자님같다.
물론 저 덩치로 우리 주장이 칼을 들고 과일을 깎는 모습보다는 나은 것 같기
는 하다.
“형, 형. 나 멜론 하나만 주라.”
“시켜 먹어.”
저 과일 도시락을 내가 시켜먹어본 적은 없다.
가격도 제법 비싸고 과일을 그리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릴리가 일도의 뒤에서 침을 흘리며 과일 도시락을 보는 모습이 애잔하다.
나는 릴리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도 조그만 주먹을 꽉 쥐어서 화이팅 포즈를 취하고 포르르 사라졌다.
1군의 주말 경기가 있는 날이다.
우리는 모든 경기를 보지는 않지만 도움이 될 만한 경기는 리플레이로 챙겨본다.
FWX를 포함한 1군 라이브 경기는 잘 보지는 않는 편이다.
보통 경기 시간대는 연습 시간이고, 어느 쪽으로건 도움이 될 만한 부분이 있
다면 어차피 감독님이나 코치님께서 취합해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관객이 아니니까.
벌써 1군의 4번째 경기.
1세트정도는 가져올 수 있으려나?
여태까지는 3판 2선승제로 진행되는 경기 중 단 한판도 가져오지 못했다.
“어, 같은 팀 걸렸네.”
“개꿀.”
나와 유찬이는 아직 배가 고프지 않아서 게임을 돌리기로 했다.
이번에는 유찬이와 맞춘 것도 아닌데 같은 팀에 걸렸다.
내 점수는 오르막길을 달리고 있다.
“챌린저 크로스.”
맞다.
나도 챌린저로 들어섰다.
이제 300명 안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챌린저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금방이지만 그렇다고 하루이틀 한다고 해서 금
방 되는 것도 아니긴 하다.
지금은 시즌 중이기도 하고, 랭크 게임을 시작하는데만 해도 10분은 걸린다.
정말로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다.
“거니거니 스킨 안씀?”
“어. 스킨을 따로 안사서. 있긴 할걸? 이거.”
유찬이에게 가지고 있던 중국팀 우승 스킨을 보여주자 얼굴이 사색이 된다.
“야발! 이건 없는거나 다름 없지! 부정타게 이런걸 왜 샀어!”
“산 건 아니고 박스에서 나왔는데..”
- 발꼬락꼬순내 님이 아군을 위해 팀 부스트를 구매했습니다!
시원한 소리와 함께 부스트가 발동된다.
돈도 없는 녀석이 이런걸 신경쓰고.
“중국산 스킨은 팔아버려.”
“이미 갖고 있는 걸 어떻게 팔아.”
“다른 스킨을 사던가! 그딴 건 부정 탄단 말이야.”
그냥 고개를 끄덕여줬다.
조금만 더 두면 스킨이라도 선물 줄 기세다.
스킨은 그냥 스킨일 뿐인데.
어지간하면 부정적인 표현을 하지 않는 이유찬이 이렇게까지 정색을 하다니.
편해지려고 중국행의 꿈을 꾸고 있던 내가 좀 민망하다.
사실 중국 팀들은 강력하다.
이미 여러번 세계 대회에서 우승을 가져간 적도 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중국 팀들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널리 퍼져있다.
중국 팀들의 플레이는 확실히 조금.. 불편한 부분이 있다.
우선 유망주 빼가기.
자본주의 세상이니 유망주가 팀을 선택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긴 하다.
하지만 빼간 유망주 선수들을 벤치에 앉힌 채 계약 종료까지 출전 경험 한번
주지 않거나, 팀 소개 영상에서 소외받는 모습을 그대로 노출한다던가하는 모
습들이 몇번이고 반복되자 자국 리그의 골수 팬들은 눈살을 찌푸릴 수 밖에
없다.
국제 경기에서의 태도 논란은 끝도 없다.
불참 시비, 일정 조율 강요, 경기 중 고의성이 다분한 퍼즈 요청등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주최측과 복잡하게 엉킨 룰 논란이나 일정과 취재 특혜 논란 등도 매 해 함께
한다.
거기다 본인 인증이 필요한 랭크 게임에서도 중국 국적의 프로들이 멀쩡히 활
동하고, 슈퍼 계정으로 게임을 던지는 경우도 있으니 리그의 골수 팬들을 비
롯해 상위권 랭커들이 중국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
른다.
그래서였을까.
이 삶이 지겨워진 내가 그냥 중국에 가버리겠다고 했을 때, 릴리가 달가워하
지 않았던 게.
나도 이런 것들이 떠오르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어, 닷지났다.”
우리 팀 픽은 나쁘지 않았으니 상대 팀의 닷지였을까?
잠시 큐 돌리기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켠다.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경기를 보면서 휴식을 취하던 일도와 지호도 돌아
다니고 있다.
“경기 안해?”
“형. 거의 시작하자 마자 퍼즈 났어.”
이게 라이브를 잘 안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생각보다 퍼즈가 잦다.
“뭔데? 보이스?”
“버그 났다는데? 좀 큰 건가본데.. 오래 걸리는 것 같당.”
해설진의 사적인 이야기까지 넘어간 걸 보니 꽤 오랜 시간 퍼즈가 걸려 있었
던 것 같다.
큰 거라니 뭐지?
하도 많아서 기억도 안난다.
어휴, 이런 인디게임 같으니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