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화.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이 어딨어?
“대체 뭐야?”
성남 스톰의 2군 감독 하석준은 책상에 놓여있던 테이크아웃잔을 집어던졌다.
- 와르륵!
커피를 다 마시고 남은 얼음이 바닥으로 엎어지며 바닥을 더럽혔다.
앞에 서있던 코치 민수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씨, 저거 내가 다 치워야겠네.
“어떻게 된 거냐고. 왜 죽 쒀서 개 줬어? 쟤가 저렇게 잘 하는줄 너는 모르고
있었냐고!”
‘감독님도 안 잡았잖아요..’
민수형은 혀 끝을 윗니에 대고 간신히 대꾸를 참았다.
화요일 경기가 끝난 참이다.
평소에는 타 팀 모니터링도 안하던 사람이 용케도 FWX와 해머스의 경기를 찾
아본 참이다.
하지만 그것이 경기 준비와 연관이 없으리라는 것도 안다.
월요일에 있었던 경기에서 FWX로 무탈하게 이적한 권건이 활약하는 모습을 보
자 바짝 약이 오른 것이다.
“우리가 다 키운건데! 우리가 다 키운건데!”
성격이 더러운 감독은 욕심많은 소리를 뱉어냈다.
그리 실력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항상 자기가 1군 감독이 되지 못하는 것
에 불만이 더 많은 사람이다.
그 밑에 있는 코치인 민수형은 죽을 맛이었다.
자기도 어차피 하감독의 라인을 탄 셈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민수형은 선수 출신이 아니었다.
안그래도 선출과 비선출이 어느정도 갈리는 판인데 아카데미 출신의 코치인
그가 잡을 줄이라고는 연이 닿은 하석준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가만히 하석준의 개소리를 들어 줄 수 밖에 없었다.
“야, 걔는? 우리 정글러.”
“아. 상우요? 상우는 지금..”
민수형은 말을 아꼈다.
권건의 자리를 대신해 데려온 선수는 김상우였다.
챌린저에 꾸준히 발을 들일만큼 솔랭 점수가 우수했고, 외부 대회에서도 수상
경력이 몇 번 있었다.
충분히 써봄직만한 카드였고, 권건과 김상우 중 김상우를 최종 선택한 것은
감독이었다.
하지만 월요일.
FWX와의 경기에서 스톰은 김상우가 자신있어하는 울라프 카드를 쥐여줬다.
그리고 팀원들에게도 최대한 정글 지원을 할 수 있도록 지시했지만 터무니없
이 말렸다.
팀의 선수에게 이런 말을 하기는 미안하지만 뒤구르기 하면서 봐도 정글 차이
였다.
“방에 처박혀있어? 연습도 안하고? 뭘 잘 했다고?”
“아, 그게 그렇게.. 당한 게 자존심이 좀 상했나봅니다. 하지만 또 그런걸 딛
고 일어나면서 성장하는 게 애들이잖아요.”
민수형은 어떻게든 새로 데려온 정글러를 비호하려고 해봤지만 목소리가 자꾸
만 작아졌다.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 핑계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단시간에 딛고 일어날만한 차이가 아니었다.
일시적인 피지컬이라면 그 날 서로 컨디션 차이가 극과 극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두뇌 플레이는 그렇지 않다.
도대체 권건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몇 달 사이에 실력이 이렇게 늘 수 있었
던거지?
민수형 코치는 권건이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하는 말도 안되는 상
상까지 했다.
“야.”
하석준은 스산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그게 방에 처박혀서 반성만한다고 딛고 일어나질만한 차이로 보이냐?”
하석준 감독은 성격이 별로인만큼 눈이 예리했다.
어쩌면 그것이 선수로서 활동을 한 데에서 오는 감인걸까?
민수형은 입술을 오므리면서 입을 꾹 닫았다.
“하, 씨바, 이래서 언제 나는 진짜 감독 달겠냐고. 괜찮은 애들 좀 건져서 충
성심을 길러야하는건데. 왜 그걸 놓쳤지? 오늘 걔 하는거 봤냐.”
“봤죠..”
봤죠, 존나게 잘하던데.
피지컬도 강타 싸움도 오브젝트 관리도 기가 막히더라.
민수형은 욕이 나올 것 같았다.
솔직히 1군 하위권 팀에다가는 바로 넣어봐도 될 것 같다.
그럴 권한은 없지만.
“진짜 짜증난다. 저거 1군 가면 어떡하냐. 박진현이 1군으로 올릴까? 그럼 나
만 욕 먹을 거 아니냐.”
‘그건 그렇겠죠. 감독은 내가 아니라 넌데.’
민수형은 자신의 입이 제대로 닫혀있는지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다.
감독이 아니라서 좋은 건 이거 하나다.
앞에서 대신 맞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
뭐, 코치라서 다 피해갈 수 있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일 멍청한 놈 취급 받
는건 아무래도 감독이다.
“야. 수형아. 어떻게하지.”
“예?”
“뭐 좀 별로였던건 없냐?”
“뭐가요?”
“이 새낀 왜이렇게 눈치가 없어, 쟤 뭐 우리 쪽 들어올 때도 조사해봤을 거
아니야. 아님 우리 팀 있을 때나. 학폭이나 솔랭에서 이상한 말 했거나, 착짱
죽짱같은거 안했냐고.”
“착짱죽짱이 왜요?”
민수형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묻자 하석준이 다시 책상 위를 더듬으며 던질
물건을 찾았다.
“아! 뭔지 알죠. 네. 찾아보면 나올겁니다.”
갑자기 눈치가 빨라진 민수형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냥 좀 부풀려서 1군만 가기 애매하게 만들어놔도 돼. 걔네 엄격하잖아. 알
지.”
“예, 예. 알죠. FWX가 또 그런데 이상하게 엄격하잖아요.”
“FWX말고도! 혹시라도 다른 팀에 가면 그게 더 문제야!”
민수형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가서 찾아보겠다고 하며 회의실을 벗
어났다.
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저절로 한숨이 쏟아진다.
“씨바꺼.. 이게.. 맞나.. 이러려고 그 귀찮은 스포츠 의학 수업을 들은게 아
닌데..”
쏟아진 컵 때문에 더러워졌을 회의실 바닥이 떠올랐지만 도저히 다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얼음이니까 증발하겠지.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
[ 님 그거 암? ]
“릴리야. 말을 그렇게 하면 이상한 사람처럼 보인다.”
[ 난 사람 아님! 암튼 그거 암? ]
“뭔데.”
방 안에 혼자 누워서 조금 쉬고 있자니 뾰롱 나타난 릴리가 호들갑을 떨었다.
[ 나 방금 재밌는 거 듣고 옴! ]
“그러니까 그게 뭔데.”
나는 몸을 조금 일으켰다.
[ 궁금하면.. 궁금하면 젤리. ]
솔직히 별로 안 궁금하다.
반복되는 인생에 특별히 새로울게 뭐가 있을까.
하지만 릴리는 요즘 젤리에 꽂혀있으면서도 은근히 그냥 주는 간식을 다 받아
먹지는 않았다.
악마는 계약이 확실해야한다나?
자기 기분 내키는대로 하는 것 같은데, 글쎄.
어쨌든 이건 드디어 내가 준비한 물건을 테스트 해볼 기회다.
“아, 너무. 궁금하다. 이걸. 줄 수 밖에는. 없겠는 걸.”
나는 최대한 궁금한 척하며 캐비닛 안에 넣어두었던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서는 황홀하게 커다란 곰돌이 젤리가 나왔다.
와! 곰돌이 젤리! 머리보다 크다!
“악마님, 어떠십니까. 제 공물이.”
[ 에.. 에엥. ]
릴리는 황당하다는 눈으로 나와 왕곰돌이 젤리를 번갈아가며 보더니 재빨리
젤리를 낚아챘다.
[ 이, 이게 왠 횡재야! ]
누가 훔쳐가기라도 할 것도 아닌데 사방을 경계하며 조그만 가방에 젤리를 쑤
셔넣었다.
저게 들어가네.
다시 가방에서 나온 젤리는 온전하게 릴리의 손에 들렸다.
[ 히야아.. 인간, 이제야 나를 공경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냐. ]
“님 그 컨셉 이제 안하기로 한 거 아님? 이제 빨리 말하셈.”
나는 다시 침대에 기대 눈을 슬쩍 감았다.
쉬려는데 마침 잘됐다.
찾아오는 릴리 라디오.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 말투가 건방지지만 내가 용서하겠다. 흠, 흠! ]
소녀는 곰인형이라도 안고 있는 것 처럼 대왕젤리를 양 손으로 가득 들고 신
나서 입을 열었다.
[ 너 있던 팀 아저씨들이 너 잘못한거 있나 찾아볼거래. 1군 가면 안된다고.
먼지 털어서 안나오는 거가 어디있냐고. ]
‘그게 무슨 말이야. 털어서 먼지 안나오는 사람이 어딨냐고?’
[ 앗. 그거 맞아. 착짱죽짱? 그거 찾아낼거래. ]
‘그게 뭐가 잘못됐.. 아니다, 어린이는 그런 말 하면 못쓴다.’
[ 난 어린이가 아니라니까! ]
발끈하는 릴리를 두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뒤를 털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라서 뭐, 익숙하다.
인정은 항상 질투를 끌고 온다.
항상 짐작만 하고 있었는데 예상했던대로다.
성남 스톰의 2군 감독이었군.
하석준은 선수 출신의 감독이었다.
제법 실력은 있지만 성격을 주체하지 못하는 면이 좀 있다.
아니, 정정하자.
성격이 더럽다.
하석준은 1군 감독 자리를 얻어내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지금 하석준이 라이벌로 생각하는 스톰 1군 감독은 김지훈인데, 김지훈 감독
은 상당히 고전적인 스타일의 맹장이다.
선수들에게 열정과 마인드를 강조하고 선수 관리를 타이트하게 한다.
몇몇 선수들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그래서 하석준은 이런 문제가 불거질 때 마다 뒤에서 언론 플레이를 시도하곤
했다.
결국 그게 성공한 적은 없었다.
스타일이 어쨌든 김지훈 감독이 하석준 감독보다 훨씬 뛰어나거든.
나도 몇번인가 성남 스톰 1군에서 머물렀을 때가 있다.
처음에는 휴대폰까지 압수하려고 들었던 고지식한 타입의 김감독님은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더 행복하게 웃게됐고, 나중에는 내 전담 마사지사처럼 활동
해 이런 저런 짤에서 강력한 침투력을 가진 사람이 됐다.
어쨌든 내 회귀의 시작은 항상 성남 스톰 2군과의 계약 종료 직전이었다.
이적 할 때마다 꽤 이른 타이밍에 툭툭 찔러 들어오는 공격들이 어디서 시작
되었나 했더니.
‘음···’
[ 어떻게 할거야? ]
‘뭘 어떻게 해. 그냥 둬야지. 뒤져봤자 난 뭐 안나와.’
릴리는 반투명한 곰돌이 젤리를 안고 말간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젤리는 안녹나?
빨리 먹어야 하는거 아닌가?
곰돌이 머리부터 파먹을지 발부터 먹을지 궁금했는데.
[ 피의 복수를 해야지. 건드리잖아. 묻어버려야 하는 거 아니야? ]
‘오우.’
작은 입에서 나오는 말이 공격적이다.
‘어떻게 묻을까?’
[ 음.. 음.. 음.. 실력으로? ]
‘아주 평화적인 방법이군. 그럼 조금만 기다리면 되겠네.’
[ 그래? 그럼 다행이다. 난 또 아무 것도 안하고 있을 줄 알고. ]
릴리가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너무 귀여워서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고 싶지만 참았다.
나는 악마들의 법을 모르잖아.
곰같은 아버지가 화라도 내시면 어떡해?
[ 그럼 이제 1군 가는거야? 우승도 하고? ]
아, 결국 이거였군.
나는 잠깐 대답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 대충 할거면 프로 스포츠를 시작하지 말았어야지. 히히, 안그래? ]
씨익 웃은 릴리가 곰돌이 젤리를 머리부터 뜯어먹기 시작했다.
곰돌이 젤리는 머리는 딸기맛, 가슴은 망고맛, 다리는 포도맛이다.
뜯어먹힌 곰돌이의 귀가 새빨갛게 들여다보인다.
나는 어쩐지 가만히 있다가는 내가 저 꼴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피식 웃
었다.
릴리의 말은 귀여운 협박이지만 하석준 감독은 아니다.
‘그래. 알았다. 이제 좀 더 열심히 해볼게.’
가만히 있는 사람을 건드려?
눈에서 피눈물이 나게 해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