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화. 콜업 안한다니까, 아직은..
“뭐야, 1군 진출 선언한거야?”
“또 뵙겠습니다 들었어?”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오니 팀원들이 농담을 던진다.
생각보다 쉽게 풀린 경기에 다들 마음이 가벼운 듯 했다.
난 뭐, 그런 깊은 뜻은 없었는데.
어차피 사옥에서 돌아다니면 마주치잖아.
나는 1군으로 올라가는 것에 크게 관심은 없다.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이다.
지금도 먹고 살 만큼은 괜찮으니까.
제일 괜찮은 건 1군의 식스맨으로 벤치에 앉아서 괜찮은 연봉을 받는 거겠지
만 그건 내 성격상 못 참을 것 같다.
그냥 지금 이 정도도 나쁘지 않다는 뜻이다.
팀원들이 답답하긴 한데 적도 고만고만하다.
결과가 패배로 이어지면 좀 화나긴 해도.
그러고보니 중국어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었는데.
요새 중국어 공부를 통 안했다.
아무리 너튜브를 틀어도 1강부터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걸.
성조라니?
“그래봤자 그마따리..”
누가 그마 소리를 내었는가?
“유찬이형 점수부심 오졌다.”
“너 나보다 점수 높아?”
“...”
지호는 아무 말도 못하고 찌그러졌다.
우리 솔랭 전사 이유찬은 시즌 중에도 점수 관리를 하신다.
솔직히 저렇게 피지컬만 믿고 무지성으로 게임하는데도 50위 안에 들어간다는
게 믿을 수 없다.
이게 서버냐?
역시 중국으로 가야..
[ 흥, 거기라고 뭐 다를 것 같아? ]
‘아니.. 솔랭은 더 심할 듯..’
[ 됐어. 휴우. ]
릴리는 해탈한 것 같은 표정으로 허공에 동동 떠서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있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크게 한숨을 폭폭 내쉬는데 이런 걸 물어봐주지 않으면
사회성 없는 사람이라고 잔소리 듣는다.
‘왜 그래?’
[ 아까 감독은 너 좋아하는 것 같던데. ]
‘알아.’
나 보러 왔겠지.
굳이 시간까지 빼서.
FWX 1군의 정글러 윤도형은 계약이 올해 11월까지다.
그리고 이듬해, 중국으로 이적한다.
그리 유명한 선수도 아니고 세계 대회에서 마주친 적도 없어서 내가 아는 것
은 이 정도가 다다.
그 외에는 꽤 오래 활동해서 팬들이 좀 있다는 점?
차라리 게임 내에서 어떤 플레이를 하는지를 더 잘 알 것 같다.
계약 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FWX에 들어와보니 선수를 쉽게
내치거나 포기하는 타입의 팀은 아니다.
사실 FWX에 제 발로 걸어들어올만한 선수들이 많지 않은 것도 한 몫 하겠지.
어쨌든 이적은 본인의 선택이었을 것 같다.
그럼 감독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글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오늘 감독이 이 자리에 온 것만 해도 어느정도 그런
걸 염두에 두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FWX 1군이라.
[ 1군 갈거야? ]
‘그걸 내가 정하는 건 아니지. 가라고 하면 가는거고. 어차피 FWX로는 우승
못해.’
[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잖아! ]
‘얘네 성적 알면서. 이번엔 안식년이라고 했잖아.’
[ 안식이 어딨어. 네가 이끌어주면 되잖아. ]
‘말도 안 듣는데. 난 그냥 둘거야. 안 이겨도 상관 없어. 지금도 괜찮아.’
[ 사실은 이기고 싶으면서~? ]
‘...’
귀엽게 생긴 악마의 눈이 여우처럼 가늘어진다.
뭔가 약점을 잡았을 때의 눈빛이다.
[ 너 방송 할 때도 맨날.. ]
나는 귀를 막았다.
귀를 막는다고 릴리의 말이 안 들리는 건 아니지만 릴리는 더 말을 하지 않았다.
승리.
승리라.
나는 이기는 게 좋다.
그래, 솔직히 오늘도 기분 좋았다.
내가 게임을 잡고 흔드는 느낌.
이건 정말 최고다.
하지만.. 여기서?
#
“감독님. 응원하러 가신거에요?”
사옥으로 돌아온 박진현 감독 뒤로 코치가 집요하게 달라 붙었다.
“응. 머리도 식힐 겸.”
박감독은 코를 긁으며 머쓱하게 대답했다.
나오는 길에 잡힌 카메라에 적당히 FWX의 팀 간 우애를 강조하며 화이팅을 외
치고 나왔지만 못내 민망했다.
문제가 될 것은 없었지만 괜히 팀원들에게 불안감을 주려나싶어 박감독은 덧
붙였다.
“혹시 애들이 봤어? 화제가 됐나?”
“아니요. 감독님 생각만큼 감독님은 뛰어난 방송인이 아니에요. 그리고 FL에
는 관심 있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최수철 코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리 리그 하위권 팀이라도 1군과 2군을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구단은
없다.
“그럼 다행이고.”
“그래서, 어땠어요?”
최수철 코치는 박감독을 자연스럽게 조용한 회의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잘하더라, 정말. 플레이가 여유있던데.”
“2군 수준에서?”
“일단은.”
“도형이를 대체할 만큼?”
코치의 날카로운 질문에 감독은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아직 그런 말을 하기엔 너무, 너무 이르지. 어림도 없어.”
“그런 말을 하시는 분이 직관을 다녀와요? 스카우트 팀이랑 말도 안하고?”
“그건 쉬는..”
“형님. 저한테는 안통합니다.”
“우리 도형이 잘 하고 있어. 언제나 대비는 해야하니까. 그냥 그런거야.”
감독은 언제나 욕을 먹는다.
다른 스포츠와 다를 바가 없다.
어쩌면 어떤 면에서는 좀 더 욕을 많이 먹을지도 모른다.
LOS 리그는 감독이 밴픽에 관여하지만, 축구나 농구에서 킥오프나 점프볼을
감독이 하지는 않으니까.
지고나서 욕을 먹을 때면 억울한 면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박진현 감독은 그
러니까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FWX를 마음 깊이 사랑하는 그는 항상 팀을 위해 열심히 움직였다.
책상을 툭툭 두들기던 최코치가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일단은 스카우트팀 쪽에 후보 풀에서 정글러 찾아두라고 할까요?”
“후보 풀? 그건 왜?”
“2군에도 예비 정글은 필요할 것 아닙니까.”
“아니, 건이 콜업 안한다니까.”
“누가 뭐래요? 예비의 예비라고요. 인재 발굴.”
눈치 빠른 최수철 코치의 너스레에 박감독은 피식 웃고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
그리고 다음날 이어진 수원 해머스와의 경기.
해머스의 지난 시즌의 성적은 5위로 우리보다 높았지만, 올해의 우리는 작년
1, 2위 팀을 모두 잡았다.
퓨처스 리그의 순위는 꽤 자주 뒤집어진다.
멤버 변경 폭이 상당히 넓은 편이기도 하고 선수들의 성장이 빠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위권은 그렇지 않다.
연습생들도 원하는 팀이 있기 때문이다.
프로게이머를 지망하는 수많은 어린 친구들도 자신의 이름 앞에 명문 1군 팀
의 이름을 달기를 바란다.
지금으로 따지면 지난 해 LKL 우승 팀인 성남 스톰이나 역사깊은 강팀 인천
트릭스터, 대구 유니버스 같은 팀들이 그렇다.
연습생 유망주들의 선택은 이런 팀들 쪽으로 기울었고, 그래서 대체로 FL에서
도 성적이 좋은 편이었다.
다만 지난 해 2군 우승 팀인 제주 F.L.E는 1군에서는 하위권이었는데, 육성에
힘을 쏟고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여담이지만 F.L.E는 FWX와 함께 최고의 맛집으로 꼽힌다.
음식이 맛있는 맛집.
두 팀의 사옥에 초대 받은 스트리머들이나 선수들은 하나같이 ‘외식을 따로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거나 ‘산지에서 직접 공수한 듯 한 맛’이라며 극찬
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1군뿐만 아니라 2군에도 열심히 투자하지만 8989를 벗어나지 못하는 진짜 ‘맛
집’ FWX는 도대체 어떻게 된 팀인걸까?
어쨌든 우리의 성적은 상당히 고무적인 결과였기에 우리 팀에 대한 주목도는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얘네 돌진 조합 지린다.”
“그래봤잔데?”
수원 해머스는 상당히 저돌적인 조합으로 나섰다.
정글 3밴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자신들의 조합에 힘을 실었다.
어차피 나를 밴으로 막아보려고 하는 건 낭비다.
오히려 잘 하는 것을 골라가는 건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하지만 왠지 열받는다.
왜 밴을 안하지?
내가 쉬워?
어쩔수 없다.
보여주는 수 밖에.
[ 성격 더러워.. ]
청소년기에는 신체 활동이 필요하다고 한다.
일단 내 신체는 청소년기에 해당한다.
신체 활동은 심혈관계 질환의 발생 위험을 낮출 수 있으며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춘다.
그러니까 운동성 좋은 헤크림으로 간다.
“마무리 해줘!”
“잡았다.”
“바텀, 아니 미드로 밀면 게임 끝낼만 해.”
“9초 뒤에 알리 나와!”
“무시해도 될 것 같아.”
“케낸 플 있다 조심해.”
“케낸 사라졌어.”
“나이스.”
수원 해머스가 나쁘지 않은 생각을 했다고 해서 게임 결과까지 나쁘지 않았다
는 건 아니다.
해머스는 우리에게 제대로된 주먹 한번 뻗지 못하고 게임을 내줬다.
“전령이 춤을 추면서! 그대로 게임이 끝납니다! GG! FWX가! 다섯 번째 승리를
챙겨갑니다!”
다시 한 번 연승이다.
감독님은 다시 한 번 POM으로 선정된 나를 토닥이고 오묘한 표정으로 다른 팀
원들을 격려했다.
“건아, 잠깐 이야기 좀.”
일정이 끝나고 다들 정신없이 짐을 챙기고 있는 와중에 구태양 코치님이 나를
조심스레 부른다.
“그, 예비 선수가 들어올거야. 정글러. 일단 선수 등록은 아니고, 조만간 게
스트룸 쪽으로 들어올건데..”
코치님은 혹시나 내가 자리를 빼앗길지 모른다며 불안해 할지도 모른다고 생
각한 것 같았다.
알만하다.
대체로 같은 포지션의 선수가 한명 더 늘어난 다는 것은 경쟁을 뜻한다.
좋아하는 선수가 있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괜찮습니다. 너무 기대하지는 않을게요.”
“건아..”
내가 툭 던져보자 코치님은 약간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기대한다는 말로 콜업에 관한 뉘앙스를 내가 먼저 꺼냈기 때문이다.
“아닌가요?”
“아직은, 아직은 몰라. 너무 기대하지마. 하지만 언젠가는 좋은 소식이 있을
거다.”
구태양 코치님은 참 괜찮은 사람이다.
치기어린 선수의 말투에도 진심으로 대답해준다.
확실히 당장 콜업은 무리다.
아직 빨라도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몇 경기를 봤다고 1군으로 콜업한다고?
다른 팀에서 이적해온, 오래 보지도 못 한 선수를?
FWX도 바보가 아니다.
다만 예비 정글러를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분명 이번 스프링 시즌 내에 무슨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가벼운 암시정도일 뿐이다.
나는 내 실력을 알기 때문에 그것이 이뤄지리라는 것을 한없이 확신한다.
다시 말하지만, FWX도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그럼요. 저도 이 정도가 좋아요.”
“그래도 나는 네 팬이다. 넌 잘 될거다.”
환하게 웃어보인 코치님이 얼른 나를 돌려보냈다.
후.. 이렇게 빨리 신호가 오다니.
결국 또 실력이 드러나버렸나.
군계일학, 낭중지추라.
[ 진짜, 너 진짜 성격 이상해.. 더럽고 이상해.. ]
릴리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종알거린다.
별 수 없다, 어린 악마야.
니가 선택한 사람이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