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화. 호감작은 우직해야 돼
그 후에 일도의 주도 아래에서 같이 야식을 시켜먹는 걸 보니 싸웠던 둘은 어
영부영 소강상태가 된 모양이었다.
그래그래.
그 정도면 됐다.
둘 다 때려칠 것도 아니면서.
근데 방에 있는 얘는 또 왜이러냐.
이유찬이 어째 야식 먹자는 소리도 안한다 했더니.
얘는 멘탈이 강한 줄 알았는데 시무룩하게 앉아있다.
여기 무슨 유치원이야?
“야. 뭐해.”
“나 때문에..”
“뭐라고?”
“나 때문에 모두 싸우고 말았어..”
미치겠네.
“그게 무슨 너 때문이야.”
달래줄 기력이 없다.
“야. 안 잘거면 나랑 솔랭이나 돌려.”
“듀오 못하잖아.”
“그냥 큐 같이 돌려. 밤이잖아. 둘 중 하나는 되겠지. 상대 팀으로 만나면 찢
어줌.”
“너 그마잖아. 나는 챌인데.”
뭐지, 이 도발은?
회귀 당시의 내 계정은 점수가 그리 높지 않았기에 이제야 그랜드마스터에 들
어가있었다.
내가 솔랭에 조금 소홀했지만 감히 이런 말을?
“내 그마는 챌을 찢어.”
“웃기시네. 내가 탑 마오차이 보여줌.”
여기도 차이야?
참나, 유치한 도발에 넘어갈 것 같아?
“내가 왜 마오차이가 쓰일 수 없는지 보여주지.”
“모든 정글 부쉬에서 묘목이 튀어나오는 거 보여줌.”
유찬이는 벌떡 일어나 따라나왔다.
피곤하긴 하지만 게임 한 판정도는 해줄 수 있다.
어차피 주말은 쉬니까.
그래.
솔랭 전사 이유찬, 그래도 네가 제일 낫다.
#
“예성아. 이것 좀 봐봐.”
FWX 1군 소속 서포터 최은호는 발이 넓은 편이었다.
정확히는 괜찮다싶은 사람이라면 같은 팀이든 아니든 일단 들이대고 보는 편
이었다.
누구는 이런 그를 두고 뒤에서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이것도 정치다.
프로게이머로서 자신이 정점을 찍을 수 있을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1군까지 온 것은 대단한 일이 맞지만 1군도 1군 나름이다.
잘하는 팀이 따로 있고, 또 그 팀들은 세계 대회에 나가면 숱한 강팀들과 만
난다.
그래서 최은호는 친목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외국은 질색이다.
한국에서 활동하다가 한국에서 은퇴할텐데 좀 괜찮다 싶은 사람들이랑 발이라
도 걸쳐놔야 은퇴 후에 방송에서 누구누구 썰 푼다, 하면서 친분도 과시하고
그럴 것 아닌가.
하필이면 포지션이 서포터인 것도 아쉽다.
주포가 미드인 쪽이 방송에서 유리한 것 같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
아는 사람을 늘리는 것만이 살길이다!
“얘 우리 2군애더라. 잘하던데.”
그래서 하루에 한번씩은 꼭 1군 미드라이너인 김예성에게 말을 걸었다.
최은호 생각에 김예성은 붙임성이 없는 성격이다.
좀 싸가지가 없는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꼴등에 가까운 FWX에서 가장 쓸만
한 선수였다.
하루에 한번씩은 무슨 대화라도 해서 호감작을 해놔야한다.
“FWX GwonGun.. 아. 알아.”
연습실에서도 깔끔하게 차려입은 김예성이 흘긋 눈길을 준다.
김예성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각종 팀의 선수들이 친추된 목록이 있었다.
최은호의 자랑거리다.
“근데 어쩌라고? 우린 도형이형 있잖아.”
“아니 뭐 어쩌자는건 아니고..”
최은호는 황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냥 그렇다고.”
방금 샤워를 마쳤는지 머리를 툴툴 털면서 김예성이 멀어진다.
최은호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 새끼. 형한테 까칠하긴.”
솔직히 공략이 너무 어렵다.
쟤는 이적하려나? 쟤는?
최은호의 눈이 연습실을 훑는다.
‘도형이는 올해 계약 끝인데. 어떻게 하려나.’
일러도 너무 이른 생각이었지만 최은호는 항상 멀리 보려고 노력했다.
여기저기 찔러보니 FWX가 이번 시즌이 끝나고나서도 과한 투자를 할 것 같지
는 않았다.
만약 팀의 정글러인 윤도형과의 계약이 나가리된다면 다음 해에는 권건이 팀
의 정글러가 될 수도 있다.
솔랭에서 만난 권건은 [진짜]였으니까.
이래서 아무 생각없는 애들은 안된다.
세상 일이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데 친해져두면 좋지.
- FWX Class : 건이야^^ 연습 중이니?
- FWX GwonGun : 안녕하세요.
최은호는 얼른 권건에게 말을 걸었다.
권건은 무뚝뚝하긴 했지만 꼬박꼬박 인사를 잘 받아준다.
괜히 까불거나 기어오르지도 않고 참 착한 녀석이다.
- FWX Class : 그마 달았내^^ㅎ 축하해
- FWX GwonGun : 감사합니다.
- FWX Class : 왤캐ㅜ 솔랭 마니 돌려ㅠ 내 자리 뺐을라구?ㅠ
- FWX GwonGun : 형 무슨 말씀이세요
- FWX Class : 농담이야ㅎ 오늘도 홧팅ㅎㅎ
답장은 더 오지 않았다.
이정도면 친밀도 +1정도 됐겠지?
최은호는 만족감을 느끼며 큐를 돌렸다.
#
“뭐야, 형. 1군 선수들이랑 채팅도 해?”
지호가 배신감 느끼는 표정으로 옹알거린다.
“그냥. 지난 번에 휴게실에서 만나서 우연히 친추했어.”
“와. 부럽다.”
“뭐가?”
“형이랑 채팅할 수 있는거. 내가 말걸면 씹잖아.”
“...”
사실 나는 채팅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다.
그래도 인사정도는 꼬박꼬박 받아주는데, 지호가 보내는 것들은 대체로 재미
없는 농담으로 이루어져있다.
- FWX MintCho : 형
- FWX MintCho : 형형형
- FWX MintCho : 미드에 갈 수 있는 유일한 챔피언은???
- FWX MintCho : 정답
- FWX MintCho : 브리움만 미드라구ㅎ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하는데 내가 뭘 대답해.
자기가 보냈던 채팅을 열어서 보여주자 지호는 쏙 도망가버린다.
그나저나 최은호 이 양반은 왜자꾸 전남친 스타일로 말을 걸지.
나 그런 취향 없는데.
[ 삐빅. 호감도가 감소됩니다. ]
‘어떻게 알았어?’
[ 왜냐하면 최은호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
‘미쳤어? 절대 아니야. 나 그런 사람 아니라고.’
[ 이지호 채팅도 씹었잖아. 이지호의 포지션은? ]
‘도구. 아, 아니. 방금 하도 도구도구거려서..’
[ 한 번밖에 안했는데용. 인성 지립니당. ]
아니다, 이 악마야!
릴리는 점점 초딩이 되어가고 있다.
아, LOS에 나이 제한이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어린애가 자꾸 못 볼걸 봐가지고 이렇게 변하나봐.
귀여웠던 내 릴리 돌려줘.
“어이, 그마 턱걸이.”
다행히 유찬이가 연습실로 들어오자 릴리는 꺄르르 웃으며 사라져버렸다.
“유사 챌임. 조금만 기다려라.”
“시간은 금이라구, 친구.”
빙글빙글 웃으며 유찬이까지 자리에 앉자 감독님이 뒤따라 들어오신다.
내일 있을 경기에 대한 준비다.
“하루 쉬고나니까 회의실이 반갑지?”
감독님은 농담조로 말을 던졌지만 잠시 침묵이 있었다.
나쁜 분은 아닌데 뭐랄까, 요즘 애들의 섬세함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야할까.
“흠흠, 우리는 프로니까 경기 이야기를 하도록 할까.”
“다음 경기는 성남 스톰이야. 지난 시즌 2위의 팀이지.”
코치님이 설명을 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벌써 지난 해 1위를 기록했던 F.L.E를 이겼어. 이 말은 뭐다?”
“우리가 우승한거나 다를 바 없다?”
뻔뻔한 유찬이의 대답에 코치님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더 좋고. 충분히 해볼만 하다는 이야기야.”
코치님이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나가는 동안, 나는 감독님과 눈이 마주쳤다.
감독님은 어딘가 걱정스러운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뭘까?
“..그래서 스톰과 상대할 때는 시간을 너무 오래 끌지 말고 밀어붙이는 것도
중요해. 우리 팀 특성에도 그게 맞을 것 같고. 어때, 건아?”
코치님이 나에게 물어왔다.
“예. 괜찮아요. 스톰 바텀이 초반 교전을 피하는 성향이 있거든요.”
나는 별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아, 이거구나!
감독님은 지금 내 전 소속팀인 성남 스톰과의 경기를 앞둔 상태라는 걸 걱정
하고 있다.
지난 주 마지막 경기에서 창민이가 전 소속팀인 대구 유니버스를 상대하면서
무너진 걸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거의 모든 팀이 내 ‘전’ 소속 팀인걸?
거기다 나는 김창민처럼 떠밀리듯이 온 게 아니다.
내가 선택한거지.
음,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다를 수도 있나?
“걱정마세요. 그냥 경기인데요.”
“건아..”
감독님은 다행이라는 눈빛을 숨기지도 않고 다정하게 내 어깨를 두드렸다.
옆에서 일도도 나를 바라보는 것이 내심 걱정하고 있었나보다.
“그럼 밴픽은..”
시즌 초반이라 그런지 그렇게 크게 정형화된 틀은 없다.
이번 시즌의 메타는 원딜 중심의 메타다.
원딜을 잘 시팅하는 쪽이 결국 승리하기 때문에 원딜과 서포터는 거의 정해져
있는 공식이 있다.
점점 더 탑은 탱커가 선호될 것이고, 정글이 받쳐주는 식이다.
라이너들의 개입이 쉽지 않아 정글러에게 투자를 많이 해 줄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픽이 선호되고 초반 정글링이 빠른 픽들이 유
리한 편이다.
원딜이 중심이지만 정글러의 자립적 오브젝트 관리나 영리한 갱 동선을 짜는
역량이 무척 중요한 시즌이다.
뭐, 안 그런 메타가 어디있겠냐만은.
미드는 캐리력이 강한 원딜을 받쳐주기위한 유틸형, 혹은 팀의 방향성 선택에
따라 탱키한 미드 챔피언을 중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결국 중간에 패치를 통해..
음, 아직은 이른 생각이다.
어쨌든 이번 메타도 나는 익숙하다.
“아마 그쪽은 무조건 아펠을 먼저 가져가려고 할거에요.”
“우리가 선픽인데, 아펠 밴 안하면 바로 뽑자.”
팀은 밴과 픽을 예상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밴픽싸움이 생각한 대로 귀신같이 돌아갈 때도 있지만 이런 회의가 아무 쓸모
도 없을 때도 있다.
팀에 첩자가 있나 싶을 정도로 발리는 밴픽 싸움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 싸움은 아마 감독님과 코치님이 잘 담당해주시겠지.
최소한 정글 카드는 여러장 준비되어있으니까.
선수들이 도와줄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다.
“건아.”
잠시 일도를 중심으로 대화가 돌아가는 사이 감독님이 다가오셔서 따로 말을
건다.
“내일 경기말인데.”
감독님은 잠깐 무언가 고민하는 것 같다가 말을 하지 않기로 하신 것 같다.
“음, 아니다. 아무튼 너무 부담갖지 마라. 잘하고 있고, 잘 될거다. 일단 네
가 좋은 모습을 보였던 픽들을 중심으로 구성할텐데..”
성남 스톰을 나보다 더 의식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감독님.”
나는 든든한 눈빛으로 감독님을 바라봤다.
“걱정마세요. 제가 다 박살내놓을게요.”
‘전’ 소속 팀이랑 처음 경기하는 거?
나같은 인재를 놓친 거?
그럴 수 있지.
회귀 전의 나는 그렇게까지 특별한 선수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어쨌든 모든 팀은 박살낸다.
그 안에 ‘전’ 소속 팀이 들어있을 뿐이지.
난 절대 그런 거 의식 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