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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16화 (17/326)

016화. 트롤은 게임 속에만 있는 게 아니다

숙소로 돌아온 두 사람은 서로 대화를 하지 않았다.

솔직히 우리 감독님과 코치님은 꽤 괜찮은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감코진이 그렇듯 연령대가 크게 차이 나지않고 카리스마도 있으며

열성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어린 친구들을 잘 다룰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건이 형.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해?”

일도는 멘탈이 약하다.

우리 왕자님은 도대체 어떻게 챌린저가 되었나.

정치를 한번도 안 당한건가.

싸우기만 해도 엉엉 울면서 게임을 삭제할 것 같다.

“이런 일 처음이야?”

“응. 주먹질 하면서 싸우는 건 봤는데, 감정 싸움은 처음이야. 차라리 패지.”

아.. 그런 쪽이었어?

챌린저가 맞는 것 같다.

어쩐지.

역시 우리 주장.

“음.”

190을 넘는 키가 눈에 들어온다.

어깨도 아주 넓다.

필라테스만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 생각해보니 필라테스는 괴물을 만드는 운동이었다.

상상보다 훨씬 힘들거든.

순한 눈빛을 하고 있지만 매일매일 키와 근육이 자라는 우리 원딜에게 함부로

피드백?

아마 안될 것 같다.

“괜찮아. 가만히 있어도 돼. 프로라면 감당하겠지.”

못하면 소리소문 없이 은퇴하는거고.

뒷 말은 삼켰다.

“근데 둘이 같은 방 쓰잖아..”

발을 동동 구르자 바닥이 울린다.

나는 그냥 일도의 입에 과자를 물려주고 조용히 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역시 형. 형만 믿을게. 부탁해.”

일도는 그 눈빛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얌전히 과자를 먹었다.

아, 조금 귀찮아지는데..

“지호.”

나는 거실로 나가서 멍하니 앉아있는 지호를 불렀다.

방에는 창민이가 들어가 있는 모양이다.

얘네 이러면 밤에 잠은 어떻게 자냐.

“아, 형.”

지호가 미묘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나를 따라 카페로 나왔다.

자기 편을 들어줄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응, 그거 아니야.

팀에서는 싸운 놈들 다 똑같아.

“왜 그렇게 감정적으로 했어. 우리 멘탈 수업도 따로 듣잖아.”

실제로 그렇다.

직장 내 필수 이수 교육같은 느낌이긴하지만 어느 팀이건 의무적으로 멘탈 수

업을 듣는다.

“건이 형.. 그게 더 문제야. 우리 멘탈 수업도 듣는데 창민이형이 너무 추하

게 굴잖아..”

지호는 쌓인게 많은 것 같았다.

“솔직히 나도 잘한 건 없는데, 그래도 그렇게 하면 안되는거잖아. 아냐? 실수

안하는 사람이 어딨어. 당연히 다 하지. 이해해 줄 수 있어. 근데 미드 로밍

갈 때마다 느끼는건데 연기도 못한다 아니야? 나도 없는 시간 빼서 온건데 자

꾸 니가 시야에 걸렸다하고. 갈 때마다 시간 낭비만 시키고.”

이럴 때는 들어주기만 하는 것도 방법이다.

나는 여기서 멘탈 코치를 하고 있는게 아니니까.

지호도 감독님 앞에서는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는 말하기 어려웠을거다.

이 나이대의 친구나 같은 팀원끼리만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있다.

“그랬어?”

“그래놓고 다른 사람 꼽주는건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래? 거기다 자기

잘못은 빼고 말하잖아. 감독님 앞에서도 자꾸 그러더라.”

“그랬구나.”

지호는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힘차게 마셨다.

힘도 좋지.

한 번만 더 빨면 한 잔 다 마시겠다.

“그래서 감독님이 뭐라고 하셨는데?”

“뭐 뻔한 말.. 너네는 한 팀이라고.”

“맞는 말씀 하셨네.”

“나두 그렇게 생각하려고 알겠다고 했는데, 창민이형이 진짜 태도가, 와, 진

짜. 마지못해 알았다는 것처럼 네.. 이 지랄 하는데 화가 나, 안나? 선생님

앞에서는 대충대충 넘어갔는데 그 표정 알지. 진짜 하나도 인정 안하는 표정.”

지호는 흥분했는지 감독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렇구나, 이 친구도 참 어리다.

이제야 19살.

1군 리그의 출전 제한인 만 17세를 넘은지 오래 되지 않았다.

창민이도 갓 스무살에 불과하다.

화가 난 지호가 아메리카노를 다 마셔버렸다.

나는 손대지 않은 내 음료를 지호 앞으로 내밀었다.

지호는 냉큼 달콤한 아이스 초코를 마시기 시작했다.

“지호, 내 편 들어주려고 그랬지?”

“형! 역시 알고 있었구나. 솔직히 다른 건 그럴수 있지만 형은 진짜 계속 캐

리해주는데. 솔직히 나는 다른 애들이랑 했으면 우리 절대 못 이겼을 것 같은

데. 그냥.. 그냥 다 오더주고 버스 태워주는데 기사님한테 말하는 꼬라지가..”

나는 가만히 손을 들어 지호를 저지했다.

“지호야, 고마워.”

“형..”

“그런데 괜찮아. 내가 기분 나빴으면 내가 직접 말 할 기회를 줘야지. 네가

뺏어버린거잖아. 마음은 고맙지만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팀적

으로도 안좋은 행동이었어.”

지호는 조금 기가 죽은 것 같이 고개를 숙였다.

이제 달래줄 차례다.

“플레이로 보여주자. 넌 잘 하고 있어. 창민이도 열심히 하고 있겠지. 우리는

팀이고, 프로잖아. 내가 직접 이야기 해볼게. 오늘처럼 행동하지는 말자. 네

가 바랬던 꿈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지?”

지호는 아이스 초코도 다 마셔버렸다.

단 게 들어가니 조금 기분이 나아졌는지 잠자코 고개를 끄덕거렸다.

젖살도 빠지지 않은 볼이 빵빵한게 아직도 참 어린애다.

귀엽네.

“형 진짜 진지충이다. 근데 막 싫고 그러진 않아. 오히려 좋아.”

참나, 말버릇 하고는.

이래서 어린애들이란.

#

아, 내가 팔자에도 없는 멘탈 코치같은 일을 하고 있다.

멘탈 코치 유무는 팀마다 다른데 어떤 팀은 개인 전담 멘탈 코치가 있기도 하다.

물론 그게 감정적인 것만 이야기하는 건 절대 아니다.

워크에씩 관리라던가 성취감 고양, 방향성 제시 뭐 그런 것들을 하면서 감정

상담같은 것도 같이 따라다닌다.

우리 팀에는 따로 멘탈 코치 직책이 없다.

대부분의 2군 팀에 멘탈 코치가 따로 없기도 하다.

일단 비용 문제도 있거니와 2군 멤버는 워낙 자주 바뀌고, 뭐.. 이것도 팀바

팀이긴 한데 어쨌든 확실한 건 감독님과 코치님이 애들 마음을 이해할 수 있

냐 없냐와 별개로 바쁘긴 하다는 거다.

이러다가 도저히 감당이 안되면 그냥 2군 팀을 반쯤 찢어버리면 된다.

이런 식으로 다툼을 벌이는 것도 당연히 평가 대상이다.

그래서 실력이 중요하기도 하다.

똑같이 싸워도 잘리는 쪽을 상대로 만들어버릴 수 있으니까.

“창민아.”

김창민이 밉지 않냐고?

당연히 좋지는 않다.

말을 그렇게 하면 좋아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거다.

그런데 밉냐고 한다면 또 그렇지는 않다.

지호야 뭐 이것저것 복합적으로 짜증이 나있었고 갓 데뷔한 어리둥절한 어린

애라지만 나는 LOS판에서 닳고 닳아 썩어버린 고인물이다.

창민이가 한 소리는 타격감이 없다는 뜻이다.

“뭐하냐.”

방 안에 앉아있던 창민이가 화들짝 놀란다.

창민이는 키는 160 중반이지만 제법 살집이 있는 편이라 몸이 느리다.

주목받는걸 좋아하고 그게 마음대로 안되면 목소리가 커진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아니, 아니, 장점을 생각하자.

창민이는 농담을 많이 한다.

남들을 웃기는 걸 좋아하는데 그 방식이 주로 동생들이나 만만한 사람을 깎아

내리는.. 아니, 말하다보니 진짜 별로잖아?

그래도 일단 팀이다.

마음에 안드는 사람이랑 팀이 되는 것?

흔해 빠진 일이다.

“거, 건이 형.”

창민이는 대놓고 쫄아있었다.

모를 리가 없지.

내가 팀에서 중요하다는 건 겜알못 릴리도 안다.

“왜 그랬어?”

좀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다.

당장 미드라이너를 갈아치울 수는 없다.

내가 뭣도 아닌데.

아직은.

“아니, 그게 아니라.”

“뭐가 아닌데?”

“소, 솔직히 편 가르기는 좀 아니지 않나?”

“누가? 네가? 반성 중이야?”

“아니, 형 지금 지호 편 들고 있잖아.”

“나 아무 말도 안했는데.”

창민이는 뭐가 그렇게 바쁜지 숨을 몰아쉬고 있다.

편견 가지면 안되는데, 썩 보기 좋은 모양은 아니다.

“형 나한테 따지러온거잖아.”

“그건 맞지. 니가 나한테 정글 차이라며.”

“나는 CS랑 KDA가 ‘차이’난다는 말을 한거지.”

개소리를 참신하게 하네.

채팅으로 칠 것 같은 말을 실제로 하다니 정말 보기 드문 타입이다.

“그럼 너도 미드 차이?”

툭 던지자 창민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자기는 해도 되고, 남은 안된다 이건가.

“아니..”

“왜 그렇게 화가 많이 났냐.”

나는 지금 창민이를 박살내놓을 백만 팔천 오백 육십가지의 말이 떠올랐지만

참았다.

프로 리그라고해서 트롤이 없을 것 같은가?

아니, 분명히 있다.

승부 조작처럼 보일 정도로 엉망진창인 경기도 있다.

게임을 하다가 멘탈이 나간 경우, 감코진이 골라준 픽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경

우, ‘피드백’이 마음에 안들었던 경우, 심지어 그냥 사적인 이유까지.

불만을 플레이로 표현하는거다.

이런 상황은 팀의 순위가 낮을 수록 많아진다.

선수가 팀을 존중하지 않을 때.

이깟 프로게이머, 다 때려쳐버리고 싶고 지금은 그냥 남은 경기만 소화하고

이듬 해에는 인터넷 방송이나 해야겠다 싶을 때.

이 감정은 내가 느꼈던 감정과 참 비슷한 면이 있지만, 나는 어떤 경우에도

게임을 할 때 던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게 릴리가 말한 열정인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창민이를 더 긁지 않고 참은 건 이 못난 놈이 당장 프로게이머고 뭐고

때려치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떼를 쓸까봐서다.

그건 더 최악일 수도 있으니까.

“창민아, 나 그 말 듣고 기분 좋지는 않더라.”

침착하게 말해봤다.

화내봤자 얘만 자극될 뿐이고 나도 똑같은 사람이 될 뿐이다.

“그건, 그냥. 충동적으로..”

창민이의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

“상대 정글이랑 미드 때문이지?”

“하, 그 새끼들 진짜 못하는데..”

“사고만 안 났으면 충분히 해볼만 했을텐데. 아쉬웠다.”

“그러니까. 그냥 발라버렸어야되는데..”

여기까지 말하던 창민이가 내 눈치를 본다.

하고싶은 말은 많은데 좀 민망한 모양이다.

아무도 이런 투정은 안 들어줬을테니까.

“상성도 별로 안좋았지.”

창민이는 죠이를 들고 오리안느를 상대했다.

사실 절대 안좋은 상성이 아니다.

오히려 좋을 수는 있지.

그래도 그냥 그렇다고 말해준다.

“맞지 맞지. 아무래도 좀, 나는 미드 중심으로 했으면 좋겠는데 지난번에도

약속한대로 안하고 나만 세라핌 시키고. 자꾸 그런거 하면 감 떨어진단말이

야. 내가 도구도 아니고.”

이 새끼 말하는 뽄새가 영 글렀지만 참는다.

잘 달래본다.

“다음에 내가 감독님께 말씀드려볼게. 특히 유니버스랑 할 때.”

“아 진짜? 완전 땡큐지.”

창민이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리고 다시 눈치를 본다.

거,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쇼.

“솔직히 정글이 잘못했다고 생각 안해.”

“그래? 그럼 누가 못했는데?”

“그냥.. 우리 다..”

이 정도면 많이 왔다.

“다음부터는 그렇게 말하지 말자. 우리 팀이잖아. 호흡 잘 맞춰야 다음에 유

니버스 만났을 때 찢어버리지. 원래 리그라는게 그렇잖냐. 마지막에 이기는게

최고인거 알지.”

“하.. 그래야지.. 진짜 실수였으니까.”

“네 말이 맞다. 그리고 지호가 너 걱정하더라.”

“이지호가? 날?”

“어. 그래도 형한테 자기가 너무 발끈한 것 같다고. 걔가 은근 무뚝뚝하잖아.

형인 네가 적당히 좀 풀어라.”

“아, 오케이.”

이정도면 됐다.

내가 기저귀까지 채워줬다.

일단은 이걸 데리고 가는 수 밖에.

조금만 참자.

“근데 정글 차이는 사과는 안하냐?”

“아.”

아무리 그래도 정글 차이는 참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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