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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15화 (16/326)

015화. 스킬이나 똑바로 맞춰

“맛있어?”

[ 응응, 이거 예쁘다. ]

맛있다는거야 뭐야.

릴리는 내가 준 딸기를 먹고 있었다.

빨간색이 아니라 딸기우유색이었는데, 어디의 특별한 품종이라나.

나도 처음본다.

[ 히히, 새콤달콤 보석같아. ]

“그래. 네가 좋다면 됐지.”

커다란 딸기가 릴리의 얼굴을 가린다.

귀엽네, 주문하길 잘했다.

[ 기분이 안좋아? ]

릴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본다.

“아니?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 여기가 이렇게 굳어있잖아. 이렇게. ]

어깨를 들썩들썩, 승모근 말하는건가?

“긴장했나보지.”

[ 져서~? ]

릴리의 눈이 배시시 웃는다.

“뭐, 게임 한두번 지나.”

[ 2군이라서 만만하다며? ]

“...”

[ 캐리 가능하다며? ]

“게임은 혼자 하는게 아니야.”

릴리는 손에 쥐여있던 딸기를 남김없이 먹어치우고 딸기 꼭지를 허공으로 던

졌다.

딸기 꼭지가 사라진다.

[ 나도 알아. LOS는 10명이 하는 게임이야. 한 팀은 5명이고. ]

“...”

[ 근데 난 여태까지 네가 팀원들이랑 같이 게임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다 도구처럼 생각하는거 아니었어? ]

도구라니, 얘가 뭘 알고 이런 말을 하는건가?

“여태까지 같이 했잖아. 오더도 하고, 상의도 하고.”

[ 아, 딸기 맛있었다. 역시 분홍색 딸기. 색깔 차-이. ]

얘가 진짜 뭘 알고 이러는건가?

#

“너무 흥분했었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고작 1패야.”

“동의합니다.”

양태진 감독과 구태양 코치는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맞는 말이지만, 약간 처지는 기분과 불안한 감정은 어쩔 수 없다.

혹시 이 패배가 연패의 시작일까 두려운 마음이다.

“애들한테는 불안감 티내지 말자.”

“전 안 불안한데요? 감독님, 불안하세요?”

“어휴. 말을 말자.”

양태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같이 해 온 시간만큼 서로를 잘 아는 그들이기에, 구태양도 불안해 하고 있을

것을 잘 안다.

하지만 둘 다 불안에 떨 수는 없다.

한번 패배를 경험했지만 여전히 작년보다는 훨씬 좋다.

“근데, 창민이 말이에요..”

구태양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음.”

양태진도 약간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친정팀을 만나서 조금 긴장했던 것 같죠. 그것보다는 잘 하는 친구

인데.”

“휴, 정말 신경쓰고싶지 않았던 이야긴데.”

경기가 끝나고 모였던 피드백 자리.

김창민은 여전히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악감정이 있기에 반드시 혼내주고 싶다고 말했던 정글러의 하드 캐리.

그리고 자신의 자리를 뺏었다고 생각했던 미드라이너에게 빨려들어가 호되게

당한 것.

그 모든 것이 김창민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일인 듯 했다.

“멘탈 케어를 잘 해줘야 할 것 같은데.”

“저도 따로 가서 이야기해봤는데, 지금은 대화가 잘 안통해요.”

“그럴 수 있지. 그 분노가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게 해보자.”

“그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건 아니니까요. 말 잘 해봐야죠.”

두 사람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문서를 정리했다.

#

창민이는 꽤 유쾌한 스타일이다.

유찬이의 엉뚱한 기질도 곧잘 받아주면서 유산균 비데를 주장하는 두 사람 중

하나이기도 하고.

하지만 유쾌함이나 말이 잘 통한다는 것이 정신적 성숙을 뜻하는 건 아니다.

“아~ 아쉽네. 다음 주에는 전승 해버릴까?”

팀원들끼리 가진 식사시간, 창민이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어제도 유찬이형이 안 잘렸으면 이겼을 것같은데. 그랬음 진짜 전승

각인데.”

“창민아, 그건 좀.”

눈치빠른 일도가 창민이의 입을 막으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 시야 체크 했어야지. 아~”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하는 것처럼 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가시를

눈치채지 못할 팀원들이 아니다.

“스노우볼 몰라? 스노우볼 굴러간거잖아. 에휴.”

이미 피드백도 진행했고, 유찬이의 사일이 끊겼을 때 빠르게 손을 떼지 못 한

부분에서도 문제가 있었다는 것도 모든 팀원들이 자각했는데.

다시 한 번 굳이 저 이야기를 꺼내는 의도가 훤히 보인다.

“내가 미안해. 나 때문에 진 것 같아.”

기가 죽은 유찬이가 머쓱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도 쭈글거리고 있어서 탑 마오를 하겠다고 신내던 사람이 맞나 싶다.

“유찬이형, 우리 그런 말 안하기로 했잖아. 괜찮아. 그리고 창민이형, 우리가

다 못한거지 뭐. 다음 경기 잘 준비하자.”

일도가 최선을 다해 다독거리고 있었지만 가라앉은 분위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냥 한 번 졌을 뿐인데.

그거 가지고 기가 죽은 팀원들이나, 자기가 잘못한 부분은 쏙 빼고 큰 소리를

내는 창민이나.

머리로는 그 마음이 이해되지만 가슴에서는, 글쎄.

화풀이일 뿐이다.

“에이. 탑도 그렇고 그리고 정글 차이 너무 심했잖아. 그렇게 울라프가 크면

어떻게 막아?”

이제 창민이는 나를 향해 화살을 돌렸다.

오랜만에 겪는 일이네.

저런 건 무시하는게 답이다.

이미 자긴 잘못한게 없다는데 어떻게 저걸 설득하겠어.

나는 그냥 고개를 돌리고 식사에 집중하려고했다.

“진짜 듣자듣자하니까 선넘네.”

뭐지, 내 속마음이 입 밖으로 나왔나?

“창민이형. 정신 차려. 그때 형이 킬에 정신 나가가지고 킬무새처럼 소리지르

니까 건이 형도 들어간거잖아. 우리가 바보인줄 알아? 잘 모르나본데, 아군

시야는 공유돼. 다 보인다고. 그리고 우리 목소리 녹음 다 되어있거든?”

잔뜩 짜증이 난 표정의 지호였다.

“왜 지랄이야, 정말. 초반에 유찬이형이랑 건이형이 퍼블 따서 분위기 좋았는

데, 다 말아먹은건 죠이잖아. 그리고 오리한테 굳이 앞 궁 써서 죽은 건 더

레전드.”

오.. 속이 시원하긴 한데, 얘도 선 넘는다.

이제 아무도 식사를 하지 않고 있다.

“아니, 난 그냥 피드백 하는거잖아.”

창민이가 간신히 침착한 척하는 표정으로 입을 뗐다.

“피드백? 이게 무슨 피드백이야. 우리 피드백 시간 끝났어. 실컷 이야기하고,

다음 경기 준비하기로 했잖아. 내가 좆밥 프로라도 이따위로 이야기하는게 도

움 안되는건 알겠다.”

“지호야, 그만해.”

“스킬이나 똑바로 맞춰. 우리는 뭐 지적하고 싶은게 없어서 닥치고 있는 줄

아나.”

“야. 이지호, 너 형한테 무슨 말을 그따위로 하냐?”

“뭐. 어쩔건데?”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두 사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양 옆에서 우르르

붙어 말린다.

[ 와, 싸운다! 이게 ‘팀’이라는 거구나! ]

릴리까지 박수를 친다.

아니,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거야.

이런 개판인 상황을 뭐 어쩌라고?

“건이형, 애들 좀 말려줘. 지호야, 진정해. 진정해!”

주장인 일도는 그 큰 덩치로 울상을 짓고 있었고, 유찬이도 마찬가지다.

창민이와 지호는 실제로 주먹을 휘두를 것도 아니면서 바락바락 소리만 지른다.

이렇게 보니까 정말.. 애들이구나.

처음 만난 인연들, 상상도 하지 못했던 2군 FWX.

쉬울 줄 알았는데.

“창민이, 지호. 둘 다 앉아.”

여태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내가 입을 열자 두 사람은 나를 쓱 쳐다본다.

폭력 사태로까지 넘어가고 싶지는 않았을테니 누가 단호하게 말려주기를 기다

리고 있었겠지.

“앉아. 빨리. 우리, 여기서 계약하고 일하는 프로야. 학교가 아니잖아.”

내 엄한 목소리에 입을 벙긋거리던 두 사람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앉았다.

“밥 먹어.”

“건이형, 근데 창민이형이..”

“여긴 식사 자리야. 진지하게 피드백 할거면, 시간 따로 잡고 피드백 룸으로

가.”

“이런 식이면 기강이..”

“창민이 너도.”

머리가 아파온다.

나는 항상 ‘우승에 가까운 팀’을 선택해왔고, 팀원들은 대체로 책임감이 강하

고 무던했다.

무엇보다도 팀에게 믿음이 있었다.

우리가 우승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서로를 무시하지 않

는다.

“얘들아.”

그럼 그 팀의 감독과 코치들은 그렇게 만들기까지 얼마나 애를 썼을까.

그 노고를 알 것만 같다.

“누가 잘했고 잘못했는지는 우리가 판단할 게 아닌 것 같은데. 못 믿고 불만

이 있을 수는 있지. 근데 우리가 서로 이럴려고 모인건 아니지 않냐?”

“건이형..”

아무리 좋은 팀들이라 한들, 한번도 다툼이 없었을리가.

더 심각한 일도 종종 있었다.

다툼으로 인한 이적은 생각보다 흔하다.

이적까지 이어지지 않더라도 깊어진 감정의 골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도.

합숙까지 하면서 오랜 시간 붙어서 온갖 못 볼 꼴을 겪는 만큼 흔한 이야기일

수 밖에 없다.

“LOS, 이기려고 모였잖아.”

이런 늙은이같은 말이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살면서 얻어온 생각이다.

사실 난 이 애들에 비해 늙은이도 맞고.

어쨌든 지고싶어서 게임을 하는 사람은 없고 프로 중에서는 더더욱 없다.

더 말을 잇지 않은 창민이와 지호는 여전히 서로 자기가 더 화났다는 표정으

로 앉아서 콧김만 몰아쉬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카페테리아 문간에 구태양 코치님이 나타났다.

일도가 재빠르게 코치님을 부른 모양이다.

코치님은 표정이 굳어있는 선수들을 재빨리 살핀 뒤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건아, 말려줘서 고마워. 두 사람, 식사 마치고나서 따로 이야기 좀 하자.”

나도 일도를 향해 슬쩍 눈짓했다.

여전히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일도도 나에게 눈썹을 살짝 찡긋해보였다.

이 팀, 잘 모르겠다.

고작 세번 이기고 한번 졌다고 이렇게까지 감정이 널뛰기 뛰듯하다니.

프로 리그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별별 사람이 다 있네.

[ 이제 안 싸워? ]

릴리의 동그란 머리가 불쑥 나타났다.

‘모르겠어. 당장은 끝났겠지.’

[ 왜 남 탓을 하는거야? ]

‘그게 마음이 편하니까 그렇지 않을까?’

[ 한명만 잘못해서 질 때도 있어? ]

‘경기에서 그런 일은 없지. 같이 판단하니까. 결국 모두의 잘못이지.’

[ 이상하네. LOS 정말 재미있는데. 못하면 그냥 내가 더 잘하고 싶을 것 같은

데. ]

‘릴리야, 네가 선수해도 되겠다.’

[ 히히. 정말? ]

#

식사 시간이 끝난 뒤, 나와 유찬이, 일도는 한명씩 상황 설명을 위해 짧은 면

담을 거쳤다.

“형, 난 지호가 인장 띄우고 춤추는게 LOS 안에서만 그런 성격인 줄 알았어.”

일도가 내게 소심하게 속삭였다.

“지호는 왜 그렇게 화가 났던거야? 그냥 천천히 감독님한테 보고할 줄 알았는

데.”

“음, 그냥, 지호는 원래 그런 걸 싫어하는 것 같아. 그.. 은근히 누구 괴롭히

고 그런 것들. 그리고..”

“그리고?”

“지호가 형을 엄청 좋아해. 형만큼 잘하는 정글러 처음 본다고. 콜같은 것도

많이 배운다고 좋아하더라고. 유찬이형도 좋아하고.”

“유찬이는 왜?”

“건이형을 이 팀으로 데려왔잖아.”

음.

내 편을 들어주려다가 그렇게 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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