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화. 사고가 났어요
“아, 오늘도 이기면 탑 마오 가는건가?”
“어림도 없지. 유찬이형 못하게 내가 밴할거임. 쟤들 바텀 스펠 둘 다 없다.”
우리 팀은 농담도 해가며 기세 좋게 플레이했다.
상대인 대구 유니버스는 나를 키 플레이어로 판단한 모양인지, 집요하게 내
정글링을 방해했다.
뭐, 그럼 피해다니면 되지.
압박을 당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고, 내 성장도 앞서나가고 있고.
이정도는 여유롭다.
“이 쪽에 와드.”
“내가 갈게. 내가 갈게.”
“여기 제어 와드, 부쉬 바깥에 꽂혔다. 시야 조심해.”
“엇! 쏘리쏘리, 건이형 땡큐. 일도형 조심해. 여기야.”
자잘한 실수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게임은 순항 중.
뭐가 순항 중이냐고?
내가 무난하게 크고 있다는거.
[ 잘난척하긴. ]
‘초 치지 말고 저리 가있어. 바쁘다.’
[ 뭐어.. 이제는 경기 뛰기 싫다더니. ]
‘그래도 시작한 건 해야지.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닌데. 2군 경기 쯤이야.’
[ 밥도 주고 잘 곳도 주고? ]
‘그렇지. 적당히 하다가 다음 회차에는 중국으로 가서 우승해야지. 돈도 많이
벌고.’
[ 다음 회차? 아직도 그 생각이야? ]
‘이제 가.’
[ 흥, 글쎄. ]
더 상대해주지 않자 릴리가 스르륵 사라진다.
어디 집중을 방해하고 있어.
...그나저나 전에 주문했던 무슨 딸기는 이제 배송 왔으려나.
“어, 여기 어!”
갑자기 들려온 유찬이의 단말마에 정신이 퍼뜩 든다.
찰나의 순간, 전령 근처에서 상대에게 물려버린 유찬이의 사일런트.
“빠져!”
“나 수면 가능! 싸움 보자!”
내 콜과 거의 동시에 창민이가 목소리를 높여 외치면서 합류했다.
하지만 상대 냐르, 울라프에 이어 오리안느가 빠른 지원을 왔고 먼저 물린 사
일이 금세 터져버린다.
빠르게 빠져야하는 상황이었지만 창민이의 죠이는 이미 몸이 쏠렸다.
“오리 오리 오리 오리 봐줘!”
“아니..”
사일이 난동을 부리면서 죽은 덕에 상대 냐르와 오리안느의 컨디션이 좋지는
않았지만,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조이의 스킬 샷.
심지어 스킬을 맞았더라도 상대가 스펠로 반응했다면 죽었을지 확신하기 어렵다.
그리고 가진 스킬을 모두 써버린 죠이와 곁에 있던 내 그브는 그대로 울라프
의 제물이 됐다.
“아.. 울라프 트리플이네.”
“까비. 침착하게 해보자.”
바텀에 있던 일도가 조용히 격려했다.
아, 이거 안좋은데.
“나 어떻게 알았지?”
“쟤들 내 정글 동선 파악하려고 이쪽에 와드했었어. 내가 좀 더 콜 잘할걸.
미안.”
“아, 음. 건이 네가 아까 말했었는데..”
유찬이는 내 사과에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또 관성적으로 플레이한 모양이다.
주도권에 따른 암묵적인 와드 위치가 있기 마련.
하지만 팀의 선택에 따라 따르지 않을 때가 있는 법이다.
우리도 모든 시야를 다 잡을 수는 없고.
릴리가 나에게 말을 건 것과 관계 없이 좀 더 꼼꼼하지 못했던 유찬이의 실수
고, 해프닝으로 끝낼 수 있었던 사고에 빨려들어간 게 훨씬 큰 미스였다.
“그렇구나, 얘들아 쏘리쏘리. 내가 방심했어.”
“괜찮아, 나 열심히 크고 있으니까 용 앞 한타 보자.”
“형! 형! 우리가 캐리할게!”
유찬이의 사과에 일도와 지호가 격려하며 분위기를 북돋웠다.
창민이는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얘 엄청나게 감정적이구나.
“침착하게 해. 울라프 괴물이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패배의 냄새가 난다.
설마.
내가 있는데 지지는 않겠지.
#
“유니버스에 괴물이 살고 있는데요?”
“아, FWX 바텀도 모두 스펠이 빠지고 간신히 살아나갑니다!”
“유니버스 입장에서는 상관없죠. 다시 오면 됩니다.”
“완전히 디나이 당하는데요? 저기서 웨이브가 다 타고 있는데! 하지만 도끼를
든 울라프가 눈을 흉흉하게 빛내고 있어요!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유니버스의 전략은 이거였군요. 정글 압박! 초반에 잘 되지 않는가 싶더니,
전령 옆 교전에서 승리 후 끊임없이 압박을 해줍니다! 웨이브 손해를 불사하
고..! 아! 이럴수가! 바텀마저!”
“정말 잘 들어간 콤보였는데!”
답답함을 참지 못한 이지호의 알리스티가 타워를 끼고 이니시를 걸어봤지만
이미 성장한 울라프의 강한 스킬샷에 녹아내릴 뿐이었다.
“침착하게 상대 울라프 흘리면서 플레이해봐.”
적 정글이 갱 중심으로 라인을 돌아다니는 사이, 권건은 성장 회복을 위해 정
글을 누비고 다녔으나 이미 전령으로 탑을 민 상대 냐르가 집요하게 권건을
마크했다.
“이대로 가면 계속 밀려. 하나 끊어보자!”
“얘 선넘었다. 사이드에서 오리 보자.”
김창민 역시 상대 미드에게 집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선택이 제법 합리적이었기에 이유찬과 김창민은 바텀으로
향했다.
“나 미드 백업. 빠르게 잡고 빠져. 우리 합류 할 수 있는 사람 없어. 적 울라
프는 탑.”
권건이 미드 백업을 하는 사이 두 사람이 오리안느를 노렸다.
죠이의 수면 스킬을 회피하기 위해 오리안느의 점멸이 빠지고, 사일런트의 스
킬이 적중하는 순간.
“나 킬! 나 킬!!”
김창민의 강한 외침에 이유찬이 손을 멈칫했고, 그 순간 막타를 치러 들어간
죠이의 위로 죽기 직전의 오리안느의 모든 스킬이 발동됐다.
“아아아아! 사고가 났어요!”
“오리안느가 실제로 꽤 멀리 나갔었죠? 그래서 FWX가 각을 잘 봤는데, 오리안
느가 죠이를 데려갑니다!”
“죠이의 플레이가 너무 아쉽습니다. 체력 관리가 덜 되어 있는 상태에서 몸을
굳이 밀어넣지 않았어도 충분했을 텐데! 차니 선수도 킬을 양보하려다 방심한
것 같아요.”
“이러면 하나도 손해가 아니죠! 합류하기 위해 사일이 순간이동 스펠까지 사
용했는데, 오리안느가 죠이를 데려가면서 동귀어진! 그 사이에 대구 유니버스
가 전령을 다시 한 번 차지합니다! 피리부는 오리안느가 됐어요!”
“오리안느를 플레이하는 대구 유니버스의 몬스 선수는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1군 로스터에 있다가 이번에 2군으로 샌드 다운 된 선수죠. 아주 깔끔한 경기
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퓨처스 리그에서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으면 좋겠
네요.”
오리안느의 침착한 플레이에 칭찬이 쏟아졌고 FWX의 보이스는 조금 더 가라앉
아있었다.
수천번을 돌려온 게임이다.
이기는게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 선수들은 없다.
오늘 이겨서 전승을 차지하겠다는 각오는 울라프의 강력한 도끼 앞에 눈녹듯
사라졌다.
오리안느의 공을 달고 노틸러드가 적당한 CC기만 지원하면 타워 안이건 밖이
건 아군 챔피언이 터져나간다.
생각보다 스노우볼은 너무 빠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유니버스가 네번째 용을 칩니다! 바다 용을 차지하면 유니버스가 승부를 굳
힐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권건 선수가 스틸을 노리나요?”
“스틸! 스틸! 연막으로 눈을 가리고 빼앗는데 성공합니다!”
“권-건 선수! 용을 스틸해서 시간을 좀 더 벌었습니다! 그리고.. 살아나가나요?”
“와우! 무빙! 화가 많이 난 올라프의 앞에서 유유히 도망쳤어요! 총 든 괴도
네요!”
“나이스!”
“우리 정글 권건!”
권건이 용을 뺏는데에는 성공하면서 잠시 분위기가 좋아지는 듯 했다.
“으어! 나 뼈방패! 어? 아! 울라프 딜 뭐야?”
하지만 이미 커버린 울라프를 라인에서도 막기는 어려웠다.
대구 유니버스는 잘 큰 울라프를 중심으로 훌륭한 플레이를 펼쳤다.
오리안느가 희생하는 동안 먹어둔 전령으로 미드 타워를 밀어내고, 자연스럽
게 냐르로 탑을 정리하면서 바론 방향으로 돈다.
“FWX가 약간 당황한 것 같은데요? 바론을.. 막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상대 울라프도 울라프지만, 냐르도 성장이 충분히 됐기 때문에 너무 불편해요!”
“또 한번 스틸? 아, 안되죠! 냐르와 노틸이 아예 둥지 뒤에서 집중 마크합니
다! 오늘 정말 권건 선수를 막아내겠다고 제대로 작정한 모양이에요. 이렇게
두 사람이나 상대 정글에 투자를 해도, 울라프의 성장력을 바탕으로 바론이
너무 빨라요! 싸워보려고 해도 쉽지 않습니다.”
“죠이가 뒤늦게 포킹을 해보지만 아프지 않네요! 시야도 빼앗겼습니다! 이렇
게되면 바론은 넘어갈 것 같은데요. 대구 유니버스, 정말 분위기가 좋습니다?”
자연스럽게 바론을 마무리 지은 유니버스가 쭉쭉 밀고 들어가고, 중간중간 교
전이 계속됐다.
그리고 내각 타워 근처, 이유찬의 사일런트가 빼앗은 냐르 궁으로 딜러진에게
광역 CC기를 넣는데 성공했다.
“싸워! 싸워! 싸워!”
“오리 노궁!”
“키이사 노플! 키이사 키이사!”
놀라울만큼 제대로 들어간 CC에 이지호의 알리가 다시 한 번 광역 에어본.
그 위로 권건의 그브와 정일도의 사미레 스킬이 쏟아졌다.
딜이 충분한 FWX의 구성상, 유니버스의 오리안느와 키이사, 냐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울라프가 살아있어요!”
“도망갈 수가 없어요! 너무 잔혹합니다! 그냥 녹.. 녹아버렸어요! 순식간에
상대를 녹여내는 대구 유니버스의 울라프!”
“와, 강합니다. 대구 유니버스!”
“이거..혼자 남은 알리스티가 할 수 있는게 없는데요!”
바론 버프를 든 울라프가 라인을 지우고 노틸러드와 함께 쌍둥이 타워를 밀기
시작했다.
“아.. 밀리겠네.”
“지호야, 어떻게 안되겠냐?”
“..유찬이형, 타워 끼고 들어갔는데 나도 죽었어. 벼락 번쩍하고 바로 죽던데.”
“AI전 하는 느낌이겠네. 진짜 세다, 저거 진짜. 너무 세다.”
선수들은 넥서스가 깨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너도 나도 아쉬움을 토로했다.
패배감을 표출하기 싫은 기분에 의자에 허리를 쭉 기대보았지만 여전히 기분
은 좋지 않다.
“터틀 선수의 울라프가 알리를 잡아내면서, 1킬 추가요!”
“넥서스 깨지면서, GG! 이렇게 대구 유니버스가 치열한 접전이 예상됐던 대전
FWX를 잡고 단독 1위로 올라섭니다!”
“전승 팀들간의 경기인만큼 상당히 난전이 되리라 예상했는데요. 대구 유니버
스가 준비를 정말 잘했던 것 같습니다.”
“본인들의 조합적 장점을 잘 알고있고, 상당히 자신감이 돋보였어요. 오늘 터
틀 선수의 울라프는 정말 꿈에라도 나올까 무서운 모습이었는데요, 터틀 선수
를 앞세운 몬스 선수의 오리안느도 아주 안정적이었어요.”
해설진이 승리 팀에 대한 칭찬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패배한 FWX 선수들은 조용히 자리를 정리했다.
딜량 그래프를 확인하던 김창민도 한숨을 푹 쉬며 일어났고, 이유찬은 뒷머리
를 긁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권건은 장비를 챙기고 일어나며 저 멀리서 걸어오는 양태진 감독과 눈을 마주
쳤다.
“수고했다. 아쉽네. 돌아가서 피드백 해보자.”
표정이 굳어있는 권건의 어깨에 조용히 손을 올려 매만진 양태진은 아직 자리
에서 일어나지 못한 김창민을 도왔다.
시즌 첫 패배.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선수들의 발걸음이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