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화. 괜찮아, 안죽어
이유찬은 게임이 편했다.
마치 솔로 랭크에서 [탑]을 플레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리 아픈 생각을 할 필요 없이, 그냥 플레이 하면 된다.
생각은 팀원들이 해준다.
몰입도가 올라가 생각을 거치지 않고 손을 움직이고 있는데도 칭찬이 따라온다.
“유찬, 방금 와드 위치 진짜 좋아.”
시간이 남아 의식의 흐름대로 적 레드에 침투해 와드를 꽂고 귀환하는데 어김
없이 권건의 칭찬이 돌아왔다.
“근데 바로 지우는데?”
“아니, 좋았어. 굿.”
와드는 30초를 가지 못하고 상대 정글러에게 정리됐지만 권건은 무언가 정보
를 얻은 듯 했다.
자신이 얻은 정보인, 상대 정글러가 탑 쪽에 있다는 것 외에 또 다른 무언가.
순간 그걸로 뭘 더 알 수 있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 사이 라인에 도착했
고, 눈 앞에 적이 보인다.
이유찬은 다시 한번 몰입에 빠져들었다.
“두 팀의 바텀까지 모두 전령으로 모입니다!”
“서포터까지 착실하게 6레벨을 찍은 상태인데요, FWX가 조금 더 먼저 도착해
자리를 잡고 있죠?”
“길목을 먼저 차지하고, 전령은 아직까지 치지 않습니다! 죠이 위치가 아주
좋은데요! 아, 하지만 약간 스킬 샷이 아쉽죠?”
“F.L.E 선수들의 집중력 좋아요! 냐르의 분노가 관리가 잘 되어있습니다!”
팀은 조합에 제이슨과 죠이를 넣어 포킹에 힘을 줬지만, 생각보다 포킹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죠이를 플레이하는 김창민은 다소 흥분한 상태였고 상대는 적당한 거리를 유
지하며 호시탐탐 역습을 노렸다.
점점 더 상대 한타의 핵심인 냐르의 패시브 게이지가 차오르면서, 팀 보이스
에서는 고성이 오갔다.
“냐르! 분노 게이지 차고 있어! 빨리 걸어야돼!”
“창민이형! 냐르 메가 빠질 때까지 기다리는게 나아!”
“미드 라인 약간 밀린다! 얘네 미드로 돌 수도 있어!”
김창민의 성급하게 외치면서 죠이의 스킬을 난사했지만 제대로 들어간 포킹은
제이슨을 플레이하는 이유찬의 스킬 뿐.
중간중간 빠른 합류가 가능한 키이사를 통해 정일도가 미드 라인 관리를 하고
있었지만 애초에 라인이 밀린 상태로 넓은 전장을 잡았기에 키이사가 노출되
어 위험해보였다.
부담을 느낀 정일도가 말했다.
“차라리 바로 전령 보는게 낫지않아?”
라인을 정리한 후 전령 쪽으로 향하던 정일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반 박
자 빠르게 상대 로칸이 궁극기를 켠 채 벽을 넘어 들어왔다.
연달아 분노 게이지를 채운 냐르가 전광석화의 속도로 벽을 넘어오며 딜러진
의 의표를 찔렀다.
“아악!”
“괜찮아, 안 죽어.”
정일도의 단말마에 권건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 순간, 킨드리드의 궁극기가 펼쳐졌다.
“냐-르! 놀라운 3인 궁극기, 그 위에 바로 오리안느의 충격파가 터집니다!”
“전원 적중했..지만 안식처! 킨드리드의 궁극기가 펼쳐져 있어 흡수됩니다!”
“세상에! 킨드 궁이! 아!! 다시 한 번 진영을 잡은 FWX, 역습!”
“F.L.E의 챔피언들이 벽 너머에서 들어오기 어려운데요, 한번에 스킬에 쏟아
부었던 탓에 순간적으로 약점이 노출됩니다!”
“가장 먼저 냐르가 일점사 당하면서, 아! 수면! 죠이가 드디어 수면을 맞추네
요! 자이야도 도망갈 수 없습니다!”
“한명씩 정리되면서, F.L.E는 로칸만 살아나갑니다!”
집중력 높은 한타 장면에 해설진이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 명품 한타였어요! 들어간 팀도, 막아낸 팀도 놀랍습니다!”
“너무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다시 보지 않을 수 없겠죠? 우리 옵저버, 부탁
해요!”
한타에서 승리한 FWX가 편안하게 전령을 챙기고, 다시 정비하는 사이 직전의
상황이 감속 화면으로 보여졌다.
“여기서 로칸의 매혹을 킨드리드가 간발의 차이로 벗어나는데요, 이 부분을
놓친 것 같습니다.”
“충분히 스쳤을 만도 했는데, 미세하게 무빙했죠?!”
“이 때 FWX는 상대가 들어올 것을 예측했고, 아슬아슬하게 주요 딜러진에게
모두 킨드리드 궁극기가 펼쳐졌네요!”
“상당히 많은 데미지가 흡수됐죠. F.L.E도 여기서 이렇게 완벽하게 막힐 줄은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킨드리드에게 틈을 주지 않으려고 했을텐데,
틈이 생겨버리면서 기가 막힌 카운터가 됐어요. 적들을 빨아들인 셈이 됐습니
다.”
“범위 바깥에 있던 제이슨이 바로 벽 너머의 F.L.E 딜러진에게 들어가서 진영
을 헤집어 놨죠.”
“와, 정말 감탄밖에 안나오는 한타네요. 팀원들이 권건 선수를 완전히 믿었던
걸까요!”
사실 정일도와 이지호는 반응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김창민의 죠이는 초시계를 사용했지만, 해설진들은 굳이 언급하지 않
았다.
“가장 놀라운건 여기서 빠져나와서 즉시 울라프를 마크한 킨드리드인데요, 성
장력만큼이나 데미지가 어마무시해서 울라프가 키이사에게 고작 도끼 한번 던
지고 죽어버렸어요.”
“정글 차이가 많이 나고 있었죠. 그래도, 와, 이건 정말 놀랍네요. FWX가 밀
어 붙이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방금 F.L.E의 콤보는 제대로 들어갔으면 모두
끝장이었거든요. 그 전까지 포킹이 완전히 잘 들어간 것도 아니었구요.”
“하하! 이거 기세가 완전히 FWX로 기울었는데요?”
기분좋은 캐스터의 칭찬이 쏟아지는 사이, 권건의 화면으로 프로뷰가 이어졌다.
“아악!”
“괜찮아, 안죽어.”
잠시 선수 화면과 보이스에 집중했다가 돌아온 사이, 해설진은 모두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들으셨어요? 권건 선수가 ‘괜찮아, 안죽어.’!”
“너무너무 멋진데요! 좀 부끄럽긴 한데, 어우, 우리 팀이 저렇게 해주면 행복
사죠?”
“크크큭! FWX식 패기입니까? 멋집니다!”
“하하하, 권건 선수의 킨드리드 정말 좋았어요! 이렇게 한타를 한번에 뒤집는
사기챔이 있나요?”
“모두 그런건 아니죠! 권건 선수의 킨드리드 숙련도가 굉장한 것 같습니다!
궁극기도 좋았지만, 힘의 원동력은 계속된 카운터 정글링이었거든요!”
“그렇군요! 혹시 킨드리드를 원딜로 써도 되나요!”
“예? 가끔 쓰시는 분들이 있기는 한데..”
“그래요? 그럼 오늘 집에 가서 한번 해봐야겠군요! 제 포지션이 원딜이거든요!”
“앗, 아.. 캐스터님.. 여러분, 부디 오늘 랭크전을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괜찮습니다! 이러면서 실력이 느는거죠. 함께 해요, 실버 여러분!”
#
2군의 경기라고 해서 1군 경기에 비해 만만한 것은 아니다.
2군에도 1군에서 샌드다운되어 내려와 경기적 감을 잃지 않기 위해 플레이하
는 선수들이 많으며, 언제든지 1군으로 콜업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만큼 쉽
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을 꼽자면 나는 호흡이라고 말할 것 같다.
조금 더 안정적인 환경에서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춰온 1군.
언제 다시 1군으로 돌아갈 지 모르는, 일종의 ‘요양’차 2군으로 내려온 선수
들과 연습생에서 무대를 처음 경험하는 선수들이 뒤섞인 2군.
2군에서도 끊임없이 좋은 교육을 시행한다고는 하나, 아무래도 마인드셋에서
의 격차가 조금씩 있다.
한가지 예외라면, 완벽한 승리를 코 앞에 두었을 때.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다.
이제 이 경기는 내가 더 손을 대지 않아도 된다는 것.
“나 로밍 돼.”
“오케이! 여기서 냐르 노려볼게.”
“컷!”
우리는 퍼펙트를 앞두고 있다.
타워는 물론 단 1킬도 내주지 않는 승리.
야구에서의 퍼펙트 게임이나 골프에서의 홀인원만큼 어려운 기록이냐고 한다
면 그건 아니다.
오브젝트까지 모두 차지해야만 퍼펙트인지, 타워를 포함하는지 등 부르는 이
름도 모두 제각각이기도 하고.
하지만 어쨌든, 상대의 게임 보드에 0과 -를 무수히 추가했다는 것 만으로도
프로 대 프로로서 체급과 운영 모두에서 압도했다는 결과가 된다.
“죽어주지마, 죽어주지마!”
“쟤네 0킬이야! 지금 어떻게든 1킬이라도 따려고 나만 노린다!”
이미 게임의 승기는 완전히 이쪽으로 넘어왔고, 상대도 불명예스러운 말을 듣
고싶지 않은지 한명이라도 끊기 위해 집요하게 플레이하고 있었다.
“앙악아악앙악! 나 지켜!”
서포터를 원딜이 지키는 우스운 꼴도 나오고 있다.
뭐, 아무렴.
이제는 질래야 질 수가 없다.
“지호 살려! 지호 살려놔!”
“지호! 형이 간다!”
안타깝게도 지호의 알리스티는 집요한 오리안느의 궁을 맞아 죽었고, 이후 타
워를 지킬 수단이 없어진 F.L.E와의 게임은 이렇게 끝을 맞았다.
#
[ ‘괜찮아, 안죽어.’ ]
‘그런 말투로 말 안했어..’
릴리는 경기 이후 나를 쫓아다니며 놀리고 있다.
내가 전령 한타 때 저런 말을 했다나?
내 킨드리드를 무시한 댓가를 치르게 해주려고 했는데, 내가 놀림감이 되어버
렸다.
“어, 형. ‘괜찮아, 안죽어.’..”
릴리 뿐만이 아니다.
좋은 녀석인 줄 알았던 일도도 나를 괴롭힌다.
나는 그냥 말한거라고.
POM을 받고 나서도 해설진과 캐스터는 나의 그 대사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
고, 그때 한참 정신이 없어서 듣지 못했던 팀원들도 모두 알게됐다.
“어이쿠, 건아. ‘괜찮아, 안죽어.’.”
나와 어깨를 툭 부딪힌 감독님까지.
당연한걸 가지고 이렇게까지 놀리고, 이게 말이 되나?
“정말 좋았다. 진짜 최고였어. 우리가 F.L.E를 이길줄이야.”
감독님은 기분좋게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셨다.
바로 내일도 경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팀이 들뜬 느낌은 어쩔 수 없다.
“오, 우리 기사도 올라왔어. 댓글도 좀 달림.”
오늘도 각종 사이트를 돌아다니던 창민이는 신이 난 모양이었다.
오늘 경기 초반에 대단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주도권을 쥐어
준 것은 사실이고 그 한타 이후에는 기운이 나서 날아다니는 모습이었다.
“뭐라고 적혀있는데?”
“이번 시즌 최고의 한타였다고.”
“아직 시즌 시작한지 얼마 안됐는데.”
“형, 그래도.. 아! 내가 이때 초시계를 쓰지 말았어야 했는데!”
창민이는 ‘2군의 흔한 한타.gif’정도로 생성된 짤에 자신의 죠이가 초시계를
쓰고 있었던 것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뭐, 충분히 쓸 만한 상황이었고 데미지를 완전히 흘려낸 것도 좋았는데.
그 때 아무리 킨드 궁 위에 있었다고는 해도 좋은게 좋은거지.
“이 때 초시계 대신 줄넘기 넘으면서 인장 띄웠으면 완전 간지나잖아!”
그건..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