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7화 (8/326)

007화. 심부전증 있어요?

아군의 첫 킬 이후 분위기는 조금씩 올라왔다.

한마디도 못하던 지호는 슬슬 원래 버릇대로 인장을 띄웠고, 유찬이는 한번

죽었지만 계속해서 밀어붙이고 있었다.

“두 바텀이 격렬하게 싸웁니다! 모든 스펠이 빠졌는데요!”

“FWX는 빅스가 계속 툭툭 쳐대서 화가 많이 난 것 같죠?”

“두 팀의 바텀 듀오 모두 정글러를 기다리나요? 빼지 않습니다!”

“두 정글러가 바텀을 향합니다! 아! 그런데 그것보다 더 빨리! 순간 이동 스

펠이 꽂힙니다!”

“제이슨인가요? 레넥튼이 텔을 끊지 못한 것 같은데요!”

콜도 하지 않은 유찬이가 바텀으로 텔을 타는 순간, 나는 방향 전환을 하며

창민이에게 커버를 요청했다.

“창민이, 탑으로 가줘. 탑탑.”

귀환 타이밍과 맞아 떨어진 콜에 미드 세라핌은 탑 텔을 탔고, 커버.

나 역시 기동성이 좋은 챔피언 니델리로 미드 커버.

“바텀으로 텔을 탄 차니 선수가 빠르게 이즈리안을 잡아내며 킬을 따냅니다!”

“세상에! 차-니! 압도적인 스킬샷으로 서폿 칼마까지!”

그리고 유찬이의 제이슨에게서 승전보가 들려왔다.

“나이스! 유찬이형! 우리가 다 만들어둔거 알지?!”

“오게이! 일도, 지호, 베리 굿! 이제 내가 캐리함!”

더블킬 후 기분 좋은 환호가 터졌다.

내가 보기에도 굉장히 깔끔한 스킬 배분이었다.

스크림 때부터 지켜봐왔지만, 유찬이는 정말 잘 싸운다.

하지만 판단은 잘 모르겠다.

지금처럼 뒤를 받쳐줄만한 팀원이 없었다면 탑에서는 큰 손실이 일어났을 것

이다.

뒤 없이 게임하고 킬은 땄지만 왜 졌는지도 모르게 져있겠지.

“바로 전령간다. 이유찬, 중간에 끊기지 않게 올라와. 어차피 우리가 더 빨라.”

상대팀의 원딜과 서폿이 빈 틈을 타 빠른 전령 트라이.

유찬이의 제이슨이 안전한 길로 오면서 시간은 조금 지연됐지만 무사히 오브

젝트를 차지하고 자연스럽게 둘도 원래 라인으로 되돌아갔다.

“물 흐르는듯한 운영인데요?”

“손실이 전혀 없는거나 마찬가집니다! FWX, 전령을 획득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면서 몇 번의 사고는 있었지만.

“빅스의 이즈리안이 드디어 킬을 먹긴 했는데, 이미 미드가 밀리고 있어요!”

“이 상황은 FWX 입장에서 반길 만한 일인데요?”

“이러면 전혀 이득이 아니죠!”

그건 말 그대로 억까고, 사고일 뿐이었다.

LOS는 상대의 타워를 깨는 게임이다.

“이번에 무조건 바론 막으러 올거야. 쟤네 못먹으면 게임 져. 지호, 앞에서

적 들어오면 앞에서 궁써줘.”

“건이형, 쟤네 안오는 것 같은데?”

“어?”

“공짜 바론됐네?”

되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예측들이 틀리기도 하면서 게임의 기세가 완전히

넘어왔다.

“내 쓰리쉬의 죽음의 낫이 무서워서 다가오지 못한건가?”

“지호야. 너보다는 차라리 건이형의 니델리가 죽음의 창을 들었다는게 낫지

않을까.”

지호와 일도도 신났는지 말이 다시 길어졌고.

“죽여! 죽여! 창! 창! 창창창! 짜릿할 걸!”

킬을 먹을수록 유찬이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주요 오브젝트를 차지했고, 이미 골드 차이를 크게 벌렸다.

이제 게임은 훨씬 쉬워졌다.

“아, 이런! 이제와서 돌아보면 빅스 입장에서는 싸움을 열만한 챔피언이 없거

든요!”

“받아치고 싶은데, 아, 또 창이 날아와 꽂힙니다! 이러면 들어갈 수 없어요!”

릴리가 나에게 모든 스킬을 맞추는 능력이나 모든 공격을 피해내는 능력을 준

건 아니었지만, 별로 아쉬움은 없다.

그런 능력이 없더라도 내 스킬샷은 훌륭하다.

스킬샷의 절반은 심리전이고 그건 내가 잘 하는 거다.

그리고 그런 능력들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이 스포츠는 “온라인 게임”이다.

피할 좌표가 한정된 상황에서 상대 챔피언이 나에게 광역 스킬을 동시에 때려

부으면 그걸 어떻게 피할 수 있겠어.

수학적으로도 말이 안되잖아.

아, 근데 재밌을 것 같은데?

완전 무쌍 아니야?

“제이슨의 포킹! 빅스의 이즈리안이 열심히 맞포킹을 해보려고 하지만!”

“FWX에는 세라핌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죠!”

“아아아아! 죽었어요! 시야 밖에서 날아온 니델리의 창에 칼마가 사라졌습니다!”

뭐 어쨌든, 나에게 그런 사기 능력은 없다.

대신 더 초월적인 능력이 있지.

내 훈련된 감각들.

[ 다들 대단히 열심이구나! 나도 배가 부르네! 아주 흡족해! ]

어느새 다시 나타난 릴리가 신이 나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승기가 넘어온 것을 눈치 챈 모양이다.

릴리는 책상에 턱을 괴고 조그만 손으로 내 화면을 가리켰다.

[ 오늘은 가슴이 오렌지만한 인간이네! ]

아니, 그 편견없는 크기 묘사는 뭐지.

니델리는.. 오렌지보다는.. 파인애플?

아니아니, 나는 2D에 관심이 없다, 이 악마야!

조금 민망해진 나는 재빨리 팬서 폼으로 변화시켰지만, 릴리는 그 새 흥미가

떨어졌는지 다른 곳을 기웃거리고 있다.

“여기여기! 얘 선 넘었다!”

“상대 레넥튼 피 1! 죽여놔!”

이곳 저곳에서 국지전이 발생했지만, 이미 킬 스코어는 11:4의 상황.

대부분의 오브젝트나 포탑 골드도 획득하면서 실제로는 더 큰 차이가 벌어져

있었다.

이제 아이템을 직접 확인할 때마다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게임을 끝낼 때가 온 것 같은데.

“이제 빅스가 해 볼 수 있는게 거의 없는 상황인데요!”

“뒷텔! 레넥튼이 크게 돕니다!”

“FWX는 다 알고 있었어요! 아! 초반에 굶주리던 아펠라이오스가 힘을 뿜어냅

니다!”

“더 이상 그 때의 내가 아니라고 외치는 모습이죠! 앞으로 점멸까지 사용하며

트리플킬!”

“끼요옷! 일도형 진짜 왜이렇게 잘해! 미쳤나봐!”

“미드로! 미드로! 바로 넥서스 깬다!”

“나 춤 좀 출게 제발!”

“그냥 깨 그냥 깨!”

“잘했다 얘들아, 고마워 고마워 진짜 미안해!”

#

양태진 감독은 게임 초중반부터 아찔한 설렘을 느꼈다.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모니터링 룸에서 감독과 코치는 게임에 개입할 길이 없다.

그래서 분석을 하다가도 두 손을 꼭 모아잡고 기도를 한다.

제발 적 정글의 위치를 눈치 챘기를, 저 바론 트라이가 연기이기를, 1절까지

만 하기를.

오늘의 경기는 불안요소가 많았다.

경기 전부터 경황 없어보이던 정일도가 퍼블을 당하면서 멘탈이 무너졌고, 연

달아 실점이 일어나면서 손발에 땀이 찼다.

“와. 나 아까 애들 어떻게 격려할지 레퍼토리 뽑고 있었잖아.”

“저돕니다.”

구태양 코치 역시 게임 초반에는 입을 떼기도 어려웠으나 이제는 완전히 여유

를 되찾았다.

팀이 마치 두 사람의 마음을 읽은 것 처럼 움직였고, 그 이상의 플랜으로 경

기를 이끌어나갔기 때문이다.

“어우, 빨리 나가자. 나 주책맞게 감동같은게 막 오고 그런다.”

“감독님, 심부전증같은거 있는거 아니에요?”

“쓸 데 없는 소리 하지말고! 당연한 결과였다는 표정으로 안아주자.”

시원하게 웃은 두 사람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모니터링 룸을 나섰다.

#

“잘했다!”

감독님이 환하게 웃어주며 인사를 하고 돌아온 선수들을 하나씩 안는다.

서로 좋은 분위기 속에서 짐 챙기는 것을 돕고, 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2군의 경기는 1군 경기에 비해서는 상당히 작은 홀에서 이루어졌고 팬들도 적

었다.

그래도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좋아진 편이라고 한다.

하부 리그는 관중석 대신 편의점 의자에 앉아서 응원하던 시절도 있다나.

“나 너무 숨 차! 완전 신기해! 이겼어! 형들 진짜 개잘해!”

데뷔 후 첫 승을 거둔 지호는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이지호 너 겨드랑이에 땀 엄청 나는데? 드러워.”

“아까 한타 때 내가 그랩한거 봤어? 우리 다시보기 어떻게 해? 숙소가서 볼

수 있겠지?!”

“진짜. 이겨서 다행이다.”

흥분해서 날뛰는 지호와 달리 일도는 약간 가라앉아있었다.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지만 약간 무거워보이는 얼굴.

감독님이 말없이 일도의 어깨를 두드리며 귀에 무슨 말인가를 하자, 일도의

표정이 조금 나아졌다.

“선수님들, POM(Player of the match) 인터뷰 진행하겠습니다.”

LKL FL은 2라운드 풀리그, 단판제로 진행되기 때문에 오늘의 경기 일정은 여

기서 끝이다.

“유찬아, 잘 하고 와야해. 너무 많이 말할 필요는 없고, 욕이나 인터넷 용어

는 삼가고.”

코치님은 POM으로 뽑힌 유찬이 뒤를 쫓아다니며 머리를 만져주면서 여러가지

주의 사항을 알려주려고 애썼다.

유찬이는 땀을 뻘뻘 흘리며 소리를 지른 탓에 엉망이었다.

게임을 얼굴로 했나.

[ POM이 뭐야? ]

‘이 게임에서 가장 잘 한 선수. 수훈 선수같은거야.’

[ 근데 왜 네가 못 받았지? 네가 제일 잘하잖아? ]

릴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어려운 질문이다.

POM은 투표로 정해지는데, 운영이나 콜같은 것들은 투표에 영향을 주기 어렵다.

전체 내용이 공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전문가들이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겠으나, 어쨌든 이번 경기에서 가

장 파괴적인 힘으로 상대에게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유찬이다.

‘별로 중요한건 아니야. 그리고 이유찬의 망치맨 엄청 셌잖아?’

[ 망치맨이라니! ]

릴리가 코웃음을 친다.

[ 나도 안다. 아까 외웠거든? 제이스. ]

‘제이슨이거든.’

[ 참 나! 됐어! 어쨌든 이긴건 잘했다! 오늘은 힘을 많이 수집했어. ]

릴리는 얼굴이 빨개져서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리고 열망과 열렬한 감정의 부산물들을 잔뜩 긁어모았다며 잠시 자랑을 하

곤 새침하게 돌아서서 사라졌다.

대기실의 화면에서 유찬이의 인터뷰가 나오기 시작했다.

창민이는 부러운 눈빛이었다.

“오늘 멋진 승리를 기록한 차니(Chani), 이유찬 선수 모셨습니다!”

“차니 선수, 반갑습니다! 아주 오랜만이네요!”

“안녕하세요. 파이어웍스의 탑라이너 차니입니다.”

FL에는 별도의 인터뷰어가 없기 때문에, 유찬이는 해설진 옆의 인터뷰석에 앉

아있었다.

“시즌의 첫 경기를 시원한 승리로 출발하게 되셨는데요. 먼저, 소감 부탁드립

니다!”

“게임이 잘 풀려서 기분이 좋구요. 이겨서 기뻐요.”

유찬이는 온순한 얼굴로 대답했고, 무난하게 인터뷰가 이어졌다.

“초반에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 있었는데, 언제 역전을 했다고 생각하셨나요?”

“네? 역전이요?”

“초반에 연달아 킬을 내주면서 팀이 조금 어려운 상황이었잖아요.”

“그런 적이.. 있었어요?”

ㄴ 차니 멍한 표정 실화냐ㅋㅋ

ㄴ 탑도 죽었었지 않음? ㅋㅋㅋ

ㄴ 레리둥절ㅋㅋ 팀이 어려웠다고? 나는 어려운 시절은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 차니 선수! 당당함이 멋집니다! 우리는! 어려웠던 적이! 없다! 잠깐 추

진력을 얻기 위한 것 뿐이었다!”

어휴, 저 바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