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화. 첫 스크림
합숙, 훈련, 합숙, 훈련.
예전에는 왜 합숙을 해야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냥 좋았다.
부모님과 떨어져 지낸다는 사실이 그냥 좋았던거다.
하지만 내가 하는 것은 자취가 아니라 합숙이었고, 합숙은 훈련을 동반한다.
일, 일, 그리고 또 일.
게임을 좋아해서 시작했지만 하고싶지 않을 때에도 해야한다는 사실은 괴롭다.
나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프로게이머들은 이런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지겹다고 생각했던 집밥이 그리워질 때 쯤, 비시즌에 접어든다.
그렇게 또 휴가를 통해 집에 가서 에너지를 얻고 다시 시즌이 시작되고.
[ LKL FL(Futures League), 재시동. ]
[ 다시 불타는 퓨처스 리그. 새로운 유망주 대거 등장! 한눈에 살펴보기. ]
[ 풍작인가, 흉작인가? 과감한 선택을 한 팀들. ]
새로운 라인업이 공표되고 난 뒤, 몇몇 기사들이 올라왔지만 LKL(Korea
League, 1군) 하위의 리그인만큼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열성적인 팬들 몇몇정도가 댓글을 남겼을 뿐이다.
ㄴ우리 팀에 쓰알급 유망주 떴냐?
ㄴㄴ너 팀 어딘데
ㄴㄴ서울 빅스
ㄴㄴ1군 성적 그정도면 됐지; 2군까지 욕심냄;
ㄴㄴ암만 2군이라도 FWX는 이겨야되지 않겠냐;
ㄴㄴ저는 배부른 돼지가 아니라 현명한 거지가 되겠습니다8_8 제발 꼴등만 피하게 해주세요
ㄴㄴ이 새끼 FWX팬이네ㅋㅋ1군 2군 모두 씨가 마름ㅋㅋㅋ선수 내수 불가ㅋㅋ
ㄴㄴㅋㅋㅋ형님먼저아우먼저ㅋㅋㅋ ㄹㅇ바닥 싸움ㅋㅋ
반응이 어떻든 프로는 결과로 말해야한다.
그리고 우리는 공식적인 훈련에 돌입했다.
“오, 창민이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거야?”
사옥 내에 위치한 연습실.
썬 코치님은 먼저 장비를 세팅하고 솔랭을 돌리고 있는 창민이 뒤에 앉았다.
“미드에서도 쓸 수 있는 탱커 연습해서 폭 좀 늘리려구요.”
“올~ 칭찬해. 좋은 생각인데?”
이제 막 연습실에 적응하는 단계다보니, 창민이도 내숭을 부리는 것 같다.
‘진정한 미드라이너의 로망은 순수 AP챔이다’ 라고 말하던게 누구더라?
“진정한 탑라이너라면 모든 챔피언으로 솔킬을 내는 법이지.”
유찬이도 게임을 시작했다.
“올해를 상징하는 랜덤 픽은 과연?”
그리고 챔피언 픽으로 운수테스트를 한다.
아, 저런.
“써니써니형! 코치님! 저 운수테스트 해봤는데 탑 갈레오 걸림.”
“너 갈레오 할 줄 알아?”
“저요? 완전 가능. 저 서폿가면 무조건 갈레오만 함.”
“난 진짜 모르겠다. 상대는 뭔데? AP야?”
코치님은 그냥 웃고 있다.
“아뇨? 트린이요.”
갈레오 할아버지가 와도 못 이길것 같은데?
“좋아. 한번 해봐. 연구하면 좋은거지.”
코치님은 매드 사이언티스트인가?
“창민아! 탑 갈레오 룬 뭐 찍음?”
“차니형! 미드 볼베는 스킬 뭐 찍어야함? AP가도 됨? 빨리빨리 나 게임 시작
했음!”
난리도 아니다.
일단 둘 다 연습용으로 적당하진 않아보이는데.
게임이 닷지가 안난게 더 이상하다.
그 와중에 코치님은 노트에 무언가 적고 있다.
“건이형, 세팅 다 하셨나요?”
지호를 도와주던 일도가 다가왔다.
일도는 손에 스폰서 로고가 새겨진 장패드를 들고 있었다.
“혹시 마우스 패드 없으시면 비품실에 있어요. 더 필요하신 건 없나요?”
참 괜찮은 녀석이다.
“응. 난 기본 세팅으로 괜찮아. 장비를 가리는 편이 아니라서.”
“형! 스톰은 제트로니카 장비만 쓰지 않아요? 저두 그 브랜드 좋아하는데.”
지호가 자신의 제트로니카 마우스를 딸깍거렸다.
지호의 책상은 꽉 차있었다.
각종 영양제와 립밤, 핸드크림, 그리고 제트로니카 마우스, 키보드, USB, 컵
까지.
그나마 캠에 보일 수 있는 헤드셋은 일도가 바꾼 모양이었다.
꼭 모든 장소에서 스폰서의 제품을 써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권장되는 편이다.
방송에 송출되는 장소에서는 스폰서 제품을 사용해야하기 때문이다.
2군 선수가 방송을 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지만.
“왜. 쏘닉스도 괜찮은데.”
“스톰의 킹 선수랑 똑같은 걸 쓰고 싶어서요.”
지호는 정말 스톰바라기다.
확실히 FWX와 계약을 맺은 쏘닉스보다는 제트로니카가 인기가 많은 편이다.
이건 최근 몇 년간의 LOS 판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선수 중 하나인 강준윤,
킹 선수가 제트로니카만 사용하기 때문이다.
“자기 손에 잘 맞는걸 쓰면 좋지.”
남들을 모두 도와준 일도는 그제서야 자리에 앉는다.
일도의 자리는 간결했다.
깔끔하게 쏘닉스의 제품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책상에 먼지하나 없다.
“아 써니형! 여기 컴 버그있어요. 진짜 눌렀는데 스킬이 안나가요!”
트롤 두 놈이 아우성이다.
“그래? 너무 이상하네. 해킹이라도 당했나보다.”
구태양 코치님이 방긋 웃으며 유찬이의 머리를 꾹꾹 눌렀다.
그 사이 나도 유찬이 옆자리에서 게임을 켰다.
“오. 건이 큐돌리네. 실력 좀 볼까?”
이번에는 코치님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큐를 돌려도 어지간해서는 금방 잡히지 않는다.
바탕화면을 세팅하고 있으려니 옆에 커피가 놓인다.
“형은 따뜻한 아메리카노 좋아하시죠?”
일도는 몸이 여러개인가.
이 성실한 친구는 게임 찾기를 눌러놓고 머신에서 뽑은 커피를 가져다 주고있다.
“고마워.”
그 사이 배정된 팀에는 여기저기서 본 것 같은 아이디들이 떠있다.
“오, 얘는 광주 미라쥬 1군 선수네. 울산 피닉스 연습생도 있고.”
아이디로는 아는 사람들이다.
쉬는 동안에는 LOS를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내 랭크는 그랜드 마스터였고, 팀
원들은 모두 마스터에서 챌린저 사이였다.
선수에게 개인의 랭크 점수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지만 개인의 자
신감을 비롯해 여러가지 면에서 점수는 중요한 편이기에 다들 승리와 점수를
원했다.
이 등급 구간에서는 마주치는 사람들은 익숙하다.
일반 유저, 연습생, 2군, 1군.
나는 오랜 시간동안 이 구간의 사람들과 정말 수도 없이 마주했기에 아마 그
들이 모르는 자신의 버릇까지도 알고 있을거다.
“정글 뭐할거야?”
“글쎄요, 제가 후픽이라 천천히 보고 결정하려구요.”
코치님은 내 대답에 슬쩍 웃고는 또 메모를 한다.
성향 파악같은걸 하고 계시는 거였나?
밴픽이 진행되고, 점점 해볼만한 챔피언들이 추려진다.
[ 난 이 곰 캐릭터가 귀여운 것 같다. 아빠를 닮았어. ]
어느새 곁에 나타난 릴리가 수줍게 웃으며 화면을 가리켰다.
귀여운 곰? 아빠?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건이 너도 볼라베어?”
“네. 지금 구도에서는 이게 괜찮을 것 같네요.”
“왜 그렇게 생각해?”
“팀에 앞라인을 잡아줄 만한 챔피언이 없고, 아군 서포터가 다이브에 호응하
기 좋아요.”
“상대 정글이 친 짜오인데 초반은 어떻게 대응할 생각이야?”
“일단 초반에는 성장에 집중할 생각이고, 비는 정글몹 위치로 짜오 갱 동선을
찾아 팀원들에게 알려줘야겠죠. 라인을 적당히 봐줘도 좋구요. 그리고 6레벨
이후에는 바텀 쪽으로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긴 한데..”
“한데?”
“여긴 솔랭이잖아요.”
계획은 누구에게나 있다.
게임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구태양 코치님은 고개를 크게 끄덕거리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들기곤 바텀 듀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릴리는 내 화면에 뜬 일러스트를 보면서 그리운 표정을 짓고있었고, 이유찬은
탑 갈레오로 트린을 솔킬내고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진짜 어떻게 한거지?
#
코치님은 종종 연습 내용에 대한 결과에 대해 피드백을 주셨고, 아직까지 감
독님은 선수들에게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면담 내용을 바탕으로 선수들의 컨디션과 단체 생활의 규칙 등을 전반적으로
관리하셨는데 게임 내,외적으로 소통하기 편안한 환경이 되게끔 하는 것이 목
표인 듯 했다.
그리고 오늘은 우리의 첫 스크림이다.
1군 팀과의 스크림은 요원했고, 상대는 우리와 비슷하게 적당한 리빌딩을 거
친 서울 빅스였다.
서울 빅스의 1군은 지난 시즌을 준우승으로 마감했지만 2군은 10위.
9위였던 우리 팀과 이웃사촌 격이었다.
감독님이 데이터 노트를 확인하며 밴픽을 진행했다.
“첫 스크림이니까 밴은 최대한 프리하게. 바텀이 제일 중요하니까, 블루 진영
이점 이용해서 서포터 먼저 잡는 쪽으로 갈거다. 바텀이 메이킹해보자.”
감독님은 평소보다 훨씬 진지한 느낌이었다.
“지호, 하고싶은 챔피언 뭐야.”
“저.. 그.. 저는 노틸러드..”
막내 지호는 바짝 긴장한 것 처럼 얼어있었다.
“지호. 노틸은 우리가 밴했어. 집중해.”
감독님이 평소보다 엄격한 말투로 말하자 지호는 더 멍청한 얼굴이 됐다.
일도가 도와주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지금 돕는 건 감독님도 별로 원하지 않으
실거다.
“우리 어제 구도 이야기 했던거 생각나지? 레오니 트타 , 알리 칼리 조합 해
보고싶다고 했었잖아.”
감독님도 시간이 촉박해지자 달래는 기색이다.
늦어지고 있어 아슬아슬한 상황에 다행히 간신히 지호가 알리를 하겠다고 말
했다.
이제 알리만 픽하면 되는데.
1픽, 유찬이가 레오니를 픽했다.
시간이 너무 지연되자 둘 중 하나를 올리고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 어? 픽 돼버렸어!”
“침착해. 자. 빠른 리겜 할까? 아니면 해볼래?”
유찬이에게 시선을 줬던 감독님이 얼굴색 하나 안변하고 지호를 돌아봤다.
그냥 사람 좋은 타입인 줄 알았는데.
꼭 다른 사람같이 단호하다.
“해.. 해볼게요!”
지호는 우렁차게 말했고, 유찬이는 미안하다는 입모양을 만들어보였다.
너무 늦게 말하긴 했지만 미안할 수 있는 상황이다.
연달아 상대도 픽을 진행했다.
빅스 2군도 사정은 마찬가지라 조금 느리게 진행됐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바텀을 중심으로 플레이 메이킹을 할 계획으로 레오니 트타.
부족한 AP 딜량을 채워주면서도 한타 지향적인 오리안느.
정글은 어느정도 자생적인 성장을 하면서 레오니와 함께 선진입을 맡을 헤크림.
탑은 탱커이자 후반을 바라볼 수 있는 요른으로 구성했다.
각자 자신의 풀에 속하는 픽을 가져갔으며, 무엇보다도 창민이는 자신있는 오
리안느를 가져올 수 있어 즐거워보였다.
“고생했다. 너네 눕는 픽인거 잊지 말고, 꼼꼼하게 해. 정글은 바텀 신경써주
고, 나머지는 사리면서 플레이해라.”
감독님은 근처에 자리하고, 코치님은 관전을 위해 자리로 이동했다.
오랜만의 팀 게임이다.
어디, 우리 친구들의 실력 좀 볼까?